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순훈 <소설가, 서울시약사회 문화복지위원장>오늘 내가 뱉어낸 말을 가만히 곱씹어보면, 그 중 8할은 어제 말한 내용의 되새김질일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믿거나 말거나 할 통계를 아시는가.
그나마도 그것은 허위 혹은 과장된 것이기 십상이고, 굳이 ‘대화’라고 지칭하고 싶은 상호소통의 수단 자체가 통째로 농담에 가까워져버렸다는 시니컬한 반응들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늦게라도 그 정황을 포착했다면, 눈짓과 몸짓을 앞세운 침묵으로 하루를 살아내는 것이, 그 우스꽝스러운 말의 유희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현명한 처세일까. 천만에 말씀이다.
사람이 있는 곳 어디서나 말은 태어나게 마련이며, 이미 생겨난 만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한켠에서는 누군가의 천 냥 빚을 갚아주는가 하면, 다른 한켠에서는 통제 불가능한 편견으로 자라 농담으로 둔갑되거나 죄를 짓게도 하는 것이 말의 속성인 것을.
20세기 독일의 실존철학을 대표하는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자면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사사로이 주고받는 언어를 통해 개인의 품격과 신분을 가늠해 볼 수 있고, 거시적으로는 그것을 통해 물리적 자연이 ‘문화’로, 물리적 현상이 ‘의미’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는 뜻이다.
이렇게 존재의 표현을 목적으로 태어난 언어는 사회를 형성하는 매개체로 그 힘을 발휘하고, 사회라는 집단은 필연적으로 권력과 정치를 몰고 온다.
돌아보시라. 지금 우리 사회를 휘돌아다니는 말들은 얼마나 시끄러우며, 정치권력의 언저리는 또 얼마나 먼지 자욱한 의혹투성이인가.
권력이 있는 자는 권력으로, 금력이 있는 자는 금력으로 스스로를 덧칠하고 부풀리며 과포화상태로 나아가는 위태로움은 갖가지 쑥덕공론의 근원으로 자라고, 이미 그 임계점을 넘어버린 폭발로, ‘가짜 학위 신정아 사건’ 같은 비리 사건들이 ‘이름’을 더해가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우린 지금 소리와 속도의 시대를 관통해가고 있다. 불가항력적 자동차 접촉사고 파열음처럼 즉석에서 소리가 되지 못하는 어떤 말도 설득의 효과를 기대할 수 없으며, 2시간 30분 간 서울과 부산을 질주하는 KTX열차처럼 풍경을 무시하지 않고는 시(時)테크 효과를 거둘 수 없다.
이렇듯 우리가 효율과 스피드에 매달려오는 동안, 함께 가야 할 지혜롭고 따뜻한 말, 정서적 자유로움은 무심히 방치되어 왔고, 도처에 웅크린 성난 눈초리들은 매순간 우리를 주눅들게 만든다.
하여도, 홀로이 독야청청 마음 닫고 산다는 건 너무 외로운 일이다. ‘쇼 같은 정치’니 ‘현금이 실현하는 예술’이니를 제외하면, 달랑 몇 푼 남아있는 예금통장처럼 궁핍해지기만 하는 대화. 어차피 고만고만하게 살아가는 너와 나임을 미루어 짐작건대, 이제라도 따뜻한 마음 담은 견고한 ‘존재의 집’ 복원을 꿈꾸며 그 대화의 장으로 나서봄은 어떠신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무자기(毋自欺)한 말이 신뢰를 부른다 하였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