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덕성여자대학교 약학대학 명예교수/한국사진작가협회회원 권 순 경가을 산과 들을 장식하는 야생화들은 대부분 희거나 노란색 꽃을 피우는 국화과 식물들이다. 국화과 식물 일색인 가을 숲에서 8~9월에 피기 시작하여 10월에 절정을 이루는 투구꽃은 보라색이다. 꽃의 모양이 국화과 식물 꽃 모양과는 판이하고 이색적이어서 눈길을 끌고도 남음이 있다.
투구꽃은 미나리아재빗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식물로 1미터 정도 크기로 자라지만 홀로 설 힘이 부족하여 대개는 다른 물체에 기대어 비스듬히 서 있다. 잎은 줄기에 어긋나는데 잎자루가 길고 손바닥처럼 3~5갈래로 깊게 갈라지고 갈라진 조각이 다시 갈라지기도 한다. 가지나 줄기 끝에 보라색 꽃이 한 송이씩 여러 송이가 모여서 핀다.
꽃받침이 변하여 꽃잎처럼 보이게 하는 것은 식물계에서는 항용 있는 일이다. 투구꽃도 꽃받침이 꽃처럼 변한 것이고 5개로 갈라지며 위의 것은 투구모양이고 좌우의 2개는 도란형이며 하부의 2개는 기다란 타원형이다.
하부의 2개의 꽃잎은 곤충의 발판 역할을 하고 좌우의 꽃잎은 곤충이 옆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면서 꽃의 중심을 따라 들어오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한다. 수술은 40개 정도로 다수이고 암술은 3~5개이다. 곤충이 꿀을 찾아 꽃 속으로 파고들 때 수술과 암술을 건들어서 꽃가루받이가 성사되도록 한다.
투구꽃이라는 이름은 꽃의 모양이 병사들이 쓰는 투구모양을 닮은 데서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꽃의 옆모습을 보면 그야말로 투구를 쏙 빼닮았다. 옛날 우리나라 병사들이 쓰던 투구보다는 서양 로마 병사들이 쓰던 투구를 더 많이 닮은 것 같다.
속명 아코니툼(Aconitum)은 독성식물의 옛 라틴명이다. 영어명의 몽크스후드(monk's hood)나 독어명의 묀히스카페(Mönch'skappe) 는 모두 ‘수도승의 두건’을 뜻하는 말로서 꽃 모양이 두건을 닮았다고 해서 부친 이름이다. 많은 나라에서 투구꽃의 이름이 꽃 모양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투구꽃의 신기한 점은 식물이 매년 조금씩 움직인다는 것인데 이동방식이 독특하다. 지금까지 자라온 원뿌리는 자기 임무를 다 마친 후에는 썩어 없어지고 이듬해에는 옆에 달린 뿌리에서 새싹이 돋아나오게 된다. 이렇게 해서 움직이는 거리가 매년 1cm 정도 된다고 한다.
백 년 후면 1m 정도 움직이게 되는 셈이니 땅에 뿌리박고 사는 식물의 고충을 이해할 것 같다. 동일한 장소보다 옆의 토양에 양분이 더 많을 터이니 현명한 생존전략인 셈이다.
투구꽃은 신농본초경에는 오두(烏頭)라는 명칭으로 수재 되어 있고 예부터 잘 알려진 식물이다. 맹독성 물질을 함유한 독초이며 한방에서는 말린 덩이뿌리를 초오(草烏)라 한다. 진통, 진경의 효능을 비롯한 다양한 약리효과가 있으나 맹독성이므로 일반인은 절대로 손을 대서는 안 된다.
유사식물이 많으며 대표적인 것이 부자이다. 옛날 궁중에서 사약의 재료로 천남성과 같이 사용되었고 인디언들은 화살촉이나 창끝에 발라서 독화살을 만들었다. 서양에서도 일찍부터 투구꽃이나 부자의 독성이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헨리 4세를 비롯한 각종 문학작품에서 범죄와 연루되어 자주 등장한다. 실제로 독살용으로 자주 이용되기 때문에 로마제국 말기에는 부자의 재배를 법으로 금지했으며 이 식물을 소지하고 있는 것만으로 발각되면 사형에 처했다고 한다. 고대 희랍의 키오스섬에서는 늙고 병든 사람의 안락사용으로 투구꽃 독을 사용하는 것은 법적으로 허용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투구꽃이 속해있는 아코니툼속 식물에는 아코니틴(aconitine), 메사코니틴(mesaconitine), 히파코니틴(hypaconitine)와 같은 맹독성 알칼로이드가 들어있고 강력한 강심작용을 나타내는 히게나민(higenamine)도 함유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