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허난설헌(許蘭雪軒) <제10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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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수정 최종수정 2016-12-01 17:49
남편과의 관계는 날이 갈수록 더 멀어져 갔다. 초희는 그럴 때마다 함 받던 날의 광경이 새록새록 몸서리쳐지도록 그리워졌다. 그때 사랑채에는 둘째 오빠 허봉과 최순치도 함께 있었다. 매곡 최순치도 손곡 이달과 같이 서출(庶出)이다.


매곡이 서출이 아니었으면 아마 허엽이 금지옥엽 초희의 배필로 염두에 두었을 게다. 준수하면서도 칼날처럼 번뜩이는 눈빛, 일자로 다문 입과 오뚝한 코, 분질러지듯 격하지만 반듯한 논조가 사대부의 맞춤처럼 품위가 곱다. 초희도 오빠 허봉과 어울려 수창하는 매곡을 이따금 먼발치에서 봐왔었다. 달려가 뜨거운 마음을 열어 보이고 싶었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게 오매불망 했었던 극적인 조우(遭遇)가 이루어졌다. 함을 받던 날 그들은 이심전심으로 마음을 주고받던 밤 드디어 체온이 담긴 화관과 동백꽃 꽃다발을 받았다.

초희는 그때 번개처럼 다가왔었던 매곡의 열정을 아직도 그 불을 끄지 못하고 있다. 10여년이 가까웠으나 그 불은 더욱 활활 더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비단 장막으로 추위가 스며들고 아직도 밤이 길게 남았는데/ 텅빈 뜨락에 이슬이 내려 병풍이 더욱 차가워라/ 연꽃은 시들어도 밤새 향기가 퍼지는데/우물가 오동잎이 져서 가을 그림자가 없네/ 물시계 소리만 똑똑 하늬바람에 들려오고/ 발 바깥에 서리가 짙게 내려 밤 벌레소리 구슬프구나/ 베틀에 감긴 무명을 가위로 잘라낸 뒤에/ 옥문관 님의 꿈 깨니 비단 장막이 쓸쓸하네/ 님의 옷 지어내어 먼 길에 부치려니/ 등불이 쓸쓸하게 어두운 벽을 밝히네/ 울음을 삼키며 편지 한 장을 써서/ 날이 밝으면 남쪽 길 가는 역인에게 부치려네/ 옷과 편지 봉해놓고 뜨락을 거니노라니/ 반짝이는 은하수에 새벽 별이 밝구나/ 찬 이불속에서 뒤척이며 잠도 못 이루는데/ 지는 달 만이 다정하게 병풍속을 엿보네’ ≪가을≫이다.

어느 곳에서 몇 살 때 썼는지는 알 수 없으나 20대 후반 절명하기 전 어느 해 가을 장면이다. 15살에 결혼하여 하루도 고부간에 딸처럼 다정한 모습을 보였거나 금실이 좋은 부부관계가 없었던 초희에겐 결혼생활이 시집살이 하루하루였다. 가슴이 답답하고 시집살이에 신물이 날 때마다 초희는 광상산 신선세계로 숨어들거나 화관(花冠)을 쓰고 시의 나라로 들어갔다.

시어머니 송씨와 맞서 며느리의 입지를 당당히 높일 수도 있으나 초희에게 그런 용기는 애초부터 있지 않았다. 시어머니 송씨 역시 만만한 가문이 아니다.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1910)이 봉(葑)·초희(楚姬)·균(筠) 세 남매를 특히 사랑하여 “초당 집안의 세 그루 보배로운 나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처럼 정계에서와 문화계에서 허엽의 입지는 사돈관계를 맺은 김첨의 집안과는 격이 한참 높았다.

하지만 시어머니 송씨 가문은 그렇지 않았다. 친정아버지 추파(秋坡) 송기수(宋麒壽·1507~1581)는 퇴계 이황과 절친한 관계였으며 오빠 송응개(宋應漑·1536~1588)는 허봉과 막연한 사이다. 송응개는 1583년 허봉이 갑산으로 귀양 갈 때 함께 보내졌다.

송기수는 1557년 성절사 겸 사은사로 명(明)나라에 다녀와 대사헌이 되었다. 그 후 우의정 이준경의 추천으로 윤원형(尹元衡·?~1565)이 죽자 이조판서에 올랐다. 탄탄한 학문과 고매한 인품으로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까지 승진하여 가문의 영광을 이끌었다.

초희의 시어머니 송씨의 안팎은 모두 조선 사대부 집안의 명문가문이다. 그런데 아들 김성립이 성에 차지 않았다. 반면에 며느리가 너무 뛰어나 소위 배가 아프고 속이 뒤틀렸다. 그리하여 고추보다 맵다던 고부간의 사이는 세월이 더 할수록 더더욱 맵게 보였다. 평범한 며느리가 들어와 알뜰한 내조로 남편 김성립이 밖으로 나돌지 않도록 희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초희는 그렇지 못했다. 시어머니 송씨는 아들 김성립의 함량 미달은 생각지도 않고 며느리 초희의 뛰어난 시문학이 아들에게 오히려 학문에 대한 환멸을 느끼게 하여 밖으로 나돌게 된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는 식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의 사대부집 남존여비의 온존한 풍습의 아낙으로 살기를 바란 송씨의 생각에 초희는 너무나 먼 거리에ㅔ 있었다. ‘연밥과 가시가 커서 옷을 잡아 끄는데/ 해 지는 물가에 조수는 빠지지 않네/ 연잎으로 머리를 덮어 화관을 하고/ 연꽃으로 띠를 둘러 노리개 삼네/ 연꽃 향기 시들고 비바람 잦은데/ 아리따운 아가씨들 ≪죽지가≫를 부르네/ 돌아올 무렵 횡당 어구에 해는 저버려/ 안개 속에 노 젓는 소리만 삐걱 거리네’ ≪횡당 못가는 노래≫다. (시옮김 허경진)

횡당은 강소성 양주(현 남경) 교외에 있는 뚝(堤防)이다. 장간리(長干里)라는 환락가가 이곳에 있어 남녀간의사랑의 노래가 많이 읊어졌다. 연밥을 따는 관습은 시집 갈 나이의 처녀들이 짝을 찾는 암시로도 많이 쓰였다.

아마도 이 시를 쓸 때의 초희의 심정은 결혼하기 전 집안 풍경인 사랑방에 매곡을 비롯한 오빠 친구들이 많이 오갔을 당시를 반추(反芻)했을 것으로 보인다. 푸르디푸른 젊은 남녀들의 사랑의 감정을 가감 없이 토해내며 인생을 즐겼으면 얼마나 신명 났을까 생각을 하고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을 장면이다.

그러나 천리만리 이국땅에 있는 사랑의 노래를 마음껏 불렀을 장단리를 마음속으로 그리며 시를 썼을 터다. 아니 광산산의 신선세계에서 마음껏 몸과 마음을 위로 받았지 않았을까 보여지기도 한다.

초희는 이승과 신선세계 문턱과 시의 세계를 마음만 먹으면 언제고 드나들 수 있는 마법(魔法)같은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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