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퍼 유전자가위의 핵심인 크리스퍼-카스(CRISPR-Cas) 시스템은 외부 바이러스나 다른 생물의 유전물질이 침투하면 이를 가위처럼 절단하는 역할을 하는 후천적 면역체계다. 약 10년 전인 2012년에 관련 연구의 진전으로 타겟 유전물질에 대한 상보적 염기서열을 갖고 있는 크리스퍼RNA(crRNA), 크리스퍼RNA에 상보적으로 결합하는 트레이서RNA(tracrRNA), 카스9(Cas9) 단백질 등 3개 주요 구성인자로 이뤄진 크리스퍼 유전자가위가 타겟 유전자를 인식하고 절단하는 작용기전이 알려졌다.
카스9 단백질과 이를 타겟 DNA에 인도하는 가이드 RNA만 있으면 DNA 특정부위를 인식하고 절단하는 것이 가능하며 해당 구성인자들을 비교적 간단하고 쉽게 만들 수가 있다는 것이 연구계 중론이다. 예로 '크리스퍼-d카스9'로 알려진 개조된 크리스퍼 유전자가위에는 크리스퍼RNA와 트레이서RNA가 하나로 연결된 싱글가이드RNA(sgRNA)와 DNA 절단 기능을 망가뜨린 불활성 카스9 단백질(dCas9)이 있다.
타겟 유전자에 특이적 부착 기능만 남은 불활성 카스9에 전사조절인자를 결합하는 방식으로 유전자 발현을 강화하거나 억제하는 연구계의 시도가 진행되고 있다. 예로 불활성 카스9에 KRAB으로 알려진 단백질을 결합하면 전사 과정에서 RNA 중합 효소의 진행을 막아 유전자 발현을 억제할 수가 있다. 이와 같은 크리스퍼 기반의 유전자 발현 억제 기술을 CRISPRi라고 한다.
반대로 불활성 카스9에 VP64 또는 P65AD와 같은 단백질을 결합하면 타겟 유전자의 발현을 촉진시킬 수가 있고 이를 CRISPRa 기술이라고 한다. 이처럼 불활성 카스9 단백질이 포함된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는 세포 신호전달에 핵심 역할을 지닌 유전자의 발현을 강화 또는 억제하는 조절로 신호전달을 켜고 끄는 '스위치' 기능을 구현하고 있다.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는 신호전달의 스위치뿐만 아니라 '강탈'도 구현한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오승자 선임연구원과 이충일 박사후연구원의 '세포 신호전달 조절 인공 후성유전조절 효소 플랫폼으로서의 CRISPR-Cas 시스템' 기고에 따르면 세포 내 신호전달 기전을 강탈(hijacking)해서 유전자 발현을 인위적으로 유도하는 연구가 있다.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신호전달 기전의 핵심인자를 강탈하고 신호전달 방향을 변화시켜 세포에 존재하지 않는 신호전달을 만들거나 기존과는 다른 유전자의 발현을 유도하고 있다. 예로 GEARs로 알려진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는 면역억제에 기여하는 신호전달 기전을 강탈하면서 기존과는 정반대인 면역활성 효과를 나타냈다.
더 나아가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는 '후성유전조절 효소'라는 치료적 역할로 진화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유전적 요인'이 DNA 염기서열에 의한 영향을 의미하는 반면 '후성유전적 요인'은 단백질과 같은 유전자의 발현에 의한 영향을 의미하고 있다. 후성유전은 생활 조건, 생활 방식, 유전자 발현 및 건강 사이의 상호 작용을 포괄하고 후성유전정보의 비정상적 조절은 암, 심혈관 질환 등 다양한 질병을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를 활용하는 '인공 후성유전조절 효소'는 유전자 발현을 좀 더 정교하게 조절하는 목적으로서 앞서 언급한 신호전달 스위치 기능의 유전자 발현 강화 또는 억제하는 기술과는 다르다. 예로 효소라는 기능을 구현하고자 DNA 메틸화 등에 관여하는 촉매 도메인(catalytic domain)을 크리스퍼 유전자가위 시스템에 도입했다는 차이가 있다.
DNA 메틸화는 유전자 발현과 연관되고 있다. 예로 유전자 조절 부위에 메틸기가 붙어 있는지 여부로 해당 유전자의 발현이 촉진될 수도 있고 반대로 억제될 수도 있다. TET으로 알려진 인공 후성유전조절 효소는 불활성 카스9와 결합하여 유전자 발현 조절을 위한 탈메틸화를 수행하면서 결과적으로 신장 섬유증의 감소를 보였다.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를 활용하는 인공 후성유전조절 효소의 암, 염증 조절 유전자의 발현 억제에 관한 연구는 해당 기술의 활용에 대한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오승자 선임연구원과 이충일 박사후연구원은 기고에서 크리스퍼 유전자가위의 활용으로 "환자 맞춤형 정밀 의학을 위한 유전자 편집의 대안으로서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아야 할 때"라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