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315> 온라인 영상 회의 유감
연말이 가까워져도 코로나 사태가 좀처럼 진정되지 않고 오히려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쩍 대면(對面) 회의보다 만나지 않고 회의를 하는 비대면(非 對面) 온라인 영상 회의를 선호(選好)하고 있다. 불행히도 언택트(untact)가 정말 뉴 노멀 (new normal)이 되어 버린 것이다.어떤 사람은 영상으로나마 소통을 할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말한다. 음성에 추가하여 영상으로 얼굴을 보면서 회의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과학의 덕분으로 다행이긴 하다. 그러나 얼굴을 마주 볼 수 없는 온라인 회의에서는 영 사람 사는 맛이 나지 않는다. 우리 교회는 2020년 후반기부터 순장(筍長) 공부와 순(筍)예배라는 소 그룹 모임을 온라인 영상 회의로 하고 있다. 각각 목요일 아침 6시와 금요일 저녁 8시에 시작되는 모임인데, 영상으로 모이니 새벽과 저녁에 외출을 하지 않아도 되는 점 하나는 좋았다. 초기에는 Webex라는 어플리케이션을 사용하였는데 요즘에는 Zoom을 더 많이 사용한다.그럭저럭 둘 다 괜찮긴 한데, 여러 명이 동시에 이야기를 하면 웅웅거리는 소리가 나서 상대방의 말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문제는 공통이다. 특히 찬송가를 부를 때엔 참가자들의 노래가 각기 다른 속도로 들려 박자가 엉망이 된다. 영상 회의에 참여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휴대폰 또는 컴퓨터로 참여할 수 있다. 회의를 주최하는 사람 (호스트)이 필요한 준비를 해 놓은 다음, 참석 대상자 (게스트)에게 몇 시 몇 분에 첨부한 웹싸이트를 누르고 회의에 들어 오라고 카톡을 통해 알려준다. 게스트는 정해진 시간에 그 웹싸이트를 누르기만 하면 된다. 물론 일부 온라인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에게는 이마저 어렵게 느껴지긴 한다. 나는 호스트가 초대한 회의에는 잘 참여할 수 있는데, 내가 호스트가 되어 게스트들을 초청하는 방법은 아직 배우지 못 했다. 누가 알려준 대로 한번 해 보았는데 잘 되지 않았다. 화면에 id와 password를 처 넣으라는 문장이 뜨면 긴장부터 하게 된다. 그러나 누가 옆에서 도와주면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영상회의는 전원 온라인으로 참여하는 방식 외에 ‘온라인-오프라인’을 병행하는 방식도 있다. 즉 일부는 회의실에서 만나 대면 회의를 진행하고 다수는 온라인으로 회의에 참여하는 방식이다. 예컨대 2020년도 약학사 분과학회의 추계 심포지엄의 경우, 현장에는 발표자 4명과 소수의 진행자 및 영상 관련 기술자 서너 명만 나왔다.또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동창회가 후원하는 ‘제6회 제약관악 포럼’도 포럼 연자 (演者)와 소수의 현장 참석자만 학회장에 모여 대면 포럼을 진행하였다. 현장 참석을 하지 않은 희망자들도 온라인으로 연자의 발표를 보고 들을 수 있다. 학회장 전면(前面)에 걸린 대형 화면에는 온라인으로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뜬다.그들은 영상을 통해 현장에 있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질문도 할 수 있고 소통도 할 수 있다. 대형화면을 찍으면 온라인 참여자들의 ‘단체 기념사진’이 된다. 영상회의 시 참가자들은 대개 자신의 상반신 모습이 화면에 나오도록 휴대폰의 각도를 설정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상반신 모습에만 신경을 쓴다. 얼마 전 열린 서울대 약대 여동문회의 영상 송년 모임에 참가해 보니, 자신의 얼굴을 예쁘게 ‘뽀샵’ 처리한 사람, 머리에 영상 장식을 얹은 사람 등이 있었다. 상반신만 중시(重視)하는 시대가 올지도 모르겠다.앞으로 영상 회의가 더 일반화되면 옷도 상의(上衣)만 잘 팔리게 되지 않을까? 상반신만 화면에 나오니 아예 하의(下衣)를 제대로 입지 않고 영상 회의에 참석하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겠다. 이런 사람은 회의 중에 무심히 일어나서 하반신이 영상에 잡히는 일이 없도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온라인 영상회의는 앞으로 더욱 편리하게 발전해 나갈 것이다. 그래도 나는 옛날식 회의 방식이 백 배 천 배 좋다. 부디 2021년에는 서로 만나 악수를 하고 수다를 떨며 회의를 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하나님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2021-01-20 09:24 |
[기고] <314> 개 무시
1. 지난 가을에 친구네 부부하고 교외의 조용한 곳에 놀러 갔었다. 그 곳 식당 앞 양지 녘에 점잖게 생긴 개 한 마리가 편하게 앉아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평소 개를 좋아하는 친구 부인은 아내와 함께 그 개에게 다가가 반가운 척을 했다.그러나 그 개는 두 할머니가 보이지도 않는 듯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과자를 주면서 불러보고 얼러봐도 요지부동이었다. 아, 사람을 싫어하는 개 인가 하고 생각할 즈음에 예쁜 어린 아이 한 명이 개 앞에 나타났다.그러자 그 점잖기만 하던 개가 벌떡 일어나 꼬리를 치며 어린이 앞으로 다가가는 것이 아닌가? 그 아이는 어르지도, 과자를 주지도 않았는데 개가 먼저 아는 척을 한 것이다. 순간 두 할머니는 어이 없다는 듯 실소를 하며 “우이씨, 개도 이제는 우리가 늙었다고 쳐다보지도 않네, 그야말로 완전 ‘개 무시’ 당했네!” 하며 씩씩거렸다.자초지종을 듣고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개도 눈이 있겠지. 내가 개라도 할머니보다는 어린이와 놀겠다. 할머니보다는 아이가 예쁘지. 예쁜 사람을 선호(選好)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개가 눈이 얼마나 정확한데…”. 2. 무릇 모든 생명체는 어릴 때가 예쁘고 늙으면 추해진다. 꽃도, 단풍도 그렇고 무엇보다 사람이 그렇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우리 집 손자 손녀 4명도 한결 같이 예쁘다. 객관적으로 봐도 우리 애들이 제일 예쁜 것 같다.그런데 이 녀석들이 나만 보면 ‘점쟁이 할아버지’라고 놀린다. 내 얼굴에 점이 많다고 하는 말이다. 내가 “할아버지도 너희들 만했을 땐 점도 없고 예뻤단다” 해도 잘 믿지 않는다. 어릴 때 사진도 거의 없으니 증거를 보여줄 수 없지만, 내가 어렸을 땐 예뻤다는 것은 사실이다. 어릴 때 예쁘고 늙어서 추해지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다. 그리고 자연의 법칙이란 곧 하나님의 섭리이다. 만약에 늙었을 때 예쁘고 갓났을 때가 추하다고 가정해 보자. 누가 힘들여 아기를 돌봐 인류가 번성할 수 있었겠는가? 