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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NA가 생명을 만드는 레시피라는 기존 관점만으로는 생명정보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실제 생명체에서는 RNA와 단백질을 비롯한 여러 분자가 서로 연결되고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생명정보는 매우 복잡한 상호작용 속에서 만들어지고 조절됩니다.”
RNA 간섭(RNA interference, RNAi) 발견으로 2006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미국 매사추세츠대 찬 의과대학(UMass Chan Medical School) 크레이그 멜로(Craig Mello) 교수가 생명체의 정보 처리 원리를 인공지능(AI) 신경망과 연결한 새로운 생명정보 모델을 공개했다.
멜로 교수는 약업신문과 9일 인터뷰에서 이를 ‘생물학적 정보는 자기생성적 은닉층(self-generative hidden layers)에서 출현한다’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핵심은 생명정보가 DNA 염기서열에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RNA와 단백질을 비롯한 수많은 분자가 계속 만들어지고 서로 연결되면서 새로운 기능이 생겨난다는 설명이다.
멜로 교수는 이 개념을 생명 탄생 이전의 프리바이오틱(prebiotic) 화학에서 RNA 세계를 거쳐 현재의 DNA 기반 유전체까지 확장했다. 관련 원고는 현재 최상위 학술지 투고를 추진하고 있으며, 사전출판 플랫폼 bioRxiv 게시도 계획하고 있다. 아직 출판되지 않은 이 모델을 언론에 공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piRNA 수수께끼에서 시작된 ‘생명 = AI’
출발점은 생식세포에서 작동하는 piRNA였다. 마이크로RNA let-7처럼 일부 소형 RNA는 오랜 진화 과정에서도 서열이 매우 잘 보존돼 있다. 반면 많은 piRNA는 빠르게 진화해 가까운 종 사이에서도 서열이 크게 다르다. 그럼에도 piRNA 경로는 많은 동물에서 생식세포의 유전체를 보호하고 생식능력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멜로 교수에게는 이것이 오랫동안 풀리지 않는 문제였다. 생존과 생식에 중요한 시스템이라면 구성 요소도 오랫동안 보존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지만 piRNA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환점은 AI 연구자 제프리 힌튼(Geoffrey Hinton)의 노벨상 강연이었다. 멜로 교수는 “힌튼의 설명을 듣는 순간 ‘세상에, 이게 바로 우리가 연구하고 있는 것이구나’라고 생각했다”며 “piRNA의 복잡성을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하던 중 찾아온 유레카의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AI 신경망은 수많은 요소가 서로 연결되고, 학습 과정에서 연결의 중요도가 달라지면서 결과를 만들어낸다. 멜로 교수는 생명체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봤다. 수많은 분자 요소가 계속 생겨나고 일부가 다른 요소와 연결되면서 새로운 기능과 정보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는 “진화 과정에서 새로운 piRNA가 계속 생겨나면 일부 연결이 약해지거나 사라져도 전체 네트워크의 특성은 유지될 수 있다”며 “네트워크를 유지하려면 새로운 요소를 계속 만들어내는 생성 메커니즘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전이인자, 유전체의 ‘잔재’ 아닌 진화의 재료
이 관점은 진핵생물 유전체 전체로 이어진다. 멜로 교수는 자기생성적 은닉층이 실제 생물학에서도 작동한다면, 유전체에는 아직 뚜렷한 기능이 없거나 다른 요소와 강하게 연결되지 않은 서열이 많이 존재해야 한다고 봤다. 새로운 서열을 계속 만들어내는 장치도 필요하다.
그가 주목한 것이 전이인자(transposable element, TE)다. 인간 유전체의 약 절반은 전이인자 유래 서열로 구성돼 있다. 전이인자는 유전체 안에서 이동하거나 복제될 수 있는 유전 요소다.
멜로 교수는 이런 요소들이 단순히 남아 있는 유전체의 잔재가 아니라, 새로운 기능을 만드는 재료가 될 수 있다고 봤다. 처음에는 별다른 기능이 없더라도 시간이 지나 다른 유전자나 조절 시스템과 연결되면 새로운 역할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유전체에는 스스로 증식하면서 새로운 요소를 만들어온 서열들이 매우 많다”며 “이런 요소들이 훗날 다른 요소와 연결될 수 있는 새로운 노드를 계속 만들어왔을 수 있다”고 말했다. 멜로 교수는 이를 “나중에 날게 될 원시적인 날개를 만드는 것”에 비유했다.
이 논리를 과거로 더 확장하면 DNA가 등장하기 전으로 제안되는 RNA 세계에 닿는다. 그보다 앞선 단계로는 여러 분자와 화학반응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프리바이오틱 화학이 있다.
