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화학물질'로 불리는 과불화화합물(PFAS) 전면 규제가 뷰티 업계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됐다. 유럽은 단일 성분이 아닌 1만여종에 달하는 화합물 전체를 시장에서 퇴출하겠다고 나섰다. 글로벌 뷰티 규제 스탠다드를 주도하고 있는 유럽의 선언에 업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세부 규제 사항을 면밀히 알아보고 업계 현장의 의견을 반영하기 위한 'EU PFAS 규제 대응을 위한 산업계 설명회'가 산업통상부 국가기술표준원 주최, TBT종합지원센터 주관으로 21일 서울 강남구 스페이스쉐어 삼성에서 열렸다.
산업통상자원부 국가기술표준원 박용민 기술규제정책과장은 개회사에서 "고유가 등 경영 환경이 어려운 와중에도 유럽은 규제 절차를 어김없이 진행하고 있다"며 "정부도 사안의 중대성을 인지해 올해부터 300억원 규모의 대체 물질 R&D에 착수했으며, 업계 의견을 수렴해 공식 대응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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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수 방지하는 전방위적 '그룹 규제'
강연에 나선 한국생산기술연구원 국가청정생산지원센터 김성훈 팀장은 방대한 규제망이 몰고 올 파장에 대해 경고했다. 김 팀장은 "한동안 유럽의 움직임이 없어 규제를 연기하거나 포기한 게 아닌가 하는 시각도 있었지만, 지난 3월 사회경제성분석위원회(SEAC) 의견서 초안이 공개되며 급물살을 탔다"고 운을 뗐다
유럽이 유례없이 강력한 칼을 빼든 배경엔 기존 '선별적 규제'의 뼈아픈 실패가 있다. 특정 유해 화학물질 하나를 금지하면, 기업들이 탄소 구조만 살짝 바꾼 유사 물질로 교체해버리는 이른바 '두더지 잡기'식 회피가 만연했기 때문이다. EU는 이런 '꼼수'를 원천 차단하기 위해 물과 기름에 반응하지 않는 약 6000~1만여종의 PFAS 전체를 하나의 그룹으로 묶어버리는 초강수를 뒀다.
허용 기준은 개별 PFAS 25ppb 이하, 합계 250ppb 이하, 고분자를 포함한 총 PFAS 50ppm 이하. 기준을 넘길 경우엔 제품 회수 및 판매 금지와 같은 무거운 조치가 내려진다. 회원국 법률에 따라 스페인은 최대 120만 유로의 벌금을, 프랑스와 독일은 최대 2년의 징역형을 부과한다. 일차적 법적 책임은 현지 수입자에게 가해지지만, 고객사가 처벌받게 되면 국내 수출 화장품 기업 역시 대금 미결제, 손해배상 청구, 거래처 상실 등 치명적인 2차 피해를 피할 수 없다.
화장품 ‘예외 없음’
이날 행사는 PFAS가 사용되는 전 산업의 관계자를 대상으로 하는 세미나였음에도 유독 뷰티 관계자들의 참여가 많았다. Q&A 시간은 물론 쉬는 시간에도 강연자에게 화장품 관련 규제에 대해 질문 하는 참석자들이 많았다.
화장품은 규제를 가장 빨리, 전면적으로 맞게 된 산업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사회경제성 분석 결과에 따라 '차등 규제'가 실시되는데, 화장품 산업은 하나의 예외 조항도 부여받지 못했다. 반면, 의약품 활성 물질의 경우엔 무기한 유예가 적용되며, 반도체 제조 공정은 ‘기술적 대안이 전무하다’는 현실이 인정돼 12년의 유예를 받았다. 냉매, 디스플레이 코팅 등은 상용화 시기를 고려해 5년의 한시적 유예가 적용된다.
