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기부전과 폐동맥 고혈압, 주간(晝間) 기면발작과 만성통증, 우울증과 요실금, 말라리아와 루푸스...
얼핏 공통분모를 찾기 어려운 질병들이지만, 놀랍게도 하나의 약물로 동시에 치료가 가능한 "남남" 적응증들의 대표적 사례를 나열한 것이다.
다시 말해 전혀 다른 질병이더라도 최소한 생화학적 메커니즘의 일부를 공유하는 탓에 한 약물이 전혀 예기치 못했던 또 다른 효과를 발휘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효과"와 "부작용"의 경계선을 긋기가 애매한 대목인 셈이다.
미국 플로리다州에 소재한 생명공학기업 센토코社(Centocor)의 마이클 엘리오트 부회장은 "생명과학의 원리와 질병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질수록 별개의 질병들이 세포 또는 생화학적 활성 단계에서는 공통분모가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
실제로 정작 개발사측도 사전에 예상치 못했던 효과가 나타나는 의약품들의 사례는 한 둘이 아니라는 지적이다.
센토코社가 대장질환의 일종인 크론병 치료제로 개발한 '레미케이드'(인플릭시맙)의 사례를 살펴보자.
FDA는 지난 1998년 '레미케이드'를 크론병 치료용도로 허가한 데 이어 이듬해 류머티스 관절염 적응증의 추가를 승인했다. 지난해 12월에는 적응증 범위를 강직성 척추염에까지 확대하는 결정을 내렸다.
종양괴사인자(TNF)와 결합하는 기전으로 작용하는 항 TNF제제인 '레미케이드'가 염증이 형성되는 기전까지 저해하는 작용을 지녔기 때문에 이 같은 일이 가능했던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원래 협심증 치료제로 개발이 착수되었던 삼천포로 빠져(?) 발기부전 치료제로 발매되어 나온 '비아그라'(실데나필)만 하더라도 그렇다. 폐동맥 고혈압에 나타내는 효과에 뒤늦게 스포트라이트가 미치자 화이자社가 지난해 12월 '리바티오'(Revatio)라는 이름의 항고혈압제로 이름과 포장만 바꿔 FDA와 유럽 의약품감독국(EMA) 등에 허가신청서를 제출한 상태이기 때문.
이에 앞서 머크&컴퍼니社 관계자들의 귀에는 지난 1990년대 초 양성 전립선 비대증 치료제로 허가를 취득했던 '프로스카'(피나스테라이드)를 복용한 남성들에게서 발모효과가 눈에 띄었다는 얘기가 들어왔다.
머크의 자넷 스키드모어 대변인은 "처음엔 모두들 귀를 의심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프로스카'가 디히드로테스토스테론 수치를 낮춰 탈모증 개선에도 효과적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일이 소요되지 않았다.
현재 머크는 피나스테라이드제제를 '프로페시아'라는 이름의 탈모치료제로도 발매 중이다.
유사한 사례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일라이 릴리社의 항우울제 '푸로작'(플루옥세틴)이 색깔만 달리 단장한 채 '사라펨'이라는 이름의 월경前 불쾌감 증후군 치료제로도 공급되고 있고, 글락소스미스클라인社의 금연약 '자이반'(부프로피온)은 '웰부트린'이라는 이름의 항우울제로도 발매 중이다.
일라이 릴리社의 '심발타'(둘록세틴)는 지난해 우울증 용도로 허가받은 항우울제이다.
그런데 EU 집행위원회는 뇌내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과 노르에피네프린의 재흡수를 저해하는 기전을 지닌 이 약물을 지난해 8월 복압성 요실금 치료제로도 허가했다. 릴리의 팀 가넷 박사는 "이들 듀오(duo) 신경전달물질의 양이 증가하면 요도괄약근 조절능력을 관장하는 신경계도 활성화되기 때문일 것"이라고 사유를 설명했다.
'심발타'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지난해 9월 FDA로부터 당뇨병성 말초 신경병인성 통증 적용증까지 추가로 승인받았다. 아직 정확한 기전은 베일을 벗지 않았지만, 신경전달물질 듀오가 통증을 관장하는 신경계의 작용을 저해하고, 통증저해 뉴런의 활성을 제고시키기 때문에 이 같은 작용이 가능한 것으로 사료되고 있다.
덕분에 '심발타'는 시장에서 상당한 경쟁력을 확보케 된 것으로 주목받을 수 있게 됐다.
미네소타州 미네아폴리스에 소재한 오판 메디컬社(Orphan)는 지난 2002년 탈력발작(脫力發作) 치료제로 '자이렘'(옥시베이트)를 발매할 수 있도록 FDA로부터 허가를 취득했다. 탈력발작은 웃음이나 분노, 놀라움 등의 감정이 과도한 주간수면증과 동반되어 나타나는 증상.
그런데 임상시험 과정에서 '자이렘'을 복용했던 일부 환자들에게서 통증완화 효과가 눈에 띄었다. 이에 오판측은 근골격계에 통증을 수반하는 류머티스성 섬유조직염 치료제로도 적응증 확대를 허가받기 위해 연구를 진행했고, 회사이름과 달리(?) 오판측의 판단은 옳았다.
이를 두고 오판 메디컬社의 메디컬 디렉터 윌리암 하우튼 박사는 "얼떨결에 이루어진 뜻밖의 발견이었다"고 털어놓았다.
릴리社에서 중추신경계 약물개발을 총괄하고 있는데이비드 마이클 미첼슨 박사는 "한 세대 전에는 상상치 못했던 새로운 지평이 활짝 문을 열어제쳤다"고 말했다.
문득 이쯤해서 떠오르는 말이 하나 있다.
꿩먹고 알먹고, 업어치고 메치고, 님보고 뽕도 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