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도는 도(道)이다
이번 설에는 사정이 있어 처음으로 성묘를 가지 못했다. 해마다 당연하게 해오던 일을 하지 못하니 며칠이 지나도 마음이 편치 않다. 그러던 중 신문에서 중국의 한 물류업체가 춘절(春節)에 고향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신해 ‘대리 세배’를 해주는 유료 서비스 상품을 내놓았다가 거센 비판 끝에 철회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웃지 못할 이야기 같았지만, 남의 나라 일 같지가 않았다.
요즘 세상은 성묘(省墓)는 커녕 살아 계신 부모님께 세배하는 일조차 부담스럽게 여기는 분위기가 되어가고 있다. 손주들이 학원 때문에 조부모를 찾아 뵙기 어렵다는 등 현실적 이유도 있지만, 이면(裏面)에는 세배나 성묘를 굳이 해야 할 일로 여기지 않는 인식의 변화가 자리 잡고 있다.
사실 자손을 사랑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자손은 그냥 예뻐서 저절로 사랑하게 된다. 그래서 자식 사랑은 지나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부모와 조부모를 사랑(恭敬)하는 효도(孝道)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예전에는 효도는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道理)였지만 오늘날에는 결코 저절로 되지 않는, 숙제처럼 억지로 실천해야 하는 덕목(德目)이 되었다. 아마 효도에 ‘길 도(道)’ 자를 쓰는 이유도 서도(書道)나 태권도처럼 도(道)를 닦듯 고되게 훈련하지 않으면 효(孝)를 행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왜 자식 사랑은 쉬운데 효도, 즉 부모 공경은 이리 어려울까? 자연을 보면 그 이치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식물도 동물도 새끼 때는 다 예쁘다. 봄의 새싹은 생기와 향기로 가득하지만, 여름을 지나 가을이 되면 푸르름을 잃고 단풍이 된다. 물론 단풍도 아름답기는 하지만 그 아름다움에는 마지막 불꽃 같은 애처로움이 묻어 있다. 닭이나 개 같은 동물들도 병어리나 강아지 때가 제일 예쁘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아기는 다 예뻐서 보면 머리를 쓰다듬고 싶고 품에 안고 싶어지지만 노인을 만나면 저절로 사랑스러운 마음이 들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흔히 사람이 죽었을 때, ‘자식은 가슴에 묻고 부모는 땅에 묻는다’는 말이 이 상황을 웅변으로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만약에 창조주께서 이 세상을 거꾸로 만들어 놓으셨으면 어찌 되었을까? 즉 아기가 노인처럼 추하게 태어나고 노인이 나이가 들수록 아기처럼 아름다워진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아마 부모들이 아기를 기꺼이 품지 않아 오래전에 인류가 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또는 자식들이 돌아가신 부모님과의 작별의 슬픔에 괴로운 삶을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자식을 땅에 묻고 부모를 가슴에 묻는 효도 과잉의 세상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아기가 아름답게 태어나고 노년에 모습이 추해지는 것은 인류의 번성과 행복을 위한 창조주의 배려인 것이다. 섭리가 그렇다면 사람은 왜 부모에게 효도를 해야 하는가? 그것은 효도가 사람의 도리이기 때문이다. 낳아주고 길러주고 가르쳤지만 이제는 힘없이 늙고 아픈 부모를 배려하고 공경하는 일은 설명이 필요 없는 인간의 마땅한 도리가 아니겠는가? 자식 사랑과 부모에 대한 효도는 부모 자식 간의 마땅한 도리이다. 내 경험에 의하면 내 말의 의미를 모든 자식들도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분명하게 깨달을 것이다.
세상의 기존 질서들이 급격하게 바뀌고 있다. 무질서화의 이 와중(渦中)에서 어떤 도리를 보존하는 것이 현명한 일인지 가려내기 쉽지 않지만 나는 효도가 몇 가지 지킬 가치가 있는 도리의 하나라고 확신한다. 기존의 모든 도리를 부정하면 인간 사회의 기본 질서가 뿌리부터 흔들릴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도리는 곧 닥쳐올 AI로봇 시대에 인류가 자신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마지막 생명줄이 될지도 모르겠다.
자식에 대한 사랑과 부모에 대한 공경(효도)이 균형을 이루는 세상, 가족사진 속에 조부모가 자연스럽게 함께하는 세상, 학원보다 성묘와 세배가 뒤로 밀리지 않는 세상, 그런 세상에서 우리 손주의 손주들이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설날 손주들에게 세배를 받고 세뱃돈을 주는 기쁨이 세세년년(世世年年) 지속되기를 바란다.

<필자소개> 심창구 교수(서울대 명예교수)는 서울대 약학대학 교수와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으로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 명예회장과 서울대 약학박물관 명예관장을 맡고 있다. 심 교수의 약창춘추 칼럼은 2007년 처음 게재된 이후 현재까지 약 400여 회 이상 집필을 이어오고 있는 가운데 그동안 3권(약창춘추, 약창춘추2, 약창춘추3) 책으로 묶여 순차적으로 발간된 바 있다. 가장 최근에 발간된 약창춘추3은 현재 교보문고를 비롯한 시중 인터넷 서점과 약업닷컴 북몰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