SEAC는 화장품 내 PFAS 전면 금지(RO1) 시나리오를 강행하더라도, 사회 전체가 감당해야 할 비용보다 인체와 환경이 얻는 편익이 월등히 크다고 판단한 것이다. 김 팀장은 "화장품에 혼입되는 PFAS는 다른 성분으로 당장 대체가 가능하거나, 설령 대체재가 없더라도 화장품에서 해당 기능을 아예 배제해도 무방하다는 게 SEAC의 결론"이라며 "규제 공식 발효 후, 모든 산업군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18개월의 전환기간(Transition Period)이 지나면 뷰티 분야엔 예외 없는 전면 금지가 즉각 적용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뷰티 기업이 가장 주의해야 할 부분은 '비의도적 혼입'이다. 제조 공정에서 의도적으로 PFAS를 처방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예외는 없다. 김 팀장은 "현재 유럽은 의도적 처방과 비의도적 혼입을 전혀 구분하지 않으며, 최종적으로 시장에 출시되는 제품에서 기준치 이상이 검출되면 무조건 규제 대상"이라고 설명했다. 화장품 제조 설비(테플론 코팅 용기 등)나 플라스틱 포장재에서 PFAS 성분이 미량 녹아들더라도 꼼짝 없이 규제 철퇴를 맞을 수 있다는 의미다.
정밀한 '용도 매칭'이 관건
국내 뷰티 업계가 규제 파급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해볼 수 있는 부분은 오는 5월 25일 마감을 앞둔 'SEAC 공개회람(의견수렴)'이다. PFAS 제한에 대해 EU 역외 이해관계자가 직접적으로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마지막 공식 절차로, SEAC의 사회경제성 평가 및 결론 초안에 대해 이해관계자 의견을 수집해 보완하는 과정이다.
김 팀장은 "참여 방법이 기존과 달라진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과거처럼 기업이 자체적으로 작성한 PDF 보고서를 첨부하는 방식이 아니라, ECHA 홈페이지 내 EU Survey 시스템에 접속해 '설문 방식'의 의견수렴에 참여해야 한다. 시스템 내 정형화된 문항에 대한 텍스트 답변으로만 논리를 증명할 수 있다.
설문 참여의 성패는 정밀한 '용도 확인'에 달렸다. 유럽화학물질청(ECHA)이 제시한 23개 상위 분야(Sector)에서 출발해 200개 이상의 세부 'SEAC 평가 등급'으로 파고드는 하향식 매칭을 거쳐야 한다. 명칭만 보고 직관적으로 화장품 분야를 선택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동일한 기능이라도 세부 용도에 따라 다른 산업 분야로 배정되는 경우가 잦아, 반드시 각 후보군의 '제외 목록(Exclusion List)'을 이중 검증해야 한다.
김 팀장은 파급 효과를 묻는 문항 작성 시 범하기 쉬운 치명적 오류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그는 "파급효과는 철저히 유럽 역내에서 발생하는 고용 및 매출 손실을 묻는 것"이라며 "수출 중심인 한국 뷰티 업계가 무리하게 유럽 내 피해 규모를 적을 필요는 없으며, 대체물질 부재로 인한 글로벌 공급망 교란 등 거시적 타격을 논리적으로 소구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조언했다.
대체물질과 처방 유출 방지책 필요
대체물질 인정을 받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발림성을 높이거나 방수(워터프루프) 기능을 내는 대체 성분을 찾았더라도 '대체물질 가용성 판단'을 통과하기 위해선 △기술적 타당성 △경제적 타당성 △안전성 △공급 충분성 등 4대 요건을 모두 충족해야 한다.
한편, 기밀정보(CBI) 유출 방지에도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이번 의견수렴 설문은 모든 문항이 100% 외부 공개를 전제로 한다. 기밀 보호 항목 체크를 누락할 경우 뷰티 기업의 핵심 처방(레시피)과 공정 데이터가 경쟁사에 영구 공개될 위험이 있다. 사내 R&D 및 QC 부서와의 소통을 통해 실제 경쟁력 훼손이 우려되는 영업비밀을 선별하고, 블라인드 처리하는 핀셋 전략이 필수적이다.
눈앞의 불안감에 무작정 고가의 전수 시험분석에 매달리는 행위는 피해야 한다. 아직 ECHA의 공식적인 국제 표준 시험 방법이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 팀장은 "비용과 시간이 막대하게 드는 무조건적인 정밀 분석보다는, 저렴한 비용으로 시료 내 총 불소(TF) 존재 여부를 신속하게 스크리닝하는 단계별 분석 전략이 훨씬 효율적"이라며 "현재 가장 시급한 것은 화장품 원료사, OEM·ODM 제조사, 브랜드사가 사내 화학물질 인벤토리 정보를 투명하게 공유하며 B2B 공급망 차원에서 공동으로 의견서를 제출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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