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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국내 한 대형 제약사와 경구용 치매 신약의 해외 진출 가능성을 깊이 있게 논의할 기회가 있었다. 경쟁자가 전무한 이 혁신 신약을 좁은 국내 시장에 가두기보다, 규모가 월등한 해외 시장으로 확장해보자는 취지였다. 이 회의를 준비하며 국내 상위 30개 제약사의 판매 실적을 분석해 보았는데, 그 결과는 실로 충격적이었다.
창립 50년을 넘기고 매출 1조 원을 바라보는 굴지의 제약사들조차 총매출 대비 수출 비중이 고작 5~10%에 머물러 있었다. CMO(위탁생산)나 일부 바이오 기업을 제외하면, 대다수 전통 제약사의 글로벌 성적표는 턱없이 저조했다.
왜 이런 결과가 빚어졌을까. 근본 원인은 익숙한 국내 시장에 안주한 데 있다. 국내 경험이 풍부한 대형사일수록 리스크가 따르는 해외 시장 도전을 주저했다. 반세기 넘게 명망을 쌓아온 기업들이 정작 글로벌 영토 확장에는 소홀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뼈아픈 현실이자 씁쓸한 자화상이다.
물론 국내 제약사들이 그동안 수출할 만한 신약을 보유하지 못했던 사정도 있다. 대부분 제네릭과 원료의약품 위주였기에 세계 무대에 내놓을 자체 신약이 없었던 탓이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국산 신약은 40개를 넘어섰고, 미국 FDA와 유럽 EMA의 문턱을 넘은 사례도 다수다. 마음만 먹으면 해외를 직접 공략할 기초 체력은 다져진 셈이다. 만약 단독 포트폴리오가 부족하다면 타 제약사와 연합하거나 유망한 신약 판권을 확보해 ‘선단형’으로 진출하는 것도 방법이다.
창의적인 우회 전략으로 세계 시장에 도전한 사례도 있다. 스위스의 쥴릭파마(Zuellig Pharma)는 자체 신약 하나 없이 유통·도매 모델만으로 중국과 동남아 등 아시아 시장에서 성공적인 글로벌 기업이 되었다. 이는 제품이 부족해도 창의적 아이디어와 비즈니스 모델만 있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음을 시사한다.
이제는 시야를 돌려야 한다. 우리 세대에서 당장 눈앞의 과실을 따겠다는 조급함을 버리고, 다음 세대를 위한 토대를 닦는다는 ‘장기적 안목’이 필요하다. “우리는 지구를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아이들에게서 빌려온 것이다(We don’t inherit the Earth from our ancestors. We borrow it from our children)”라는 세계보건기구(WHO)의 표어처럼, 우리나라 신약 개발 사업 역시 후대에 더 큰 결실을 넘겨주기 위해 지금 씨앗을 뿌려야 한다.
방법론은 이미 나와 있다. 글로벌 빅파마들이 걸어온 검증된 길을 우리 실정에 맞게 적용하면 된다.
1. 현지 파트너 선정: 현지 파트너사를 찾아 제품 수출 형태로 해외 시장 공략을 시작한다. 우선 수출을 통해 현지 시장 수요를 파악하고 기반을 다진다.
2. 학술·마케팅 지원 사무소 설립: 해외 진출 초기부터 현지에 학술·마케팅 지원 사무소(Scientific Liaison Office)를 설립해 의학 정보 제공과 마케팅 지원을 시작한다. 현지 의료진과 시장을 제대로 이해하고 소통하기 위한 거점이다.
3. 합작법인 설립: 초기 사업 기반이 잡히면, 현지에 자사가 지분 51% 이상을 보유하는 합작법인을 설립해 사업을 본격화한다. 이후 사업이 성장하면 그 합작법인을 100% 자회사(현지 법인)로 전환하여 독자적 경영 체제를 구축한다.
4. 핵심 인력 최소 파견: 본사에서는 CEO, CFO, 마케팅 담당 임원 등 핵심 인력 3명만 현지에 파견한다. 이들은 매출(Topline), 순이익(Bottom line), 이익률 등 핵심 지표로만 성과를 관리하고, 나머지 운영은 전적으로 현지 법인의 자율에 맡긴다. 현지 사정을 가장 잘 아는 현지 팀에 권한을 주는 것이다.
5. 단계적 해외 확장: 이러한 방식을 주요 국가에 적용해 직접 진출을 시작하고, 성과를 보면서 사업 범위를 단계적으로 넓혀간다. 처음에는 선택한 국가에서 시작하지만, 점차 진출 국가와 지역을 확대해 글로벌 네트워크를 구축한다.
지금이야말로 도전을 시작할 최적기다. K-바이오와 첨단 기술에 대한 세계적 평판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이 절호의 기회를 놓쳐선 안 된다. 이 가슴 뛰는 목표를 이루려면 변화의 열쇠는 오너와 경영진에게 있다. ‘골목대장’에 만족하던 과거와 결별하고, 글로벌 시장을 개척하겠다는 뚝심과 결단이 필요하다.
2026년 새해, 우리 제약업계가 대한민국 미래 먹거리를 위해 글로벌 시장의 육중한 문을 활짝 여는 원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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