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롱제비티(Longevity) 시대, 약국의 진짜 경쟁력
이현이 자티스 대표, ‘Z이론’으로 읽는 일본 약국의 ‘인간중심’ 경영 전략
이종운 기자 news@yakup.co.kr 뉴스 뷰 페이지 검색 버튼
입력    수정 최종수정 2026-08-03 14:29

롱제비티(Longevity) 시대, 약국의 진짜 경쟁력                                                                                                                                                    

100년 역사, 일본 조제약국의 본질
 

일본의 약국은 크게 두 형태로 나뉜다. 1889년 근대적 의미의 약국으로 출발해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역 의료 인프라로 기능해 온 ‘조제약국’과,  1970년 미국 월그린(Walgreens)의 영향을 받아 마츠모토 키요시와 같은 유통·리테일 혁신에서 출발한 50여년 역사의 ‘드럭스토어’다.
2010년에 들어서며 식품과 잡화로 고객을 확보한 대형 드럭스토어들이 조제 병설형 융합 점포를 확대하며 시장 규모 약 10조엔의 거대 공룡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고령화와 지역포괄케어가 한층 심화된 지금, 시장은 단순한 리테일의 편의성만이 아닌 100년 역사 속에 담겨있는 본질을 요구하고 있다. 약사와 환자(고객) 사이에 축적된 약과 건강에 대한 안전안심의 깊은 신뢰를 약국에 기대하고 있다. 
한편, 일본의 조제약국은 주식회사(법인)가 개설 및 소유가 가능하고 약사를 직원으로 채용하는 등 기업형 직영 체인의 형태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구조는 조제약국을 하나의 경영 전략 단위로 만드는 배경이 되고 있다.

■ 일본 주요 조제약국 체인 현황(2025년 3월 기준)

Source. 각 기업 2025년 3월기 결산 자료 및 DRUG magazine, ‘의약품 산업 랭킹2025’(2026.07.01) 참고하여 작성.


‘Z이론’, 약국 DX화 시대의 경영 전략 핵심에 ‘사람’이 있다
 

일본의 조제약국들 역시 적극적으로 DX를 추진하고 있다. 후생노동성의 통계에 따르면 2025년 11월 기준 전자처방전 도입율은 86.5%에 달하며, 조제 로봇, AI재고관리, 역사 내 스마트 로커 등 수가 인센티브와 정책 로드맵을 바탕으로 인프라를 착착 구축해 가고 있다. 
그러나 제도도 기술도 결국 사람을 통해 구현되고 작동한다. 로봇이 처방전에 따라 약을 피킹할 때, 약사는 고객의 표정과 생활변화, 복약을 포기하려는 마음 등 기술이 읽어낼 수 없는 행간을 헤아린다. DX가 가속화될수록 역설적으로 약사라는 ‘사람’의 역할이 약국 경영 전략의 중심에 있는 이유이다. 그러한 관점의 뿌리를 미국 UCLA 경영대학원의 윌리엄 오우치(William G. Ouchi) 교수가 1981년 발표한 경영학의 고전 에서 찾을 수 있다. 

일본계 미국인이었던 오우치 교수는 오랜 시간 일본과 미국 기업을 비교 연구하며, 단기적 성과와 기계적 효율성에 치중하는 미국식 ‘A타입’ 경영과 달리, 구성원의 직업적 삶은 물론 개인적·사회적 삶 전반에 진정한 관심을 기울이는 Z타입의 전인적 관심이 구성원의 동기유발로 이어져 생산성이 강화된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밝혀냈다. 즉, 1980년대 미국을 압도하던 일본 기업의 생산성 비결이 단지 기술이나 자본이 아닌 ‘사람에 대한 전인적 관심’에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러한 오우치의 Z이론은 기업 경영을 넘어 일본 사회 전반에 흐르는 문화적 맥락과 닿아 있다. 집단적 의사결정, 현장 지식의 존중, 구성원에 대한 장기적 투자 등 일본이 고도성장기를 거쳐 현재의 초고령사회에 이르기까지 일본 사회 전반의 시스템을 유지해 온 방식이며, 이러한 맥락이 DX화 속에서도 약사라는 사람을 그 중심에 두고 있는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다.
 