늙으면 추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이니 순종하는 수 밖에 없다.그나저나 ‘점쟁이’라고 놀려도 좋으니 손주들이 나를 자주나 만나주면 좋겠는데, 그 놈의 학원인지 뭔지 때문에 애들이 너무 바빠 나를 만날 시간이 없단다. 내 마음 같아서는 애들을 저녁 늦게까지 학원에 보내는 부모를 처벌하는 아동학대법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시간이 있다고 손주들이 할아버지를 만나고 싶어 할지는 잘 모르겠다. 할아버지에 대한 손주들의 애정이 세월과 함께 식어감이 느껴져 허무할 따름이다. 뭐 어쩌겠는가! 3. 요즘도 여전히 후배 교수들이 정년퇴임을 하고 있다. 그런데 정년퇴임이 옛날과는 확연히 달라졌다는 느낌이다. 옛날에는 노숙한 노교수님들만 정년 퇴임을 하셨다. 생약학의 이선주 교수님은 한참이나 인자한 할아버지의 풍모를 자랑하신 연후에 정년퇴임을 하셨다.그런데 요즘은 새파란(?) 후배들이 정년퇴임을 하고 있다. 그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아니 그 사람이 벌써 정년을?” 하며 놀란다. “요즘 애들은 나이만 먹었다”는 농담이 농담이 아니다. 돌아 보니 내가 아는 사람들은 이미 60을 다 훌쩍 넘었고 젊어 봤자 50 중반 이후의 중늙은이들이었다. 내 주변에 젊은이는 오래 전에 사라진 것이다. 아!!!4. 예전에는 정년퇴임을 하신 교수님들은 어딜 가셔도 깍듯이 ‘어른’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막상 내가 퇴임을 해 보니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어디 가서 허리 한번 빳빳하게 펴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동창회에 가면 더 그랬다. 팔십 구십 잡순 선배님들이 무수히 건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그래서 경로당에 육칠십 대의 젊은이(?)는 나오지 않는다 이야기가 있다. 그 나이에는 주전자를 들고 심부름이나 해야 되기 때문이란다. 이제 어디 가도 팔십은 넘어야 어른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좋은 일이다. 그래도 가끔은 ‘나는 언제 왕초 노릇 한번 해 보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런 걸 노추(老醜)라고 하는 모양이다. 5. 코로나 사태 속에서도 또 한 해가 지나감에 감회가 새롭다. 아 세월이여!
2021-01-06 10:00 |
[기고] <313> 약사 직능의 진화
요즘 ‘전원일기(田園日記)’라고 하는, 지난 1980년말부터 2002년말까지 22년간 인기리에 방송되었던 농촌 TV 드라마의 재방송을 가끔 본다. 훈훈한 이야기도 많이 나오지만 드라마를 관통하고 있는 분위기는 농업이 쇠락하여 머지 않아 농촌이 붕괴될 것 같다는 무거움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우리 농촌의 삶은 드라마의 예상과 달리 붕괴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때보다 나아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돌아보면 우리나라의 제약산업도 1987년에 물질특허제도가 도입되면 대부분 붕괴될 것이라는 무거운 전망이 나돌았었다. 2000년의 의약분업 실시도 일부 제약기업에는 간단치 않은 시련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나라 제약산업은 놀랍게도 이런 위기들을 잘 극복해 내고 오히려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제약산업은 그 사이에 신약을 30개나 개발하여 소위 ‘신약개발 강국’ 리스트에 우리나라 이름을 올릴 수 있었으며, 금년 코로나 사태에서도 타 산업과 달리 의미 있는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천만 다행이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지난 11월 20일, 인천에 있는 가천대 약대 학생들에게 ‘예비약사의 진로와 자세’이라는 주제로 특강을 할 기회를 가졌다. 비록 마스크를 쓰고 한 강의였지만 분위기는 오히려 진지했다. 강의 내용은 한마디로 우리나라의 약학 및 약업이 발전함에 따라 약대 졸업생들의 진출분야도 옛날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으니, 과거의 시각에 집착하지 말고 새로운 미래를 예측하면서 자신의 진로를 선택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강의 내용의 일부를 이하에 소개 한다. 약학은 기본적으로 신약의 창제 및 개발 (創藥, Creation Pharmacy), 의약품의 제조 (製藥, Manufacturing Pharmacy), 그리고 의약품의 임상 사용(用藥, Clinical Pharmacy)이라는 3대 분야에 관한 이론과 기술을 연마하는 학문이다. 그 동안 약대 졸업생의 진로도 자연히 이 3대 분야에 집중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 약학이 급속히 진보함에 따라 이들 대 분야(大分野)도 진화(進化) 분화(分化)를 거듭하여 다양한 중소분야가 새롭게 생겨나고 있다. 우선 창약분야에서는 신약창조에 관한 기초 연구를 하는 연구기관 (대학, 회사, 국공립 연구기관) 외에, 신약의 개발 과정 전반을 기획 관리하는 벤처 회사들이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으며, 이에 따라 벤처 회사의 연구자금 조달을 위한 벤처 캐피탈 회사들도 줄을 잇고 있다. 또 신약개발과 관련하여 변리사, 변호사, 벤처 CEO, 신약개발 자문, 비 임상 또는 임상시험 관리, CLO, 벤처 캐피탈리스트 등이 이미 약사의 직역(職域)이 되었다. 제약분야에서는 개발 전문, 제조 전문(CMO), 특정제제 (소프트 캡슐 등) 전문제조, 판매 전문 등으로 제약회사의 기능이 진화, 분화 되고 있다. 또 의약품 원료, 첨가제, 코팅색소, 주사제용 고무마개, 실험용 동물, 제약기기, 시험장비, 공조시설 (양압, 음압 시설) 등을 제조 또는 취급하는 회사들, 또 GMP 등을 교육하는 전문 기관도 생겨났다. 기존의 제약회사 내에서의 진출 분야도 다양해졌다.순수 연구는 물론, 학술, 개발 (식약처 승인 받기), 글로벌 업무, 영업, 주가 관리 등 개인의 능력과 취향에 따라 진출할 수 있는 분야가 다양해 진 것이다. 또 의약품 시장이 국제적으로 개방됨에 따라 많은 다국적 기업이 국내에 생겼는데 약사들, 특히 여약사들의 이들 기업으로의 진출이 괄목할만하다. 끝으로 용약분야 업무는 크게 병원약국과 일반약국에서 환자에 대한 의약품의 투여로 나눌 수 있는데, 앞으로 환자 개개인의 유전적 특성 등에 따른 환자 맞춤형 약물요법 (personalized drug therapy)이 대세를 이룰 전망이다. 이에 따라 복약지도 등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될 전망이다. 병원약제부에서는 숙원사업이던 특수 질환 전문약사 제도가 실시됨에 따라 약사들의 직능도 다양화, 전문화 될 전망이다. 나는 인공지능의 시대에도 약사의 직역은 더욱 진화할 것으로 믿는다.
