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가 지난달 발표한 건강보험 보장성 축소 정책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그 불똥이 보건복지부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에 튀는 모양새다. 우리나라 건강보험 정책 대부분을 심의‧결정하는 건정심의 과도한 영향력과 편향된 의제설정 등 운영방침이 건보 정책을 퇴보시키는 원인으로 지목되면서다. 전문가들은 가입자 권한이 강화된 새로운 건정심으로의 개편을 요구하면서 건보 정책을 전 정부에 대한 정치보복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일침을 놓고 있다.
3일 국회의원회관 제1세미나실에서 열린 ‘윤석열 정부의 긴축기조에 따른 건강보험 보장성 정책 후퇴 문제점과 대응 방안 모색’ 토론회에는 김윤 서울대 의대 의료관리학교실 교수와 김흥수 공공운수노조 사회공공성위원장, 유정엽 한국노총 정책2본부장, 손호준 복지부 보험정책과장, 제갈현숙 한신대 강사 등이 참석해 현 정부의 건강보험정책에 대한 문제점을 짚어보고 개선 방향을 제시했다.
“의료남용, 이명박‧박근혜 정부때도 있었다”
김윤 교수는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달 13일 국무회의에서 건강보험의 정상화가 시급하다며 ‘건강보험 재정위기론’을 주장했고, 언론은 이를 문재인 케어 폐기 선언으로 해석했다”며 “하지만 우리나라 건강보험 누적 적립금은 재정위기가 아니다. 건보 누적적립금은 문 케어 시작 당시 20조1000억원이었고, 문케어가 끝난 지난해에는 20조2000억원이었다. 심지어 복지부는 지난해 11월 발표하기를, 2021년 말 기준 건강보험 누적 적립금이 20조원이 넘게 있어서 건강보험 재정은 안정적으로 관리되고 있다고 했다”고 꼬집었다.
김 교수는 “초음파와 뇌 MRI 검사 중 남용 의심 진료비 규모는 2000억원으로 전체의 약 9%에 불과하다. 정부의 말대로라면 이를 줄여서 재정위기를 막겠다는 것인데, 대한민국 건강보험 진료비는 100조원 규모로 이의 2%에 불과한 2000억원을 줄여 위기를 막을 수 있다는 논리는 말이 안 된다.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 때도 의료 남용은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오히려 건강보험 재정 누수 원인은 병상 공급 과잉, 만성질환 관리, 실손보험에 있다고 분석했다. 병상공급이 늘면서 입원할 필요가 없는 환자까지 입원하게 됐으며, 환자 거주지와 단골의사 소재지의 소진료권이 일치할 때 고혈압 환자의 의료비용 총액이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 또 민간의료보험에 가입했을 때 건강보험 진료비 남용은 4조6000억원에서 10조1000억원으로 확인됐다고 전했다.
오히려 그는 우리나라 건강보험 정책 대부분을 결정하는 복지부 건정심이 과도한 영향력과 편향된 의제설정, 회의록과 안건 비공개 등 불투명한 운영을 지속함으로써 구성과 운영에서 문제가 지적되고 있는 점을 주목했다.
그는 “가입자 권한이 강화된 건정심 개편이 요구되고 있다”며 “건정심 산하에 사무국을 두고 보건의료연구원 신의료기술평가위원회와 심평원의 급여평가위원회를 통합 운영해 행위에 대한 승인과 급여결정을 하게 해야 한다”며 “이를 통해 과도한 급여 책정을 방지할 수 있으며, 위원 구성은 공급자 8인, 보험자 및 가입자 8인, 공익 4인, 투표권 없는 시민‧소비자‧환자 대표 4인으로 구성을 재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건정심 권한 과다 집중…가입자 참여 확대해야”
이어 토론자로 나선 김흥수 공공운수노조 사회공공성위원장은 “낭비의료의 원인은 재정누수요인 이외에 민간 중심의 공급구조와 비용 유발적인 진료 보상체계인 행위별 수가제가 가장 핵심적 요인”이라며 “이는 ‘문케어’가 목표만큼의 보장성 확대를 달성하지 못한 원인이기도 하다”고 지적했다.
김 위원장은 “무엇보다 낭비적 비용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건강보험 주요 정책결정 구조나 과정이 중요하다. 특히 건강보험 보험료 부담과 의료서비스 이용 주체인 가입자의 정책 결정 참열르 강화해 의사결정 수용성과 책임성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현재 건강보험 거버넌스는 건정심의 과도한 권한 집중, 재정운영위원회의 가입자 대표기구로서의 역할 축소, 전문평가위원회 및 급여평가위원회 등에 가입자 참여 배제, 건강보험 급여 결정 수행 주체 이원화 등 문제를 가지고 있다”며 “건정심의 보험료율 결정 및 상대가치점수‧요양급여비용 상한 심의 기능을 재정운영위원회로 이관해 기능을 확대하고, 건정심은 의견 상충 시 조정 기능을 수행하는 사회적 합의기구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정엽 한국노총 정책2본부장 역시 “현재 건정심은 공익위원 중 관계부처 당연직 위원 외 공익위원을 사실상 복지부가 임명하는 만큼 이를 개편할 필요가 있다”며 “공익위원 선임절차를 개선하고 독립적 사무국을 설치하는 등 국민 중심의 거버넌스로 개편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전문평가위원회, 약제급여평가위원회, 급여평가위원회 등 심평원의 각 분과위원회는 이해상충 관계가 없는 자로 구성하고, 회의참석자 실명과 회의록을 공개하는 등 투명성을 제고해야 한다”며 “건강보험료율 결정 권한을 현행 건정심에서 가입자와 공익으로 구성된 건강보험공단 재정운영위원회로 이관할 필요도 있다”고 전했다.
“국민건강보험 재정위기론, 의도된 왜곡?”
제갈현숙 한신대 강사는 이번 건보 보장성 축소 논란에 대해 “국민건강보험에 대한 제도적 몰이해에서 비롯됐다”며 “현 정부와 언론에서 무차별적으로 사용하는 ‘적립금’ 규모와 50년 후 장기 추계를 근거로 재정 상태에 대해 적자라고 몰아세우는 것은 제도에 대한 몰이해거나 의도적인 왜곡”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준비금’에 대해 적립금으로 설정해서 ‘재정 고갈’이 앞당겨진다는 식의 설정은 제도가 가진 사실이나 특징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고 일갈했다.
그는 “한국의 2019년 GDP대비 공공사회복지지출 비율은 12.2%로 OECD 평균인 20.2%보다 낮은 수준”이라며 “GDP 비중 경상의료비는 OECD 평균이 9.7%인데 반해 한국은 8.4%이며, 경상의료비 비중에서 정부‧의무가입제도가 차지하는 비중은 한국이 62.6%로 OECD 평균인 76.3%보다 상당히 낮다”고 꼬집었다.
그는 국민건강보험 보험기구인 국민건강보험공단의 독립성 확보가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경제구조적 위험으로부터 가입자의 이해를 최대한 대변해야 할 기구라는 이유 때문이다.
그는 “보험자는 가입자를 대표해야 하고 정부로부터 최대한 독립적인 관계가 설정돼야 한다”며 “건강보험제도가 사회보험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할 수 있도록 제도전반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주체가 돼야 한다. 가입자와 의료공급자 사이를 연결하고, 가입자의 이해를 최대한 대변하면서 공급자와의 협력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