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개발 열기가 뜨겁다. 블록버스터 신약 한 개는 개별 기업의 지속가능한 미래를 보장 할 뿐 아니라 아니라 국가경제에도 이바지 한다는 점에서, 글로벌 제약바이오기업들과 각국 정부는 연구개발 및 지원에 적극 나서고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 1999년 SK케미칼 백금착체 항암제 ‘선플라주’가 국산 신약 1호 타이틀을 거머쥐 후 40여 개 가까운 국산 신약이 탄생하며 신약강국으로 도약하고 있다. 하지만 세계적인 신약이 아직 탄생하지 않았다는 점은 제약 7대 강국, 10대 강국 도약에 여전히 걸림돌이다. 정부의 적극적 지원, 제약바이오기업의 지속적 연구개발, 시대를 읽는 통찰력이 어울어져야 하는 세계적 블록버스터 신약 탄생은 글로벌 신약강국 도약을 위해 국가 산업 기업이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로 자리잡았다. 이에 약업신문은 창간 70주년을 맞아 국내 신약개발이 걸어온 길과 현재, 그리고 성공적 신약개발을 위한 과제를 인터뷰와 기고를 통해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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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약을 조제하지도, 만들어본 적도 없는 약사.’
국민 건강과 신약개발을 위해 반 평생을 보냈지만, 오히려 그런 자신을 “약사 면허 한 번 제대로 써본 적 없는 사람”이라고 낮추는 이가 있다. 고등학교 시절, 6·25 피난 중에 복통으로 고생하시는 할머니를 보고 약의 중요성을 깨달은 소년은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졸업 후 유학을 준비했지만, 갑작스런 아버지의 사망으로 돌연 공직에 입문했다. 보건의약 주요 보직을 두루 거치다 보건사회부 약정국장으로 재임한 후에는 약무행정 사상 처음으로 ‘신약개발 연구지원’ 항목을 신설하는 등 의미있는 한 획을 그었다. 한국신약개발연구조합 이강추 전 회장의 이야기다.
그는 보건복지부의 전신인 보건사회부의 약정국장으로 일하면서 국내 신약개발 발전을 위해 비중있는 성과를 거둬 온 것으로 유명하다. 약업신문은 창간 70주년을 맞아 한국신약개발 주역 중 한 사람으로 이강추 전 신약개발연구조합 회장이자 전 보건사회부 약정국장을 꼽았다. 올해로 ‘구순(九旬)’을 맞이한 그에겐 아직도 보건의약에 매진한 세월이 가장 긴 셈이다.
이 전 회장은 1970년 10월 국립보건원 약품부 분석2과 보건연구관으로 공직에 입문 후 1995년 12월 국립보건연구원장으로 정년퇴임하기까지 국내 제약 역사에서 꼽을 만한 일을 두루 경험했다. 보건사회부 약정국 약무제도과 의약품 품질관리 담당계장으로 일할 당시엔 KGMP(우수의약품 제조관리기준) 최초시안을 만들었다. 그는 “국제기준을 전면 수용하기엔 너무 열악했던 제약산업의 현실에서 동료들과 함께 땀과 수고를 보탰던 당시를 생각하면 뿌듯하다”며 함께 애썼던 동료와 관계자들에게 감사를 전했다.
하지만 늘 좋지만은 않았다. 1975년 약무시책의 일환으로 추진한 ‘약효 재평가 사업’ 시행 과정에선 온 나라를 흔든 ‘밀가루약’ 소동으로 맘고생을 겪기도 했다. 약효 재평가 결과가 발표되자 ‘밀가루약이 사용됐다’는 식의 잘못된 보도로 의약품에 대한 국민적 불신이 증폭되고, 의약품 수출에 악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그는 “재평가의 충분한 취지와 평가방향에 대한 전문적인 이해가 부족해 벌어진 일”이라며 “당시엔 국산의약품에 대한 불신이 커져 힘들었지만, 평가기준 등 보완책을 강구한 끝에 후속평가는 순조롭게 진행돼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보건의약 행정을 맡은 그는 늘 냉온탕을 오가는 일상의 연속이었다. 보건복지부 1급 관리관으로는 사상 처음으로 만기정년을 맞아 명예롭게 퇴직한 것과는 대조되는 모습이다. 1992년엔 ‘은행잎 엑스제 의약품 메탄올 검출사건’으로 또 한 번 세상을 들썩이며 직위해제와 검찰 수사라는 풍랑을 마주했다.
이 사건은 선경인더스트리가 은행잎 추출물에 대한 제법특허를 취득한 1991년 3월 은행잎 추출물 원료 및 완제품 제조품목 허가신청서를 제출하자, 동방제약이 국회에 청원서를 제출하면서 불거졌다. ‘은행잎 파동’은 이듬해 ‘메탄올 파동’으로 모양을 달리하며 약업계 전체와 보건당국에 일대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그때 저는 공직자로서의 소신과 역할을 온전히 견지하지 못했고, 불이익을 무릅쓰고라도 사건의 진상을 밝히려는 용기와 소신이 부족했다”고 고백하면서도 “저를 비롯해 함께 일한 10여명이 출국금지 조치와 금융계좌 추적 등 검찰수사로 힘들고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국립소록도병원 약제과장으로 일하면서 알게 된 한센인 분들이 나를 위해 기도하셨다고 들었다. 힘든 와중에 감사한 일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1977년 국립소록도병원 약제과장으로 승진해 소록도 생활을 한 바 있다. 결국 수사는 ‘혐의없음’으로 종결됐고, 그는 이듬해 국립보건원장으로 발령을 받아 공직에 복귀했다.
반면 보사부 약정국장 재임 당시 추진한 일은 제약업계에서 의미있는 성과로 회자된다. 그는 약정국장으로 부임한 지 3개월만에 약무행정 사상 유례가 없던 정부 주최의 대규모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신약개발 정책에 관한 심포지엄’은 당시 우리나라 제약산업의 선진화‧국제화를 위해 신약개발 정책을 재조명하고 새로운 기반조성을 마련하기 위한 자리였다.
이는 물질특허제도 도입으로 극도로 위축된 제약산업을 살리기 위해 ‘신약개발’만이 살길이라는 인식이 업계와 보건당국에 퍼진 계기가 됐고, 보사부는 심포지엄에서 제시된 정책대안을 근거로 다음연도 예산에 ‘신약개발 연구지원’ 10억원을 예산당국에 요청했다. 처음엔 신규사업이란 이유로 전액 삭감됐지만, 보사부는 경제기획원과 최종 협의 끝에 5억원의 예산을 살려 ‘신약개발 연구지원’ 예산항목을 신설했다.
이후 신약개발 연구지원 예산은 해마다 확대됐고, 지원범위도 보건의료 전 분야로 늘어나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이 전담관리기관으로 새로 설립되는 성과로 이어졌다. 보사부 약정국 산하에는 신약개발과가 신설됐다. 이는 그가 공직 퇴임 후 신약개발연구조합에 합류해 20여년간 회장을 역임하며 제약산업과 신약개발을 위해 종횡무진하는 계기로 이어졌다. 그가 받은 정부 근정포장과 국민훈장 동백장, 동암 약의상 등은 모두 그 활동 속에서 거둔 성과들이다.
반평생을 신약개발을 위해 보낸 이강추 전 회장은 한국이 글로벌 빅파마와 어깨를 나란히 할 세계적인 신약 강국이 될 것으로 믿는다고 했다. 다만 여기엔 조건이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제약산업이야말로 국가안보 차원에서 지원‧육성해야 하는 산업”이라면서 “신약개발 R&D에 대한 정부의 더 과감한 투자와 지원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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