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제이(以夷制夷)!
글락소스미스클라인社는 지난 2003년 항우울제 '팍실'(파록세틴, 영국 등에서는 '세로자트'로 발매)의 제네릭 제형들이 발매되어 나오기 시작하자 자체적으로 값싼 제네릭 제형을 선보이며 카운터 펀치를 날렸다.
한해 30억 달러 상당의 매출을 올렸던 '팍실'은 원래 40㎎ 용량의 연두색 한 정당 3.37달러로 미국시장에 공급되어 왔던 항우울제. 그러나 글락소측이 파아 파마슈티컬社(Par)와 손을 잡으면서 내놓은 값싼 제네릭 제형은 흰색 한 정당 2.88달러의 가격이 책정됐다.
그 결과 지난 2003년 8월 FDA로부터 승인을 얻어내면서 제네릭 1호 제형에 주어지는 180일의 독점발매권을 확보했던 캐나다 아포텍스社는 4억 달러 이상의 매출차질을 감수해야 했다. 한 정당 2.97달러에 발매한 아포텍스측의 제네릭 제형보다 글락소가 내놓은 제네릭 제형이 더욱 저렴한 가격에 공급되었기 때문.
특허가 만료된 오리지널 제품의 제네릭 1호 제형에 대해 보장되는 180일의 독점발매권은 지난 1984년 헨리 왁스만 하원의원(민주당·캘리포니아州)과 오린 해치 상원의원(공화당·유타州)이 제네릭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공동발의해 제정되었던 해치-왁스만法에 근거를 둔 제도이다.
글락소의 미국 현지법인을 이끌고 있는 크리스토퍼 비바커 회장은 "자체적인 제네릭 제형의 발매를 통해 특허만료에 따른 손실을 100% 상쇄할 수는 없었지만, 상당정도 보전받는 성과를 거뒀다"고 말했다.
메이저 제약기업들이 제네릭 메이커들의 거센 도전에 맞서 일종의 이이제이 전략으로 김빼기 작전에 나서고 있다. '이이제이'라면 중국의 오랜 군사전략을 지칭하는 말로, 오랑캐의 힘을 빌려 오랑캐를 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같은 전략은 FDA가 지난해 7월 2일 특허보유권자측의 제네릭 제형(unbranded versions) 발매를 허용하면서부터 본격화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게다가 컬럼비아 순회상소법원은 지난 6월 이른바 '위임 제네릭 제형'(authorized generics)의 발매가 위법이 아니라고 판결했다. 이 판결은 테바 파마슈티컬 인더스트리社(Teva)가 항경련제 '뉴론틴'(가바펜틴)의 제네릭 제형을 발매하려는 화이자社의 움직임이 위법이라며 제기했던 소송에 대해 내려진 것이었다.
그 결과 오늘날 한해 580억 달러 안팎의 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제네릭 메이커들의 대응책 마련을 위한 움직임도 갈수록 분주해지고 있다. 약가인상을 유발하는 불공정한 처사라며 불법화를 이끌어 내기 위한 물밑작업에 총력을 경주하고 나서기 시작한 것.
대표적 제네릭 메이커의 한 곳으로 꼽히는 펜실베이니아州 소재 밀란 래보라토리스社의 헤더 브레슈 대변인은 "180일의 독점발매권을 보장하는 것이야말로 제네릭업계의 근간을 이루는 제도"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독점발매권을 보장받지 못하게 될 때 제네릭업계 내부적으로 R&D 투자가 인센티브를 상실케 되고, 공정한 경쟁풍토가 조성되지 못하게 될 것이며, 결국 약가인상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게 브레슈 대변인의 주장.
제네릭업계가 대책마련에 나설만도 한 것이 제네릭 제형들은 발매 첫해에만 오리지널 제품의 매출과 이익을 80% 정도까지 잠식해 왔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런던에 본사를 둔 시장조사기관 데이터모니터社(Datamonitor)는 "오는 2010년까지 총 1,030억 달러 상당의 매출을 올려왔던 오리지널 처방약들이 특허만료에 직면을 앞두고 있어 차후 위임 제네릭 제형의 발매가 붐을 이룰 것"이라고 예측했다.
메이저 제약기업들이 위임 제네릭 제형의 발매에까지 손길을 뻗치게 된 것은 최근 제약업계의 현실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가령 지금으로부터 꼭 10년 전이었던 지난 1995년 최고의 베스트-셀링 품목이었던 글락소의 항궤양제 '잔탁'(라니티딘)은 한해 40억 달러대 매출을 올렸지만, 현재의 매출랭킹 1위 품목인 화이자社의 콜레스테롤 저하제 '리피토'(아토르바스타틴)은 연간 100억 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는 것. 또 지난 1996년 53개에 달해 1962년 이래 최고치를 기록했던 FDA의 허가품목수가 2003년 21개, 2004년 31개 등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현실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제네릭업계의 노력도 만만치 않아 미국 공정거래위원회(FTC)가 위임 제네릭 제형의 공정경쟁 저해 소지를 면밀히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공정거래위는 지난해 5월 이 제도가 제네릭 제품수 축소와 약가인상을 가져올 것이라는 요지의 서한을 접수했었다. 이 서한은 척 그래슬리(공화당·아이오와州), 패트릭 레이(민주당·버몬트州), 제이 록펠러(민주당·웨스트 버지니아州) 등 3명의 상원의원들이 제출했던 것.
한편 위임 제네릭 제형과 관련한 제네릭 메이커들의 대응은 엇갈린 행보를 보이고 있다는 지적이다. 아포텍스와 밀란 등의 경우 메이저 제약기업과의 공조를 거부하고 있는 반면 파아(Par)와 왓슨 파마슈티컬스(Watson) 등은 손을 맞잡고 위임 제네릭 제형의 생산을 떠맡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는 것.
메이저 제약기업들도 업체에 따라 대응방식에 차이를 내보이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한 예로 화이자社와 로슈社·존슨&존슨社 등은 제네릭 분야의 계열사를 설립해 보유하고 있는 케이스. 사노피-아벤티스社는 소규모 M&A를 통해 제네릭 메이커를 확보하겠다는 전략을 지난 6월 공개했다.
노바티스社의 제네릭 부문 자회사인 산도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메이저 제약기업들의 위임 제네릭 제형 생산에 손길을 뻗치고 있다. 브리스톨 마이어스 스퀴브社가 발매해 왔던 항고혈압제 '모노프릴'(포시노프릴)의 제네릭 제형이 여기에 해당되는 경우.
제네릭업계에서는 머크&컴퍼니社의 콜레스테롤 저하제 '조코'(심바스타틴)이 특허만료시점에 도달하는 것이 위임 제네릭 제형과의 싸움에서 분수령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며 주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머크측은 '조코'의 위임 제네릭 제형을 내놓지 않을 방침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