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안의 풍치 좋고 많은 사람들의 발길 닿는 곳에 매창의 시비(詩碑)가 세워졌다. 대표적인 곳이 매창공원과 성황산(城皇山) 서림공원이다. 그곳엔 여러 개의 시비가 아름다운 영혼을 위로하고 있다.
화려한 꽃의 아름다움과 꿀에 매료되어 벌나비가 날아들 듯 매창 주위엔 시인 묵객과 권세가들이 끊이지 않았다. 노비시인 유희경, 김제군수 이귀, 전라관찰사 한준겸(韓浚謙·1557~1627), 부안현감 윤선(尹銑·1559~1637), 공주목사 허균, 그리고 천민시인 백대붕(白大鵬·15501592)등이 그녀 주위에서 서성댔다.
인향 때문 이였으리라... 아니 재항(才香)에 취해 풍류객들이 밤마다 주지육림의 풍류를 즐기려 했지 않았을까? 예나 지금이나 마초(남자다움)들의 성정은 크게 변함이 없어서다. 여자가 남자를 좋아하고 남자 또한 여자를 사모한 것이 무슨 죄일까?
조선조는 억불숭유(抑佛崇儒)의 성리학의 나라다. 매창이 살았을 때는 임란(1592)이후 남녀칠세부동석의 엄격한 사회규율이 어느 정도 와해되었던 시대다. 그래서인지 중인(中人)들을 비롯한 하층민들도 어느 정도 신분이 상승되는 분위기로 옮아갔다.
유희경, 백대붕 등이 풍월향도(風月香徒)란 시단(詩壇)의 활동도 사회흐름의 변화를 말함이다. 성리학의 나라 사대부 중심사회에서 천민출신들이 중심이 된 시단이 한양에서 버젓이 활동할 수 있을까? 개화바람이다. 그 중심에 유희경과 백대붕 이였었다. 그리고 그들을 사랑했던 천재여류시인 매창이 불을 질렀다.
매창의 인향은 시와 노래, 그리고 거문고와 춤에서 아침 안개모양 피어났다. 전라감찰사 한준겸의 부임 후 생일잔치에 부안현감 윤선이 매창을 대동하고 참석한다. 매창을 본 유천(柳川·한준겸의 호)은 대뜸 시를 읊는다.
‘두견이 울음소리 어찌나 괴로운지/ 장안의 길 모두 통하지 않네/ 돌아가고자 하는 생각이 천고의 한이러니/ 새벽바람에 실려 오는 피를 토하는 울음소리/ 달빛 밝은 도산의 새벽/ 찬 하늘 은하수도 텅 비었어라/ 외로운 신하는 재배하며 눈물 흘리는데/ 홀로 술마시니 어지러운 구름속에 있는 듯....“ ≪자규새의 울음소리를 듣고 느낌있어≫다.
즐거운 생일잔치에 한양 구중궁궐에 있는 임금에 대한 시(詩)인듯하다. 흥겨워해야 할 분위기에 침울한 잔치다. 부안현감인 윤선이 매창을 데리고 간 것은 관찰사(현 도지사)에게 잘 보이기 위한 로비를 한 것일 게다. 윤선의 눈치와 유천의 표정을 읽은 매창이 거침이 없다.
‘이곳은 신선이 사는 산과 가까이 접해있고/ 시냇물은 흘러 약수와 통했네/ 벌들은 따뜻한 봄날을 날아다니고/ 돌아온 제비는 맑은 바람에 지저귀네/ 오묘한 춤사위로 꽃 그림자를 흘리게 하고/ 고운 노랫소리는 벽공을 울리지/ 반도 복숭아를 서왕모에게 바치며 장수를 비나니/ 모두 술잔을 들어 축수하리라!’ 역시 매창이다. 유천의 시에 ≪한준겸이 생일잔치에 지은 시에 차운(次韻하면≫에 화답한 폭포수 같은 시다.
아마 윤선은 그날 유천에게 톡톡히 후한 점수를 받았을 것이다. 매창이 기생신분이었으나 풍류객들이 오고갔을 것은 자명할 터다. 이름난 기생에게 풍류객들이 아름다운 꽃에 벌나비들이 날아들 듯 모이지 않으면 그 또한 이상하지 않은가...
매창에게 사내들이 꼬였다. 유희경이 찾아와 정인(情人)이 된 후 임란이 발발하여 만남이 뜸해졌다. ‘노류장화’라 했다던가! 윤선이 한준겸에게 매창을 소개했듯이 기생의 몸은 자신이 제 몸의 주인이 아니다. 매창은 유희경, 이귀, 허균, 심광세(沈光世·1577~1624), 권필(權韠·1569~1612), 임서(林揟·1570~1624)등과도 시를 주고받았다.
‘대나무 숲에 봄이 깊어 새들이 지저귀는구나/ 눈물로 지워진 화장자국 보일까 휘장으로 창문을 가렸는데/ 거문고 글어다가 상사곡을 연주하니/ 봄바람에 꽃이 떨어지고 제비들은 비켜나네요...’ 매창의 ≪봄날을 원망하며≫다.
이에 심광세 역시 ‘깊은 시름 꿈에서 깨는 경우 많은데/ 눈물이 그렁그렁하여 베개를 흥건히 적셨네/ 땅에 가득 떨어진 꽃잎들 봄빛도 지나가는데/ 발 사이로 가랑비 내리고 향대에 꽂힌 향에서 연기가 비끼네’ ≪계랑의 시에 차운(次韻)하며≫에 심광세가 화답한 시다.
그는 시 말미에 매창을 뛰어난 시기(詩妓)라는 첨언을 빠뜨리지 않았다. 물론 당시 매창은 시기로서 확고한 명성을 누리고 있을 때다.
비록 그들이 사대부와 기녀 사이지만 신분의 관계를 뛰어넘어 서로 경외(敬畏)하는 남과녀 사이일 게다. 형이상학적인 친구관계일 것이다. 정인(情人)이란 연인관계에 있는 사람, 정사(情事)의 상대란 것인 사전적 의미다.
허균이 이귀는 매창의 정인이라 했다. 소위 애인이란 뜻일 게다. 허균이 이귀가 매창의 정인이라 했으나 정작 매창이 이귀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객관적으론 수절을 할 정도로 사랑을 했던 유희경만이 진정한 정인이 아니었었나 추론을 할 뿐이다. 그녀의 주위엔 풍류를 즐기는 사내들 중엔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인물들도 허다했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살을 섞는다고 모두 정인이 아니다.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었을 때 진정한 연리지(連理枝)란 관계의 정인이라 호칭할 수 있는 사이일 게다.
매창이 이승을 떠난지 400여년이 지났는데도 문화예술계는 당시보다 더 뜨겁게 르네상스 되는 것은 그녀가 비록 기녀신분이었으나 높은 덕성과 아름다운 성정으로 고고한 인품에 만인이 매료하는 시를 비롯한 노래와 거문고, 그리고 춤사위를 남겼기 때문이다.
육신은 이승을 떠났어도 그녀의 영혼은 문화예술창작 에너지로 더욱 강렬하게 문화예술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매창은 거문고를 함께 묻어 달라 하였다. 평생 반려가 거문고였었다. 오늘도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이들의 귀엔 그녀의 아름다운 거문고의 음률이 들릴 것이다. 그녀의묘는 1983년 8월 지방문화재 제65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