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백신 자립, 돈만 쏟아붓는다고 안 된다…생태계 없으면 공장도 멈춰"
단순 자금 지원 넘어 생태계·실무 인력·품질문화 구축이 선결 조건
WHO PQ 일률 적용보다 목표 시장별 규제 경로·장기 재정 확보 중요
"백신 최저가 경쟁 조달 한계…백신의 보건안보 가치 반영해야"
권혁진 기자 hjkwon@yakup.com 뉴스 뷰 페이지 검색 버튼
입력 2026-08-18 06:00   수정 2026.08.18 06:01
‘2026 ADB-RIGHT 바이오 생산공정 실습교육 수료식 및 파트너십 포럼’ 현장.©약업신문=권혁진 기자
(왼쪽부터) 김재균 아시아개발은행(ADB) 보건 전문관, 무하메드 샤하부딘 방글라데시 국영 제약사 EDCL 공장 부총괄책임자, 이훈상 라이트재단 전략기획이사, 윤인규 국제백신연구소(IVI) 사무차장, 에두아르도 반존 ADB 보건 부문 디렉터, 김민정 유바이오로직스 국제협력팀 선임이 ‘지역 백신 제조 생태계 구축’을 주제로 토론하고 있다.©약업신문=권혁진 기자

“이번 교육에서 익힌 백신 생산공정 경험과 기술이 각국의 실제 생산시설과 기술이전 사업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교육을 마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지 제조 역량을 구축하는 실제 프로젝트로 연결하는 것이 다음 단계입니다.”

김재균 아시아개발은행(ADB) 보건 전문관은 인천 송도 연세대학교 국제캠퍼스에서 14일 열린 ‘2026 ADB-RIGHT 바이오 생산공정 실습교육 수료식 및 파트너십 포럼’ 고위급 패널 토론에서 이같이 강조했다.

이날 전문가들은 중저소득국의 백신 제조 생태계 구축을 가로막는 구조적 과제를 짚었다. 기술과 장비를 이전하고 공장을 세우는 데서 그치지 않고 생산 생태계와 현장 전문 인력, 품질, 상업화 전략과 예측 가능한 수요까지 함께 갖춰져야 현지 생산을 지속할 수 있다는 데 의견이 모였다.

토론에는 김 전문관이 좌장을 맡고, 에두아르도 반존(Eduardo Banzon) ADB 보건 부문 디렉터, 윤인규 국제백신연구소(IVI) 사무차장, 김민정 유바이오로직스 국제협력팀 선임, 무하메드 샤하부딘(Muhammed Shahabuddin) 방글라데시 국영 제약사 EDCL 공장 부총괄책임자, 이훈상 라이트재단 전략기획이사가 패널로 참석했다.

지역 백신 제조 생태계 구축을 주제로 열린 이날 행사에는 라이트재단, ADB, IVI와 국내 주요 백신 기업 SK바이오사이언스, GC녹십자, 유바이오로직스 관계자, 18개국 교육생 등 80여 명이 참석했다. 이번에 수료를 마친 41명의 중저소득국 교육생은 앞서 9주간(이론 4주, 연세대 K-NIBRT 실습 및 현장견학 5주) 백신·바이오의약품 핵심 생산공정 교육을 이수했다.

자본 투입 그 이상…‘생태계·인력·품질문화’ 삼박자

에두아르도 반존 ADB 보건 부문 디렉터는 코로나19 팬데믹을 계기로 아시아 지역 내 백신 생산역량 확대 필요성이 더욱 분명해졌다고 강조했다. 백신 생산이 일부 국가에 집중되면서 개발도상국의 백신 접근성이 제한됐고, 이를 계기로 지역 제조 생태계 구축 논의가 본격화됐다는 설명이다.

반존 디렉터는 “각국이 이미 갖추고 있는 역량을 보다 효율적이고 체계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ADB는 정부와 민간 부문 모두에 금융을 제공할 수 있다. 국가가 백신 생산을 추진한다면 적절한 방식과 기술, 파트너를 선택해 지속 가능한 체계를 갖추도록 돕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윤인규 IVI 사무차장은 기술이전의 성패를 결정하는 요소로 ‘생태계(Ecosystem)·사람(People)·문화(Culture)’를 제시했다.

윤 사무차장은 “기술이전은 기술 자체나 기술을 넘겨주는 행위만의 문제가 아니다”며 “성공적인 기술이전을 위해서는 전체 생태계와 훈련된 사람, 적절한 문화가 함께 갖춰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연구개발부터 규제와 생산, 공급까지 가치사슬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성공적인 기술이전이 어렵다”며 “제품이 규제기관의 실사를 통과하고 같은 품질을 유지하려면 조직 전체에 품질문화가 자리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WHO PQ 일률 적용보다 목표 시장에 맞는 규제전략

현지 제조사와 기술 제공기업 관점에서는 목표 시장과 조달 구조에 맞는 규제·상업화 전략이 중요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김민정 유바이오로직스 선임은 “세계보건기구(WHO) PQ를 획득할 수 있다면 이상적이지만 모든 파트너가 반드시 같은 경로를 택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며 “파트너가 자국이나 허가를 확보한 목표 시장을 담당하고, 기존 제조사는 국제조달 시장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역할을 나누는 것도 현실적인 모델”이라고 말했다.

WHO 사전적격성평가(PQ)는 유니세프 등 국제기구 조달 시장 진입에서 중요한 요건이지만 국가 품목허가를 대신하지 않는다. 자국 시장은 해당 국가의 국가규제기관(NRA) 허가가 필요하고, 다른 국가에 공급하려면 해당 국가에서 요구하는 허가·등록 또는 적용 가능한 규제 경로를 충족해야 한다.

