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많은 사람들이 칼을 차고 살던 나라인 일본에는 농담이 별로 없다. 윗사람에게 대한 농담은 윗사람이 기분 나빠하는 순간 공포를 부르기 때문이다. 즉 네가 나한테 농담할 군번이냐? 는 식으로 화를 내거나, 심지어 칼을 빼들면 바로 난감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함부로 농담을 해선 안된다. 특히 윗 사람에게는…
‘나라’라는 도시에 가면 옛날 무사들이 차를 마시던 곳이 있단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 찻집의 천정이 매우 낮아 안으로 들어 가려면 거의 기어들어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유인즉 천정이 높으면 차를 마시던 상대방이 갑자기 칼을 뽑아들 수 있으므로 긴장을 풀고 차를 즐길 수 없기 때문에, 일부러 천정을 낮게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상대방이 칼을 뽑으려다가도 팔꿈치가 천정에 닿아 칼을 다 뽑을 수 없도록 말이다. 이런 방이라야 비로소 어느 정도 마음을 놓고 차를 마시며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늘 칼을 의식하며 살수 밖에 없었던 일본이 안쓰러워지는 대목이다.
뼈대 있는 일본인의 집안을 보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일본도를 모셔놓은 경우가 적지 않다. 마치 우리나라 양반이 청자나 백자를 잘 모셔 놓은 것처럼. 이처럼 칼은 일본인의 생활 습관이나 문화와 깊숙이 관련되어 보인다.
칼은 사람을 죽이는 무서운 것이다. 일본인이 얼마나 칼을 무서워했는지는 일본인의 인사 습관만 보아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일본 사람들은 남과 헤어질 때, 조금 과장을 섞으면, 대여섯 번은 굽실거린 후에야 헤어진다. 왜 그럴까? 한번 칼을 찬 사무라이와 헤어지는 장면을 상상해 보자. 돌아 설 때, 사무라이가 찬 칼이 자꾸 마음에 걸리지 않겠는가? 뒤가 근지럽다. 그래서 슬쩍 돌아 보지 않을 수 없다. 그 순간 사무라이와 눈이 마주친다. 민망하다. 그 민망함을 감추려 서둘러 굽실거리며 ‘도오모 (저, 참..)’, ‘시츠레이 시마쓰 (실례합니다)’ 또는 ‘사요나라 (안녕)’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다시 돌아서 가려는데 아무래도 뒤가 또 켕긴다. 나도 모르게 다시 돌아보다가 또 눈이 마주친다. 또 굽실…. 이를 대여섯번 쯤 반복하면 이젠 제법 사무라이와 나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이제야 비로소 마음을 놓고 뒤돌아 보지 않고 제 갈 길을 간다.
칼 때문인지 자고로 일본 사람들은 남에게 정말 친절하다. 예의 바르다. 말도 참 곱다. 그런 일본 사람을 오랜만에 만나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인사말은 ‘안녕하십니까?’가 아니다. 우선 ‘고노마에와 도오모 (요전번에 정말로)’ 라고 말해야 한다. 그 뒤는 우물우물하면 된다. 요전번에 감사했는지, 아니면 미안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가 감사할 일이나 미안해 할 일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 말도 안 하는 그런 무례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부터 밝혀두는 일이다. 생각이 잘 안 나더라도 일단 조건반사적으로 이 말부터 해두고 보는 것이다. 일본어에 서툴던 시절, 나는 ‘요전번에 뭐?’ 냐고 되물어 상대방을 당황케 한 기억이 있다. 일본인을 만나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고노마에와 도오모’ 부터 읊어 두기 바란다.
권력자가 백성의 인권을 존중하게 되는 것은 백성이 두렵기 때문이지, 권력자의 자비로움 때문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일본 사람과 미국 사람이 친절하고 남을 함부로 무시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특별히 자비로워서가 아니라, 백성들이 칼과 총을 무서워했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고 보면 과거에는 사람을 죽이는데 사용되던 총과 칼이 오늘날에는 오히려 인권을 지켜주는 역할을 한 셈은 아닐까? 요컨대, 친절함, 고운 말, 예의, 그리고 민주주의는 총과 칼 끝에서 나왔다는 말이다. 총칼의 역설인 셈이다. 새해부터는 총과 칼이 아니라도 약자가 보호되고 인권이 엄중하게 존중되는 그런 지구촌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