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재훈 약사
1957년에 독일에서 탈리도마이드라는 새로운 수면제가 시판됐다. 동물 실험 결과 이 약은 아주 안전해보였기에 처방 없이 구입이 가능한 일반약으로 판매되었다.
과거 언론에 보도된 기록을 보면, 당시 이 약이 수면 효과는 뛰어나면서도 다음날 몽롱해지는 부작용이 없어서, 잠에서 깬 뒤에도 머리가 말끔하다는 이유로 유럽 전역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유럽 각국에서 매일 밤 이 백만 명이 탈리도마이드를 먹고 잘 정도였다. 그런데 탈리도마이드(상품명: 콘테르간)가 출시되고 나서 당시 서독의 손과 발이 없이 태어나는 기형아 출생률이 백만 명에 한 명에서 천 명에 2명꼴로 크게 늘어났다.
마침내 1961년 11월에 이 약이 문제의 원인이었다는 사실이 세상에 밝혀졌다. 이미 늦었다. 세계 전역에서 피해자 수가 10,000명에 달했다. (주로 영국, 독일에 피해가 컸고, 일본의 경우도 300명이 넘었다. 다행히 당시 우리나라에는 이 약이 시판되지 않았다.)
탈리도마이드 사태가 벌어진 1950년대 말까지만 해도 독일을 비롯한 유럽 각국의 약품 규제는 지금보다 느슨했다. 특히 독일 의약품 시장은 개방적이어서 약품의 효능이나 안전성에 대해 자세한 증거 자료를 제시할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탈리도마이드의 경우, 생쥐를 대상으로한 독성 실험 결과로만 보면 대단히 안전해보였다. 생쥐에게 체중1kg당 5000mg을 먹여도 죽지 않을 정도라니, 소금의 치사량과 비교하면 1600배를 투여해도 될 정도로 안전한 약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원숭이 실험에서는 임신 초기 투여시 예외 없이 기형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때는 늦었다. 역사상 최악의 약화사고로 불리는 탈리도마이드 사건은 이미 벌어진 뒤였다.
탈리도마이드가 기형을 일으킨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몇 년이 지나 놀라운 반전이 생겼다. 한센병과 다발성 골수종과 암등의 치료에 이 약이 효과를 보인다는 사실이 발견된 것이다. 1964년 예루살렘의 한 대학병원에서 한센병 치료 과정에서 심한 피부통증을 호소하는 환자에게 탈리도마이드를 처방하였더니 증상이 놀랍게 향상되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탈리도마이드가 비록 악명 높은 약물이었지만 진통효과가 높다는 것은 알려져 있었고, 대상이 남자환자였기 때문에 시험 삼아 투여해보았더니 의외로 상당한 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워낙 큰 문제를 일으켰던 약이라 공식 승인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마침내 1998년에 미국 FDA는 탈리도마이드(상품명: 탈로미드)를 한센병환자의 합병증 치료제로 승인했다.
임산부나 가임기 여성에게는 사용하지 않으며, 남성이 복용 시에는 반드시 피임하도록 하는 조건이었다. 물론 여전히 세계보건기구에서는 가급적 탈리도마이드보다는 다른 약을 사용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뒤이어 2006년에는 탈리도마이드가 항암제로 승인됐다. 탈리도마이드가 태아의 기형을 유발하는 기전을 알게 된 덕분이었다. 이 약은 임신 초기 태아의 팔과 다리가 생성되는 시기에 필요한 새로운 모세혈관이 만들어지는 것을 억제하는 효과(혈관신생억제효과)가 있어, 손과 발이 결손되는 기형을 유발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암세포는 빠르게 수가 늘어나기 때문에 주변에 신생혈관을 만들어서 영양을 공급받으려는 성질이 있고 이렇게 주위에 모세혈관이 새로 생기는 걸 막으면 암세포 사멸을 유도할 수 있다. 엄마 뱃속 태아에게는 엄청난 비극을 일으킬 수 있는 약 부작용을 역으로 항암 치료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이용하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날의 비극을 잊을 수는 없다. 새로 승인된 용도로 사용될 경우에도 탈리도마이드 이용에는 여러 제한이 따른다.
여성은 복용에 앞서 4주 전부터 복용 4주 뒤까지 최소 두 가지 이상의 방법으로 피임해야하고 남성도 복용 시점부터 4주 동안 성관계를 가질 경우 반드시 콘돔을 사용해야 한다. 부작용에 대한 지식이 없었을 때는 몰라도, 이제 알고 있는 이상 최대한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부작용 없이 효과만 강력한 완벽한 약은 세상에 없다. 그렇기에 약의 사용은 항상 저울질에 따른다. 치료 상의 유익이 부작용의 위험보다 훨씬 더 클 경우에는 부작용을 알면서도 사용해야 할 경우가 있다.(항암제로서 탈리도마이드) 반대로 치명적 부작용 위험이 예상될 경우라면, 효과가 있더라도 해당 약의 사용을 피해야 한다.(수면제로서 탈리도마이드) 비극을 야기한 탈리도마이드의 부활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