2020-12-16 23:38 |
[기고] <312> 최근의 주례사
지난 10월 마스크를 쓰고 주례를 보았다. 그 때의 주례사를 다소 수정하여 소개한다.결혼식은 인생이라는 바다에 ‘OOO/OOO의 가정’이라는 이름의 돛단배가 항해를 시작하는 출범식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몇 가지 축복의 말씀을 드립니다. 두 사람이 탄 돛단배가 무사히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순풍을 만나야 합니다. 항해할 때에 운(運)이 좋은 사람은 순풍을 만나고, 운이 나쁜 사람은 폭풍을 만납니다. 그래서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는 말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인생의 7할은 운이 좌우한다는 말이지요. 저는 이 말을 은칠기삼(恩七技三)으로 바꿔 부릅니다. 하나님 은혜가 7할이라는 뜻인데, 사실 인생의 100%가 다 하나님 은혜에 달려 있습니다. 순풍이냐 폭풍이냐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관사항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바다의 바람을 좌우할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순풍이 불기만을 기도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같은 기도를 해도 어떤 사람은 순풍을 만나고 어떤 사람은 폭풍을 만납니다. 왜 그런지 우리는 그 비밀을 알지 못합니다.다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가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고 가르치셨으니, 아마도 순풍, 즉 복을 기원하는 사람의 기본 자세는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아닐까 짐작할 따름입니다.그런데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코로나 19 대유행의 와중에도 이렇게 아름다운 결혼식을 올릴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리고 두 사람은 건강하게 태어나 지혜롭게 성장해서 좋은 직장에 다니다가, 이렇게 멋진 배우자를 만나 사랑으로 결혼에 이르게 되었으니 이 또한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의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나의 오늘은 내가 잘 나서가 아니라 다 하나님 은혜로 받은 것’임을 깨닫고 감사하는 사람은 결코 교만하게 살 수 없습니다. 자연 겸손해지고, 성실해지고, 정직해지고 온유해 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나보다 축복을 덜 받고 있는 사람들까지 이해하고 포용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시작은 감사이어야 하고 그 완성은 사랑이어야 합니다. 사랑 없는 항해는 순항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사랑 없는 가정에 복이 가득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하기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합니다. 자식 사랑이 제일 쉽고 부부 사랑이 그 다음이며 부모 사랑이 제일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식 사랑은 절제가 필요하지만, 부모 사랑은 이를 악물고 해야 하는가 봅니다. 부모 사랑을 효도(孝道)라고 하는데, 얼마나 효도하기가 어려우면 태권도, 서도(書道) 등에 사용하는 길 도(道)자를 붙여 놨겠습니까? 당연한 말이지만 되도록 부부 간의 싸움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서로 말을 잘해야 합니다. 나는 인생은 언구행일(言九行一), 즉 인생은 90%의 말과 10%의 행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부부 간에도 말을 잘해야 합니다. 서로 입만 열면 사랑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말하지 않으면 절대로 모르는 것이 사랑입니다. 부모님께도 자식에게도 틈만 나면 “사랑한다”는 말을 계속 반복해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주의해야 할 것은 부부간에 본심(本心)을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심지어 부부 간에 대화(對話)하지 말라고까지 합니다. 왜 그러는지 아세요? 잘못된 대화는 상대방에 대한 지적질로 발전(?)한 다음 마침내 큰 부부싸움으로 확전(擴戰)될 우려가 크기 때문입니다. 본심을 담은 지적질은 사랑을 파괴하는 마귀임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지적질이 목구멍 밖으로 나오려고 하면 재빨리 “아부 모드” 스위치를 켜고 아무 말이라도 좋으니 칭찬의 말을 해야 합니다. 솔직한 지적질은 부부 싸움을 치열하게 만들지만, 아부성이라도 칭찬은 서로간의 사랑을 돈독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러니 진심 어린 칭찬은 얼마나 위력이 크겠습니까?두 사람의 가정의 인생항로에 하나님의 순풍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축복합니다.
2020-12-02 20:39 |
[기고] <311> 어색한 표현들
세월이 가면 말도 바뀌게 마련이라지만 그래도 내 보기에 어색한 표현들이 적지 않다.1. 수동태의 남용1) 보여집니다 (일본어의 ‘미라레루’와 유사. ‘보입니다’로 충분). 2)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관심이 모이고 있다’, ‘관심이 간다’가 나을 듯). 3) 생각됩니다. 생각되어집니다 (일본어의 ‘오모와레루’가 연상됨. ‘생각합니다’가 좋을 듯). 4) 예상된다 (예상한다). 5) 에너지를 너무 분산한 것은 아닌가 (‘분산시킨 것은’이 나을 듯).2. ‘..도록 하겠습니다’의 남용1) 소개시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소개하겠습니다’로 충분). 2) 노래를 한번 불러보도록 하겠습니다 (한번 부르겠습니다). 3) 시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작하겠습니다). 4)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발표하겠습니다). 5) 투표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진행하겠습니다). 6) 전해드리도록 하도록 하겠습니다 (전해드리겠습니다). 7)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마무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무리하겠습니다)3. ‘같아요’의 남용 1) 모처럼 야외에 나오니 기분이 너무 좋은 것 같습니다 (기분이 참 좋습니다). 2) 상품이 마음에 드시면 지금 번호를 눌러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번호를 눌러 주세요). 3) 궁금하면 OO를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OO를 보십시오). 4) 이래서 내가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이래서 내가 좋아했습니다). 5) 감사한 것 같아요 (감사해요). 6) 아직도 고마워하는 것 같아요 (아직도 고마워하고 있어요). 7) 별을 보는 것이 우리들의 주목적이었던 것 같아요 (주목적이었어요). 8) 느낌이 남달랐던 것 같아요 (느낌이 남달랐어요).4. ‘너무’의 남용1) 너무 좋아요, 너무 축하 드려요, 너무 기뻤었던 것 같아요 (‘너무’는 ‘다들 너무해요’의 용례처럼 ‘지나쳐서 안 좋다’는 의미를 갖고 있으므로, 각각 ‘참 좋아요’, ‘진심으로 축하 드려요’, ‘정말 기뻤어요’가 좋을 듯).5. ‘부분’, ‘보수적’ ‘제한적’ 및 ‘일정 정도’의 남용1) 서브 부분에서 좀 보완이 필요하다 (서브 보완이 필요하다). 2) 예산을 보수적으로 잡았다 (정확한 의미를 알기 어렵다). 3) 그 영향은 제한적이다 (그 영향은 별로 크지 않다). 3) 일정 정도 타당하다 (어느 정도 타당하다).6. 경어의 남용1) 병원에 갔더니 나보고 ‘잠시 앉아계실 게요’ 한다. 식당에 갔더니 ‘음식 나오실 게요’ 한다. (원래 ‘게요’는 남의 행동을 예고하는 데에 쓰는 어미(語尾)가 아니다. 여기서는 각각 ‘잠시 앉아 계세요’, ‘음식 나왔습니다’가 맞을 듯). 2) 식당에 가면 ‘주문 도와 드릴게요’, ‘계산 도와드릴게요’ 소리를 듣는다 (뭘 도와준다는 말인가? 그냥 ‘주문하세요’, ‘계산 이렇게 나왔습니다’하면 될 듯). 7. 한자 조어(造語) 및 외래어 남용1) 유어금지 (游魚禁止)와 소주밀식 (小株密植)- 각각 ‘고기잡이 하며 놀지 말라’, ‘벼 포기를 작게 해서 촘촘하게 심으라’는 뜻이라는데 유식이 지나쳐 보인다. 쉬운 말로 고쳤으면). 2) baby changing table (아기 기저귀 가는 곳이라는 뜻이라는데 맞는 영어인지는 모르겠으나 좀 이상해 보임). 3) 강남더샵 라르고 오피스텔(우리 동네 건물 이름. 주변에 외래어 투성이의 건물 이름이 너무 많다. 혹시 정말 시부모님이 못 찾아 오게 이렇게 정했나?).8. 기타 (회자, 예정, 되세요) 1) ‘좋은 하루 되세요, 즐거운 영화관람 되세요, 행복한 여행되세요 (이런 것들이 ‘되라’고 명령어체로 말해서 되는 일인가? 각각 ‘하루 잘 지내세요’, ‘영화 즐겁게 보세요’. ‘재미있게 보세요’가 맞을 듯). 2) 비가 올 예정이다 (비가 오기로 우리가 정한 것이 아니므로 ‘비가 올 것으로 예상된다’가 맞다). 3) 회자(膾炙)된다 (‘인구(人口)에 회자된다’가 표준 용법인줄 알았는데 요즘은 그냥 ‘회자된다’고 쓰는 사람도 많다. 원래는 음식 맛이 입에서 떠나지 않는다는 긍정적인 의미로만 썼다는데 요즘은 부정적인 의미로도 쓴다. 괜찮은 건지 모르겠다).
