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잘못일까?
“안과입니다. 선생님이 주신 전화 메시지를 받고 연락드립니다.”
“전화주셔서 고맙습니다. 제 눈에 홍채염이 다시 생겨 프레드니솔론 (prednisolone) 안약이 필요해서 전화드렸습니다. 집에 안약이 있기는 한데 유효기간이 지나 버렸네요.”
피곤해서 그랬는지 오늘 홍채염 (iritis)이 다시 시작됐다. 홍채염은 프레드니솔론과 같은 스테로이드계 안약을 이용해서 치료한다. 증상이 시작되었을 때 사용하기 시작해서 증상이 완전히 사라지면 중단한다. 즉, 증상이 있을 때에만 안약을 사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증상이 언제 시작될 지 모르므로 프레드니솔론 안약을 항상 구비하고 있어야 한다. 오늘 집에서 확인해 보니 안 뜯은 프레드니솔론 안약이 하나 있었다. 하지만 유효기간이 3개월 지난 것이라 사용하기가 좀 찜찜했다. 그래서, 안약을 처방한 안과에 전화를 했던 것이다.
“선생님의 리필 기록을 보니 작년에 약을 타 가셨군요.”
“그렇습니다.”
미국은 처방약 리필제도가 있다. 즉, 의사를 만나지 않고도 약국에서 기존에 처방받았던 약을 다시 탈 수 있는 제도다. 예를 들어, 의사가 A라는 약을 30일분으로 다섯 번 리필할 수 있다고 처방하면 환자는 의사를 만나지 않고도 30일마다 약을 약국에서 다섯 번 더 탈 수 있다. 이론적으로는 최대 180일분 – 처방 당일과 다섯 번의 리필 등 총 여섯 번 - 의 약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향정신성 의약품을 제외한 일반적인 처방약의 경우, 리필이 허용되는 기간은 처방날짜로부터 최대 1년이다. 내가 작년에 프레드니솔론 안약을 처방받았을때 의사는 세 번의 리필을 허용했지만 나는 그동안 리필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동안 홍채염이 재발하지 않아서 처방받아 가지고 있던 안약을 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리필이 아직 세 번 남아 있었더라도 의사가 처방전을 발행한 지 15개월이 되었기 때문에 리필을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의사의 새로운 처방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약은 안압을 올릴 수 있어서 안과 의사 선생님을 뵌 다음에 새로운 처방을 받아야 합니다.”
“언제 안과 선생님을 볼 수 있을까요?”
“선생님은 그동안 P 의사 선생님이 보셨는데 그 분이 떠나서 다른 분을 만나셔야 할 것 같아요. 가장 빨리 볼 수 있는 날이 11월입니다.”
“11월이면 지금으로부터 3개월 뒤인데요. 너무 늦습니다. 당장 약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동안 안압 검사를 받아 왔고 모두 정상이었어요.”
“의무기록을 보니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안압검사를 받으신 게 15개월 전이네요. 그 때, 의사 선생님이 9개월 뒤에 재진해야 한다고 의무기록을 남겼네요. 그런데, 재진 기록이 없군요.”
“저는 안과로부터 연락받은 적 없습니다.”
“저희 안과에서는 환자가 9개월이 지나도 연락을 받지 않으면 환자가 저희에게 직접 연락하도록 하고 있는데 왜 연락 안 하셨나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자기들이 재진 스케줄을 만들어 놓지 않았는데 환자인 나한테 책임을 미루고 있네.
“아니, 재진 스케줄을 만들지 못한 안과 책임이 아닌가요? 저는 안과에 그런 방침이 있다는 것을 오늘 처음 듣습니다. 환자한테 방침을 미리 알려주고 난 다음 책임을 물어야 하지 않나요?”
“선생님, 본인의 건강을 돌볼 책임은 환자 자신에게 있습니다. 다음부터는 9개월이 지나도 저희로부터 연락을 받지 못하면 저희한테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황당했다. 자신들이 잘못해 놓고도 (사과를 요구받지 않는 한) 고객에게 절대 사과하지 않는 것은 미국에서 흔하게 보는 일이다. 고객 (환자)한테 오히려 책임을 미루다니 한 술 더뜨는 것 아닌가.
내 클리닉에서도 환자의 재진 스케줄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적이 있었다. 클리닉에서 재진 스케줄은 의사, 간호사 등 건강관련전문직이 아닌 일반 직원들이 담당한다. 이들은 소수의 의사를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클리닉을 모두 담당한다. 내가 일하는 샌프란시스코 종합병원의 가정의학과 클리닉의 경우, 직원당 하루에 200~300 명의 재진 스케줄 요청을 받는다. 이처럼 직원이 담당해야 하는 재진 스케줄 수가 많기 때문에 가끔 빼먹는 경우가 생긴다. 또, 재진 스케줄을 원하는 날짜에 만들려면 이를 넣을 수 있는 클리닉의 스케줄 템플레이트 (template)가 병원 전산시스템에 먼저 만들어져야 한다.
내 경험으로는 오늘로부터 3~6개월까지 클리닉의 스케줄 템플레이트만 쓸 수 있는 것이 보통이다. 9개월 뒤의 재진 스케줄은 오늘 내가 직원에게 요청하더라도 만들 수 없다. 직원이 이를 기억하거나 따로 메모해 두었다가 요청한 날짜의 클리닉 템플레이트를 쓸 수 있을 때 재진 스케줄을 넣어주지 않는 이상 9개월 뒤의 재진은 스케줄이 안 될 가능성이 크다. 즉, 안과가 내 재진 스케줄을 만들지 못한 것은 이러한 안과 전산시스템의 문제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나한테 전화한 안과의 간호사의 입장에서 보면 이 전산 시스템 문제는 자신이 일으킨 것이 아니다. 또, 자신이 재진을 9개월 뒤에 해야 한다고 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이 재진 스케줄을 담당하지도 않는다. 나의 재진 스케줄이 만들어지지 않은 것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기에 사과하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간호사는 나와의 통화를 환자 교육의 기회로까지 보았다.
고객인 나의 입장에서 보면, 그 간호사는 문제를 일으킨 조직의 일원이다. 나는 재진 스케줄이 만들어지지 않은 것을 조직의 책임으로 보기 때문에 (“안과 책임이 아닌가요?”) 조직의 일원인 간호사가 환자와 통화할 때 조직을 대표하여 사과를 해야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시각의 차이는 어떻게 보면 개인주의가 특징인 미국 문화와 집단주의의 영향이 큰 한국 문화의 다른점에서 비롯되는 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2007년 미국 버지니아 대학교에서 한국계 미국인 학생이 총기사건을 일으켰을 때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미국 웹사이트에 한국인을 대표해 사과한다는 댓글을 달았었다. 이에 대해 많은 미국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마치 간호사가 사과하지 않는 것을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어쨌든 제가 오늘 약이 필요하니 어떻게 좀 도와주시겠어요?”
“제가 일단 의사 선생님에게 연락을 해 보고 다시 연락을 드릴께요.”
한 시간 뒤에 간호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의사 선생님이 새 처방을 약국에 보냈으니 약국에서 약을 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저희 안과에서 따로 안압검사 일정을 잡기 위해 연락을 드릴 것입니다.”
사과는 받지 못했지만 약을 받을 수 있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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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신재규 교수
-서울대 약학대학, 대학원 졸업
-University of Florida Doctor of Pharmacy-University of Miami Jackson Memorial Hospital Pharmacy Practice Residency
-Universityof Florida Cardiovascular PharmacogenomicsFellowship
-현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임상약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