멜로 교수는 “프리바이오틱 화학에서도 반응 네트워크와 선택을 다룬 연구가 이미 있다”며 “생명 기원의 네트워크부터 현재 유전체에서 정보가 만들어지는 과정까지 하나의 흐름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말했다.
생명체가 실제 AI 프로그램과 똑같이 작동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여러 요소가 연결되고 그 연결 관계에 따라 새로운 정보가 만들어진다는 AI 신경망의 특징을 생물학과 진화에 적용한 모델이다.
“잘 알려진 유전자 밖에도 새로운 치료 표적 있다”
멜로 교수는 이 모델이 신약개발에도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고 봤다. 신약개발에서는 그동안 기능과 질환 연관성이 명확하고 진화적으로 잘 보존된 유전자와 단백질이 주요 표적이 돼왔다. 멜로 교수는 이들을 오랜 진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 네트워크에 단단하게 자리 잡은 요소로 봤다.
그러나 질환과 관련된 유전변이가 항상 단백질 코딩 영역에서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유전자 사이 영역이나 프로모터 등 유전자 발현을 조절하는 영역에서도 질환과 관련된 변이가 발견된다.
멜로 교수는 “우리가 지금까지 주로 연구해 온 것은 잘 보존된 표적”이라며 “하지만 덜 고정돼 있으면서도 중요한 요소들이 많이 있고, 그중에는 아직 충분히 연구되지 않은 새로운 치료 표적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핵심은 문제가 생긴 유전자 하나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유전자와 연결된 전체 조절 네트워크를 함께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CRISPR로 문제가 있는 유전자를 직접 고치는 방법이 있지만 전신에 걸쳐 광범위한 세포를 교정하기는 쉽지 않다. 반대로 문제가 있는 유전자의 기능을 대신하거나 보완할 수 있는 다른 유전자를 찾는다면 주변 네트워크를 조절하는 방식으로 기능을 회복할 수 있다.
멜로 교수는 “고장 난 유전자를 직접 고치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전신에서 이를 실행하는 것은 어렵다”며 “더 큰 네트워크 안에서 기능을 보상할 유전자를 찾을 수 있다면 주변 유전자 발현을 조절해 전체 기능을 개선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네트워크가 가진 회복탄력성(resiliency)을 치료에 활용하는 것은 매우 매력적인 접근”이라고 강조했다.
생명체는 하나의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구조가 아니라 여러 유전자와 조절 인자가 연결된 네트워크로 작동한다. 멜로 교수는 이런 특성을 생물학적 시스템의 강건성(robustness)으로 설명했다.
이 관점을 RNA 치료제 개발에 적용하면 특정 mRNA 하나만 억제하거나 발현시키는 전략에서 더 나아가, 질환과 연결된 RNA와 조절 인자를 찾아 기능을 보완하는 접근으로 확장할 수 있다.
“AI도 믿지 말고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라”
멜로 교수는 AI 시대의 젊은 RNA 연구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연구 태도로 ‘반증’을 꼽았다.
그는 “자기 자신을 믿되, 읽은 내용을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며 “내가 하는 말도 믿지 말고, 내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려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과학은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정보를 모으는 것이 아니다”며 “자신이 틀렸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질문을 던지고 실험으로 검증하는 과정”이라고 강조했다.
AI 역시 과학자의 실험과 검증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AI가 방대한 정보를 빠르게 정리하고 새로운 가설을 제시할 수는 있지만, 그 가설이 실제 생물학에서도 성립하는지는 결국 실험으로 확인해야 한다.
멜로 교수는 “AI는 실험을 할 수 없지만 연구자가 빠르게 배우고 현재 알려진 지식의 최전선까지 가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며 “AI가 제시하는 것도 결국 가장 가능성이 높은 가설이다. 그 가설이 틀렸는지 확인할 질문과 실험을 만드는 것은 과학자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RNAi에서 출발해 piRNA와 전이인자, 유전체 정보 체계를 연구해 온 멜로 교수의 질문은 이제 생명의 기원과 치료제 개발로 확장되고 있다.
핵심은 DNA에 어떤 정보가 들어 있는지만 보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분자가 어떻게 연결되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지,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 새로운 생명정보와 기능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멜로 교수의 ‘자기생성적 은닉층’ 모델이 새로운 생명정보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을지는 앞으로 연구와 검증이 필요하다. 다만 RNAi 발견 이후 약 30년이 지난 지금, 멜로 교수는 생명정보를 개별 유전자가 아닌 ‘연결과 네트워크’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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