2020-11-18 09:00 |
[기고] <310> 팩트체크(2). 자몽주스는 정말 녹았을까
이번에는 어떤 물질(용질, 容質, solute)이 어떤 용매(溶媒, solvent)에 녹는다, 즉 용해(溶解, dissolve)된다고 하는 현상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한다. 대한약전(통칙, 通則)에서는 용해성(溶解性)을 ‘의약품을 고형인 경우 가루로 한 다음 용매 중에 넣고 25 플러스 마이너스 5도C에서 5분마다 30초간씩 세게 흔들어 섞을 때 30분 이내에 녹는 정도’라고 정의한 다음, 용해성의 크기를 “썩 잘 녹는다, 잘 녹는다, 녹는다, 조금 녹는다, 녹기 어렵다, 매우 녹기 어렵다, 거의 녹지 않는다”로 구분하였다.그리고 그 밑에 ‘녹는다는 말은 투명하게 녹는 것을 의미한다’고 정의하였다. 여기에서 ‘투명하게’란 말은 눈에 띄는 의약품 가루가 없어진 상태를 말하는 모양인데, 나는 이 마지막 정의가 지나치게 애매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실험실에서는 용질을 용매에 넣고 저어 준 다음 여과지로 여과(filter)하여 걸러져 나온 투명한 액체를 용액(溶液, solution)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용질 분자는 용액 중에서 어떤 상태로 존재할까? 어떤 경우에는 단분자(單分子) 상태로 분산되어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분자들끼리 회합하여 이량체(dimer)나 그 이상의 다량체(polymer) 상태로 존재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예컨대 살리씰산은 물 중에서 이량체로 존재한다고 한다.특히 주의해야 할 점은 우리 눈에는 ‘투명하게’ 보여도 나노입자 (nanoparticles) 상태로 현탁(懸濁, suspend) 분산되어 있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여과할 때 흔히 쓰는 흔히 밀리포어 필터의 구멍 크기(孔徑, pore size)는 0.6 미크론이므로 이 필터로 여과하여 받은 여액(濾液)은 눈으로 보기에는 ‘투명한 용액’처럼 보여도, 여과 용액 중에는 600 nm 이하 크기의 나노입자가 얼마든지 공존할 수 있는 것이다. 약전의 정의에 따르면 단분자 분산, 이량체 분산, 나노입자 현택액 모두가 다 ‘용액’이다. 이는 과학의 발전에 비추어 볼 때 지나치게 비과학적인 정의이다. 이제는 용질 분자가 분산되어 있는 상태에 따라 단분자 분산, 이량체 분산, 나노입자 현택액(suspension) 등으로 구분해서 불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의약품이 위장관 내에서 단분자 분산 상태로 녹는지, 이량체 분산 상태로 녹는지, 아니면 나노 미립자 분산 상태로 현탁되어 있는지를 구별하지 않으면, 그 약물이 위장관에서 흡수되는 메커니즘을 규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약물이 위장관 막을 통과하여 흡수될 때에 분자와 미립자의 기전이 전혀 다르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또 분자라 해도 단분자보다 큰 다량체 분자의 막투과성이 낮다. 예컨대 살리씰산의 막투과성은 실질 분자량을 단분자의 2배로 보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특히 나노 미립자는, 분자의 경우와 달리 수동확산 (passive dissfusion)이나 막 수송체를 이용한 능동수송(active transport)을 통하여 흡수되지 않고, 미립자 고유의 endocytosis(우물우물 삼키기)란 기전을 통해 흡수되는데, 분자 분산이냐 아니면 미립자 현탁이냐 등 분산상태를 고려하지 않으면 어떤 약물의 화학구조와 위장관 흡수와의 관련성(구조-흡수 상관성)을 잘못 해석하게 된다.이처럼 잘못된 정보에 근거하여 신약의 분자구조를 설계한다면, 분자구조로부터 기대했던 흡수 특성을 얻지 못해 낭패를 볼 우려도 있는 것이다. 자몽 주스를 복용하면 간의 특정 효소가 과잉 발현되어 어떤 약물의 흡수와 약효발현이 영향을 받는다는 유명한 연구가 있다. 그러나 이 연구에서는 자몽 주스 중에 어떤 특정 성분이 어떤 상태로 녹아 있는지 규명하지 않았다.나는 자몽 주스에는 특정 성분의 나노 미립자가 현탁되어 있지 않나 의심한다. 그리고 자몽 주스의 작용은 분자가 아닌 나노 미립자의 endocytosis에 기인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이 점에 주목하여 재 시험을 한다면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 ‘발견’될지도 모르겠다. 이 생각을 하면 지금도 가슴이 설렌다.
