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1년, 대학 졸업 20주년 기념으로 대학 동기 수십 명이 부부 동반으로 설악산에 놀러 간 일이 있었다. 모두 관광 버스를 타고 갔는데, 버스 안에서 K라는 남자 동기가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자기가 마스터한 기(氣)를 한번 넣으면 아무리 골초라도 담배를 끊게 되고, 소주는 특유의 쓴 맛이 없어진다고 했다. 그의 유창하고 장황한 언변(言辯)은 동반한 일부 부인의 귀에는 솔깃했던 모양이었다. 오랫동안 허리 통증을 앓고 있던 I 부인은 K군에게 자기 허리도 기(氣)로 고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물실호기(勿失好機)! K군은 당연히 고칠 수 있으니, 100만원을 내겠다는 계약을 하자고 재촉하였다.
I 부인은 자기 남편에게 K군과 계약을 하자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남편은 아내의 애원을 콧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리고는 “그 돈 있으면 차라리 떡을 사먹겠다”고 내뱉었다. 아 뿔싸! 이에 I 부인은 “내가 100만원의 가치도 안 되느냐?”며 비분강개하였고, 그 바람에 공연히 나머지 참가자들마저 긴장된 분위기 속에 여행을 하게 되었다. 동기들의 냉담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K군의 기(氣) 장사는 버스가 동해 바다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더욱 흥미로웠던 것은 모두에게 낯선 한 여자가 K군의 새 아내라며 자신을 소개하고는 K군의 기(氣) 장사에 추임새를 넣는 모습이었다.
버스 안에는 골초인 L군도 타고 있었다. K군은 L군을 자기 사업의 선전도구로 삼을 생각이었는지, 자기가 기를 한번 넣어 주면 아무리 골초라도 담배를 끊게 된다고 L군을 구슬렸다. 마음 약한 L군은 어쩔 수 없이 기를 받게 되었다. 다만 다행인 것은 그 기는 무료라는 사실이었다. L군에게 기를 넣은 K군은 ‘이제 L군은 자기의 기를 받았으니 담배가 써져서 더 이상 담배를 피우지 않을 것’ 이라고 버스 안의 친구들에게 선언하였다.
기의 효과 때문이었을까? 놀랍게도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L군이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본 사람이 없었다. 과연 골초였던 L군이 담배를 끊게 된 것일까? 궁금함을 참지 못한 한 친구가 조용히 L군에게 물었다. “야, 담배 맛이 써졌냐? 그래서 너 정말 담배 끊었냐?”
L군은 벌레 씹은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하였다. “야, 쟤가 저렇게 침을 튀기며 기(氣) 장사를 하는데, 내가 어떻게 담배를 계속해서 피울 수 있겠냐? 할 수 없이 더럽지만 화장실 가서만 피우고 있다. 에이!” 나는 L군의 뜨거운 우정(?) 에 감탄하였다.
설악산 콘도에 짐을 푼 후 동기들이 속초 바닷가에서 회 한 접시에 둘러 앉아 소주를 마실 때이었다. 갑자기 K군이 한 소주 병에 기를 불어 넣은 후 이렇게 말하였다. “야, 너희들 이 소주와 저 소주의 맛을 한번 비교해 봐라, 기를 넣은 소주는 더 이상 쓴 맛이 나지 않을 거다, 어떠냐? 마셔 봐, 그렇지?” 그러나 두 소주 간에 맛의 차이를 느낀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끄~응, 그러고 보니 이쪽 소주가 좀 덜 쓴 것도 같다” 라고 얼버무릴 수 밖에. 그러나 속으로는 “너의 기는 사기(詐欺)야” 라고 말하는 표정이었다. 아마 K군 자신도 자신의 사기에 속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기(氣)와 관련된 K군의 추억은 무궁무진하다. 유창한 언변은 그의 기(氣) 장사의 자본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듣다 보면 어느 새 현혹되기 십상(十常)일 정도로 그는 정말 말을 잘 했다. 한번은 그가 내 연구실에 와서 “너는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늘 남산의 소나무를 생각해라” 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했더니, 그가 하는 말이 “너, 백반(白礬)을 혀에 댔다고 한번 생각해 보라, 그럼 침이 나오지? 그게 바로 생각이 우리 몸의 생리를 바꿀 수 있다는 증거야. 마찬가지야, 네가 소나무를 생각하고 있으면 너도 모르게 네 건강에 유익한 생체 성분이 분비되거든. 그래서 소나무를 생각하며 살라는 거야”.
어떻게 내가 이 친구를 당할 수 있었겠는가?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지낼까? 문득 옛날의 추억들이 꼬리를 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