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제약업계와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의 신약 약가가 지나치게 낮다며 무역협상 의제로 삼을 것을 주장했다. 이에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이하 건약)는 “정부가 다국적 제약사의 압력에 굴복해서는 안 되며, 국민 건강을 우선하는 정책 원칙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제약협회(PhRMA)는 지난달 27일(현지시간) 미국무역대표부(USTR)에 제출한 의견서에서 한국을 포함한 10개국을 ‘비상호적 약가 정책 국가’로 지목하고, 무역 협상을 통해 제도 개선을 유도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미국 상공회의소, BIO(미국생명공학산업협회) 등도 의견서를 함께 제출하며 한국의 낮은 약가 수준과 신약 진입 지연 등을 문제 삼았다.
의견서에 따르면 이들 단체는 △OECD 국가 중 최하위 수준의 신약 지출 비중(GDP 대비 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과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이중 평가 구조로 인한 시장 진입 지연 △신약의 혁신성에 대한 저평가 등을 집중 비판했다. 특히 한국은 건강보험 등재 및 약가 협상에 과도한 시간이 소요돼 시장 접근성이 낮다고 주장했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5월 12일 서명한 ‘최혜국대우(MFN) 약가 정책’ 행정명령과도 연결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당시 “미국은 세계 인구의 5%에 불과하지만 글로벌 제약산업 이익의 3분의 2를 부담하고 있다”며 “외국 정부가 신약 가격을 비정상적으로 낮게 책정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건약은 4일 발표한 논평에서 “트럼프와 다국적 제약사의 압박은 결국 국민 건강을 위한 공공 시스템을 훼손하려는 시도”라고 평가했다. 건약은 “국민 모두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약가 통제와 건강보험 제도는 정당한 정책 수단이며, 외부 압력에 따라 이를 완화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건약은 또한 한국 정부가 과거 한미 FTA 체결 이후 미국 측 요구에 따라 허가-특허 연계제도, 위험분담제, 환급제 등 기업에 유리한 제도를 잇따라 도입해 왔다고 지적했다. 최근에는 고가 신약의 경제성평가 기준을 완화하고, 희귀질환 치료제의 급여 인정 문턱을 낮추는 등의 시도가 이어지며 약가 통제의 공공성이 점차 약화되고 있다는 우려도 제기했다.
특히 미국 제약업계가 자국 내에서는 MFN 약가 정책에 반대하면서, 외국 정부에는 약가 인상을 요구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건약은 비판했다. 자국 내 약가 인하에는 투자 위축을 이유로 반대하면서, 외국에는 고가 정책을 요구하는 행태는 정당성을 잃었다는 설명이다.
이어 건약은 “혁신성 반영이라는 명분 아래 추진되는 약가 인상 제도는 환자를 위한 정책이 아닌 다국적 기업을 위한 정책일 뿐”이라며, 이를 재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유럽 국가들이 고가 신약 문제에 공동으로 대응하고 있는 사례를 언급하며, 한국 역시 국제적 연대를 통해 협상력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고가 약가 유지 정책이 제약산업 육성에 실효성이 있는지도 면밀히 따져봐야 한다고 했다. 건약은 “약가가 과도하게 높게 책정되면, 오히려 리베이트와 과잉 처방을 유도하게 된다”며, “지금은 약제비 지출을 구조적으로 낮추기 위한 새로운 정책 수립이 시급한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끝으로 건약은 “한국의 약가는 글로벌 기준에서 결코 낮지 않으며, 특히 제네릭 의약품의 경우 세계 최고 수준의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다”며 “진정한 약가 개혁은 미국 내 과도하게 보호받고 있는 제약 특허제도부터 바로잡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