2020-11-04 17:25 |
[기고] <309> 착각
칠십 노인이 아주 오랜만에 친구 부부를 만났는데, 글쎄 그 친구가 자기 부인을 ‘자기야!’ 하며 부르는 게 아닌가? 젊었을 때는 ‘순자야!’ 하고 소리 지르던 친구가 어쩌다가 이렇게 변했을까 안타까워서 물었다. “이 보게 친구야, 애들도 아니고 다 늙어서 남사스럽게 ‘자기야’가 다 뭔가? 큰 소리로 이름을 부르던 자네의 기개는 다 어디로 갔는가?”그러자 친구는 귀속말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쉿 조용히 하게, 실은 마누라 이름이 생각이 안 나서 할 수 없이 ‘자기야’라고 부르는 거야”. 비웃던 친구는 그제야 알게 되었다. 그 친구가 일견 남사스럽게 변한 데에는 다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그 때 그는 깨달았다고 한다. ‘남을 함부로 착각하고 비난해서는 안되겠구나’. 이번에는 다른 집 영감님 이야기이다. 영감님이 어디선가 들었는데 여자가 나이를 먹으면 가는 귀를 먹는다는 것이었다. 예컨대 30미터 떨어진 곳에서 아내를 불러봐서 잘 못 알아 들으면 약간 귀가 먹은 것이고, 20미터 떨어진 곳에서의 소리를 못 들으면 제법 많이 먹은 것이며, 10 미터 거리에서도 못 들으면 심각한 상황이니 병원엘 데리고 가봐야 한다는 얘기였다. 이 이야기를 들은 영감님은 집에 와서 마나님의 청력을 테스트 해 보기로 하였다.그래서 30미터 떨어진 소파에 앉아 부엌에서 저녁 준비를 하고 있는 마나님을 향해 소리쳐 물었다. “여보, 오늘 저녁 메뉴는 뭐예요?” 그런데 아내로부터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영감님은 ‘아하 이 사람이 정말 귀가 어두워 졌나 보다’ 생각하고 가슴이 시렸다. 그래서 20미터 떨어진 식탁으로까지 가서 다시 한번 물어 보았다. “여보, 오늘 메뉴가 뭐예요?”아 그런데 이번에도 아무런 대답이 없는 게 아닌가? 가슴이 철렁 내려 앉은 영감님은 몇 발 더 걸어나가 싱크대 옆 마나님 곁에 바짝 붙어 섰다. 그리고는 마나님 귀에 대고 한번 더 물었다. “여보 오늘 메뉴가 뭐냐구?” 그러자 이 말이 절반도 끝나기 전에 마나님이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아이구, 귀 떨어지겠네! 김치찌개라고 몇 번을 얘기해야 알아들어? 제발 보청기 좀 해 이 영감텡이야!” 그제야 영감님은 마나님이 아니라 바로 자기 귀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이 아닌 내게 문제가 있으면서도 나는 늘 옳고 남은 늘 그르다는 선입견(착각)을 갖고 사는 사람에게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기회는 오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든다. 세종대왕 때 황희 정승에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가 젊었을 때 유람 중 남쪽 어느 지방에 이르렀을 때의 일이란다. 늙은 농부가 누렁소 한 마리와 검정 소 한 마리를 교대로 부려가며 논을 갈고 있었다. 이를 구경하던 황희가 큰 소리로 농부에게 물었다. “누렁 소와 검정 소 중에서 어느 소가 논을 더 잘 가나요?”그러자 농부는 일손을 놓고 일부러 황희가 있는 곳까지 오더니 황희에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누렁 소가 더 잘해요”. 황희는 “뭐 그 얘기를 그냥 거기서 하시지, 일부러 나와서 귓속말로 하시나요?” 물었다. 그러자 농부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두 마리가 다 힘들여 일하고 있는데, 어떤 소가 더 잘한다고 내가 소리치면 일을 못하는 소는 기분이 나쁘지 않겠습니까?”. 농부의 말에 황희는 큰 가르침을 받았다. 황희 정승의 일화를 하나 더 소개한다. 황 정승의 집안 노비 두 사람이 서로 다투다가 그를 찾아 와 서로 상대방의 잘못을 일러바치자, 먼저 온 종의 말을 듣고는 “네 말이 옳다”라고 하고 다음에 온 다른 종의 말을 듣고는 “네 말도 옳다”라고 하며 돌려 보냈다. 이를 지켜보던 부인이 어찌 이 말도 옳고 저 말도 옳다고 하냐고 나무라자 그는 “부인의 말도 옳소”라고 하였다. 18년간이나 영의정을 지낸 황희가 바보라서 이처럼 무정견(無定見)한 말을 했을까? 젊었을 때 농부로부터 교훈에 따라 소보다 천만 배 귀한 사람(종)들의 싸움에서 함부로 어느 편을 정죄(定罪)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때로는 무정견이 섣부른 착각이나 맹신에 따른 정죄(定罪)보다 오히려 훌륭해 보이는 오늘이다.
2020-10-21 16:41 |
[기고] <308> ‘하였다’와 ‘되었다’
요즘 매스컴에서 우리말을 사용하는 습관 중 내 생각과 맞지 않아 듣거나 보기에 거북함을 느끼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 중 하나가 약춘 269 “자동사, 타동사, 수동태” (2019.3.13)에서 언급한 바 있는 대로 ‘되었다’ 라고 쓰는 것이 옳은 것 같은데 ‘하였다’라고 쓰는 경우이다. 매스컴에서 발견되는 그런 사례들을 모아 보았다. 먼저 약춘 269에서 소개했던 사례들을 다시 한번 적어 보면, 1) 영화가 개봉(開封)했다 (개봉되었다), 2) 영화가 상연(上演)했다 (상연되었다), 3) 경제 성장률이 둔화(鈍化)했다 (둔화되었다), 4) 이 달 말에 계약이 종료(終了) 한다 (종료된다), 5) 한반도가 분단(分斷)했다 (분단되었다), 6) 추모제가 엄수(嚴守? 嚴修? 둘 다 약간 거북함)하였다 (엄수되었다), 7) 애국가 봉창으로 시작하였다 (시작되었다), 감기가 시작했다 하면 판콜! (시작됐다), 8) 불신감이 확산(擴散)하고 있다 (확산되고 있다), 9) 한진그룹은 약사면허를 대여(貸與)하여 약국을 개설하였다 (대여받아, 또는 빌려서), 10) 갈등은 본격화(本格化)할 전망이다 (본격화될), 11) 흥행이 쭉 이어가길 바란다 (이어지길), 12) 평화는 군이 강할 때 지속(持續)한다 (지속된다), 13) 그 전집 중 1책이 전(傳)하지 않는다 (전해지지), 14) 그 사고로 세 명의 행인이 부상(負傷)하였다 (부상을 당했다, 부상을 입었다), 15) 화재가 발생(發生)하였다 (사전을 보니 ‘발생되었다’와 ‘발생하였다’가 둘 다 맞는 듯하다) 등이 있다. 약춘 269를 쓴 이후도 그런 사례들은 끊임없이 발견되었다. 그런 사례들을 추가해 보면 다음과 같다. 16) 약국, 처방전은 슬슬 회복(回復)하는데… 오히려 매출은… (회복되는데), 경제가 회복할 것으로 전망된다 (회복될), 17) 앙드레 김은 1977년 디자이너 최초로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수여(授與)했으며 (수여 받았으며), 18) 추경이 제때에 통과(通過)하지 않으면... (통과되지), 19) 언제쯤이면 산업의 과학화가 실현(實現)할까? (실현될까), 20) 김 약사는 지난 6일 개막(開幕)한 학술대회에서 이같이 밝혔다 (개막된), 21) 시장이 포화(飽和)한 서울보다는 경기도의 시장이 더 커가는 추세다 (포화된, 커지는), 22) 중국산을 한국 등 다른 나라 제품으로 대체하려는 노력이 가속(加速)하는 분위기 (가속되는), 지반 공사로 원형훼손이 가속할 것이다 (가속될), 23) 상황이 갈수록 악화(惡化)하면서 현지에선 병상 부족 사태까지… (악화되면서). NASH는 지방간이 악화해 간세포 손상을 유발하는 질병이다 (악화되어). 