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약가 정책에 대한 제약계의 불만이 가시지 않고 있다. 정부야 이유가 있다고 말하지만, 제약사들의 피해를 떠나 논란을 불러 일으키는 약가 정책이 지속될 경우 약가 인하의 정당성도 상실하고, 정부정책의 신뢰성에도 타격을 준다는 지적이 많다. 심평원과 공단의 이중 약가 결정 구조, 정부의 무리한 약가 협상 등이 이어질 경우, 궁극적으로는 환자들에게 피해를 줄 것이라는 지적이다.
경제성 평가 약가인하를 위한 도구인가?
지난해 하반기 초 노바티스는 신약출시에 대한 기대감에 들떠 있었다.
경쟁사들이 1년에 한 개 통과하기도 힘들다는 심평원 약제급여평가위원회의 문턱을 '라실레즈','루센티스','가브스' 등 3개 품목이 넘어 마지막 공단 약가협상만을 남겨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가브스는 경쟁품보다 낮은 가격에 약가가 결정됐으며 기대를 모았던 라실레즈, 루센티스는 협상결렬로 고배를 마셨다.
특히 루센티스의 경우 초기 제출가인 170만원보다 약 30% 인하한 122만원에 심사평가원을 통과했기 때문에 공단협상에서는 추가인하 여지가 없어 결국 비급여를 택하게 됐다는 후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심평원을 통과하기 위해서 수차례의 약가인하는 당연하게 여겨져 왔다. 회사가 약가인하를 하지 않으면 경제성 부족이라는 말로 비급여 처리되기 일쑤다. 심평원 통과를 위해 전세계 최저가로 약가를 인하하고 공단에 가서 추가 인하요구를 받으면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 급여출시를 포기하게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 급여여부가 약제의 성공에 가장 중요한 척도가 되는 한국 제약시장에서 비급여를 원하는 회사는 그 어디에도 없다.
때문에 업계에서는 심평원이 비급여 판정의 이유로 들고 있는 ‘경제성 부족’으로 인한 약가인하는 정당한가라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제약사들이 약 7천만원에서 1억원에 달하는 비용을 한 약제의 경제성평가 자료 준비에 지출하고 있고 ,그 준비에만도 6개월에서 1년을 투자하고 있음에도 경제성 미입증이 가장 주된 비급여 사유라면, 이는 심평원의 경제성 평가 잣대가 정당한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 수 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더구나 대부분의 신약이 영국 호주 캐나다 등 해외에서 까다로운 경제성 평가 심사를 통과하고 급여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평원으로부터 경제성을 인정 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 제약계의 주장이다.
심평원이 경제성을 이유로 궁긍적으로는 추가적인 약가인하를 목적으로 하는 반면, 업계는 무리한 약가 인하를 수용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정부의 무리한 약가협상 탓?- 제약사의 무책임?
약가협상이 결렬된 라실레즈의 경우 최초의 '레닌억제제' 계열 고혈압 치료제로 기대를 모아왔다.
업계에서는 이러한 혁신 신약의 약가협상 결렬로 인한 비급여는 이원화돼 있는 약가결정체계에 근거한 경쟁적 약가인하구조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보고 있다.
실제로 약제급여평가위원회에서 통과되는 약제 중 심평원과 협상과정에서 수차례에 걸친 약가인하를 하지 않은 약제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지적이다.
지난해 6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약제급여평가위원회는 국산 12호 신약인 비스테로이드 계열 신물질 소염진통제인 '펠루비정'에 대해 업체가 제시한 희망약가에서 11원을 추가 자진인하할 경우 즉시 급여로 전환시키는 조건부 비급여를 결정한 바 있다.
이는 최초 신청가에 비해 17% 인하한 가격.
조건부 급여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제약사 입장에서는 급여를 위해 심평원의 약가인하요구를 수용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이후 공단 협상에서 3.8%의 추가 인하가 있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실제로 약가협상기관이 두 개가 된 셈이다.
