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약학의 특성 12: 교육의 깊이와 너비
이종운 기자 news@yakup.co.kr 뉴스 뷰 페이지 검색 버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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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부터 상당 기간 동안, 약학대학 졸업생들의 사회 진출 분야는 매우 넓었습니다. 제약회사나 약국, 또는 병원약국뿐 아니라 화학, 식품, 화장품 공장 등 다양한 산업 분야로 진출한 이들도 많았습니다. 이는 약학 교육 과정에서 다양한 분야에 대한 개론적인 지식(broad knowledge)을 습득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당시 학생들은 많은 과목을 이수해야 했기에 넓은 지식을 얻을 수 있었지만, 그 대신 한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전문 교육은 다소 부족했습니다.

오늘날은 약학대학 졸업생이 다른 산업 분야로 진출하는 경우가 과거보다 현저히 줄어들었습니다. 이제 우리나라 산업 전반이 단순한 개론 수준의 지식만으로는 기여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고도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약학 교육은 기본적으로 전문성을 기르는 과정입니다. 예를 들어, 약물의 약리작용을 이해하려면 분자 수준의 생화학 및 약리학적 메커니즘에 대한 깊은 지식이 필요합니다. 또한, 약물 설계와 개발을 위해서는 유기화학, 물리약학, 제제학 등 고도화된 전문 지식(specialized or in-depth knowledge)이 요구됩니다.

하지만 약학의 직능을 온전히 발휘하기 위해서는 이런 전문 지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다양한 분야와 융합하고 소통해야 하는 오늘날에는 오히려 더 넓은 범위의 개론적 지식이 요구됩니다. 약학의 4대 분야 중 하나인 신약개발만 보더라도, 약물학·독성학 등 특정 분야의 전문성뿐 아니라,전체 개발 과정을 조망하고 단계별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폭넓은 시야와 개론적 이해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는 마치 오케스트라에서 각 연주자 외에 전체를 통합하고 조율하는 지휘자(conductor)가 필요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의사, 간호사, 임상시험 관리자, 정책 결정자 등과의 긴밀한 협력을 위해서는 통계학, 데이터 과학, 생명윤리, 보건정책, 경제학, 그리고 소통 능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대한 개론적인 지식도 필수입니다.

최근 교육계에서는 'T자형 인재'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T'자의 수직선은 깊이 있는 전문성을, 수평선은 폭넓은 개론 지식을 의미합니다. 한 분야를 깊이 파고드는 동시에, 타 분야와 연결하고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인재가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약학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러한 T자형 인재가 특히 요구되는 분야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전문성과 개론 지식을 동시에 교육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입니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시대적 요구에 따라 필요한 모든 지식을 가르치려다 보면, 교육 연한을 10년으로 늘려도 부족할 지경입니다. 어떤 이들은 변리사, 변호사, 벤처 캐피털, 기업 경영까지도 약학 교육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입니다. 자칫하면 교육이 산만해지고 학문적 깊이마저 얕아질 우려가 있습니다.

이 때문에 지금은 어느 때보다도 효율적인 커리큘럼 구성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약학의 목표와 부합되지 않는 과목은 과감히 정리하고, 새롭게 필요성이 대두되는 분야는 주저 없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약학교육의 깊이와 너비에 대해 진지하고 치열한 논의가 지속적으로 필요합니다.

약학 교육의 개혁은 결국 커리큘럼의 개혁에서 시작됩니다. 더 이상 커리큘럼에 대한 전문성도, 관심도 없는 교수들에게 그 개혁을 맡겨서는 안 됩니다. 지난 수십 년간의 경험에서 얻은 교훈입니다. 이제는 교육학 전공자를 전임 교수로 채용하여, 그들에게 교육 개혁의 주도적 역할을 맡겨야 합니다.

몇 년 전부터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에서 의미 있는 변화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과거에는 퇴직한 교수의 자리를 동일한 전공 분야의 후임자로 채우는 전통이 있었지만 이제는 이 관행을 과감히 깨고 약학교육의 미래 목표에 부합하는 새로운 분야의 전공자를 교수로 채용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는 커리큘럼 개혁의 실질적인 첫걸음으로, 큰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후배 교수님들의 분발을 기대합니다.  이상으로 12회에 걸친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필자소개>

심창구 교수(서울대 명예교수)는 서울대 약학대학 교수와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으로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 명예회장과 서울대 약학박물관 명예관장을 맡고 있다.  심교수의 약창춘추 칼럼은 2007년 처음 게재된 이후 현재까지 약 400여 회 이상 집필을 이어오고 있는 가운데 그동안 3권(약창춘추, 약창춘추2, 약창춘추3) 책으로 묶여 순차적으로 발간된 바 있다. 가장 최근에 발간된 약창춘추3은 현재 교보문고를 비롯한 시중 인터넷 서점과 약업닷컴 북몰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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