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허난설헌(許蘭雪軒) <제15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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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수정 최종수정 2016-12-01 18:02
그토록 소중하게 다루었던 물건들을 난설헌은 며칠 전부터 하나둘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중국 설화집 ≪태평광기≫(太平廣記)와 ≪수호전≫(水滸傳)등 어느 책 보다 소중하게 아꼈던 책을 경탁 위에 올려놨다. 그리고 책갈피엔 쪽지도 하나씩 잊지 않았다. 자신이 이승을 떠난 후에 누구에게 주라는 내용이다.


난설헌에겐 거울과 빗이 여럿 있다. 오라버니 허봉이 중국에 갔을 때 사온 상아 얼레빗과 쇠뿔로 만들어진 참빗, 큰 오빠 허성이 일본 수신사로 다녀오면서 사다 준 매화 문향 장미목 거울, 아버지 허엽이 명나라 진하사(進賀使)로 갔다가 사온 연꽃 장식의 거울, 그리고 어머니가 쓰시다 물려 준 오동나무 거울도 경탁위에 깨끗하게 닦아 올려놨다. 그동안 써놨던 시들도 일부는 서안(書案·책상)에 넣고 나머지는 별당 뒤뜰에서 깊은 밤에 불태웠다.

그리고 내일은 오랜만에 목욕을 하리라 생각한다. 난설헌은 문득 손곡(蓀谷·이달李達의 호)의 ≪학 한 마리≫를 떠올린다.

‘외로운 학 한 마리/ 먼 하늘을 바라보며/ 밤도 차가운데/ 한 발을 들고 섰네/ 저녁 바람이 차갑게/ 대나무 숲에 불어와/ 몸에 가득/ 가을 이슬로 적셨구나.’ 그랬다. 난설헌은 외로운 학 한 마리가 되어 서녁 바람이 차가운데도 두 발 중 한쪽 발은 들고 외롭고 쓸쓸하게 서 있는 형국의 별당 생활이다.

이제 난설헌은 신선의 나라로 가려 한다. 시의 세계와 광상산 신선의 세계를 오가며 별당 생활을 힘겹게 버텼던 이승을 정리하고 훠이훠이 떠나려 마음먹은 것이다. 막상 이승생활을 청산하고 떠나려 하니 정리 할 것도 그리 많지 않았다.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히 몸부림 쳤던 아들 제헌과 딸 소헌이가 먼저가 있고 아버지 허엽, 오빠 이상으로 존경하였던 허봉까지 일 년전에 이승을 떠났으니 속세(俗世)에 미련을 두고 가슴 조릴 일들이 없다. 다만 자신이 쏙 빼 닮은 친정 어머니가 목에 걸린 생선가시 모양 온 몸이 쑤시고 아프다.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주체하기 어렵다. 고부간의 갈등이 고추보다 매웠어도 난설헌은 눈물은 절대 흘리지 않았다. 눈물을 쏟고 서러워하면 자신의 운명에 굴복하는 것 같아 난설헌은 입술을 깨물고 허벅지를 꼬집어가면서도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았다. 눈물이 하늘에서 내리는 오뉴월 장맛비처럼 주체를 할 수 없게 쏟아졌다.

또 스승 손곡의 시 ≪꽃을 보며 더욱 늙음을 느껴≫를 번개처럼 떠올렸다. ‘봄 바람도 또한 공평치 않아/ 온갖 나무 꽃 피워도 사람만은 혼자 늙게 하네/ 억지로 꽃가지 꺾어 희 머리에 꽂아 보았지만/ 흰 머리와 꽃은 서로 어울리지 않아라...’ (시 옮김 허경진)

난설헌은 손곡의 출생을 알고 있다. 그런 그를 허봉 오빠가 동생 허균의 스승으로 사랑채에 초빙하였다. 그때 난설헌도 아버지의 배려로 같이 공부 할 수 있었다. 손곡은 균의 스승으로 초빙되었지만 난설헌도 아낌없이 가르쳤다. 난설헌은 손곡 가르침을 흡반처럼 빨아들였다. 초롱초롱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총기에 손곡은 난설헌과 고우에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난설헌과 손곡은 사반세기(25년) 가까이 나이 차이가 있다. 부녀(父女)같은 분위기에서 동생 균과 같이 공부 하였다.