물론 오늘날 디지털 경제 환경에서는 Z이론의 장기고용·집단주의·암묵적 규범이 민첩한 혁신과 디지털 전환을 제약할 수도 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따라서 그 한계를 전제로 하면서, 약국이 조제업무라는 이른바 A타입의 대물관리를 DX에 인계하고, 약사가 환자를 Z타입의 전인적 존재로 케어하도록 하는 재해석 지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의 전인적 관심이 일본 약국 제도 안에서 구현된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전담약사(かかりつけ薬剤師, 카카리츠케 약사, 이하 전담약사 )’제도라고 볼 수 있겠다.

 

‘전담약사(카카리츠케 약사)’, 제도로 완성된 Z이론과 조제약국 업계 동향

일본에서 Z이론의 ‘사람에 대한 전인적 관심’이 제도로 구현된 대표적인 사례로서 ‘전담약사’ 제도라 할 수 있다.
2015년 후생노동성은 ‘환자를 위한 약국 비전’을 통해 약국의 기능 및 약사 업무를 조제기능의 대물 중심에서 맞춤형 케어 기능의 대인 중심으로 전환할 것을 선언했다. 후생노동성이 정의하는 전담약사란, 환자가 여러 의료기관에서 처방을 받더라도 단 한 명의 약사를 지정하여 복약 이력과 잔약 관리, OTC 의약품 및 건강식품과의 상호작용까지 일원적·지속적으로 통괄 관리받는 전담 헬스케어 파트너를 의미한다. 

■전담약국 및 전담약사 이미지

 


전담약사로 지정을 받기 위한 요건 또한 엄격하다. 3년 이상의 보험약국 실무 경력, 해당 약국 주 31시간 이상 및 연속 6개월 이상 재직, 연수 자격 취득 및 지역 의료 활동 참여 등, 약국 차원의 시설 지정뿐 아니라 약사 개인과의 장기적 신뢰를 제도적 수가로 인정해 주는 구조다. 이는 단순한 복약 지도를 넘어 환자의 삶 전반에 관여하는 Z이론의 전인적 케어가 국가 제도화된 명확한 사례다.
나아가 2026년 6월 조제보수 개정에서는 이를 한 단계 더 심화해 약국 문을 나선 환자의 삶에 지속적으로 관여하도록 평가 방향 및 체계를 전환했다. 전화 팔로업, 재택 방문, 잔약 조정, 복약 상황 총괄 관리 등 실질적인 대인 케어에 가치를 부여하는 방식이다. 처방전 응대 수량에서 제공하는 의료 질과 환자와의 장기적 관계로, 약국이 어디에 있는가보다 지역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로 전환된 것이다.
경영적 관점에서 전담약사 제도는 약국에 거대한 파급효과를 가져온다. 처방전 발생 여부에 의존하던 수동적 경영에서 벗어나, 환자의 생애주기 전반을 케어하며 고정 고객을 확보(Lock-in)하는 ‘관계형 경영’으로의 체질 개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실제 일본의 상위 조제약국 체인 기업들의 움직임에서도 이러한 전환을 읽을 수 있다. 업계 1위의 아인 홀딩스(Ain Holdings)는 2025년 통합보고서에서 'DX를 통한 업무 효율화'와 '대인 서비스 강화를 위한 인재 투자'를 경영의 핵심 축으로 선언했다. 조제 로봇 등의 도입으로 대물 업무 시간을 줄이는 만큼, 확보된 시간동안 약사가 환자의 다약제복용(Polypharmacy) 및 생활습관을 장기적으로 추적·관리하는 '전담약사 연수 프로그램'에 집중하고 있다.
또한, 선제적인 DX로 유명한 니혼초자이(Nihon Chouzai)는 모바일 헬스케어 플랫폼 ‘오쿠스리 테초(전자 약 수첩) Okusuri Plus’를 운영한다. 전자 처방전 수신 이외에도 AI가 분석한 환자의 복약 이행 데이터를 바탕으로 약사가 비대면으로도 환자의 일상 건강 상태를 지속해서 추적 관리하는 체계를 통해 약사와 환자가 24시간 연결되는 이른바, 디지털 기반 전인적 관계를 구현했다.
업계 3위의 쿠오르 홀딩스(Qol Holdings)는 유통업체 및 편의점 로손과 결합한 병설형 약국으로 접근성을 높이고, 지역포괄케어시스템의 중점 항목인 재택의료관련 재택 전문 약국을 전개하고 있다. 약사가 조제실 밖으로 나와 지역 사회의 다직종(의사, 방문간호사, 사회복지사) 케어 팀에 참여하며 왕진에 동행하거나, 거동이 불편한 고령 환자의 가정을 방문하는 재택약료(방문약료) 서비스에 주력하고 있다. 아울러 일반 의약품 등을 직접 배송하는 ‘이동 판매 서비스’도 실시하는 등, 독자적인 강점을 살린 서비스를 제공한다.

