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반의 나라에 이중성이다. 일곱 살만 되면 같은 자리에 앉으면 안 되는 나라에서 어떻게 아들 딸 낳아 옹기종기 행복한 가정을 꾸렸을까? 억누르면 더 튀고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심리다.
길가에 주인 없는 아름다운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데 슬쩍 꺾어 집으로 가져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그게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또한 예쁜 여인이 있는데 그냥 한 번 쳐다보지도 않고 스쳐 지나간 사내가 있다면 그 남정네를 정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랬다. 조선후기 사회에 이매창·이옥봉(1552~1592)·계월향·황진이(1520~1560) 등과 같은 걸출한 기생여류문인이 탄생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이다. 인간이 살고 있는 곳엔 자연스런 현상으로 삼욕(三欲:식욕·성욕·수면욕)이 꿈틀댄다.
그런데 당시 조선에선 성욕은 외견상으론 금기시 되었다. 밤이면 밤마다 질펀하게 욕망을 불태우면서도 기생집을 나서면 시치미를 뚝 떼었다. 이중성 사회다. 그런 사회 흐름이 조선이었으며 후기에는 그 상황이 더욱 심하였다.
매창이 그런 시대에서 꽃피워진 천재 기생 여류문인이다. ‘배꽃 눈부시게 피고 두견새도 우는 밤/ 뜰에 가득 달빛어려 더욱 서러워라// 꿈에 만나려도 잠마저 오지 않고/ 일어나 매화핀 창가에 기대니 새벽닭이 울어라// 대숲엔 봄이 깊고 날 밝기도 멀었는데/ 사람도 없는 뜨락엔 꽃잎만 흩날려라// 거문고 빗겨 안고 강남 가신 님 노래를 뜯으니/ 끝없는 시름으로 한 편의 시를 이루었어라... ’ ≪규중에서 서러워하네≫다.
매창이 교우한 사내는 유희경 외에도 이귀(李貴·1557~1633)·허균(許筠·1569~1618)등도 있었다. 하지만 뼈가 녹는 운우지정을 만족시켰던 남정네는 유희경뿐이었을 것이다.
이 시는 매창이 유희경을 학수고대 밤마다 기다렸을 심사다. 하지만 유희경은 한양에 올라간 후 풍월향도(風月香徒)에 심취해 있다. 침류대(枕流臺)에는 서출과 천민출신 풍류객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나 신분을 뛰어넘는 교류장으로 사대부들도 있었다.
이수광(李晬光·1563~1628)·신흠(申欽·1566~1628)·임숙영(任叔英·1576~1623)·이정구(李廷龜·1564~1635)·권필(權韠·1569~1612)등 장안에서 뜨르르 하는 사대부들과 문필가들이 참가하여 시(詩會)를 더욱 빛냈다. 부안에서 매창과 황홀한 사랑을 만끽하고 한양으로 올라온 유희경은 풍월향도들과 어울려 신선놀음 같은 풍류에 젖었다.
한편 부안의 매창은 하루하루를 여삼추 같이 보내면서 유희경이 와주길 학수고대하고 있다. 그럴 즈음 어느 가을 저녁 무렵이다. 허균이 찾아왔다. 매창이 네 살 연하다. 사랑을 하기로 마음을 먹으면 딱 맞는 짝이다.
하지만 그들은 형이하학 쾌락의 파트너가 아니고 형이상학의 연리지(連理枝)다. “허허허! 친구... 이 좋은 날씨에 집에만 있으면 어떻하나! 어서 나갈 채비를 하소.... 나귀가 대기하고 있소이다.” 그들의 행동에 거침이 없다.
금슬 좋은 부부같이 그들은 변산의 명소인 채석강·적벽강·내소사·개암사·직소폭포 등으로 산책길에 나섰다. 매창은 나귀에 올랐고 허균은 종자(從者·따라 다니는 사람)가 되었다. 점심도 거른 채 주마간산 식으로 직소폭포와 적벽강 등을 구경하고 집으로 왔을 때는 땅거미가 추녀 밑에 내려앉기 시작하였다.
“피곤하시죠? 사대부 어른...” 깍듯한 예의다. “아니오. 모처럼 빼어난 산천경개를 봤더니 가슴이 펑 뚫리는 기분일세! 이제 술이나 한잔하면 금상첨화일세....” “그렇게 하세요! 오늘 저녁엔 소녀가 손수 빚은 매창주(梅窓酒)를 올리고 거문고와 소리로 분위기를 띄워 드리겠습니다.!” 허균이 매창의 꾀꼬리 같은 음성에 호랑나비의 날갯짓 모양의 춤과 거문고 선율에 넋을 빼앗겼다. “과연 매창이로다!” 춤과 소리가 끝날 때마다 무릎을 치며 탄성을 연발했다.
1601년 7월 23일 밤이다. 허균이 전운판관(轉運判官·양곡을 한양으로 옮기는 직책)으로 부안에 내려온 때다. 매창은 허균의 방에 질녀에게 잠자리를 양보했다.
먼동이 트자 허균은 매창의 따뜻한 배웅을 받으며 공무길에 올랐다. 천재 허균은 그날 이후 평생도반(道作·사상을 동행하는 벗)으로 매창을 생각했다. 허균만이 매창을 아끼지 않았다. 시조시인·국문학자 이병기(李秉岐·1891~1968)는 매창을 이렇게 읊었다. ‘돌비는 낡아지고 금잔디 새로워라/ 덧없이 비와 바람 오고가고 하지마는/ 한분의 향기로운 이 흙 헐리지 않는다// 이화우(梨花雨) 부르다가 거문고 빗겨들고/ 등아래 홀로 앉아 그 누구를 생각하는지/ 두 뺨에 젖은 눈물이 흐르는 듯하구나// 라삼상(羅衫裳) 손에 잡혀 몇 번이나 찢었는지/ 그리던 운우(雲雨)도 스러진 꿈 되고/ 그 고운 글발 그대로 정은 살아 남았다.’ ≪매창뜸≫이다.
매창은 기녀의 몸으로 한 사내를 위해 목숨처럼 정절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쳤다. 유희경은 매창과 꿀맛 같은 사랑을 나눈 후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의병을 모아 전선에 나갔다. 혁혁한 전공을 올려 면천(免賤·천민신분을 벗어남)하여 사대부들과 더욱 활발한 교류를 하였다.
유희경은 당시 조선사회에서 비주류(주류·사대부)였으나 풍류객으로 높은 유명세로 주류사회에서도 존경받는 대시인 이였었다. 때문에 매창도 촌은을 위해 정절을 지켰으리라...
풍월향도는 유희경이 좌장(座長)이었다. 풍월향도는 삼청시사(三淸詩社)로 이어져 중인·평민 문학인 위항문학(委巷文學)의 시발이 되었다. 어쩌면 유희경이 면천되어 당대에 걸출한 사대부로 제2인생을 살게 된 것도 매창의 숭고한 사랑에 보답하려는 대시인의 지조(志操)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