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후 그녀는 허봉을 마음속 낭군으로 섬겼다. 눈을 감으면 실제 낭군으로 다가갔고 눈을 뜨면 마음속의 낭군으로 정성껏 받들었다.
수옥이 오늘 임영(현 강릉)에 왔다. 혼자 올 용기가 없어 매곡을 앞세우고 초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초희도 어느 여인이 허봉 오빠를 사모한다는 풍문은 들었으나 이곳까지 찾아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그런데 베일 속에 있을 그녀가 베일을 훌훌 벗어던지고 직접 낭군을 찾아 나선 것이다. 그것도 초희가 역시 마음의 낭군으로 생각하고 있는 매곡과 동행을 하고서였다.
초희는 가슴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함을 받던 날 남들이 볼까 가슴조이며 담 밖에서 손만 내밀어 준 동백꽃 꽃다발과 화관을 담 안에서 받은 후 오매불망 그리워했었던 마음 속 낭군을 지척지간에서 직접 볼 수 있다는 것이 기쁘기도 하고 수옥이 한없이 부러웠다.
사랑하는 사람이 지금 금강산이 아무리 좋다 해도 낯설고 물 설은 곳에서 방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수옥이 찾아 나선 용기다. 하지만 초희는 마음만 불태우고 용기가 없어 성에 차지 않은 김성립과 백년해로를 맺었다.
오빠 허봉은 따뜻한 성정을 가진 남자다. 오빠라기보다 스승같은 존재다. 허봉은 초희의 아들 희윤의 비문을 이렇게 적었다. ‘피어보지도 못하고 진 희윤아... 희윤의 아버지 誠立은 나의 매부요 할아버지 첨(瞻)이 나의 벗이로다. 눈물을 흘리면서 쓰는 비문, 맑고 맑은 얼굴에 반짝이던 그 눈! 만고의 슬픔을 이 한 哭에 부치노라’ 허봉이 쓴 조카의 비문이다.
그랬다. 이렇듯 눈물이 있고 따뜻한 가슴의 사나이인 것을 수옥은 첫눈에 알아본 듯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불원천리 한양에서 허위허위 임영까지 발길을 재촉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초희는 그런 수옥이 눈물이 나도록 부러웠다. 자신은 숯덩이처럼 가슴을 태우면서도 매곡을 향해 한걸음도 다가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속의 풍속을 고스란히 따르면서 속으로만 불만을 토로해서다. ‘동쪽집 세도가 불길처럼 드세던 날/ 드높은 다락에선/ 풍악소리 울렸지만/ 북쪽 이웃들은 가난에 헐벗으며/ 주린 배를 안고서/ 오두막에 쓰러졌네/ 그러다 하루아침에 집안이 기울어/ 도리어 북쪽 이웃들을 부러워 하니/ 흥하고 망하는 거야 바뀌고 또 바뀌어’ 하늘의 이치를 벗어나기는 어려워라‘ ≪하늘의 이치를 벗어나기는 어려워라≫다.
초희도 역시 여자다. 당시 조선은 엄격한 남존여비의 사회다. 친정집에선 금지옥엽으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로 사내(허균)와 별 차이 없이 공부도 할 수 있었다. ≪태평광기≫·≪서유기≫·≪논어≫·≪맹자≫ 등 제자백가의 문학을 공기처럼 마음껏 즐겼으나 시집와선 환경이 360도 바뀌었다. 천재 초희도 세습적 환경에 적응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친정 허엽의 집엔 1만여권의 책이 있었다. 허엽·허성·허봉·허균의 네 부자의 학문세계다. 그 학문세계에서 초희도 헌헌장부들의 꿈과 야망의 도전에서 숨 쉬고 생활하였다. 하지만 시집은 친정집의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친정은 욱일승천하는 분위기였으나 시집은 서서히 햇빛이 피해가는 석양녁이다.
초희는 천재답게 현실을 인정하고 별당을 자신의 소우주(小宇宙)로 만들었다. 그곳에선 화관을 쓰고 시를 쓰면서 자신의 세계에서 꿈과 이상을 마음껏 펼쳤다. 그런데 주어진 숙명을 고스란히 인정하면서 살기를 어언 십 수 년 갑자기 그 세월이 원망스럽고 자신이 못났음이 자각되었다.
수옥을 보고서다. 자신이 마음속의 낭군을 찾아온 수옥이 너무나 부러웠다. 그리고 자신이 부끄럽기까지 하다. 소위 천재 소녀로 세상에 알려졌으나 자신의 꿈 하나 이루지 못하고 있는 처지가 초라하고 비루하게 느껴졌다. “여기에 금강산이 어딘데! 어떻게 가려고...” 수옥의 꿈을 저지하고 싶다.
마음속의 낭군을 만나러 가는 용기 있는 수옥에게 질투가 발동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속으로 “오빠는 비록 객지에서 유랑하고 있으나 이승과 저승(지하선)에서 동시에 낭군으로 모시겠다니...” 라고 태산이 날아갈 듯 한숨을 토해냈다. ‘제비처럼 춤추고 꾀꼬리처럼 노래하는데 이름은 막수라네/ 나이 열다섯에 부평후에게 시집 왔다네/ 화려한 집에서 거문고 안고 실컷 타며/ 화관을 즐겨쓰고 옥황께 예를 올렸네/ 구슬집에 달이 밝으면 퉁소 소리에 봉황새가 내려오고/ 창가에 구름이 흩어지면 거울에 새긴 난새도 걷혀졌네/ 아침저녁으로 단 위에 향을 피우건만 학 등에는 찬바람이 일어 어느새 가을일세’ ≪자수궁에서 자며 여관(여도사)에게 바치다≫ 다. (시옮김 허경진)
자신의 결혼생활을 반추한 듯한 시다. 본인이 열다섯 살에 결혼했으나 가슴 조이고 부푼 꿈을 안고 한 사내를 만났지만 실망으로 바뀌었다. 막수(美人지칭)는 바로 자신의 아바타로 등장시킨 듯해 보인다.
초희는 입술을 피가 맺히도록 꼭 깨물고 속으로 다짐한다. 이승을 떠나 광상산 신선세계로 가면 욕심껏 꿈도 키우고 마음껏 이상도 키우며 이루지 못한 사랑도 화려하게 꽃피우리라고... 그러면서 아침을 먹고 서둘러 허봉 오빠가 있는 금강산을 향해 웃음을 얼굴 가득히 담고 힘차게 떠나는 수옥의 뒷모습을 부러운 듯 시선의 끝자락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아씨 빨리 갔다 올께요...” 라고 손을 흔들며 시야에서 사라지는 수옥을 초희는 뜨거운 눈물로 배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