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우현 박사님 !
지난 7월 20일 동창회를 통해 약수(若水) 백우현(白于玹) 박사께서 소천하셨다는 비보(悲報)를 들었다. 병세가 만만치 않음은 알고 있었지만 예상보다 빠른 진행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나는 지난 5월 30일 백 박사님을 포함한 원로 제약공장장 10분을 모시고 “우리나라 제약공장의 초창기 발전사(가제)”라는 주제로 좌담회를 개최하였다. 사전에 백 박사님께 전화를 걸어 그날 와 주십사 부탁을 드렸더니, “요즘 다리에 힘이 없어 통 외출을 안하고 있지만 심박사가 오라면 가야지” 하시며 오겠다고 하셨다. “정 불편하시면 카카오 택시를 보내 드릴까요?” 여쭈었더니 ‘나도 부를 줄 안다’며 신경 쓰지 말라고 하셨다.
5월 30일 12시에 모든 참석자가 서울대 호암교수회관에 모였는데, 백 박사님은 지팡이를 짚고 몹시 수척해지신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평소에 남달리 건강하셨던 분이라 다들 깜짝 놀랐다. 식사 후 서울대 약대 21동 소회의실로 옮겨 오후 6시까지 논스톱으로 좌담회를 진행했는데, 백 박사님은 본인의 공장 생활을 포함한 제약계의 시대상을 상세하게 회고해 주셨다. 나아가 다른 분들의 회고담도 미동도 않고 경청하시면서 중간 중간에 ‘그때 이런 일도 있었어요’ 하시며 코멘트를 해 주셨다. 백 박사님은 그날 참석자 중 최고령(만 89세)이셨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적극적인 참여자이셨다. 이날 좌담회의 내용은 곧 나올 ‘약학사회지 제8권’을 통해 약학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6월 25일, 교회에 다녀와 쉬고 있다가 백 박사님의 전화를 받았다. ‘서울대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데, 지금 나를 만나러 와 주기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웬만하면 ‘와라’ 하실 분이 아닌데 심상치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급히 차를 몰아 병실로 갔더니 좀 더 창백해지신 백 박사님이 며느님과 간병인과 함께 계셨다. 백 박사님은 ‘옆의 환자가 신경 쓰이니 밖의 휴게실로 나가자’며 휠체어에 태워 달라 하셨다. 며느님과 간병인은 ‘곧 의사가 회진 와서 어제의 검사 결과를 알려줄 시간이니 그냥 병실에 계시라’고 했지만, 백 박사님은 약간의 신경질까지 내시면서 끝내 휴게실로 나가셨다.
휴게실에서 백 박사님은 “나는 아무 미련이나 원망, 또는 불안없이 평안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데, 그냥 심박사가 보고 싶어 불렀다. 또 한 분 만나고 싶은 분은 보령제약의 김승호 회장님이다. 며칠 후 퇴원하면 요양병원으로 갈 예정이다” 등의 말씀을 하셨다. 다른 말씀은 없었다. 잠시 후 저녁 식사 시간이라 간병인의 부름을 받고 병실로 들어가시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7월 20일, 부음을 들은 것이다.
백 박사님은 2023년 3월 펴낸 회고록 약로여정(藥路旅程, 서울대학교 약학역사관 발행) 98-99 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이 나와의 관계를 설명하셨다.
“전략.~ 나의 사회생활을 되돌아보면 심창구 명예교수(모교 25회)는 나에게 많은 도움과 조언을 주었고 나는 그의 영향을 받은 점이 많았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2003년 심교수가 식약청장 재직 시 나를 기술자문관으로 위촉하여 활동하게 해 줬고 평양제약 방문도 그의 추천으로 갔었다. ‘종합 실용 의약용어사전’과 ‘팜텍’ 발간에 즈음해서는 많은 도움과 조언을 해 줬으며, 내가 서울대 발전기금에 기부할 때도 그의 자문을 받았다. 심 교수는 내가 주관하는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해서 축하와 격려를 해 주었다.
내가 보령제약에 재직 시의 일이다. 심창구 교수가 직장암 수술을 받고 퇴원했을 때 나와 같이 있는 연구소의 성열익(심 교수의 고교 동기생) 박사와 함께 심 교수 내외분을 모시고 저녁 식사를 한 적이 있다. 심 교수는 몇 십년이 지난 지금도 잊지 않고 고마워하니 오히려 내가 무안할 정도다. 나는 필요할 때면 수시로 심 교수의 조언을 구했고, 그럴 때마다 올바른 판단으로 자문해 주었다. 나는 심교수가 정년 퇴임 후 우리나라 약학사 발굴과 정립에 기여한 공로를 높이 평가하고 싶다. 우리나라 약계의 보석 같은 존재가 아닌가 생각한다.”
백 박사님의 과분한 사랑에 감읍하며 영원한 안식을 기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