24) 덕수궁 석조전 역시 피격(被擊)했지만 미술관 지하창고는 멀쩡했다 (피격됐지만), 25) 행정수도건설추진위원회가 발족(發足)하자 헌법 소송이 제기됐다(발족되자), 26) 폭우로 제방이 붕괴(崩壞)하면서… (붕괴되면서), 27) 최근 시리아 내전이 격화(激化)하면서 (격화되면서), 28) 디즈니 테마파크가 지난 달에 재개장(再開場)하였다 (재개장되었다). 이처럼 ‘되었다’라고 해야 할 경우에 ‘하였다’라고 하는 것은 이미 매스컴에서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 잡은 느낌이다. 하도 사례가 많아 문법이 바뀐 것을 나만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또 내가 이런 현상을 걱정하는 것이 부질 없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을까? 누군가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그냥 그러려니 하고 신경 쓰지 마세요” 라는 반응이 돌아왔다. 내가 과민하다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다른 어떤 이는 ‘요즘 기자들이 한자를 잘 몰라서 그래요’라며 내 편을 들어 주었다. 내 말이 맞는다는 것이다. 과연 내 생각이 맞는 것인지 기회가 닿는 대로 한글 학자들에게 물어 봐야겠다. 아울러 내 생각이 맞는다면 이를 바로 잡도록 노력해 달라고 부탁도 해 볼 생각이다.코로나19가 아직도 기승을 부리는 이 와중에 한가한 이야기를 꺼내 송구스럽다.
2020-10-07 10:12 |
[기고] <307> 팩트체크 (1). 위액(胃液)의 pH
첨단과학의 시대에도 ‘잘못된 기초 지식’을 바탕 삼아 진행되고 있는 연구들이 적지 않다. 이는 진실의 탑을 모래 위에 세우려 드는 것처럼 결국은 헛수고가 될 수 밖에 없는 일이다. 약제학 영역에서도 그런 ‘잘못된 기초 지식’이 몇 가지 눈에 띈다. 오늘은 ‘위액(胃液)은 늘 산성(酸性)이다’라는 명제에 대해 팩트 체크를 해 보고자 한다.사람이 정제(錠劑)를 복용하면 정제가 처음 만나는 환경이 위액이다. 먹은 약이 약효를 나타내려면 1) 정제 중에 들어 있는 약물(藥物, 약효 성분)이 일단 위액 속으로 용출(溶出), 즉 녹아 나온 후, 2) 위의 유문(幽門)을 통과해 소장(小腸)으로 내려가야 하고, 3) 거기에서 소장 표면을 덮고 있는 소장상피세포(小腸上皮細胞)를 통과해서 혈액 중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 순차적인 과정을 흡수(吸收)라고 부르는데, 흡수의 첫 단계가 약물이 위액에서 용출되는 과정인 것이다. 약물이 위액에 빨리 용출되기 위해서는 정제 속에 들어 있는 약물이 위액에 잘 녹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염기성(鹽基性, 또는 알칼리성) 약물은 산성(酸性)인 물에 빨리 녹고 알칼리성 물에는 잘 녹지 않는다. 그러므로 위액의 산성도(酸性度, pH)는 정제를 복용하였을 때 함유된 약물이 용출(溶出)되는 속도를 좌우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위액의 산성도(pH)는 약물의 용출속도, 즉 흡수 및 약효 발현 속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위액의 pH는 얼마일까? 모든 교과서는 ‘위액의 pH는 위에서 분비되는 염산(鹽酸) 때문에 1~2’라고 쓰고 있다. 내가 쓴 생물약제학 교과서에도 공복 시에는 1.2~1.8, 식후에는 3.5~5.0이라고 하였다. 약사 면허 시험에서도 1~2라고 답해야 정답으로 인정해 준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들에 의하면 이는 늘 옳은 것은 아니었다. 한 연구에 의하면 위액의 pH는 인종(人種, race)과 나이(age)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미국인의 경우 무염산증(無鹽酸症, achlorhydria)인 사람이 20-40세는 12.5%, 40-60세는 26.2%, 60세 이상은 31.5%에 이른다. 나이가 들수록 위액의 pH가 산성이 아니라 중성 내지는 약알칼리성인 미국인이 많아지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특히 일본인에게 이런 경향이 현저하였다. 무염산증 환자의 빈도가 각각의 연령대에서 52.5%, 81.6%, 90%에 이르는 것이다. 일본 젊은이의 절반 이상, 그리고 40대 이상의 대부분이 무염산증을 보였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어떨까? 조사 결과 각 연령대에서 40.9%, 46.2%, 57%가 무염산증이었다. 일본인 보다는 적지만 미국인에 비해서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특히 고령자가 무염산증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염기성 약물(정제)은 미국인에게는 일반적으로는 효과가 잘 (빨리, 강하게) 나타나겠지만 특히 고령의 일본 노인에서는 약효가 잘 나타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위액이 산성(미국인)일 때는 약이 잘 (빨리, 많이) 녹지만 산이 없는 경우, 즉 액성이 중성이나 약알칼리성인 고령자의 위액 중에서는 염기성인 약물이 잘 안 녹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우리나라 사람들도, 일본 사람들보다는 덜 하지만, 역시 고령이 될수록 무염산증인 사람이 적지 않아 염기성 약물의 약효가 잘 안 나타날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고령자에게 염기성 약물을 투여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여 세 나라의 정제에 대한 용출 시험이 다르게 규정되어 있음에 주목하여야 한다. 즉 각 나라의 약전(藥典)을 보면 미국은 정제의 용출시험액으로 pH 1.2 액을, 우리나라는 pH 1.2, 4.0, 6.8 및 증류수를, 일본은 염기성 약물에 대해서는 pH 1.2, 3~5, 6.8 액 및 증류수를, 산성 약물에 대해서는 pH 1.2, 5.5~6.5, 6.7~7.5 및 증류수를 사용 하도록 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위액의 pH는 언제나 1~2’라는 고정 관념을 갖고 신약개발이나 정제의 처방설계에 임해서는 안될 것이다.
