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편 > ‘藥業新聞’의 창간..‘藥事時報’ 제호로 첫 호 발행 (1954. 3.)
이덕규 기자 abcd@yakup.co.kr 뉴스 뷰 페이지 검색 버튼
입력 2026-08-26 06:00   수정 2026.08.26 06:00

< 제  2편 > ‘藥業新聞’의 창간..‘藥事時報’ 제호로 첫호 발행 (1954. 3.)

1954년 3월29일자 약업신문 창간호 1면에 게재된 창간사 전문. ©약업신문 

 “우리는 육․이오 사변 이후 인류사상 유례없는 참담한 전화 속에서 필설(筆舌)에 절(絶)하는 모든 인내와 간난(艱難)을 겪어 생존하여 왔거니와 우리 민족은 오히려 이 신산(辛酸)한 전쟁생활의 시련을 통하여 와신상담하는 불요불굴(不搖不屈)의 기백과 강인한 생존력이 더욱 배양되었다고 외지(外紙)는 찬양해 보도하고 있다.
 우리 보건인은 인류의 행복과 국가의 번영에 기간이 되는 보건확보의 명제 밑에서 일신의 안위와 사리(私利)를 초월하여 혼연 국가시책에 봉공하는 숭고한 직업윤리를 가졌기 때문에 이러한 고귀한 업적이 이루어졌던 것이라 하겠다.
 이제 우리 앞에는 긴급한 모든 보건시설의 전재(戰災) 부흥사업이 있고, 또 세계 선진국가의 보건수준을 지향하는 대중보건사상의 계도문제가 가로놓여 있는 이때 우리는 대중의 복지와 각자의 공통한 이익을 위하여 더욱 단결협조하여 매진할 것이 요청되는 바이다.
 본지는 이러한 대국의 요청에 입각하여 비록 약사부문을 표방하였다고는 하나 의약불가분의 관계상 약업경제 부문은 물론 전반보건 부문의 공기(公器)로서 미력하나마 보도의 사명과 여론의 정도(正導)에 예의매진함으로써 다소라도 사계(斯界) 발전에 기여하고자 하오니 전국 각지의 독자 여러분께서는 특별하신 협조와 성원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약사시보’(藥事時報‧창간 당시 영문제호는 The Medical Press, 등록번호 332호) 제호로 발간된 지난 1954년 3월 29일자 제 1호 제 1면(전체 4면)에 게재된 창간사의 일부이다. 여기서 본지 창간호에 게재된 창간사는 기본적으로 국한문 혼용체를 사용하면서도 한자표기를 빈용했던 당시의 작문관행으로 인해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가독성(可讀性)이 크게 떨어진다는 점을 감안해 한자를 한글로 바꾸고 옛날식 어법과 표기법, 문어체 등 또한 오늘날의 표현방식으로 바꿔 현재의 눈높이에 맞게끔 다시 전재해 본다. 한글만으로는 의미전달이 어려워 보이는 경우 괄호를 열고 한자를 병행표기했다.

참고로 1954년은 서기(西紀)가 아니라 아직 단기(檀紀)를 연호(年號)로 사용하던 시절이어서 창간 당해연도의 경우 단기로는 4287년에 해당된다. 1954년 3월 29일이라면 오늘날 주요 일간신문의 하나로 빼놓을 수 없는 ‘한국일보’가 창간호를 발간했던 같은 해 6월 9일보다 2개월 이상 앞선 시점이다. 또한 당시는 한국전쟁으로 인한 극도의 혼란 속에서 부산까지 내려갔다가 환도한 정부가 약사법(藥事法)을 제정하고, 각 제약기업과 의약품 도‧소매업소, 병‧의원 및 약국 등이 전란의 아픈 상처를 씻고 전쟁의 폐허와 잿더미 속에서 생업인 약업을 이제 막 재건하고 다시 시작하기 위한 재건에 분망했던 무렵이다.

