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 블록형 거점도매의 끝은 유통 재편?…업계 "생존권 위협"
"물류 효율화" vs "유통 통제"…유통업계·약사회 반발
공정위 제보·국회 릴레이 시위까지…이지메디컴 역할도 쟁점 부상
전하연 기자 hayeon@yakup.com 뉴스 뷰 페이지 검색 버튼
입력 2026-05-20 06:00   수정 2026.05.20 06:01
 유통업계는 블록형 거점도매 정책을 ‘유통 통제’로 규정하고 있으며, 대웅제약은 ‘공급망 효율화’라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약업신문=전하연 기자, AI 생성 이미지

오래된 유통망은 비효율일까, 아니면 시장을 떠받쳐온 안전망일까.

대웅제약의 블록형 거점도매 정책을 둘러싼 갈등은 단순한 거래 방식 논쟁을 넘어 국내 의약품 유통 구조를 둘러싼 충돌로 번지고 있다.

대웅제약은 물류 효율화와 공급망 투명성 강화를 위한 구조 개편이라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지만, 의약품 유통업계는 이를 특정 유통 구조 중심의 시장 재편 시도로 받아들이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특정 거점도매 중심으로 공급 구조가 재편될 경우 중소 유통사의 거래 기반이 흔들리고, 장기적으로는 의약품 공급 안정성과 약국 접근성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에 최근에는 공정거래위원회 제보와 국회 릴레이 시위, 전국 단위 규탄대회까지 이어지며 갈등 수위도 한층 높아지는 모습이다.

갈등의 시작은 지난해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웅제약은 2025년 12월 블록형 거점도매 선정 입찰을 공고하며 기존 유통 구조 개편에 나섰다. 이후 올해 2월 5개 거점도매 선정과 3월 운영 개시 방침을 통보하면서 유통업계 반발이 본격화됐다.

한국의약품유통협회는 즉각 긴급회의를 열고 정책 재검토를 요청했다. 업계는 블록형 거점도매 정책이 특정 유통 경로 중심의 공급 구조를 고착화하고, 기존 지역 유통망과 중소 유통사의 역할을 위축시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특히 유통업계는 이번 정책을 단순 물류 효율화 차원이 아닌 ‘유통 통제’ 성격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특정 거점도매 중심 구조가 확대될 경우 결국 공급 물량과 거래 구조가 일부 업체 중심으로 재편되고, 장기적으로는 유통 생태계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주장이다.

업계 내부에서는 “수십 년간 제약사와 함께 시장을 키워온 유통사들의 사다리를 걷어차는 구조”라는 반응까지 나온다. 지역 병원과 약국 현장을 누비며 의약품 공급망을 떠받쳐왔는데, 이제 와 특정 구조 중심으로 거래 체계를 재편하려 한다는 위기의식과 배신감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실제 최근 유통업계 집회 현장에서는 ‘생존권’, ‘유통주권’, ‘유통 통제’, ‘갑의 횡포’, ‘상생 파괴’ 등의 표현이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단순 거래 구조 개편을 넘어 업계 존립 기반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위기감이 반영된 표현들이다.

대웅제약이 올해 2월 5개 거점도매 선정 및 3월 운영 개시 방침을 통보하자 유통업계의 반발은 장외 투쟁으로도 이어졌다. 한국의약품유통협회는 지난 3월 ‘대웅제약 유통갑질 철회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성명서 발표와 탄원서 제출, 회원사 참여 확대 등 대응 체계를 구축했다. 4월부터는 대웅제약 본사와 전국 지점 앞 1인 시위를 진행했고, 4월 21일에는 대웅제약 본사 앞에서 1차 규탄대회를 열었다.

이달 들어서는 국회 앞 릴레이 1인 시위와 공정거래위원회 제보로 대응 수위를 한층 높였다. 유통업계는 지난 13일 불공정 거래 행위 의혹과 관련해 공정위에 공식 제보를 진행했다고 밝혔다.

