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사람이 세상을 사는 코드는 ‘겸손’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잘 나가는 사람의 교만은 멸망에 이르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본시 교만할 수가 없는 존재이다. 사람의 외모, 머리, 심지어 성격까지도 다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일 뿐인데, 마치 제 공 (功)인 것처럼 자랑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찬송가 가사처럼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인 것이다. ‘겸손’이라는 말 자체가 교만한 단어일지도 모른다.
동시에 나는 크리스챤은 마땅히 남의 잘 됨을 함께 즐거워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나의 과거를 돌아 보니 나는 돈 잘 버는 사람에 대해서는 비교적 시기하는 마음을 갖지 않고 살 수 있었다. 다만 교수가 되고 나서는 다른 연구자들이 좋은 연구 업적을 내면 살짝 배가 아프곤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후배 교수들이 좋은 연구 업적을 내서 상을 받고 큰 연구비를 받아도 배가 아프지 않다. 오히려 진심으로 축하하는 마음이 생긴다. 나이가 좀 든 탓일 것이다. 이런걸 철이 들었다고 하는 것인가? 아무튼 남의 성공을 배 아파하지 않게 된 자신이 스스로 대견스럽다.
2. 함께 울기 : 성경의 욥기란 책을 보면 하나님을 잘 믿는 욥이란 사람이 하루 아침에 자식들이 다 죽고 재산이 다 없어지는 참혹한 어려움을 겪는다. 그 욥을 위로하기 위해 몇 친구들이 찾아 왔다. 어떤 친구는 ‘네가 잘못한 것이 있으니까 이런 벌을 받았을 것이니 지금부터라도 회개하고 하나님을 잘 믿으면 복을 다시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한다. 다른 친구들도 비슷한 취지의 말을 쏟아 붓는다. 친구들의 말을 들은 욥은 위로는커녕 더 깊은 마음의 상처를 받게 된다.
욥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교훈을 얻는다. 하나는 ‘어떤 사람이 복을 받고 어떤 사람이 벌을 받는가?’를 사람이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두 번째 교훈은 남의 비극을 앞에 두고 하는 섣부른 훈계는 상처를 더욱 깊게 할 뿐이라는 것이다. 만약 욥의 친구들이 훈계 대신 욥을 붙들고 함께 울었으면 어땠을까? 오히려 그 것이 욥에게 더 큰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 나는 18년 전 내가 직장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 와, “형 어떻게 된 거야” 하면서 동생이 울었을 때에 큰 위로를 받았었다.
세상은 역경을 딛고 성공한 사람들을 칭송한다. 당연한 일이다. 반면에 끝내 역경을 극복하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성공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고난의 시절은 성공을 돋보이게 하는 배경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끝내 실패한 사람에게 있어서 고난은 절망스러운 환경일 뿐이다. 이 지구상에 깨끗한 물과 세끼 밥을 먹으면서 입시나 정치 문제를 가지고 투덜거릴 수 있는 나라는 몇 되지 않는다. 국내에도 경제적,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국내외에 절망 중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이야기이다.
국가와 사회, 특히 교회는 성공한 사람, 또 역경을 딛고 일어 선 사람을 보고는 ‘함께 즐거워’ 해야 하지만, 고난 중에 재기하지 못하고 있는 어려운 사람들을 붙들고는, 우선 ‘함께 울기’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울기’가 참 사랑의 시작이라는 생각이 드는 연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