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치마폭에 눈물은 떨어지지만/ 모두가 임 때문이 아니었던가/ 막힌 속은 거문고로 풀면 되지만/ ᄄᅠᆯ어지는 저꽃들은 어이하랴, <<무제>>다. 시 한수를 가을 무우 밭에서 무우 뽑듯 쓰고난 난설헌은 머리뒤에 손을 가져가 비녀를 뽑았다. “너 급히 옥봉이 한테 갔다 오너라!,,라고 몸종 옥비(가명)를 향해 시를 쓴 칠색 비단을 둘둘 말아 주면서 독촉 하였다.
옥봉(玉峰 1526~1592)은 난설헌(1563~1589)보다 37살이나 위다. 난설헌과 옥봉은 지체가 다르다. 난설헌은 조선의 으뜸가문인 안동김씨의 며느리인 반면에 옥봉은 조원(趙瑗 1544~1595)의 소실이다. 허지만 그들은 문학 동지 였을 터다. 난설헌의 개혁적 사고로 옥봉을 한 사내의 소실로서가 아닌 시(時)를 쓰는 여류문인으로 생각하고 동류의식에서 위의 시를 보냈으리라...
아마 시의 내용으로 봐 죽음직전의 상황인 듯 하여 보인다. 옥봉의 나이 37살이나 위이면서 난설헌보다 3년을 더 살았다. 난설헌이 27살에 절명 했을 때 옥봉은 63세였다. 환갑을 치르고도 세상을 3년이나 더 보았던 것이다. 당시론 상당히 장수한 삶이었다.
옥봉과 난설헌의 거처는 지금으론 그리 먼 거리가 아니였으나 당시엔 이웃집 가듯 갈 수 있는 거리는 아니였었다. 그러나 난설헌은 시를 급히 써서 몸종을 통해 옥봉에게 보냈다. 천재는 천재가 이미 알아 보았던 것이다.옥봉이 비록 서녀(庶女)로 태어나 떳떳한 조강지처가 되지 못하고 소실(小室)이 되었지만 그녀는 어엿한 왕실의 피를 받은 후예 였다. 아버지 이봉(李逢1441~1493)은 학문은 뛰어났으나 출사엔 등한히 하였다. 이럿듯 가문으로만 보면 비록 소실에 있지만 난설헌에 꿀릴것이 없는 지체다. 게다가 나이까지 37살이나 위였으니 시인으로 대 선배가 아니였던가?
아마도 난설헌과 옥봉은 처지상 만나지는 못했드라도 서신은 자주 왕래가 가능했으리라... /임 찾아 오는 말의 방울소리에/ 취한 술은 다시 깨어 가슴 아파라/ 시름에 겨운 얼굴 차마 못내놔/ 창가에 눈썹이나 그려 보느니..., 옥봉은 난설헌이 보낸 칠색 비단의 여백에 시 한수를 기다렸다는 듯이 거침없이 써 보냈다.
그때 옥봉이 나이 63세 때다. 두 여인의 남편들은 임진왜란때 사망하였다. 남자들 역시 조원이 김성립보다 18살이나 위였으나 사망할때는 같은 해인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에 세상을 등졌다. 이처럼 여자들은 여자대로 시라는 문학으로 소통을 했으며 남편들은 전장에서 전우(戰友)로서 애국심에 불탔으리라...
난설헌은 공교롭게 이옥봉. 황진이(黃眞伊1511~1551)와 서로 엃여 있다. 황진이는 허엽과 화담서경덕(徐敬德 1489~1546)같은 문하생이며 이옥봉과는 천재 여류시인으로 옥봉이 난설헌의 언니다. 세 여류시인은 또한 공교롭게도 여필종부와 남녀 칠세 부동석 성리학의 사대부 나라에 태어나 주류사회에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세 천재여류시인의 시를 소개한다. ‘자주 빛 퉁소 소리에 구름이 흩어지자/ 발 밖에는 서리가 차가워 앵무새가 우짖는데/ 밤 깊어져 외로운 촛불이 비단 휘장을 비추고/ 이따금 드 뭇한 오동나무 가지에선 밤 벌레가 우네/ 명주 손수건에 밤새도록 눈물 적셨으니/ 내일 보면 점점이 붉은 자국이 남았으리라, 난설헌의 <<임을 그리며>>다.(시 옮김 허경준)
‘강가의 어느집 벽옥 난간에 기대선/ 봄 생각에 젖은 미인 눈썹에 시름이 겨워/ 머리 숙여 선골(仙骨) 낭군과 속삭이려는데/ 가벼운 배는 무정하게 여울을 떠나가네, 이옥봉의 <<강행>>(江行)이다. ’동짓날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춘풍(春風) 이불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얼은님 오신날 밤이 여든 굽이굽이 펴리라, 황지이의 <<무제>>다.
세 천재여류시인이 모두 몸과 마음을 몸땅 받쳐 진정으로 사랑하는 님을 그리워한 시다. 그랬다. 하늘은 한 인간에게 모든 것을 다 주지는 않았나 보다. 세 천재여류시인들은 살아서 보다 사후에 더 유명해져 오늘에도 뭇 사람들로부터 입이 닳도록 회자되고 있다. 그들의 속마음에 꽁꽁 숨겨져 있어 수세대가 지났어도 신기루처럼 꿈과 낭만을 끝없이 피어 낸다.
결국은 사랑이었다. 옥봉은 왕실(王室)의 후예였으나 서녀의 신분으로 소실이 되어 탁월한 시의 세계를 마음껏 펼치지 못했으며 난설헌 역시 조강지처의 자리엔 앉았지만 남편의 무관심과 시어머니의 냉대로 작품활동을 마음 편히 하지 못 하였다.
명월(明月)이란 기명(妓名)으로 더 많이 알려진 황진이 또한 본인이 사랑하려 했었던 사내(서경덕)의 품으로 끝내 들어가지 못하고 제자가 되어 측근에서 보는 것으로 만족 해야만 하였다.
옥봉과 난설은 조선에서 보다 중국에서 더 문명(文名)을 ᄄᅠᆯ쳤다. 옥봉은 시를 쓰지 않겠다는 ‘금시맹약,(禁詩盟礿)을 쓰고 이봉의 소실이 되었다. 허지만 천척의 억울한 누명을 벗게 한 <<위인송원>>(爲人訟寃)으로 금시맹약을 어겨 쫒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난설헌 역시 현모양처보다 천재시인으로 조.중.일의 문화계를 경천동지케 하였다. 황진이 또한 사대부나라에서 지체 높은 대학자에서부터 소리꾼에 이르기까지 사랑이란 미명아래 섬김이 아닌 파트너만으로 재색(才色)을 방패삼아 더 우월적 지위로 40평생을 자랑스런 여성의 삶을 살았다. 사랑은 그렇게 위대하게도 비참하게도 만들 수 있는 연금술사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