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정적 광고 …젠더 감수성 간과 위기 불러
‘남성 중심’ 구조 등 한계 …산업 전반에 악영향
김민혜 기자 minyang@yakup.com 뉴스 뷰 페이지 검색 버튼
입력 2025-10-02 06:00   수정 2025.10.02 06:48

국내 뷰티 기업들이 젠더 감수성 관련 광고 논란에 연이어 휘말리고 있다. 올해만 세 번째다. 업계 안팎에선 구조적 한계에서 기인한 것으로 제품은 물론 브랜드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여성 소비자가 산업의 절대 다수를 차지함에도 기업 내부는 여전히 남성 중심 구조에 묶여 있어 소비자의 감수성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도 잇따르고 있다.


반복되는 광고 논란

이니스프리는 최근 인플루언서와의 협업 콘텐츠(왼쪽)가 문제가 되자 이를 삭제한 후 X(舊 트위터)에 사과문을 게시했다. ⓒSNS갈무리

이니스프리는 최근 신제품 ‘그린티 세라마이드 밀크 에센스’ 홍보 영상에서 인플루언서가 흰색 액체 제형의 제품을 얼굴에 붓는 장면을 연출했다가 ‘성적 암시’ 논란에 휩싸였다. 소비자들은 “불필요하게 선정적”이라는 반응을 보이며, 브랜드 이미지와 맞지 않는 기획이라고 지적했다. 

“정액 이미지를 차용한 잘못된 마케팅으로 여론이 나빠지는 걸 보고도 느끼는 게 없었나” “제품을 구입하고 실제 사용할 사람 보라고 하는 광고가 맞느냐” 등등 소비자들의 비난은 거셌다. 결국 이니스프리는 문제 장면을 삭제하고 사과문을 게재했지만, 20년 이상 이어진 ‘맑고 깨끗한 브랜드 이미지에 금이 갔다'는 타격을 피하지 못했다. 

소비자가 불러온 ‘잘못된 마케팅’은 지난 3월 있었던 사례다. 한 뷰티 브랜드가 연어의 정소와 정액에서 추출되는 연어 PDRN을 남성의 정액에 빗댄 ‘정액 화장품’으로 마케팅 활동을 펼쳐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풋샴푸 브랜드 ‘발을씻자’도 인플루언서 협업 과정에서 젠더 갈등에 휘말렸다. 지난 2월 해당 인플루언서가 남성을 조롱하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는 논란이 불거지자 브랜드 측은 즉각 계약을 해지하고, 광고를 삭제조치 했다. 

그러나 이후, 문제는 더 커졌다. 정작 자사 제품명을 차용해 여성 혐오 발언을 했던 웹툰 ‘이세계 퐁퐁남’ 논란 당시에는 대응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 재차 도마에 올랐다. “주요 고객 층인 여성의 지적은 외면하면서 일부 남성의 민원에만 신속히 반응했다”며 이중적 태도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이 과정에서 남녀 양측 모두에게 불매 움직임이 번졌다. SNS 마케팅 성공 사례로 손꼽히던 발을씻자의 X 계정은 며칠 만에 팔로워가 1만명 이상 줄었고,  끝내 운영이 중단된 상태다.

이처럼 광고 논란이 잇따르는 배경에는 소비자 가치관 파악 미비가 있다. 디지털 시대 광고는 빠른 확산력이 특징인 만큼 초기 기획 단계에서 작은 실수도 곧바로 기업 전체 이미지에 타격을 준다. 전문가들은 “MZ세대는 특히 제품 성능보다도 브랜드의 태도와 가치관을 더 중시한다”며, 광고가 기업 정체성을 드러내는 창구임을 강조한다.

논란 이후 대응과 관련해 이니스프리 측은 “향후 재발 방지를 위해 고객 감수성 측면에서 내부 점검 가이드라인을 강화할 예정”이라며 “콘텐츠 검토 단계에서 다양한 가능성을 사전 검토하는 노력을 더욱 기울일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아모레퍼시픽 그룹은 다양성과 포용성의 가치를 사내외에 확산하기 위해 전 임직원을 대상으로 다양성 및 포용성 교육 및 인식 개선 프로그램, 다양성 및 포용성 기반의 뷰티 제품 개발과 캠페인 등을 전개하고 있다”고 밝혔다. 