난설헌이 여류천재라면 균은 조선천하의 천재였다. “누나 나도 이다음에 소설을 쓸 거야!” 난설헌이 ≪수호전≫과 ≪태평광기≫를 읽고 있을 때면 초롱초롱한 두 눈을 반짝이며 누이 난설헌에게 으스대기도 하였다. 그렇게 난설헌이 김성립과 결혼하기 전엔 무엇 하나 아쉬울 것 없이 자랐다. 그때 허봉오빠와 잘 어울려 사랑채에 드나들었던 최순치도 자연스럽게 얼굴을 익혔다. 난설헌은 그때 이미 결혼을 하면 허봉 오빠와 여러 가지로 닮은 최순치와 하겠다고 마음을 굳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거북 등 껍데기보다 견고한 인습에 밀려 난설헌은 안동 김씨와 양천 허씨의 징검다리가 되었다. 이제 난설헌은 그 징검다리역에서 떠나려 서두르고 있다. 그 첫 수순으로 목욕을 하려 한다. 시어머니 송씨가 손자와 함께 이웃집으로 마실을 갔다. 있는 힘을 다해 물을 데워 옹기 자배기에 붓고 몸을 담갔다. 참으로 오랜만이다. 시집 온지 십수년이 됐으나 남편과 뜨악한 관계로 목욕도 자주하지 못하였다.

오늘 목욕은 이승에서 마지막이 될 것이다. 손수 물을 데우고 준비를 하였다. 별당과 정주간은 약간의 거리가 있다. 오랜만에 집안이 텅 비었다. 심부름하는 몸종들이 모두 볼일이 있어 외출을 했으며 시어머니 송씨 마저 손자를 업고 이웃집으로 마실을 갔기 때문이다. 언제 그들이 들이 닥칠지 몰라 난설헌은 목욕을 서둘렀다.

목욕통에서 물안개가 피어올라 어느새 난설헌의 눈앞에 오색무지개를 꽃 피웠다. 따뜻한 물에 난설헌의 두 눈이 잠들 듯 사르르 잠겼다. 눈앞에 광대한 무한의 세계가 펼쳐졌다. 온몸이 오색구름 위에서 황금마차를 타고 난새와 봉황의 호위를 받으며 옥황상제에게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그곳엔 이미 아버지 허엽과 오빠 허봉이 먼저 도착하여 난설헌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난설헌이 스승 손곡을 통해 배웠던 시성 두보와 시선 이태백도 있었다. 시성과 시선은 활짝 핀 백일홍의 꽃다발을 난설헌에게 건네주었다. 신선세계에서 뜨겁게 환영을 해주자 난설헌은 너무 늦게 온 것이 아닌가 생각까지 들었다. 힘든 이승생활을 공연히 버티느라 애쓴 생각이 아가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특히 시성 두보와 시선 이태백을 만나자 이승생활이 허송세월이 되었다 싶게 마음이 쓰였다. “허허, 조선의 천재 여류시인을 이제사 보게 되네... 내 참 무려 800여년이나 기다렸소이다! 난설헌의 백옥루상량문은 우리나라 이하의 상량문과 너무나 닮았소! 나는 이하가 조선의 여자로 환생을 하지 않았나 의심을 했소이다...” 이택백이 흰 이를 드러내며 환히 웃어보였다. 진정으로 기쁜 표정이다.

아버지 허엽과 오빠 허봉도 옆에서 눈시울을 적시며 웃음으로 맞았다. 난설헌은 이승에서 8살에 쓴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이 생겨진 광한전 옥양문을 쳐다보며 이곳이 오매불망 동경했던 신선세계임을 실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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