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팬데믹은 감염병의 위험에 대한 큰 교훈을 남겼다. 코로나19가 등장하면서 한켠으로 밀려났지만 공중 보건을 오랜 동안 위협해 온 감염병이 있다. 바로 HIV다. 발견 초기만 해도 치료 방법이 없어 ‘죽음의 병’으로 불렸다. 하지만 이제는 하루 한 알의 치료제로 관리할 수 있고 예방까지 가능하다. 그럼에도 질환에 대한 낙인과 차별은 여전하다. 물론 검사를 회피하고 치료하지 않으면 죽음의 그림자는 여전하고, 감염의 위험도 크다. 약업신문은 감염자에겐 올바른 관리법을 안내하고, 일반인에겐 잘못된 편견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HIV 특집을 6회에 걸쳐 게재한다. <편집자 주>
우리나라 HIV 예방관리가 새 전기를 앞두고 있는 가운데, 향후 5년 간의 HIV 관리 정책 방향성을 담은 ‘제2차 후천성면역결핍증 예방관리대책(2024~2028)’이 내년 초 발표될 예정이다.
보건복지부와 질병관리본부(현 질병관리청)는 2019년 11월 제1차 후천성면역결핍증 예방관리대책(2019~2023)을 수립했다. 제1차 대책은 ‘신규 감염 제로, 사망 제로, 차별 제로’라는 비전 하에 2023년까지 감염인지 90%, 치료율 90%, 치료효과 90% 달성 등을 1단계 목표로 설정했다. 이후 2030년까지 감염인지 95%, 치료율 95%, 치료효과 95% 달성 등을 2단계 목표로 세웠다.
두 기관은 비전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조기발견 및 조기진단 체계 강화 △환자 및 접촉자 관리 강화 △연구개발 및 예방치료 강화 △대국민·대상군별 교육 홍보 강화 등 4가지 핵심 추진 전략을 세웠다.
제1차 대책이 발표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2020년 초부터 코로나19 팬데믹이 본격화되면서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HIV 진단 기관의 마비로 진단이 원활하게 진행되지 못했다. HIV에 감염된 사람이 자신의 감염 사실을 인지하는 비율인 감염 인지율은 진단율을 높이는 것이 핵심이지만 지난 3년간은 팬데믹의 영향으로 진단율을 높이는 데 제한이 많았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 사회적 거리 두기가 생활화되면서 신규 HIV 감염 건수는 줄었다. 2019년 당시 신규 HIV 감염인 수는 1223명이었으나 팬데믹에 들어선 후 2021년에는 975명까지 줄었다. 2022년 신규 감염인 수는 1066명으로 보고됐다. 신규 감염 건수가 줄어들거나 유지되는 추세는 실질적 전파 차단 영향도 있겠으나 진단을 받지 못한 HIV 감염인이 늘었을 것이란 예측이 우세하다.
실제로 2020년 국내 의료 청구데이터와 의료시설 방문 건수 등을 토대로 진행된 횡단면 연구(cross-sectional study)에 따르면, 국내에서 진단되지 않은 감염인 비율은 37.5% 수준으로 추정됐다. 이는 국내 HIV 진단율이 62.5%로 추정된다는 의미로, 제1차 대책 1단계 목표의 첫 관문인 감염인지 90%에는 한참 못 미치는 수치다.
HIV 예방에서도 한계를 보이고 있다. HIV는 운동, 식사, 목욕 등 일상생활로는 전파되지 않으며, 과학적으로 확인된 방법만으로도 충분히 예방할 수 있다. 대표적인 방법이 콘돔 사용과 노출 전 예방요법(Pre-exposure prophylaxis for HIV, PrEP)이다.
PrEP은 현재 국내에선 처방 가능한 약제가 허가돼 있을 뿐 아니라 건강 보험 급여까지 적용되고 있다. 다만 그 대상이 한정적이고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점이 문제다.
U=U(Undetectable=Untransmittable) 개념에 따르면, 감염인이 적절한 항레트로바이러스 치료(Anti-Retroviral Therapy, ART)를 통해 체내 HIV가 검출이 불가한 수준으로 떨어져 유지된다면 전염력이 없다. 따라서 감염인이 치료받고 있다면 파트너는 고위험군이 아니다. 하지만 PrEP 급여 기준이 ‘감염인의 성관계 파트너’로 한정돼 있다. 정작 PrEP이 필요한 대상은 파트너의 HIV 감염 여부를 모르는 MSM(Men who have sex with men)이다. 이들은 적극적인 HIV 예방을 하고 싶어도 급여 적용 대상에서 제외돼 있다.
실제로 PrEP을 처방받고 있는 고위험군은 거의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우선 PrEP이라는 HIV 예방 요법이 홍보가 잘되지 않아 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고, 급여 대상자가 한정적이며, 약을 구하기도 쉽지 않다. 지난 8월 말, 기자가 직접 서울 동대문구에 위치한 대학병원 근처 약국 5곳을 방문해본 결과, PrEP 약제를 구할 수 있는 약국은 한곳도 없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빅데이터에 따르면 2022년 전국 약국 수는 2만 4302곳이다. 이 중 처방전을 갖고 방문한 당일 PrEP을 바로 조제받을 수 있는 약국은 50여 곳도 안 되는 것으로 파악된다. 인터넷을 통해 PrEP 조제 약국에 대해 검색해 보거나 HIV 고위험군의 정보교류커뮤니티에서도 PrEP 조제 가능 약국에 대한 정보는 전무한 상황이다.