LG생활건강 측은 “2021년 이사회 산하에 ESG위원회를 신설하고, 매년 ESG 보고서를 통해 지속가능경영 전략을 공시하며 사회책임 활동과 거버넌스 정비를 강조하고 있다”며 “특히 여성CEO 선임을 비롯, 인재 채용 및 양성, 사내 문화 형성 등의 측면에서 유능한 여성 인재 활용을 늘려나가기 위한 구조적 개선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여성 임원 소수에 그쳐 

광고 논란의 핵심 원인으로 꼽히는 것은 리더십 성비 불균형이다. 리더스인덱스에 따르면 국내 매출 상위 500대 기업(분기보고서 제출 376개사) 기준, 2025년 1분기 여성 임원 비중은 8.1%에 불과하다. 국내 뷰티 산업의 경우 타 산업군에 비해선 양호한 편이나, 소비자의 성비 구성을 고려하면 관리직 및 임원단 성비 불균형은 여전히 개선이 필요한 상황이다. 업계의 일부 전문가들은 “여성 소비자가 핵심임에도 고착화된 기업의 남성 중심 구조 때문에 광고 기획 단계에서도 젠더 감수성 부족 같은 구조적 한계가 드러난다”고 지적한다.

아모레퍼시픽의 경우 여성 임직원 비중이 남성보다 높지만, 2018~2020년 기준 여성 관리자 비율은 33~35%대에 그친다. LG생활건강도 2024년 기준 전체 임직원 중 여성 비중이 54.7%에 달하지만 관리자 비율은 35.4%, 임원은 18.9%에 머문다. 직원 대다수가 여성임에도 의사결정 라인에서 여성은 소수다.

글로벌 기업의 지속가능보고서에 따르면, 시세이도는 글로벌 관리자 중 59.5%, 일본 내 관리자 41.1%가 여성이다. 이사회는 54.5%가 여성으로 과반을 넘어섰다. 로레알은 전 세계 직원의 71%가 여성이고, 핵심 포지션에서 여성 비율이 57%, 브랜드 디렉터는 62%에 달하며, 이사회 역시 절반이 여성이다.

LG생활건강은 지난 2월 ‘발을 씻자’ 관련 젠더 논란이 일자 브랜드의  X 계정을 폐쇄했다. 


단기 성과 중심·외주 의존의 허점

다른 문제들도 있다. 업계 전반의 성과 지표 중심 단기주의도 주요 요인이다. 조회수·노출 같은 KPI(핵심성과지표) 달성에 집착하다 보니 ‘자극적 연출과 화제성 확보’라는 접근이 반복된다. 단기 성과는 얻을 수 있지만 브랜드 가치와 소비자 감수성은 뒷전으로 밀린다.

여기에 외주 및 인플루언서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리스크는 더욱 커지고 있다. 빠른 트렌드 대응을 위해 협업을 확대하지만, 기업 내부 검증 절차가 약해 인플루언서 개인 발언 이력 같은 잠재적 리스크를 걸러내지 못하는 경우가 잦다. 한 업계 관계자는 “제품 출시 시기에 맞추려다 보니 충분히 검토하지 못하고 광고를 내보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며 “큰 기업도 광고 검증 과정이 허술해 논란이 생긴 후에야 허둥지둥 대응하는 모습이 반복된다”고 지적했다.

세대·문화적 다양성 부족을 지적하는 사람도 많다. 소비자는 20~40대 여성이 중심인데, 의사 결정권자는 40~50대 남성이 다수다. 세대·문화적 감수성 차이로 젊은 층이 민감하게 반응할 암시나 코드가 걸러지지 않는다.

위기관리 체계 부재도 반복적 논란의 원인이다. 논란이 발생하면 사과문과 광고 삭제로 끝나는 대응이 대부분이다. 글로벌 기업들이 DE&II(Diversity·Equity and  Inclusion) 위원회와 소비자 패널을 통해 사전 검증과 사후 대응 체계를 강화하는 것과 비교하면, 한국 대기업은 여전히 임시방편에 그치고 있다.


소비자 감수성은 브랜드 생존의 조건

소비자들은 이제 단순히 제품 효능만이 아니라 브랜드가 보여주는 가치관과 태도를 평가한다. 특히 MZ세대는 자신과 같은 감각을 공유하는 브랜드에만 충성도를 보인다. 때로 광고 논란은 단발적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불매운동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결국 이번 사건들은 한국 뷰티 산업의 구조적 과제를 드러냈다. 여성 직원은 많지만 리더십은 남성 중심으로 굳어져 있고, 단기 성과 지표와 외주 의존, 세대 다양성 부족, 위기관리 부재가 맞물리며 위기가 반복된다.

브랜드 이미지가 곧 ‘브랜드 자산’인 시대다. 사건이 벌어진 후에 단편적 대응만으론 이미지 회복이 어렵다. 여성 리더십 확대와 더불어 다양한 세대와 배경을 의사 결정에 참여시키는 제도적 장치, 그리고 체계적 사전 검증 시스템이 강조되는 이유다.

성신여자대학교 뷰티융합대학원 김주덕 원장은 “기업의 잘못된 판단은 제품이나 브랜드 이미지뿐 아니라 산업 전반에도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 원장은 “지금은 Z세대가 화장품 트렌드 및 소비를 주도한다”며 “브랜드 가치에 집중하는 이들의 목소리에 집중하고, 논란의 소지가 있는 메시지는 내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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