2020-09-16 10:26 |
[기고] <306> 경성약전의 독일어 교수 조희순
경성약학전문학교(1930~1946, 경성약전)의 역대 교수 총 14명 중 한국인 교수는 독일어의 조희순(曹喜淳), 생약학의 도봉섭(都逢涉)과 심학진(沈鶴鎭), 그리고 영어의 배상하(裵相河) 등 4명이었다. 조희순은 1930.4~1933.12, 도봉섭은 1930.5~1942.10, 심학진은 1934.10~1941.12에 교수로 근무한 기록이 있지만 배상하는 1935년경 교수로 재직한 사실 이외에는 자료가 없다. 이하 조희순 교수에 대한 김봉희의 논문 (조희순의 문학연구, 현대문학이론 연구 55집, 2013)을 발췌하여 소개한다. 조희순은 1905년 3월 경남 김해에서 아버지 조정환과 어머니 송정희 사이에서 1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여동생은 조희복이다. 그의 아버지는 사범학교 교사를 지냈으며 경북의 청송, 경산, 영천 군수를 거쳐 ‘대정 생명보험주식회사’와 ‘동부위생조합장’등을 역임한 사업가이다. 그의 유년기와 청년기는 부유한 환경이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는 대구고등보통학교 4년을 다니다가 일본으로 가 야마구찌(山中) 중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제국대학 독문과에 진학한 다음 23세가 되던 1929년에 졸업(문학사)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그의 주소는 경성 혜화동이었다. 그는 최준영과 결혼(시기 불명)하여 아들 조관현을 낳았다.‘서울대학교 약학대학 100년사’(이하 ‘100년사’)에 따르면 조희순은 1930년 4월에 한국인 최초의 경성약전 교수로 부임하여 1933년 12월까지 3년 8개월간 독일어를 가르쳤다. 그는 소박하면서 소탈한 성격을 지닌 애연가(愛煙家) 였다.그는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이하 경성여의전) 강교사(講敎師)도 겸하였다. 그러나 1936년 2월에 발간된 ‘삼천리’ 제8권 2호에 그가 경성여자의학강습소의 교무주임이라고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경성약전과 경성여의전을 그만 두고 언제부터인가 그 강습소에 근무한 것으로 보인다.학생들은 키가 훤칠하게 크고 기골이 장대한 조희순 교수를 ‘노서아 양복쟁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100년사). 야마구찌 고등학교에 다니는 3년 동안 로맨스 많은 학교 생활을 보냈다고 술회 (동아일보 1930.10.7)할만큼 그는 낭만적인 문학도의 기질을 보였던 것 같다. 동경유학에서 돌아 온 그는 1929년 12월을 거쳐 1930년부터 본격적으로 신문과 잡지 매체를 통해 활발한 문단 활동을 하였다. 그는 원래 이름인 조희순(曹喜淳) 대신 하인리히 하이네의 이름을 따 하인리(河仁里) 또는 조희순(曹希醇)이라는 필명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의 작가비평은 항상 실증주의적 입장에 섰고, 문예비평은 대부분 독일 문단의 동향을 알려주었으며, 공연비평은 표현주의와 자연주의를 수용했다고 한다. 해외문학파 출신의 김진섭, 유치진 등과 1931년 7월 ‘극예술연구회’를 창립한 그는 한국 근대 초기에 독일 극문학을 한국에 소개하여 다양한 신극(新劇)운동에 힘썼던 평론가 중의 한 명이었다.그의 문단활동은 1936년 7월에 멈춰 있다. 1939년 ‘문예월간’ 문인 소식란에 ‘공생약업(共生藥業) 주식회사’의 이사라고 나와 있는데, 그 회사 설립에 대주주로 동참하고 감사이사를 겸임한 것으로 보인다. 광복 전 ‘하인리 실업’이라는 회사도 운영했는데 무슨 사업을 하는 회사인지는 불명이다. 1947년 이승만의 도미외교에 100만원이라는 거금의 후원금을 기부하였다. 1952년 12월 20일 ‘조선전업(현 한국전력)’의 부사장 자격으로 한미(韓美) 전력회의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 후 ‘조선전업’에서 이름을 바꾼 남선전기의 사장으로 취임하였는데 그 후의 행적은 불명이다.
2020-09-02 09:36 |
[기고] <305> 사과, 배, 복숭아
지금의 내 생각, 내 주장이 후세에도 옳을지 확신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옛날에 경부 고속도를 만들 때 왜 막대한 돈을 들여 쓸데없는 고속도로를 만드냐고 강력히 반대한 정치 지도자들이 있었다고 한다. 또 올해로 도입 20년을 맞은 의약분업도 2000년 당시에는 반대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경부 고속도로와 의약분업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의 한 때의 주장이나 신념이 나중에 잘못된 것으로 판명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인간이 시공(時空)을 뛰어 넘는 불변의 진리를 깨닫기란 자고(自古)로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워낙 인간의 지식이 제한적인데다가, 코로나 19와 같은 미래에 일어날 사건 사태를 예측할 능력이 없을뿐더러, 그 나마의 주장이나 신념도 자신의 고정 관념이나 선입관에 의해 왜곡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섣부른 주장이나 정책은 자칫 사회를 불안하게 만드는 등 역사에 큰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어떤 주장을 펴기에 앞서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내 생각이 틀릴 수 있으며, 또 나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또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다 바보, 미친 사람 또는 나쁜 사람으로 몰아서는 안 된다. 그들을 타도의 대상으로 여겨서는 더욱 안 된다. 반대 의견도 한번 더 헤아려 보아야 한다. 그리고 나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과도 조화롭게 공존할 생각을 해야 한다. 어차피 나만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므로 힘있는 사람이나 단체일수록 정책을 수립하거나 주장을 하기에 앞서 신중, 겸손한 태도를 보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기독교는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등 여러 교단으로 나뉘어 있다. 이 상황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교회 안에도 많다. 이에 대해 고 하용조 목사님은 ‘사과, 배, 복숭아가 다 한 바구니에 들어 있는 과일’이라고 하였다. 내가 속한 교단만 정통이라며 다른 교단을 배척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하신 말씀일 것이다. 사과와 배와 복숭아가 서로 나만 맛있는 과일이라고 주장한다면 얼마나 우습겠는가? 우리 말에 ‘우리’라는 말이 있다. 전에 ‘우리라는 우리’라는 글(약창춘추 99, 2012.4.11)을 쓴 바 있지만, ‘우리’라는 말에는 영어로 ‘we’라는 의미도 있고, 또 ‘돼지우리’의 용례처럼 우리들이 안전하게 지낼 수 있도록 울타리를 친 공간 (cage)이라는 의미도 있다. 우리(we)는 같은 우리(cage)에 사는 사람을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cage)는 넓을수록 살기에 좋다. 그런데 요즘 우리는 우리의 cage를 스스로 좁히고 있는 것 같아 걱정이다. 우리와 의견이 다른 사람 이마에 바보, 미친 사람 또는 나쁜 사람이라는 낙인을 찍어 우리의 cage밖으로 내 쫓는 것이 바로 그런 행위가 아닌가 한다. 또 지나친 갑(甲)질도 을(乙)들을 cage밖으로 내모는 행위일 것이다. 이렇게 나가면 cage 안에 있는 남아 있는 우리(we)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고 울타리 밖으로 쫓겨난 군중들의 숫자는 늘어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우리(we)가 적진(敵陣) 속의 포로처럼 역(逆)으로 낙인 찍히고 을(乙)의 신세로 전락할지도 모른다.이런 경고는 에멀젼(emulsion, 乳濁液)의 전상(轉相, phase transition)이라는 현상을 통해서도 들을 수 있다. 수중유 (水中油, o/w, 물 중에 작은 기름방울이 분산되어 있는 상태)형 에멀젼의 외상(外相)에 기름을 조금씩 추가해 나가면 어느 순간 에멀젼의 내외상이 뒤집혀(轉相) 유중수(油中水, w/o)형 에멀젼이 된다. 즉 밖(외상)에 있던 물이 내상(內相)에 갇혀 고립되는 것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란 말이 있는 것처럼, 완강하게 주장하기에 앞서 남의 의견을 열린 마음으로 들어보자. 그리고 적극적으로 포용함으로써 남과 내가 하나 되는 노력을 해보자. 우리(cage)를 넓혀 살기 좋은 우리 공동체로 만들어 나가자. 사과와 배, 복숭아 모두 다 맛있는 과일 아닌가! 서로 ‘있을 때’ 잘하자.
