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5월은 스승의 달이다. 문득 나를 이끌어 주신 은사님들께 배운 교훈들이 머릿속을 스쳐간다.
1983년, 동경대학에서 학위를 마치고 서울대 약제학 교수직에 응모해 결과를 기다리고 있을 때, 몇 해 전에 은퇴하신 ‘약제학의 대부(代父)’ 우종학 교수님께서 일부러 나를 찾아오셔서 이런 말씀을 해 주셨다.
“비 오는 날이면 ‘우산 쓰고 가면 되지’ 하지 말고, 그냥 집에 있어라.”
이 말씀은 교만하지 말고 세상을 조심하며 살아야 한다는, 일제강점기와 광복, 6·25 전쟁을 온몸으로 겪어 내신 삶의 지혜이자 사랑 어린 충고였다. 약제학 연구실 생활을 비 오는 날로 비유하시면서 힘들테지만 지혜롭게 잘 견뎌내라고 하신 말씀이었다. 원래도 대범하지 못한 나였지만, 지금도 마음이 조급해질 때면 그 말씀을 떠올리며 한 박자 쉬려 애쓴다.
또 한 분, 약제학실의 두 번째 교수이셨던 김신근 교수님께서는 실용적이고도 따뜻한 조언을 많이 해 주셨다.
“머리 염색은 시작하지 마라. 한 번 염색하면 계속해야 한다. 어느 날 염색을 거르고 친구들을 만나면 ‘어디 아프냐, 왜 이렇게 늙었냐’는 말을 듣게 된다. 번거롭다.”
또 이런 말씀도 하셨다.
“차를 살 때는 흰 차는 피하라. 처음엔 예쁘지만 금방 더러워져서 세차(洗車)가 번거롭다.”
김교수님의 한의약학(韓醫藥學)에 대한 깊은 식견도 인상 깊었다.
“숙지황을 만들 때 ‘구중구포(九蒸九曝)’란 꼭 아홉 번 찌고 말리라는 뜻이 아니라, 여러 번 반복하라는 의미다. ‘구절양장(九折羊腸)’이나 ‘구중궁궐(九重宮闕)’처럼 ‘아홉’은 숫자라기보다 횟수의 많음을 뜻한다.”
또 이런 말씀도 해 주셨다.
“‘동의보감(東醫寶鑑)’의 성격을 아느냐? 허준 선생이 중국의 여러 의서(醫書)를 검토해 가장 타당하다고 여긴 처방만을 선별해 원전(原典)과 함께 소개한 일종의 종설(綜說, review article)이다. 그래서 ‘동의보감’에는 원처방이 거의 없다. 따라서 ‘동의보감 원방에 따라 만든 OOO’이라는 광고는 대부분 말이 안 된다.”
금년에 작고하신 이민화 교수님도 기억에 깊이 남는다.
“장군(將軍)을 왜 ‘제너럴(general)’이라 부르는지 아느냐? 영관급까지는 각자 병과가 있지만, 장군이 되면 병과(兵科)에 국한되지 않고 전체를 지휘할 수 있는 폭넓은 역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나의 약학관(藥學觀)과도 연결되었다. 약학사나 약사로서 경력을 시작할 땐 좁은 분야의 전문가(specialist)가 되어야 하지만, 점차 나이가 들면 약학 전반을 아우르는 제너럴리스트(generalist)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 말이다. 물론 요즘은 제너럴리스트로 졸업해서는 취직도 쉽지 않은 고도의 전문기술 시대가 되었다.
석사 과정 시절부터 나를 아끼고 지도해 주신 박만기 교수님은 말씀보다 행동으로 많은 교훈을 주셨다. 교수님은 약속이 있으면 늘 시간보다 먼저 오셨다. ‘차라리 미리 도착해 기다리는 게, 집에서 뭉개다 늦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셨던 듯하다. 생각나면 즉시 실천으로 옮기는 선생님의 부지런함은 나의 게으름을 일깨워 주셨다. 교수님은 처음부터 못 할 일은 맡지 않으셨고, 일단 맡으면 반드시 제시간에 마무리하셨다. 코로나로 갑작스럽게 소천하신 일이 아직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안타깝다.
유병설 교수님은 학문적 자존심이 높으셨다. 외국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시면 내 연구실을 찾아오셔서 자랑하셨다. 나는 교수의 논문 자랑은 당연한 일이라며 진심으로 부러워해 드렸다.
한 번은 내가 전화를 받으며 “심창구 교수입니다”라고 했더니, 유 교수님은 “그건 좀 건방지게 들릴 수도 있다. ‘심창구입니다’ 또는 ‘교수 심창구입니다’라고 하는 게 좋겠다”고 조언해 주셨다. 평소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날따라 실수했던 것이다. 유 교수님은 자연계의 저명한 교수님들을 소개해 주시는 등 여러모로 큰 사랑을 베풀어 주셨다. 췌장암으로 예순도 되기 전에 소천하신 그분이 요즘 부쩍 그리워진다.
세월이 흐를수록 스승님들의 교훈은 더 선명해진다. 그분들의 말씀과 삶의 태도가 지금도 나의 길을 바로잡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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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심창구 교수(서울대 명예교수)는 서울대 약학대학 교수와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으로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 명예회장과 서울대 약학박물관 명예관장을 맡고 있다. 심 교수의 약창춘추 칼럼은 2007년 처음 게재된 이후 현재까지 약 400여 회 이상 집필을 이어오고 있는 가운데 그동안 3권(약창춘추, 약창춘추2, 약창춘추3) 책으로 묶여 순차적으로 발간된 바 있다. 가장 최근에 발간된 약창춘추3은 현재 교보문고를 비롯한 시중 인터넷 서점과 약업닷컴 북몰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