■일본 약국 조제보수 체계(2026년 개정 후)

Source. 후생노동성, ‘2006년도 진료보수개정 개요 – 조제’. (2026.07.01).

 

롱제비티 시대, 약국의 진짜 무기는 ‘약사 본연으로의 회귀’
 

오늘날 우리는 100세 이상의 생애가 표준이 되는 롱제비티 시대에 살고 있다. 과거보다 수명이 늘어난 만큼 그 시간을 건강한 상태(Well-being)를 유지하며 주체적인 다단계 삶을 누리기 위해 ‘건강수명’은 필수이다. 그리고 이러한 건강수명을 일상의 가장 가까이에서 관리해 주는 허브로서의 공간이 바로 동네 약국일 것이다. 
오우치가 제시한 Z이론의 핵심은, ‘생산성의 궁극적 원천은 기술이 아니라 신뢰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사람에 있다’는 것이다. 조제 로봇이 5초만에 약을 집어내고, AI가 재고를 예측하며, 스마트 로커가 역사에서 약을 건네는 시대에, 일본이 전담약사 제도를 더욱 견고히 하며 약사의 대인 기능을 강화하는 까닭은 분명하다. 기술이 약사를 대체하는 것이 아닌, 약사가 ‘사람과의 상호작용’이라는 어쩌면 본연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도록 돕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일본 약국 경영의 변혁이 보여주는 시사점은 분명하다. AI 시대에 약국이 가질 수 있는 최후의 무기는 첨단 장비 그 자체가 아니다. 기술을 통해 확보된 소중한 시간 위에서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쏟아붓는 가장 인간적인 ‘전인적 관심’, 그리고 이를 통해 약사 본연의 소명을 다함으로써 지역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지켜내는 롱제비티 거점으로서의 단단한 신뢰 자본이다.
한국의 약국 체인은 법제도적으로 일본의 조제약국 체인과는 상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본부가 점포를 직접 소유·운영하는 일본과 달리, 국내는 각 약국이 소상공인에 가까운 독립 사업자로서 자발적으로 가맹을 선택하는 형태가 일반적이다. 따라서 일본처럼 거대 자본의 투입으로 DX 인프라를 일괄 도입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많은 장애가 존재하므로, 기술 그 자체 역량보다 도입의 방식과 형태에 대한 상당한 혜안이 필요하다. 그러나 Z이론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약사 본연의 역할이다. 약사와 환자라는 인간 중심 관점에서의 역할을 고민하고 실천하는 것이 진정한 동네 약국의 경쟁력이 될 것이다.
 

<필자소개>

이현이 대표

필자는 일본 비즈니스 전문가이자 경영컨설팅 기업 JaTIS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일본능률협회컨설팅과 국내 경제단체에서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경영혁신 컨설팅을 수행해 왔다일본의 정책·산업·시장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공공정책산업  지역 혁신인적자원 분야에서 연구와 자문을 이어오고 있으며특히 롱제비티 비즈니스와 고령사회 대응 전략특히헬스케어  의약 산업의 구조 변화에 관해 한국과 일본의 제도와 시장을 비교하며 깊이 있는 인사이트를 제시하고 있다.

 

 

전체댓글 0개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