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약바이오 산업은 최근 정부의 일방적인 제네릭 약가 인하 정책 여파로 현장 전반에 위축된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수익 구조가 흔들리면서 연구개발(R&D)과 투자 여력까지 동반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그러나 산업이 직면한 현실이 녹록지 않다고 해서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정부는 R&D 예산을 확대하며 생명공학 기술과 제약바이오 신약개발 분야를 미래 성장동력으로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이는 중장기적으로 기술 기반 기업과 연구 조직에 새로운 기회가 열리고 있다는 신호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정부와의 합리적인 약가 협의와 함께, 변화된 정책 환경을 냉정하게 해석하고 이를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접근이다. 확대되는 연구개발 재원과 각종 지원 프로그램을 놓치지 않고 정교하게 연결한다면, 이번 위기는 또 다른 전환점이 될 수 있다. 약업신문은 보건의료·제약바이오 산업이 선택지와 전략을 점검할 수 있도록 ‘2026 정부 R&D 사업 부처합동 설명회’를 집중 분석한다. <편집자 주>
질병관리청 국립보건연구원이 2026년 R&D 전략의 핵심으로 '감염병 안보'와 '데이터 기반 미래 의료'를 꼽았다.
지난 20일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열린 ‘2026년 정부 R&D 사업 부처합동설명회’에서 국립보건연구원은 총 1,988억 원 규모의 내년도 R&D 투자 계획을 발표하며, 팬데믹 대비와 바이오헬스 산업의 미래 먹거리 창출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분명히 했다.
이는 2025년 1,860억 원 대비 약 6.9% 증가한 수치로, 정부의 긴축 재정 기조 속에서도 질병 관리와 보건 안보 기술에 대한 투자는 지속적으로 확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예산의 '선택과 집중'...감염병은 '방어', 미래의료는 '공격' 초점 2026년도 질병관리청 R&D 예산 1,988억 원의 세부 내역을 뜯어보면, '안보'라는 든든한 방패 위에 '혁신'이라는 창을 얹은 모양새다. 전체 예산의 포트폴리오는 크게 감염병(47%), 미래의료(36%), 만성병(17%)의 '3각 편대'로 구성되었다.
① 감염병 위기대응 (943억 원, 47.4%)..."흔들리지 않는 안보 주권" 전체 예산의 절반에 가까운 943억 원이 감염병 분야에 배정됐다. 전년(929억 원) 대비 1.5% 소폭 증가에 그쳤지만, 이는 감염병 연구가 이미 대규모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는 '상수(constant)'임을 의미한다. 질병청은 이 예산을 통해 단기적인 성과보다는 ▲mRNA 백신 플랫폼 국산화 ▲미해결 감염병(SFTS 등) 치료제 개발 등 장기적인 '기술 주권' 확보에 집중한다. 즉, 수익성은 낮지만 국민 생명과 직결된 '시장 실패' 영역을 공공 재정으로 확실히 방어하겠다는 의지다.
② 미래의료 인프라 (716억 원, 36.0%)..."성장을 위한 공격적 베팅" 가장 주목할 지점은 '미래의료' 분야의 가파른 성장세다. 2025년 620억 원에서 2026년 716억 원으로 무려 15.5%나 급증했다. 이는 전체 예산 증가율(6.9%)의 두 배를 상회하는 수치다. 이 '뭉칫돈'은 대부분 **'데이터'**로 향한다. AI 신약 개발과 정밀의료의 원유(Oil)라 할 수 있는 '국가 통합 바이오 빅데이터' 구축과 유전체 정보 인프라 확충에 예산을 집중 투입하여, 국내 바이오헬스 산업 전체의 파이를 키우는 '마중물' 역할을 자처했다.
③ 만성질환 (329억 원, 16.5%)..."초고령화 사회의 안전망" 만성병 분야는 311억 원에서 329억 원으로 5.6% 증액됐다. 절대적인 규모는 가장 작지만, 초고령화 시대의 핵심 난제인 '치매'와 '여성 건강', '기후변화 기인 질환' 등 삶의 질과 직결된 문제 해결에 초점을 맞춰 알짜배기 연구를 이어간다.
감염병 분야의 최우선 과제는 '초고속 백신 개발 역량' 확보다. 질병청은 팬데믹 발생 시 200일 이내에 백신을 개발한다는 목표 아래, '팬데믹 대비 mRNA 백신 개발 지원사업'에 2025년부터 2028년까지 총 5,052억 원(국비+민간)을 투입한다. 2026년에는 코로나19 mRNA 백신 후보물질의 임상 2상 진입을 지원하며 비임상부터 임상까지 전주기 패키지 지원에 나선다.
아울러 시장성이 낮아 민간 개발이 저조한 미해결 감염병에 대한 공공 투자도 강화된다. 치사율이 높아 '살인 진드기병'으로 불리는 중증열성혈소판감소증후군(SFTS) 항체 치료제 개발 및 백신 표준물질 개발이 주요 과제로 추진되며, 메르스(MERS) 치료제 개발도 지속된다.
12만 명 '바이오 빅데이터' 열린다… K-정밀의료 가속화 가장 가파른 예산 증가세를 보인 미래의료 분야는 '데이터'가 핵심이다. 질병청은 '국가 통합 바이오 빅데이터 구축 사업'을 통해 희귀·중증 질환자 및 일반인 12만 명을 모집하고, 임상·유전체 데이터를 확보하여 연구자들에게 개방할 계획이다. 이는 AI 신약 개발과 정밀의료 실현을 위한 핵심 인프라가 될 전망이다.
또한, 한국인 고유의 유전체 정보를 담은 '한국인칩 v2.0' 기술을 민간에 이전하고, 이를 활용한 만성질환(비만, 당뇨 등) 예측 모델 개발을 지원한다. AI를 활용한 미진단 희귀질환 진단 기술 개발에도 예산이 투입되어, 진단 방랑을 겪는 환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고령화·미세먼지 대응 및 연구자 친화적 행정 개선 만성병 분야에서는 초고령사회 진입에 따른 '건강 노화'와 '치매 극복'이 화두다. 90세 이상 초고령자 코호트를 구축하고, 치매 뇌은행을 운영하여 뇌부검 기반의 정밀 연구를 추진한다. 미세먼지 등 환경 변화가 소아 천식이나 만성폐쇄성폐질환(COPD)에 미치는 영향을 규명하는 연구도 확대된다.
한편, 이번 설명회에서는 연구자들을 위한 제도 개선 사항도 발표되었다. 2026년 용역과제부터는 연구비 선금에 대한 이자 반납(위탁정산)이 의무화되며, 연구비 변경 신청 기한이 기존 '계약 종료 60일 전'에서 '70일 전'으로 앞당겨져 연구비 집행의 투명성과 행정 효율을 높일 예정이다.
질병청의 2026년 R&D 로드맵은 제약·바이오 기업들에게 명확한 시그널을 주고 있다. 정부가 mRNA 백신 국산화와 AI 기반 신약 개발에 막대한 예산과 데이터를 쏟아붓겠다는 의지를 천명했기 때문이다.
질병청이 100만 명 규모 구축을 목표로 하는 바이오 빅데이터와 코호트 정보가 민간에 얼마나 효율적으로 개방되느냐가 국내 바이오 산업의 '퀀텀 점프'를 결정짓는 관건이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