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 면허를 딴 지 얼마 안 되는 아버지가 오늘 처음으로 고속도로를 주행한다고 하셨다. 그런데 아들이 집에서 티브이를 보고 있자니, ‘어떤 사람이 고속도로에서 역주행을 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는 뉴스가 나오는 것이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 어떤 사람이 고속도로에서 역주행을 하고 있다니 조심하세요”. 전화를 받은 아버지가 대답하였다. “그래 나도 보고 있다. 그런데 한두 놈이 아니다”.
2. 빵 장수와 버터 장수
어느 빵 장수에게 매일 아침 버터를 납품해 주는 시골 농부가 있었다. 어느 날 빵 장수는 버터의 양이 정량(定量)보다 조금 모자라는 것을 발견하고 농부를 법정에 고소하였다. 재판관이 농부에게 물어보니 농부의 집에는 저울이 없어서, 농부는 그저 빵 무게에 맞추어 버터를 자르고 포장해 납품했다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빵 장수가 이익을 더 남기기 위하여 자신의 빵의 무게를 조금씩 줄였던 것이다. 농부는 줄어든 빵 무게에 맞추어 버터를 잘라 납품하다 보니 자연 원래 계약된 양보다 적은 양의 버터를 납품하게 되었던 것이다. 재판관은 농부가 아닌 빵 장수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고 한다.
3. 알았시유
충청도 사람들은 유순하고 예의가 바르다. 그러나 결코 남의 말에 쉽게 부화뇌동(附和雷同)하지는 않는다. 충청도 사람을 조금 길게 설득하려 들면 거의 예외 없이 “알았시유”라는 반응이 돌아온다. 성미 급한 상대방은 그 말을 ‘예스’로 받아 들여 기쁘게 돌아 간다. 얼마 후 상대방은 그 일이 진행되지 않은 사실을 깨닫고 충청도 사람에게 ‘어떻게 된 거냐’고 따진다. 그러면 충청도 사람은 “내가 언제 한다고 했나유? 그냥 알았다고 했지”라고 대답한다. 충청도에서 “알았시유”는 ‘예스’나 ‘노’가 아니다. 그냥 ‘당신이 말하는 취지는 알겠으니 이제 그만 말해도 좋겠다’는 뜻일 뿐이다. 오늘날 ‘알았시유’는 ‘답답해서 속 터지는’ 대답쯤으로 비난 받기도 한다. 그러나 ‘알았시유’는 ‘노’ 라는 거절보다는 한결 덜 매몰차고, ‘예스’라는 즉흥적 긍정보다는 한결 신중해 보인다.
4. 오뚜기
오뚜기는 밀면 잠시 넘어지지만 곧 바로 다시 선다. 이런 현상을 보고 ‘복원력이 크다’고 한다. 복원력이 큰 것은 무게의 중심이 몸의 아래쪽에 있기 때문이다. 만약 무게 중심이 위쪽에 있다면 한번 쓸어지면 다시 서지 못할 것이다. 태권도 등에서 대련(對鍊)시 하복부에 힘을 주라고 강조하는 것도 복원력과 관련 있지 않을까?
(고찰) 첫 이야기는 자기가 역주행을 하면서도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잘못하고 있는 것처럼 잘못 보는 우리의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부끄럽게도 나도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잘못으로 세월호 사고를 보고 있다. 두 번째 이야기는 남의 잘못이 실은 나로 말미암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는 회개의 이야기이다. 인터넷에 있는 이야기를 친구가 보내주었다.
세 번째 이야기는 우리 사회가 ‘알았시유’ 처럼 포용력이 좀 있었으면 좋겠다는 뜻에서 소개하였다. 어쩌면 ‘알았시유’는 외교적인 수사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아니면 우연일 뿐일까? 외교의 정점(頂点)인 유엔의 사무총장을 충북 출신의 반기문 씨가 담당하고 있다. 네 번째 이야기는 낮은 무게 중심에 오뚜기의 높은 복원력의 비밀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어떤 분은 우리나라가 일제 36년 후에 우리의 정체성(正體性)을 신속히 복원할 수 있었던 것은 충청도 사람들의 오뚜기 기질 덕분이라고 하였다.
세월호가 침몰한 것은 평형수(平衡水)를 덜 채워 정상 위치로의 복원력(復元力)이 낮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위기에 처한 우리나라도 국가적 복원력에 문제가 많다는 지적이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평형수를 채워 넣어 정상(正常) 국가로의 복원력을 키울 수 있을까? 백가(百家)가 쟁명(爭鳴) 중이지만, 나는 ‘내가 아닌 남의 시각으로, 나부터 돌아 보고, ‘알았시유’의 포용력을 갖고, 오뚜기처럼 내 스스로의 무게 중심을 낮추는 것’이 한 방법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하나님, 우리나라를 지켜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