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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AI)과 조제 자동화 기술이 약사를 대체할 것이라는 전망과 달리, 해외 주요국들은 오히려 약사의 임상 역할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약국 시스템을 재편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AI와 로봇이 반복적이고 기계적인 조제 업무를 담당하는 대신, 약사는 환자 상담과 만성질환 관리, 약물치료 의사결정 등 전문성이 필요한 영역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직능 변화가 이뤄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가장 적극적인 변화는 영국에서 나타나고 있다.
영국 NHS는 의사 부족과 진료 대기 증가, 만성질환자 급증이라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약국을 지역사회 1차 의료의 한 축으로 활용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24년 도입된 'Pharmacy First'다. 이 제도는 급성 중이염, 인후통, 부비동염, 대상포진, 농가진, 벌레 물림·감염, 단순 요로감염 등 일부 경증질환에 대해 환자가 의원을 거치지 않고 약국에서 약사의 평가와 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이 핵심이다.
영국 정부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조제 업무의 자동화와 중앙화를 추진하고 있다. 2025년부터 시행 중인 'Hub & Spoke' 모델 확대 정책에 따라 반복적이고 표준화가 가능한 조제 업무는 중앙 조제센터(허브)에서 수행하고, 지역 약국은 환자 상담과 복약관리, 만성질환 관리 등 임상 서비스에 집중하도록 제도를 개편하고 있다.
영국 정부가 발표한 영향평가 보고서에서도 이러한 정책의 목적은 단순한 비용 절감이 아니라 지역 약국이 보다 많은 임상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하는 데 있다고 설명한다. 조제는 자동화하되 약사는 환자 곁으로 이동시키겠다는 전략인 셈이다.
미국 역시 비슷한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세계 최대 약국 체인인 월그린(Walgreens)과 월마트(Walmart)는 대형 마이크로 풀필먼트 센터(MFC)를 구축해 대규모 조제·포장 업무를 중앙화했다.
자동화 시스템이 수천~수만 건의 처방 조제를 처리하면서 지역 약국 약사들은 예방접종, 복약상담, 만성질환 관리 등 환자 중심 서비스에 보다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게 됐다. 조제 기능은 중앙화되고 약사의 역할은 임상서비스 중심으로 재편되는 구조다.
업계에서는 조제 자동화의 가장 큰 효과가 인력 감축이 아니라 약사 업무의 재배치에 있다고 평가한다. 반복 조제에 투입되던 시간을 환자 케어로 전환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일본은 AI를 활용해 약사의 행정 업무 부담을 줄이는 데 집중하고 있다.
최근 일본 약국가에서는 음성인식 AI를 활용해 복약상담 내용을 실시간으로 기록하고 약력관리 문서를 자동 작성하는 시스템 도입이 확대되고 있다. 약사가 환자와 상담하면 AI가 내용을 정리해 약력기록 초안을 생성하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약사는 문서 작성 시간을 줄이고 복약지도와 상담에 보다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일본에서는 AI를 약사 대체 기술이 아니라 상담 시간과 환자 접점을 확대하는 지원 도구로 활용하는 흐름이 확산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변화가 정밀의료 시대에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전망한다.
유전체 정보와 바이오마커, 웨어러블 기기에서 생성되는 개인건강데이터(PGHD) 등이 의료현장에 본격 활용되면서 약사의 역할도 단순 조제를 넘어 데이터 기반 치료 의사결정 영역으로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처방전에 따라 의약품을 조제하는 것이 약사의 핵심 업무였다면 앞으로는 환자의 유전적 특성과 질환 상태, 복용 이력, 생활습관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최적의 약물치료 전략을 제시하는 역할이 더욱 중요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 약사사회 역시 AI 시대에 대응하기 위한 준비에 속도를 내고 있다.
최근 경기도약사회는 'AI와 함께 진화하는 약사(Pharmacists, Evolve with AI)'를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다제약물관리와 약국 자동화 기술 등 실제 약국 현장에서 활용 가능한 AI 사례를 소개했다.
약학정보원도 미국병원약사회(ASHP)의 AI 활용 선언문을 토대로 생성형 AI의 약사 실무 적용 가능성과 윤리적 고려사항을 조명하며 환자교육, 약물관리, 행정업무 자동화 등 다양한 활용 방안을 제시했다.
보건약학협회 역시 올해 'AI 시대 약사 전문성 강화 세미나'를 개최하고 AI 기반 약국 운영 전략과 디지털 헬스케어 환경에서의 약사 역할 변화, 미래 약국 모델 등을 주요 의제로 다뤘다.
이처럼 해외는 물론 국내 약사사회에서도 AI를 약사 대체 기술이 아닌 전문성 강화 도구로 바라보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약업계에서는 AI가 약사의 역할을 대체하기보다 환자 중심 약료와 임상 서비스 확대를 촉진하는 방향으로 활용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약사사회 관계자는 "초기에는 AI가 약사 직능을 위협할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약사의 전문성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활용되고 있다"며 "AI가 정보를 분석하고 위험 신호를 선별할 수는 있지만 이를 검증하고 환자에게 적용하는 최종 판단과 책임은 결국 약사의 몫"이라고 말했다.
이어 "미래 약사의 경쟁력은 지식을 독점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AI가 제공한 데이터를 환자 상황에 맞게 해석하고 최적의 치료 전략으로 연결하는 능력에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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