'산업의 쌀' 나프타 수급 불안, 제약주권 흔들린다?
약가 통제 속 제조 원가 폭등 껴안은 제약사들… 공급망 붕괴 막을 '탈석유화학' 시급
API부터 의료용 플라스틱까지 원가 도미노… '제약주권' 흔드는 공급망 리스크
김홍식 기자 kimhs423@yakup.com 뉴스 뷰 페이지 검색 버튼
입력 2026-03-30 06:00   수정 2026.03.30 06:01
그래픽. ©약업신문=김홍식 기자

최근 중동 지역의 지정학적 긴장 고조와 주요 산유국들의 감산 기조, 그리고 글로벌 해상 물류망의 재편이 맞물리면서 석유화학 산업의 기초 원료인 '나프타' 수급에 짙은 먹구름이 끼고 있다. 흔히 '산업의 쌀'로 불리는 나프타는 원유 정제 과정에서 추출되며 플라스틱, 섬유, 합성고무 등 현대 산업의 뼈대를 이루는 핵심 물질이다. 나프타의 가격 변동성과 수급 불안이 전통적인 제조·화학 산업을 넘어, 인간의 생명과 직결된 '제약산업'의 근간까지 깊숙이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이는 많지 않다.

얼핏 보기에 시커먼 원유를 다루는 정유 공장과, 무균 상태를 유지하는 하얀 제약 연구실은 전혀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현대 의약품의 밸류체인을 분자 단위까지 파고들어 가면, 제약산업은 그 어떤 산업 못지않게 석유화학 의존도가 높다. 나프타 수급 불안은 현재 글로벌 제약업계, 특히 원가 경쟁력과 해외 의존도라는 이중고를 안고 있는 한국 제약산업이 직면한 가장 현실적이고 뼈아픈 리스크다.

화학합성 의약품의 기원, 석유화학 크래커에서 출발하다

나프타가 제약산업에 미치는 직간접적인 영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매일 먹는 알약이 어떻게 탄생하는지 그 화학적 계보를 추적해야 한다. 정유 공정에서 생산된 나프타를 나프타 분해 설비(NCC)에 넣고 섭씨 800도 이상의 고온에서 열분해하면 에틸렌, 프로필렌, 부타디엔과 같은 기초유분과 벤젠, 톨루엔, 크실렌(BTX) 등 방향족 화합물이 쏟아져 나온다. 바로 이 기초유분과 방향족 화합물들이 화학합성 의약품의 뼈대를 이루는 '원료의약품(API, Active Pharmaceutical Ingredient)'과 '화학 중간체'를 합성하는 데 필요한 절대적인 레고 블록 역할을 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전 세계적으로 소비되는 해열진통제의 핵심 성분인 '아세트아미노펜'과 '아스피린'이다. 이 약물들은 나프타 분해 산물인 벤젠을 시작으로 큐멘, 페놀을 거쳐 여러 단계의 복잡한 화학적 합성을 통해 만들어진다. 비단 진통제뿐만이 아니다. 항생제, 고혈압 및 당뇨 치료제, 항우울제 등 현대인이 일상적으로 처방받는 합성 의약품의 90% 이상이 넓은 의미에서 석유화학 추출물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또한, 이러한 원료들을 녹이고 반응시키고 정제하는 과정에 수없이 들어가는 메탄올, 에탄올, 아세톤, 이소프로필알코올 등의 화학 용매 역시 나프타 공급망의 산물이다. 나프타 밸류체인의 최상단이 흔들리면, 약을 조립하는 블록과 접착제가 동시에 말라버리는 심각한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중국·인도' 경유하는 공급망, 나프타 가격 급등이 부르는 원가 도미노

나프타의 수급 불안과 이에 따른 국제 가격 급등은 필연적으로 원료의약품 및 화학 중간체의 가격 상승으로 직결된다. 글로벌 제약사들은 물론, 국내 제약사들 역시 원가 절감을 위해 원료의약품의 70% 이상을 중국이나 인도 등 신흥국 거대 공장에서 수입하여 완제의약품을 생산하고 있다. 중국과 인도는 대규모 석유화학 단지와 연계하여 기초 화학물질부터 최종 원료의약품까지 수직계열화된 생산 라인을 갖추고 전 세계 제약 시장을 장악했다.

문제는 이들 국가의 API 제조사들 또한 글로벌 유가 및 나프타 가격 변동성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다는 점이다. 나프타 가격이 오르면 중간체 가격이 도미노처럼 상승하고, 이는 결국 수입산 원료를 쓸 수밖에 없는 국내 제약사들의 막대한 원가 부담으로 작용한다.

특히 대한민국 제약산업의 특수성을 고려하면 그 충격파는 배가된다. 국내 시장은 상대적으로 개발 리스크가 낮지만 이익률이 박하고 제조 원가 비중이 높은 '제네릭(복제약)' 위주의 중소·중견 제약사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에게 나프타 발 원료가 상승은 기업의 영업이익률을 직접적으로 훼손하는 치명타다. 더욱이 한국은 국민건강보험 시스템 산하의 엄격한 약가 통제 제도를 운용하고 있어, 외부 원자재 가격이 폭등했다고 해서 그 상승분을 즉각적으로 완제의약품 약가에 반영하여 소비자에게 전가할 수 없다. 원가 인상분을 제약사가 100% 흡수해야 하는 구조 속에서, 지속적인 나프타 가격 상승은 기업의 생존을 위협하고 궁극적으로 미래를 위한 신약 연구개발(R&D) 투자 여력을 고갈시키는 악순환을 낳는다.

