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이후, 제약바이오 업계에서 자사주를 활용한 지분 재편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다.
특히 코스닥 상장 제약사들을 중심으로 자사주를 최대주주나 특수관계인에게 넘기는 방식의 대응이 잇따르고 있으며, 이러한 변화는 향후 지배구조 개편은 물론 소액주주 권익과 충돌할 소지도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진양제약은 지난 2일 창업주인 최윤환 회장에게 자사주 32만주(지분율 2.45%)를 장외로 매각했다. 거래 금액은 약 20억원 규모로, 회사 측은 “운영자금 확보와 재무구조 개선”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5년 연속 흑자를 기록하며 지난해 117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린 진양제약이 자사주 매각에 나선 배경에는, 상대적으로 낮은 최대주주 지분율을 보완하려는 전략이 깔려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현재 최 회장 및 특수관계인 지분율은 30.07%에 불과하다.
같은 날 솔본도 자사주 167만9052주(6.14%)를 계열사 테크하임에 장외로 처분했다. 이로 인해 최대주주 측 지분율은 57.88%까지 늘었다. 지엔씨에너지는 지난 4일 자사주 50만주(3%)를 국내외 투자자에게 시간외대량매매(블록딜) 방식으로 매각했으며, 환인제약 또한 7일 100만주(5.38%)를 케이프투자증권 등 국내 투자자에게 같은 방식으로 처분했다.
이들 사례의 공통점은 자사주 매각을 통해 의결권이 회복되며, 지배구조에 실질적 영향이 미칠 수 있다는 점이다. 할인된 가격으로 자사주를 처분한 결과 주가가 급락하는 부작용도 발생하고 있다. 환인제약은 매각 당일 3.8%, 지엔씨에너지는 6%가량 주가가 떨어졌다. 소액주주들 사이에선 “자사주가 청산가치에도 못 미치는 가격에 넘겨졌다”는 불만이 제기되고 있다.
이번 상법 개정안은 △이사의 충실의무를 회사에서 주주 전체로 확대 △감사위원 선출 시 대주주 및 특수관계인 의결권을 3%로 제한(일명 3%룰) △자산 규모에 따른 독립이사 선임 비율 상향(1/4→1/3) △자산 2조 이상 기업 전자주총 의무화 등을 주요 내용으로 담고 있다. 특히 충실의무의 주주 확대 적용 조항은, 자사주를 장기 보유하거나 우호세력에게 헐값 처분하는 행위가 배임 논란에 휘말릴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된다.
제약바이오 업계는 이번 개정안에 따른 파급력이 특히 클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업계 특성상 장기적 시야가 필요한 신약개발 프로젝트가 많고, 오너 중심의 신속한 의사결정이 주요 경쟁력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셀트리온, 대웅제약, 유유제약, 삼진제약, 한독, 동화약품 등 국내 주요 제약사 대다수는 오너 경영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이승규 한국바이오협회 부회장은 지난달 16일(현지시간) 미국 보스턴에서 열린 '2025 바이오 USA' 기자간담회에서 "한국 바이오산업은 3~5년 내 글로벌 경쟁력을 잃을 수 있다"며 "정부는 네거티브 규제 전환과 기업 자율성 보장을 통해 성장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바이오업계는 상법 개정으로 투자 판단 부담이 커지면 오히려 장기 신약개발 동력이 약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이같은 업계 우려는 실제 기업 의사결정에도 나타났다. 파마리서치는 지난달 발표한 인적분할 계획을 상법 개정 논의가 본격화되자 전격 철회했다. 회사 측은 “지배구조 변화와 주주가치 훼손 우려 등 다양한 의견을 반영했다”고 설명했다.
일각에선 법 개정이 제약업계에 단기적인 불확실성을 초래하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지배구조 투명성 제고와 자본시장 신뢰 회복에 기여할 수 있다는 평가도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경영 투명성이 높아지면 오히려 진정한 기술력과 임상역량을 갖춘 제약·바이오 기업이 중장기 투자 유치에서 유리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자사주는 그간 최대주주의 경영권 방어 수단으로 활용돼 왔지만, 소액주주가 이를 문제 삼기 어려운 구조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상법 개정을 계기로 자사주 매각이나 보유 방식이 배임 논란에 휘말릴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생기면서, 활용의 투명성과 정당성이 기업 평가의 핵심 기준으로 자리잡을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실제로 일부 리서치 보고서에서는 자사주 처분 행위가 향후 이사 책임이나 주주 소송의 타깃이 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