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8편 > 本紙와 洪文和교수 남다른 인연의 첫 단추 (1957. 6.)
[대하기획시리즈] 약업신문 지령 6000호 돌파기념
이덕규 기자 │ abcd@yakup.com 뉴스 뷰 페이지 검색 버튼
입력 2026-10-06 12:00   수정 2026.10.06 12:00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약학자이자 약학계의 큰 어른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는 데 이론의 여지가 없는 학자인 대하(大河) 홍문화(洪文和) 교수는 생전에 ‘藥業新聞’과 남다른 인연을 맺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50년대 중반은 필자가 미국에 가 있던 기간이어서 초창기의 애틋한 어려움은 별반 나누지 못했지만 60년에 들어서면서부터 확고한 발전기에 접어든 ‘藥業新聞’은 바로 필자의 공직생활의 발전을 편달하고 북돋아 주는 後見人 역할을 하여온 것이다. 더욱이 東巖은 필자를 어떻게 보았는지 거의 매일이다시피 夕陽杯를 나누면서 大小事를 막론하고 淡論하던 생각이 난다.”

윗글은 지난 1984년 3월 29일자 본지 창간 30주년 기념특집호 9면에 홍문화 교수가 ‘나와 藥業新聞’이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원고의 한 부분이다.

기고문에서 홍문화 교수는 “‘담론’을 ‘談論’이 아니라 ‘淡論’이라고 표현한 것은 바로 東巖의 시작이며 ‘君子之交는 淡如水’의 淡字의 뜻을 지니고 있지 않을까”라고 회고했다.

특히 홍문화 교수는 이 기고문에서 “필자가 되는 소리 안 되는 소리 붓을 놀리는 습성이 생긴 것도 약업신문에서 언제나 아낌없이 지면을 베풀어 준 덕택인 것이다”라고 밝혀 이목이 쏠리게 했다.

‘동암’(東巖)은 ‘藥業新聞’의 창간자인 故 함승기(咸承基) 사장의 아호(雅號)이다. 훗날 본지의 함용헌 회장은 “홍문화 교수와 함승기 사장이 생전에 웬만큼 가깝고 막역하게 교류한 사이가 아니였다면 결코 나올 수 없는 글귀들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고 회고했다.

그러면 홍문화 교수가 본지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그것은 아마도 지난 1957년 6월 25일자 본지 2면에 게재된 특별강연회 개최공고가 처음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대한약사회와 대한약학회가 공동주최하고 ‘약사시보’가 후원한 이 특별강연회에서 ‘美國藥學의 二‧三 動向’을 주제로 강연한다고 알리는 내용이 아마도 홍문화 교수의 이름이 처음으로 본지에 오른 사례였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일본 출장길에 함께 포즈를 취한 홍문화박사(사진왼쪽)와 함승기 사장.©약업신문

그 후 홍문화 교수가 기사를 통해 ‘약업신문’의 지면을 처음으로 장식한 것은 아마도 이로부터 몇 년 후인 지난 1961년 12월 10일자 5면에 게재된 인터뷰 기사였던 것으로 보인다.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의 주최로 타이완 타이페이와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렸던 동남아 과학교육회의(東南亞科學敎育會議)에 참석한 후 응한 귀국인사 형식의 인터뷰가 바로 그것이다. 원고기고를 통해서는 같은 달 17일자 5면 및 24일자 12면에 ‘東南亞를 다녀와서’라는 제목으로 연재된 회의 참가기로 첫 테이프를 끊었다.

흔히 말하는 스트레이트 기사의 경우에는 이듬해인 1962년 1월 26일자 1면에 해방 이후 우리나라 약학박사 1호로 학위를 취득했다는 내용의 기사가 눈에 들어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학장으로 취임했다는 후속보도 또한 이어졌다.

함용헌 회장은 홍문화 교수와 함승기 사장과의 활발한 교류가 홍문화 교수의 학장 재임시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측했다. 당시 서울약대는 을지로에 소재해 있었던 까닭에 직장으로 보더라도 ‘약업신문’과 이웃사촌이었고, 자택 또한 당시 명수대(明水臺)로 불린 지금의 흑석동(黑石洞)이어서 지근거리였던 만큼 더욱 가깝게 교류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의미이다.

약업신문사는 창간 이후 3여년 동안 중구 입정동(笠井洞) 189번지에 소재한 광덕빌딩 건물 2층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 지금은 종로 3가 신영빌딩과 강연장, 스터디 룸, 카페, 그룹소모임 공간 등으로 사용되고 있는 종로파고다 내일캠퍼스가 들어서 있는 자리이다. 부산에서 올라온 대한무역약종상협회(大韓貿易藥種商協會) 또한 같은 건물에 사무실을 두고 있었다. 입정동은 그 시절 문자 그대로 ‘보건타운’을 이루었던 관철동(貫鐵洞)과 지척의 거리에 위치해 있는 곳이었다. 대한약사회 뿐 아니라 대한의학협회(현재의 대한의사협회), 한국의약품도매협회(현재의 한국의약품유통협회) 등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관철동에 밀집해 있었다.

덕분이었는지 홍문화 교수와 함승기 사장은 이 단체들의 기관장들과 무척 격의없이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 당시는 개별 의‧약 관련단체들의 회원 수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여서 직역간 갈등으로 반목하거나 적대시하지 않고 같은 보건인으로서 소통하고 협조하면서 공존공생한 “아름다운 시절”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함용헌 회장은 지난 2020년 3월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약학역사관이 발간한 ‘대한민국 약학박사 1호 대하 홍문화’ 235페이지에서 “홍 박사님과 저의 가친께서는 저녁 때면 의기투합해서 자주 만나셨습다. 또 가까운 거리인 신문로(新門路)에 환인제약 신호균(申浩均) 사장님이 거주하고 계셔서 세 분이 자주 자주 합석하시어 함께 잔을 기울이곤 하셨습니다”라고 회상했다.

윗부분에서 밝힌 바와 같이 붓을 놀리는 습성이 생긴 것이 ‘약업신문’에서 언제나 아낌없이 지면을 베풀어 준 덕택이었다고 회고한 홍문화 교수는 우리나라 경제가 발전하고 국민생활이 안정되어 가면서 의약품, 식품 및 의료 등 건강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도가 부쩍 높아졌고, 이에 따라 신문이나 방송, 월간지 등의 대중매체들이 이 분야의 필자를 발굴하는 데 열을 올리기 시작하던 무렵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기 시작했다. 당시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국 등에서 약과 건강에 관한 프로그램이 필요할 때면 거의 고정출연자로 홍문화 교수를 섭외하곤 했다.

홍문화 교수는 지난 1968년 10월 10일자 본지 16면에 ‘藥의 날’을 맞아 기고한 원고에서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당시는 홍문화 교수가 국립보건원 원장으로 재직 중이었던 때다.

“나 자신 아무 足跡도 남기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바이며 기껏 敎壇 20年에 藥學전도사 역할이나 한 것으로 자위하는 수밖에 없으며 또 요즈음은 국민보건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는 것으로 意義를 찾고 있다.”

그리고 ‘약업신문’은 홍문화 교수가 이렇듯 ‘건강 전도사’ 역할을 하는 데 중간다리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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