비용도 약국에 따라 편차가 크다. 급여가 적용된 30일치를 조제받을 경우 상급종합병원 원내 약국에선 23만 6700원, 종합병원 원내 약국에선 19만 7250원이다. 병의원에서 처방받은 후 외부에 있는 약국에서 조제받으면 11만 8350원으로 구입 경로에 따라 가격 편차가 크다.
◇제2차 예방관리대책 전망 및 제언
제2차 후천성면역결핍증 예방관리대책 수립을 앞두고 전문가들의 제언이 나오고 있다.
대한에이즈학회 주최로 지난 11월 17일 전북 전주 라한 호텔 전주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최준용 세브란스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2024년부터 2028년까지 HIV 예방관리를 강화하고 종국에 HIV 및 에이즈를 종식하기 위해선 제2차 대책에 3가지 과제가 적극 반영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3가지 과제는 △진단율 향상 △예방 활성화 △감염인 대상 진단·예방 교육 및 비감염인 대상 질환 인식 개선 등이다.
최 교수는 “우선 진단율을 높이기 위한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엔데믹 이후에도 신규 HIV 감염인 수가 대폭 증가하는 추세는 아니다. 신규 감염이 줄었는지, 본인의 감염 사실을 인지하지 못해 진단받지 못한 HIV 감염인이 늘었는지는 미지수이기 때문에 진단율을 높이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라는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우선 HIV가 조기 검진 될 수 있도록 진단 기관을 확대해야 한다. 현재 보건소에선 검사 결과가 10-20분 내에 바로 나오는 신속 검사를 받을 수 있다. 검사비가 무료인 데다 익명이어서 HIV 감염에 취약한 고위험군이 심적 부담 없이 주기적으로 검사받기가 용이하다. 전국적으로 HIV 신속 검사를 확대해야 한다는 제언이다.
이외에도 국내 방문 거주 중인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진단율도 높여야 한다. 공항에 검사소를 마련하거나 주요 관광지나 외국인 거주지를 거점으로 외국인 대상 검사소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본인 노출이 부담스러운 고위험군에게 자가검진키트를 적극적으로 보급하는 것도 진단율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최 교수는 진단율 향상 외에 중요한 과제로 ‘예방 활성화’를 꼽았다. 우선 PrEP이라는 HIV 예방 요법이 있다는 것을 고위험군을 대상으로 적극 알려야 한다는 것이다. 하루 알약 한 알을 복용함으로써 HIV 감염을 예방할 수 있다는 점을 HIV 감염 고위험군이 소속된 기관이나 다수 참여하는 행사를 통해 전폭적으로 알리는 노력이 필요하다.
최 교수는 급여 대상 확대의 필요성도 강조했다. HIV 감염인의 파트너는 실질적인 고위험군이 아니기 때문에 HIV 감염인의 파트너 외 실질적인 고위험군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것. 이에 더해 재정 비용 부담을 줄이기 위한 재원 확보 방안을 모색할 것을 제안했다. 공공기관의 예산을 추가 편성하거나 민간기업으로부터 기부받는 등 건강보험 재정 외 가용할 수 있는 재원으로 HIV 예방교육을 펼쳐 PrEP 실효성 등을 널리 알리자는 것이다.
그는 “검사율과 PrEP 실효성을 동시에 높이기 위해 주기적으로 HIV 검사를 받고 해당 검사 결과 문자를 증빙으로 제출하면 PrEP을 무상으로 공급하는 등의 방안도 고려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약제를 처방하고 전달하는 과정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PrEP 약제의 경우 비대면 처방과 약제 전달 시스템을 마련한다면 신상 노출을 최소화할 수 있어 HIV 고위험군의 부담을 실질적으로 줄일 수 있다. 또한, 조제받을 수 있는 약국을 찾아 전전하지 않고 예방 의지를 가진 시점에 최대한 빨리 PrEP을 시작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마지막으로 최 교수는 “감염인을 대상으로 한 진단·예방 교육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HIV 감염 질환이 충분히 관리 가능한 질환임을 알려 진단에 대한 부담을 낮추고 주기적으로 검사받아 건강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질환, 검사 방법과 주기, 비용 등에 대한 교육 홍보가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특히 예방 면에선 구체적인 예방 방법과 PrEP 처방 방법, 비용, 콘돔 사용 방법 등에 대해 주기적으로 교육할 수 있는 창구를 마련해야 한다.
최 교수는 보건소나 기타 검사 기관에서 교육 자료를 전달할 수 있고, 검사자를 대상으로 온라인 교육 영상 링크를 공유하는 방법 등을 고민해봐야 한다고도 언급했다. 검사기관 외에도 비뇨의학과나 산부인과, 이비인후과 및 일반 내과 의원을 통해 HIV 검사 및 예방 정보를 널리 전달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는 설명이다.
비감염인을 대상으로 한 인식 개선도 매우 시급한 과제로 꼽혔다.
최 교수는 “질환에 대한 편견과 오해가 고위험군의 진단과 감염인의 치료를 저해하고 그들을 음지로 내몰고 있다”면서 “전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인식 개선 캠페인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캠페인을 통해 HIV는 더 이상 죽는 병이 아니며 일상생활로 전파되지 않는다는 점을 알려야 한다. 더불어 조기 진단됐을 때 충분히 관리가 가능할 뿐 아니라 적극 치료했을 때 타인에 대한 전파와 지역사회 내 확산을 막을 수 있다.
최 교수는 “인식 개선을 통해 사회가 HIV 검사를 더욱 권하고, 질환에 대한 논의와 예방관리 실천을 양지화해 HIV 예방관리 정책에 대한 우호적인 의견을 확산하는 밑거름이 될 수 있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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