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참혹함, PTSD
‘고참병장 증후군(Old sergeant’s syndrome)’이란 표현이 있다. 1947년 레이먼드 소벨이라는 의사가 참전 용사들을 진료하면서 남긴 표현이다. 전우를 잃은 베테랑이 갈수록 신참에게 마음을 열지 못하고 고립되는 심리적 상태를 말한다. 정 붙였던 동료가 다음날 죽어가는 상황을 계속 겪으며 자연스럽게 마음의 문을 닫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버티지 못 하는 게 전쟁터다. 죽느냐 사느냐의 참혹함이 느껴진다.
전쟁터의 참혹함이야 새삼스럽긴 해도, 과거에는 어느 정도의 선이 있었다. 죽음은 고결하고 신사들은 약속을 지키는 그런 전장이었다. 하지만 전쟁도 변하는 법. 고도화하는 무기와 체계화되는 전술 속에서 전쟁은 갈수록 참혹해져 갔다. 화학무기를 살포하고 기관총을 난사하며 민간인과 포로를 학살하는 전장에서 고결한 죽음을 찾기는 불가능하다. 20세기의 전투는 이 정도는 해야 이기는 전장으로 빠르게 진화(?)했다. 하지만 사람은 빠르게 진화하지 못 한다. 전장의 참상은 참전 용사들의 뇌리에 강력하게 각인되었다.
전쟁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참전 용사들은 나약한 개인으로 치부되기 일쑤였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란 대규모 전장을 경험하며 사람들은 전쟁 후유증이란 증상이 꽤 많은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곧이어 치러진 한국전쟁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이어지자 미국정신의학협회에서는 1952년 발간한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 DSM)’을 통해 전쟁 후 겪는 후유증을 ‘종합적 스트레스 반응(gross stress reaction)’으로 규정하였다. 1968년 발간된 DSM-2에서는 이러한 내용이 빠지는데 1980년 발간된 DSM-3에서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라는 비교적 친숙한 이름으로 다시 등장한다. 우리가 통칭 PTSD라고 부르는 증상이다.
PTSD가 새로이 규정된 계기로 보통 꼽는 것이 베트남전쟁이다. 베트남전쟁은 그전까지 미군이 경험했던 전쟁과는 완전히 다른 전쟁이었다. 우선 명분이 약했다. 공산주의의 확장을 막는다는 큰틀에서의 전략이야 그렇다쳐도 전쟁에서 중요한 것은 직접적인 명분이다. 미국이 베트남전쟁에 참전하게 된 직접적인 명분은 1964년 있었던 통킹만 사건이다. 미군함이 공격받은 사건을 계기로 미국이 베트남전쟁에 직접 들어왔다. 그런데 이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사실이 1971년 드러났다.
전쟁의 참혹함도 다시 한 번 부각되었다. 당시 미군은 민간인 속에 숨어 있는 간첩, 이른바 베트콩을 소탕하기 위해 민간인을 학살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무리한 전략이 미국 본토에 보도되며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움직였던 그간의 미군과는 다른 평가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이어지자 미국 내에서 반전 운동이 전개되었다. 명분도 없고, 올바르지 않은, 그것도 머나먼 이국 땅의 전쟁에서 왜 자국 젊은이들이 죽어 나가야 하느냐는 근본적인 물음을 사람들은 정치권에 던지게 되었다.
그리고 졌다. 10년 넘게 50,0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내며 이어온 전쟁이었지만 결국 졌다. 그러자 그전까지의 전쟁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장면이 귀국 후 벌어졌다. 참전 용사들에게 살인마라며 비난이 쏟아진 것이다. 전장에서 온갖 고초를 겪으며 힘겹게 생환한 군인들이었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차갑기 그지 없었다. 이후 취업에서도 어려움을 겪어야 했던 제대 군인들은 전장의 참혹함과 귀국 후의 냉대 속에서 트라우마에 시달려야 했다. 이때가 1970년대 후반이다.
고전 영화, 람보 1탄에서 주인공 존 람보는 베트남전쟁 참전 용사다. 종전 후 사회에 정착하지 못한 람보는 같은 전투원이었던 동료를 찾아오지만 그 동료가 이미 암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에 허탈해 한다. 이후 부랑자처럼 정처 없이 거리를 걷던 람보를 경찰이 구금하고 심문하면서 베트남전쟁의 트라우마를 떠올린 람보는 반사적으로 경찰을 제압하게 되고 경찰과 람보의 대치가 이어진다. 인근 산속으로 도망친 람보는 전쟁 영웅으로서의 스위치가 켜지고 이때부터 지역 경찰 및 군대와의 교전이 이어진다. 우리는 람보를 영화 속 히어로 캐릭터로 생각하고, 실제 람보 2탄부터는 이런 특징이 맞긴 한데, 람보 캐릭터의 시작은 PTSD에 시달리는 안타까운 제대 군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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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백승만 교수는 서울대학교 제약학과 졸업후 동 대학원에서 생리활성 천연물의 화학적 합성에 관한 연구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사우스웨스턴 의과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11년부터 경상국립대학교 약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의약화학을 강의·연구하고 있다. 현재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를 연구 개발하고 있으며 약의 역사도 함께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 ‘분자 조각자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