창간 당시 ‘약사시보’의 주소지는 서울특별시 중구 입정동(笠井洞) 189번지 廣德빌딩에 소재해 있었다. 당시의 입정동 189번지는 보신각에서 종로 3가 쪽으로 한블럭 지나 삼일대로를 건넌 후 청계 2가 방면 끝쪽 모서리 부근 쯤이어서 아마도 2025년 현재 신영빌딩과 종로파고다 내일캠퍼스가 소재해 있는 위치 정도였을 것으로 보인다. 

신문을 창간할 당시에 제호로 사용되었던 ‘약사시보’와 관련, 1954년 7월 15일자 1면 하단에 보면 “本社에서는 日本 藥業界의 代表的 有力紙인 ‘藥事時報’의 我國 內 讀者의 便利를 도웁기 爲하야 取扱頒布하기로 되었읍니다”라면서 구독 희망자들의 연락을 바라는 내용의 사고(社告)가 게재되어 있어 긴밀한 협력관계에 있었음을 짐작케 해 준다.

참고로 ‘약업신문’은 창간 이후부터 1960년대 초까지는 현재와 달리 별도의 표지면을 사용하지 않고 1면부터 기사면으로 제작됐다. 창간 당시 주 1회 발간된 ‘약사시보’의 지대(紙代)는 1개월에 100환이었다. 1954년이면 쌀 한가마의 가격이 3,930환이었던 시절이다. 1956년의 돼지고기 반근값이 100환, 목욕값이 50환, 영화 1편 관람료가 30환이었다.

이와 함께 1950년대 뿐 아니라 1970~1980년대까지도 국한문(國漢文) 혼용이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던 관계로 한자(漢字)가 많이 사용된 데다 해방 직후 80~90%대에 달했던 것으로 알려진 높은 문맹률을 배경으로 당시 이승만 대통령 정부가 한글을 읽히는 대로 쓰도록 하는 정책을 시행했던 까닭에 지금의 표기법이나 문법과는 차이가 나는 부분이 적잖고, 현재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옛날식 표현 및 어법 또한 자주 눈에 띈다는 점 등도 감안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바꿔 말하면 이렇듯 생경하고 예스러운 문체는 오히려 ‘약업신문’의 오랜 역사와 전통을 방증하는 생생한 증거라고도 풀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본문에서 “戰爭中 國內 모든 醫療施設과 製藥施設은 거의 破壞되고 秩序가 混亂한 가운데..”라고 언급한 부분을 보면 한국전쟁 직후 불모의 폐허와도 같았던 암담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약업신문’을 창간하기에 이른 취지와 함께 전문언론으로서 약업계의 발전을 선도해 나가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역력하게 엿볼 수 있다. “비록 藥事部門을 標榜하였다고는 하나 醫藥不可分의 關係上 藥業經濟部門은 勿論 全般保健部門의 公器로서 微力하나마 報道의 使命과 輿論의 正導에 銳意邁進함으로서 多少라도 斯界發展에 寄與하고저 하오니..”라고 밝힌 부분이 바로 업계의 발전을 선도해 나가겠다는 강한 의지를 오롯이 담아낸 문장이다.

창간 당시 경영진을 보면 대한무역약종상협회(현재의 한국의약품수출입협회) 초대회장으로 재임했던 곽인영(郭仁榮‧대한약농 사장) 사장과 함승기 주간‧편집인 및 인쇄인, 홍현오(洪鉉五) 편집국장 등으로 체제를 갖췄다.

한편 타블로이드판 4페이지의 창간호는 명동(明洞)에 소재했고 1949년에 진보적인 색채의 일간신문으로 창간되었던 ‘태양신문’(太陽新聞) 공무국에서 인쇄됐다. 1954년에 이 ‘태양신문’을 인수한 장기영(張基榮)은 한달 후 제호를 개제(開題)하고 ‘한국일보’를 창간하기에 이른다.

약업신문 창간호(1954년 3월29일자) 1면 지면 모습. 창간호는 타블로이드판 4개 지면으로 구성됐다 ©약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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