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라벨' 용도 제한 "빈대 잡으려다..."
소아환자 70%에 처방 현실 외면한 처사
이덕규 기자 abcd@yakup.com 뉴스 뷰 페이지 검색 버튼
입력 2003-06-19 18:11   수정 2003.06.20 11:11
어린이는 작은 어른이 아니라는 말은 현대 소아의학의 기본전제이다.

그러나 영국 글래스고우大 의대의 소아의학 담당교수 말콤 도날드슨 박사는 원래 전립선암 치료제로 성인환자들에게 사용되는 고서릴린(goserilin)이라는 항암제를 소아환자들에게 빈번히 처방해 왔다.

고서릴린이 조숙한 성장(early-onset puberty)으로 고민하는 소아환자들에게 효과적인 약물이라 확신하고 있기 때문. 사실 도날드슨 박사는 성인용으로 허가된 약물들을 평소 18세 이하의 소아 및 청소년 환자들에게 처방하고 있는 수많은 영국의사들 중 한사람일 뿐이다.

그러나 유럽연합(EU)이 각종 의약품들의 '오프-라벨'(off-label) 용도와 관련한 새로운 제도의 마련을 추진하고 있어 도날드슨 박사의 향후 처방패턴에도 변화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EU 차원에서 모종의 조치가 마련될 경우 영국의 의사들도 성인용으로 발매 중인 약물들을 소아환자들에게 처방하지 못하도록 규제받게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는 것.

실제로 영국 보건省 산하 의약품·의료용품관리국(MHRA)는 지난 10일 소아환자들에게 항우울제 '세로자트'(미국시장 발매명은 '팍실)를 처방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MHRA의 발표는 소아환자들에게 처방되는 모든 의약품들의 경우 소아에게 투여하는 것이 적절한지를 입증하는 임상시험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압력이 EU 차원에서 제약기업들에게 고조되고 있는 현실 속에 나온 것이었다.

이에 따라 새로운 관련기준이 향후 2년 이내에 제정될 것이라는 전망도 뒤따르고 있다.

그러나 도날드슨 박사는 "그 같은 방안이 자칫 수많은 소아환자들을 재난에 빠뜨릴 수 있다"며 깊은 우려감을 표시했다. 물론 소아환자들에게 성인용 약물들의 처방을 규제하고, 18세 이하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임상시험을 진행한 뒤 당국의 허가를 취득해야 한다는 것이 이상적인 시나리오이기는 하지만, 당장 부모라면 대부분 그들의 자녀를 임상시험에 참여시키지 않으려 할 것이라는 걸림돌에 봉착하리라는 것.

이와 관련, 오늘날 영국에서는 소아환자 10명 중 7명에게 정작 소아용도로는 공식적인 허가를 취득하지 못한 각종 처방약들이 투여되고 있다는 통계자료가 공개된 바도 있다.

단적인 사례로 '세로자트'도 성인용도로 허용됐지만, 소아환자들에게 처방되고 있는 수많은 약물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지적이다. 정신분열증 치료제, 호르몬제, 진통제, 진정제, 천식치료제 등 다양한 약물들이 소아환자들에게 처방되고 있다는 것.

한 예로 영국에서 정신분열증 치료제 '리스페달'은 공격적 행동을 유발할 수 있다는 부작용에도 불구,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환자들에게 널리 처방되고 있다.

또 아나볼릭 스테로이드제의 일종인 옥산드롤론(Oxandrolone)은 성장장애 소아환자들에게, 모르핀계 약물들은 심한 통증에 시달리는 소아들에게 각각 사용되고 있다. 성인용 스테로이드제가 소아 천식환자들에게 처방되거나, 성인용 진통제가 소아들의 통증완화에 투여되는 사례 역시 부지기수이다.

영국 보건省도 병원 중환자실에서 치료받는 소아환자들의 경우 소아용도로 허가되지 않은 약물들이 용량이나 제형을 (성인에게 투여할 때와) 달리한 가운데 처방되는 비율이 최대 90%에 달한다며 현실을 인정하고 있다.

이 비율은 일반병원에서도 36~67%, 개원가 또한 22~56%에 달하고 있을 것으로 보건省측은 추정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제약업계도 이 같은 현실에 책임이 없지 않다고 지적하고 있다. 많은 소아환자용 약물들이 스몰마켓을 형성하고 있을 뿐이어서 제약기업들이 구태여 이들을 대상으로 별도의 임상을 진행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데다 정작 임상을 진행했더라도 그에 따른 인센티브가 적은 관계로 소극적인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구체적인 입증자료가 부재함에도 불구, 효과가 있으리라는 자체 판단에 따라 소아환자들에게 각종 약물을 처방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의사들의 주장이다.

미국의 경우 제약기업측에 소아환 대상 임상시험의 진행을 의무화하고,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법규가 이미 마련되어 있는 상태이다.

유럽집행위원회의 한 대변인은 "인센티브와 법적 의무화를 포괄한 미국식 제도가 유럽에서도 하루빨리 마련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영국 정부는 소아환자들에 '세로자트'를 처방하지 말도록 한 조치가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고 밝혔다. 아울러 이번 발표가 소아환자들에게 성인용도로 허가된 각종 의약품들이 처방되던 관행을 일시적이나마 금지시키는 효과를 발휘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에딘버러에 소재한 웨스턴 종합병원의 임상약리학자 사이먼 맥스웰 박사는 "임상시험을 통해 효과를 뒷받침한 자료가 없다는 것이 곧 해당 의약품이 소아환자들에게 무익한 약물임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라고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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