갈등의 전선은 최근 이지메디컴으로까지 확대됐다. 한국의약품유통협회와 비상대책위원회는 19일 서울 서초구 이지메디컴 본사 앞에서 제2차 규탄대회를 열고 블록형 거점도매 정책 철회를 촉구했다. 당초 예상 인원을 크게 웃도는 100여명의 유통업계 관계자가 집결하면서 현장 분위기도 한층 격앙됐다.

참석자들은 빨간 머리띠와 피켓을 들고 “대웅제약 윤재승 오너는 유통갑질 중단하라”, “거점도매 철회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현장에서는 풍물패 공연과 침묵시위, 현수막 찢기 퍼포먼스도 이어졌다.

유통업계가 집회 장소를 대웅제약 본사가 아닌 이지메디컴 앞으로 정한 것은 이번 갈등이 단순 제약사 정책 문제가 아니라 GPO(구매대행업체) 구조 논쟁으로까지 번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업계는 이지메디컴을 대웅제약 오너 일가와 연결된 구조로 인식하며, 블록형 거점도매 정책이 결국 구매대행업체의 영향력을 강화하고 중소 유통사를 배제하는 방향으로 작동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박호영 한국의약품유통협회장은 최근 집회에서 “우리는 단지 대웅제약이라는 한 기업의 횡포를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한민국 의약품 유통 생태계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고 말했다.

이어 “거점도매 시스템은 효율이라는 이름 아래 자행되는 명백한 차별이자 유통 통제”라며 “특정 업체에만 특혜를 주고 수십 년간 의약품 공급의 모세혈관 역할을 해 온 중소 유통사들을 고사시키려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약사회도 이번 사안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약국 입장에서는 의약품 공급 안정성과 선택권이 중요한 문제인 만큼 특정 공급 구조 집중이 약국 현장과 의약품 접근성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실제 대한약사회는 입장문을 내고 유통업계에 힘을 실어주며 공조를 이어가고 있다.

대한약사회는 공식 입장문을 통해 블록형 거점도매 시스템 중단을 촉구하며, 도도매 경유 의약품 반품 제한 가능성과 플랫폼 가입·선결제 요구 등에 대해 우려를 제기했다. 약사회는 약국이 사전 예측이 어려운 처방 환경 속에서 재고 부담까지 떠안을 수 있다고 보고 있으며, 배송 차질이 반복될 경우 환자 치료 연속성 차원에서 대체조제 검토 가능성도 언급했다.

반면 대웅제약은 기존 유통 구조의 비효율을 개선하고 공급망 투명성과 배송 안정성을 높이기 위한 정책이라는 입장을 밝혀왔다. 품절·배송 지연 문제를 줄이고, 수요 예측과 재고 관리, 운송관리시스템(TMS) 등을 통해 약국 편익을 높이겠다는 설명이다.

결국 이번 갈등의 핵심은 블록형 거점도매 정책이 공급망 효율화인지, 아니면 특정 구조 중심의 유통 질서 재편인지에 대한 시각 차이로 모아진다.

업계 관계자는 “의약품 유통은 단순 물류가 아니라 병원과 약국, 환자에게 안정적으로 약이 전달되도록 하는 공공적 기능을 갖고 있다”며 “특정 구조에 물량이 집중되면 가격 왜곡과 공급망 경직으로 이어질 수 있고, 그 피해는 결국 의료 현장과 환자들에게 돌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유통업계는 현재 공정위 제보와 국회 릴레이 시위, 전국 단위 규탄대회 등을 이어가며 대응 수위를 높이고 있다. 비상대책위원회는 향후 국회와 정부 부처를 상대로 GPO 구조의 불공정 거래 문제와 관련한 제도 개선과 법적 장치 마련 필요성도 계속 제기할 계획이다.

블록형 거점도매 정책을 둘러싼 갈등은 단순 유통 방식 논쟁을 넘어 제약사와 유통업계 간 관계 재편, GPO 역할 확대 문제 등으로 확산되는 양상이다. 향후 공정거래위원회 판단과 업계 대응에 따라 논란은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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