김 선임은 장기 재정 계획과 조직적 준비도도 핵심 조건으로 꼽았다. 그는 “백신 기술이전에서 상업생산까지는 수년이 걸릴 수 있고 예상하지 못한 지연도 발생한다”며 “초기 자금만큼 중요한 것이 사업을 끝까지 이어갈 장기 재정 계획이다. 몇몇 개인에게 의존하지 않고 조직 자체가 기술과 품질 역량을 갖추고 있는지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R&D부터 기술이전·생산 인프라까지 자금 연결

이훈상 라이트재단 전략기획이사(CSO)는 R&D부터 기술이전, 생산 인프라 투자까지 단계별 자금을 연결하는 구조를 제시했다.

이 CSO는 “차세대 백신의 연구개발만 지원해서는 실제 접근성 개선까지 연결하기 어렵다”며 “R&D와 함께 기술이전을 지원해 현지 제조 역량을 구축한다면 백신 자립과 접근성을 높일 수 있고, 팬데믹 상황에서는 지역 생산시설 자체가 중요한 자원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라이트재단은 아시아 지역 글로벌보건 펀딩기관들과 ‘Asian Funders Coalition’을 통한 공동 펀딩 체계를 추진하고 있다. R&D와 기술이전 단계에서는 복수의 펀딩기관이 초기 위험을 분담하고, 이후 ADB와 같은 개발금융기관이 생산시설 등 대규모 인프라 투자를 연결하는 방식이다.

이 CSO는 “여러 펀딩기관이 R&D와 기술이전 단계의 위험을 함께 부담하고, 이후 ADB와 같은 개발금융기관이 인프라 투자를 연결한다면 연구개발부터 실제 제조 역량 구축까지 이어지는 자금 체계를 만들 수 있다”고 강조했다.

중저소득국 현장 “같은 시간표 적용해선 안 돼”

중저소득국 제조 현장에서 발생하는 현실적인 제약도 논의됐다. 무하메드 샤하부딘 EDCL 공장 부총괄책임자는 “한국이나 미국에서 적용하는 것과 같은 시간표를 중저소득국 현장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렵다”며 “엔지니어링 인력과 공급망, 행정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1년으로 예상한 계획이 현장에서는 2~3년까지 길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 과정에서 단기간에 성과가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원을 중단하면 이미 시작한 프로젝트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며 장기적인 관점의 파트너십을 강조했다.
인력 양성 방식도 현장 중심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봤다.

샤하부딘 부총괄책임자는 “온라인에서 이론만 배우는 교육보다 실제 현장에서 장비를 다루고 생산공정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실습교육이 필요하다”며 “기술이전 초기부터 현지 정부와 규제당국이 참여해 국제 기준과 현지 규제 체계를 단계적으로 정합화하는 과정도 병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바닥 향한 경쟁’ 벗어나 백신의 보건안보 가치 반영해야

토론 후반부에서는 지역 생산시설의 지속가능성을 결정하는 핵심 변수로 수요 예측 가능성과 조달 구조가 꼽혔다.

김민정 선임은 경구용 콜레라 백신(OCV)을 사례로 들었다. 그는 “수요가 언제 얼마나 발생할지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제조사가 모든 재무적 위험을 부담하면서 생산시설과 숙련 인력을 계속 유지하기는 쉽지 않다”며 “장기조달약정이나 지역 공동구매처럼 일정 수준의 수요를 예측할 수 있는 구조가 뒷받침돼야 제조사도 장기 생산 계획을 세울 수 있다”고 말했다.

복수 제품이나 공정 전환에 대응할 수 있는 유연 생산시설도 대안으로 제시됐다. 특정 백신 수요가 줄더라도 다른 제품 생산으로 전환할 수 있어야 설비 유휴와 인력 이탈 위험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훈상 CSO는 가격 중심의 국제 조달 체계가 지역 제조 생태계의 지속가능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 CSO는 “가장 낮은 가격만을 추구하는 이른바 ‘바닥을 향한 경쟁(Race to the bottom)’과 규모의 경제 논리만으로는 이제 막 성장하는 지역 백신 제조 생태계를 유지하기 어렵다”며 “백신을 단순히 가격으로만 평가할 것이 아니라 감염병 위기에서 생산 기반과 공급망을 유지하는 보건 안보(Health Security)의 가치까지 함께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에두아르도 반존 디렉터도 기후변화 대응처럼 백신 생산과 공급에 공공정책과 금융의 역할을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존 디렉터는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각국 정부가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고 재생에너지 전환을 지원하듯 백신 역시 국제사회가 공동으로 지켜야 할 글로벌 공공재(Global Public Good)라는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며 “정부와 다자개발은행이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민간 제조사가 감수하는 위험을 분담할 수 있는 유인책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ADB와 라이트재단, SK바이오사이언스, GC녹십자, 유바이오로직스 관계자와 참가국 대표들이 ‘ADB–RIGHT–Korean Industry Pipeline Studio’에서 국가별 백신·바이오의약품 생산 프로젝트 연계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약업신문=권혁진 기자
‘ADB–RIGHT–Korean Industry Pipeline Studio’ 논의 모습.©약업신문=권혁진 기자
약업신문 공식 SNS 채널 구독
블로그 유튜브 텔레그램 링크드인 페이스북 카카오톡
전체댓글 0개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