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호흡, 제4형, 들이친 파도!”
일본의 인기 만화 ‘귀멸의 칼날’을 보면 호흡이 매우 중요한 설정 중 하나로 나온다.
주인공 탄지로는 물의 호흡을 활용한 기술로 혈귀들을 처단한다.
이외에도 각 등장인물들은 번개의 호흡, 불의 호흡 등 고유의 호흡법을 갖고 있다.
만화적인 상상력 아니냐고?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여기, 호흡으로 환자를 살리는 의사가 있다.
최초의 호흡재활 국제학회, INSPIRE 탄생하다
“호흡재활은 무척 생소한 분야입니다. 거의 시한부 환자들이 대상이다 보니, 호흡재활 치료에는 적극적이지 않거든요. 호흡재활은 환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음에도 다루는 사람이 거의 없어 의학적인 기술이나 학문을 교류할 수 있는 기회가 지금까지는 없었죠. 그게 제가 국제학회를 만든 이유입니다.”
강남세브란스병원 강성웅 호흡재활센터장은 지난달 28일 최초의 국제 호흡재활전문학회인 ‘INSPIRE’를 창립했다.
하지만 학회 창립 과정을 살펴보면 시계바늘을 좀 더 뒤로 돌려야 한다. 강성웅 센터장은 2009년 강남세브란스병원에 우리나라 최초로 호흡재활센터를 열었다 그리고 시선을 바로 외국으로 돌렸다.
“다른 나라들도 호흡재활은 거의 전무했습니다. 국제적인 인프라가 굉장히 취약했죠. 그래서 해외 의사들을 초청해 무료로 교육을 하기 시작했어요. 지금까지 15개국에서 35명의 의사들이 교육을 받고 돌아갔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국제적으로 인적 인프라가 쌓여갔다. 호흡재활 학문을 더 많이 확산하고, 인적, 학문적 교류를 위해 학회가 필요해졌다. 2019년 발기인 대회도 마쳤다. 모든 게 일사천리였지만 뜻하지 않게 코로나19로 2년이 연기돼 지난 10월 비로소 그 결실을 맺었다.
강 센터장이 초대 회장을 맡았다. 임기는 2년이지만 연임이 가능한 만큼, 학회가 활성활 될 때까지는 조금 더 일을 할 생각도 있다.
“INSPIRE라는 단어는 영감을 준다는 뜻이 있지만 이 단어의 명사는 ‘들숨’이라는 의미도 있어요. 학회 로고는 민들레로 만들었는데, 민들레 씨앗처럼 호흡재활이 지금까지 소외 받았던 환자들에게 널리 퍼져 행복해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죠.”
호흡재활, 환자 삶의 질 180도 바꿔
강 센터장의 얘기처럼 호흡재활은 아직까진 생소한 분야다. 호흡재활은 교육 및 다양한 기법, 또는 기구를 활용한 치료를 통해 호흡질환의 증상을 완화하고 조절하며 호흡장애로 인한 합병증을 예방하는 치료법이다.
호흡재활 치료의 대상은 만성 폐질환 환자나 척수 손상 같은 희귀질환 환자들이다. 이들은 호흡 근육도 약해져 있기 때문에 가래가 생겨도 뱉어내지 못해 폐렴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이런 환자들은 대부분 기도 절개 후 가래를 제거했다.
“호흡재활 측면에서 봤을 때 기도 절개가 필요 없는 환자들이 너무 많았어요. 호흡재활 테크닉 몇 개만 이용해도 석션없이 빼낼 수 있는 방법이 있거든요. 호흡재활 치료를 받는 환자들이 가장 기뻐했던 게 바로 절개가 필요 없다는 거였죠.”
상태가 심한 경우 호흡기(인공호흡 보조기구) 치료를 동반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도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 센터장은 전했다.
“우리가 흔히 호흡기를 사용한다고 하면 마치 식물인간이라도 된 것처럼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리 힘이 약할 때 이동을 위해 휠체어를 타듯, 호흡 근육이 약한 환자들을 보조해주는 도구라고 생각을 바꿔야죠.”
강 센터장의 환자들은 대부분 낮에는 호흡기를 쓰지 않고, 밤에 호흡근육이 지칠 때쯤 호흡기를 사용한다. 그래서 환자들은 학교나 직장도 다닐 수 있다. 삶이 완전히 바뀌는 것이다.
“다른 의사들도 저희가 호흡재활 치료하는 모습을 보면 깜짝 놀랍니다. 그들 기준으론 중환자실에 들어가야 할 환자를 이렇게 관리하니 말이죠. 환자들도 삶의 질이 향상돼 만족도가 매우 높아요.”
“호흡재활 치료가 전 세계에 널리 퍼질 때까지”
우리나라 호흡재활은 강남세브란스병원 재활의학과가 시초다. 1985년 근육병클리닉을 개설한 문재호 교수가 근육병 환자를 위한 호흡재활 치료를 시작한 것.
이후 강성웅 센터장은 1998년 재활의학에 강점이 있는 미국 뉴저지 메디컬 스쿨(현 럿거스 메디컬 스쿨)로 연수를 떠나 호흡재활 치료 지식의 심화 과정을 거쳤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강 센터장은 호흡재활센터를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병원도 호흡재활센터가 의미 있는 일인 걸 알지만, 수익성을 무시할 순 없기에 우선 순위에서 계속 밀렸죠. 사실 호흡재활 영역은 수익을 기대하기 어려운 분야입니다. 그래도 센터 설립을 포기할 순 없었어요.”
때 마침 사회공헌을 위해 발족한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에서 강 센터장의 취지에 공감했다. 재단의 공모에 센터 설립으로 응모를 했는데 채택된 것. 재단으로부터 설립비와 운영비를 지원받아 드디어 2009년 우리나라 최초의 호흡재활센터가 문을 열었다.
“재단은 지금까지도 운영비 일부 지원 등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그 외 개인이나 기관으로부터 받은 기부금으로 운영을 하고 있죠. 다행히 병원에서도 지난해 처음으로 인력을 충원해줬어요. 한결 나아졌죠.”
강 센터장이 국제학회를 통해 이루고 싶은 목표는 분명하다. 물고기를 주는 게 아닌, 잡는 법을 알려주는 것이다.
“호흡재활은 단순히 환자를 초청해서 치료하고 보내면 되는 게 아니라 꾸준한 관리와 치료가 필요합니다. 각 나라에서 호흡재활 시스템을 갖춰 환자들을 관리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저희 학회의 목표입니다.”
강 센터장과 인터뷰를 하면서 모소 대나무가 떠올랐다. 씨를 뿌리고 4년이 지나도 땅 밖으로 겨우 3cm 밖에 자라지 못하는 나무. 하지만 5년째가 되면 하루에 30cm, 6주일 만에 15m 넘게 성장하는 모소 대나무.
우리나라의 척박한 환경에서 호흡재활 치료 씨를 뿌리고 이제는 해외로 눈을 돌리는 강 센터장의 노력은 이제 5년째가 되는 모소 대나무이지 않을까? 강 센터장의 바람이 민들레 씨앗처럼 널리 퍼지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