이와 같은 이중적 약가결정구조에서 심평원과 국민건강보험공단이 공조하기 보다는 누가 더 깎을 수 있는지 경쟁하며 제약 회사를 압박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특히 제약계에서는 약가인하를 급여의 대전제로 요구하는 심평원의 업무방식은 의약품 선별등재제도 시행 이전에 심평원이 약제의 안전성-유효성 평가와 약가결정을 동시에 하던 것과 전혀 변화 없는 구제도의 답습으로 볼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제약계에 따르면 의약품 선별등재제도 시행 후 심평원의 역할은 약제의 유효성과 진료상의 필수성, 그리고 비용효과성을 평가하는 것으로, 공단은 시장 상황과 보험재정의 영향을 감안한 약가 협상으로 그 역할을 명확히 분담하는 듯 했다.
하지만 심평원은 비용효과성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약가의 고려가 필수 요소이며, 제약사의 급여의지와 약제의 경제성 간의 간극을 상쇄하기 위해서는 약가협상은 배제될 수 없다는 입장에서 이중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
반면 공단 입장에서는 공단에게 부여된 약가 협상이라는 역할에 부합하는 목적을 달성하고 보험재정을 최소화 하고자 급여의 대전제에 약가인하를 내세우는 것은 당연한 처사라는 지적이다.
이에 따라 이미 심평원 검토 시 제출가에서 최저수준까지 인하된 약가를 가지고 공단협상 테이블에 임하는 제약업계의 입장에서는 더 이상 낮출 가격 폭이 없어 실제로 협상이 결렬되는 사례들이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또 수 차례의 약제급여결정 신청 과정 중에 약제의 특허가 만료되는 경우 제약사는 결국 출시를 포기하게 돼, 외국에서는 우수성을 인정받고 성공적으로 판매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환자들은 치료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이와 같은 이중적이고 불합리한 약가결정구조에서 제약사는 울며 겨자 먹기로 전세계 최저가를 감수하면서도 출시를 위한 약가인하를 단행하고 있으며 출시 후에도 사용량-약가 연동, 약가재평가 등의 다양한 약가인하장치들로 인해 고심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약제 협상 결렬로 인해 최종적 피해를 보는 것은 신약을 기다리고 있는 환자들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러한 이중 현실 때문이라는 얘기다.
약가협상을 둘러싼 심평원과 보험공단의 역할 명확해야
전문가들은 환자들의 수요와 제약산업의 현실을 고려한 유연한 정책 적용이 절실히 요구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최근 보건복지가족부는 공청회나 간담회 등을 통해 제약업계와 동반자적 관계를 유지하고 약가 결정에 대한 근거 자료들을 공개하겠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현재 한 약제가 심평원과 공단이라는 두 개의 약가결정 관문을 통과하기까지 수 차례에 걸친 가격인하 사례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또 그 인하율도 천차만별인 것을 감안한다면 신약 급여 결정에 관해서는 두 기관 간의 역할 분담이 명확하지 않고 누가 더 약가를 많이 인하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경쟁관계에 있는 듯하다는 것이 제약계의 지적이다.
일단 제약계에서는 최근 보건복지가족부가 신약의 약제급여결정신청 시기를 식약청 허가 이전으로 앞당기는 법안을 추진하고 있다는 점과 식약청과 심평원의 업무 공조는 고무적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심평원의 약가인하를 목적으로 하는 평가관행이 지속된다면, 약가 검토기간 단축과 신약의 빠른 출시를 위한 식약청과의 공조는 크게 실효를 보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는 지적도 동시에 나오고 있다.
따라서, 최근 한 목소리로 불거지고 있는 약가결정구조의 일원화가 심각하게 고려돼야 할 사안이라는 것.
특히 학계 일각에서 ‘약가인하의 수단으로, 얼마나 약가를 인하할 의지가 있는지를 평가하는 수단으로 전락된 경제성 평가의 경제성을 재평가 하라’ 는 목소리가 일고 있는 점을 심평원과 정부는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제약계에서는 심평원도 본연의 업무와 역할에 충실하면서 비용효과성을 위한 약가선을 공단에 권고하는 형식으로 업무가 진행된다면 이는 업계와 정부 모두 상생하는 방향이 될 것이라고 조언하고 있다.
제약계 한 인사는 "의약품선별등재제도 시행 이후 약가 협상은 공단에게 주어진 임무이고 근거중심의 약제급여여부에 대한 평가가 심평원에게 주어진 임무"라며 "두 조직의 중복적 행정으로 인해 낭비되는 자원에 대한 부담을 고스란히 소비자인 국민이 부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정부는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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