포장재와 의료기기까지 덮친 연쇄 타격… GMP 규제가 낳은 딜레마

나프타의 나비효과는 약의 화학적 성분에만 머물지 않고, 의약품의 품질을 유지하고 환자에게 안전하게 투여하기 위한 '포장재'와 '의료용 소모품' 분야까지 광범위하게 타격을 입힌다. 알약을 습기와 빛으로부터 보호하는 낱개 포장용 블리스터 팩(PTP), 기침 시럽을 담는 플라스틱 병, 병원 응급실과 병동에서 끊임없이 소비되는 수액 백, 그리고 무균 상태의 일회용 주사기와 튜브류 등은 모두 폴리염화비닐(PVC), 폴리프로필렌(PP), 폴리에틸렌(PE) 등 나프타를 중합해 만든 합성수지 제품들이다.

나프타 공급 불안은 이러한 핵심 의료용 부자재의 가격 폭등과 수급난을 동시에 초래한다. 여기서 제약산업만의 특수한 딜레마가 발생한다. 의약품 포장재와 의료용 플라스틱은 인체 안전성과 직결되므로 의약품 제조 및 품질관리 기준(GMP)의 엄격한 규제를 받는다. 포장재의 미세한 화학물질이 약물로 전이되는지 여부를 철저히 검증받아야 허가를 유지할 수 있다.

따라서 기존에 쓰던 플라스틱 포장재의 원가가 올랐다고 해서 제약사가 하루아침에 품질이 검증되지 않은 저렴한 다른 업체의 소재나 다른 재질로 임의 변경할 수 없다. 소재 변경을 위해서는 규제 당국(식약처 등)에 긴 시간과 비용을 들여 안정성 시험 결과를 다시 제출하고 허가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제약사들은 나프타 가격 상승기마다 꼼짝없이 묶인 채 원료의약품 단가 인상과 부자재 가격 인상이라는 끔찍한 이중고를 감내해야만 한다.

원가를 넘어선 공포, 넥스트 팬데믹 수준의 '공급망 붕괴' 리스크

업계 전문가들은 단순한 수익성 악화보다 '공급망 붕괴'를 훨씬 더 심각한 위협으로 꼽는다. 나프타 수급 불안이 임계점을 넘어 특정 석유화학 기초 원료의 공장 가동 중단이나 물류 마비로 이어지면, 이는 곧바로 원료의약품의 극심한 품귀 현상으로 직결된다.

우리는 이미 과거 코로나19 팬데믹 초기나 중국의 급격한 환경 규제(동계올림픽 시즌 등) 강화 시기에 이러한 공급망 붕괴의 공포를 실시간으로 경험한 바 있다. 당시 해열제, 감기약, 항생제의 원료 수입이 막히면서 국내 완제의약품 생산 라인이 도미노처럼 멈춰 섰고, 약국마다 약을 구하지 못하는 '약국 대란'이 벌어졌다. 의약품은 대체재를 찾기 힘든 필수재이므로, 원료 부족으로 인한 생산 중단은 곧 환자의 생명을 위협하는 중대한 공중보건 위기로 비화된다.

제약주권 수호를 위한 대안, '공급망 다변화'와 '화이트 바이오'의 부상

결론적으로 '나프타의 수급 불안'은 멀리 떨어진 중동 사막이나 거대한 정유탑에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다. 환자의 병상에 도달하는 제약산업의 심장부를 겨누고 있는 가장 구조적인 위협이다.

이러한 전방위적 위기 속에서 제약업계와 정부는 선제적이고 유연한 위기 대응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단기적으로는 국가 필수의약품에 들어가는 핵심 원료와 포장 부자재의 안전 재고 비축량을 의무적으로 늘리고, 중국과 인도에 과도하게 편중된 수입망을 동남아시아, 남미, 동유럽 등으로 다변화하는 '차이나 플러스 원' 전략을 적극 실행해야 한다. 정부 차원에서도 안보적 관점에서 필수의약품 원료의 국산화 비율을 높이는 기업에게 세제 혜택과 약가 가산, R&D 지원 등 강력한 유인책을 제공해야 한다.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제약산업의 '탈(脫) 석유화학'이라는 거대한 패러다임 전환이 요구된다. 전통적인 화학적 합성 방식에서 벗어나, 식물 자원이나 미생물, 효소를 이용한 바이오 공정으로 의약품 중간체와 원료를 생산하는 친환경 '화이트 바이오' 기술에 대한 투자를 대폭 확대해야 한다. 나프타 의존도를 줄이는 것은 단순히 원가 절감을 넘어 미래 제약산업의 ESG 경쟁력을 결정짓는 핵심 지표가 될 것이다. 포장재 역시 탄소 배출을 줄이고 인체에 무해한 바이오 플라스틱이나 친환경 생분해성 소재로 발 빠르게 전환해야 한다.

원유 펌프질 , 석유 방울의 나비효과가 병상에 누운 환자의 치료 포기로 이어져서는 된다. 기초 화학물질부터 완제의약품 포장 박스에 이르기까지 주기를 아우르는 강건하고 회복탄력성 높은 '제약 공급망 생태계' 구축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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