2020-08-19 09:21 |
[기고] <304> 언택트 시대의 동창회
나는 금년 2월, 서울대약대 동창회 상임위원회에서 2년 임기의 동창회장직 제안을 받았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지난 4년간 28회 졸업생인 C회장님이 회를 잘 이끌어 왔기 때문에 이번에는 29회 이후의 후배가 회장을 맡는 것이 순리(順理)였다. 그런데 다들 고사하는 바람에 어찌어찌 하다가 오히려 3년이나 선배(25회)인 내게 불똥(?)이 튄 것이다. 아무 걱정(?) 없이 동창회에 참석해 온 나로서는 불의(不意)의 일격(一擊)을 당한 느낌이었다.물론 더 나이 먹기 전에 동창회를 위해 미력을 보태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임자보다 선배로서, 또 모교 교수 출신으로서 회장을 맡는 것이 아무래도 쑥스럽고 거북스러웠다. 더구나 여기저기가 몸이 불편한 나에게는 아무래도 무리 같았다. 그래서 몇 번 고사(固辭) 하였지만 결국은 피할 수가 없었다.마음을 정하였지만 정식으로 회장에 취임하는 일은 의외로 쉽지 않았다. 회칙에 따르자면 회장은 반드시 2월에 열게 되어 있는 정기총회에서 선출해야 한다. 그러나 마침 시작된 코로나 19의 유행 때문에 전국적으로 ‘사회적 거리 두기’ 운동이 일어나고 있어서 회원들이 얼굴을 맞대고 만나는 대면(對面) 총회를 열 수 없었다. 부득이 코로나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정기 총회를 연기할 수 밖에 없었다.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코로나 사태는 세월이 흘러도 좀처럼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따라서 언제 총회를 열 수 있을지 전혀 기약(期約)할 수 없는 상황이 지속되었다. 회무 공백을 피하기 위하여 부득이 3월 1일부터 회장 직무를 수행할 수 밖에 없었지만, 내가 정식으로 회장으로 처신해야 되는지 여부를 잘 알 수 없는 난감한 상황에 처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6월 5일에 열린 2020년도 제1차 상임위원회는 정기 총회를 서면(書面)총회로 대체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의를 하게 되었다. 이는 제약바이오협회 등 여러 단체에서 이미 서면총회로 대면총회를 대체하고 있는 추세를 따른 것이었다. 사실 서면총회가 법적으로 대면총회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인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았지만, 사상 초유의 비상사태에 달리 뾰족한 대안도 없었다. 어떤 이사는 서면총회 대신 온라인 총회를 열자고 제안하였지만 온라인이 오히려 더 번거로울 수도 있다는 의견에 따라 최종적으로 서면총회를 선택하였다. 서면 총회를 준비해 보니 종래의 대면 총회를 준비하는 것보다 오히려 힘이 더 들었다. 주소가 있는 수천 명(2748명)의 동문들께 회의 자료 (결산 및 감사보고, 사업계획 및 예산안, 회장 등 임원개선안)를 프린트 하여 우송하는 일, 각 동기회장님들을 비롯한 동문들께 찬반 의견을 제시해 주십사 휴대폰 문자를 보내는 일, 동문들의 회신을 정리하는 일, 서면총회 진행 상황 및 결과에 대하여 감사위원회의 감사를 받는 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면총회의 결과를 다시 각 동문님들께 우편으로 알려드리는 일 등이 다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정식 회장도 아닌 사람이 이 과정을 진행하려니 단어 하나, 문장 하나 하나에 더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복잡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25대 동창회가 출범하였으나 정작 더 큰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모든 동창회는 ‘동창 간의 만남’을 통한 친목 도모를 주된 활동 목표로 삼아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 19의 유행으로 야기된 소위 언택트(untact, 사람들이 콘택트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우리나라에서 만든 말) 시대에는 그 ‘만남’ 자체가 매우 어렵게 되었다. 언택트가 뉴노멀(new normal)이 된 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과연 무슨 일을 해야 좋을까가 동창회의 새로운 과제로 떠오른 것이다. 나는 우선 동창회 홈페이지의 구축, 동창회보의 내실화 등 온라인 및 오프라인 소통의 활성화를 당면 과제로 삼을까 한다. 아울러 저서 등 동문들의 각종 업적을 수집 정리 및 전시하는 일도 구상하고 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걱정되는 바가 하나 둘이 아니다. 하루 바삐 사태가 종식되기를 기원하며 이 상황을 ‘기록’으로 남기는 바이다.
2020-08-05 09:41 |
[기고] <303> 빛과 소금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들으려고 산 위에 모여든 무리에게 ‘세상을 썩지 않게 하는 소금(鹽)이 되고, 세상을 밝히는 빛(光)이 되라’고 가르치셨다 (산상수훈, 마 5:13-16). 내가 졸업한 제물포 고등학교의 모표(帽標)는 세 개의 소금의 결정 위에 등대(燈臺)모양의 고(高)자를 얹은 형상이었다. 이에 따라 교훈도 “학식은 사회의 등불, 양심은 민족의 소금”이었다. 나는 나이를 먹을수록 빛과 소금에 깊은 의미가 있음을 깨닫는다.1. 먼저 빛에 대해 생각해 본다. 예수님은 “너희도 너희 빛을 사람들에게 비추라”(마 5:16)고 하셨다. 빛의 첫 번째 특징은 당연히 밝음이다. 햇빛이 대표적이다. 햇빛은 물론, 촛불이나 등잔불까지, 크고 작은 모든 빛은 어둠을 몰아 냄으로써 사물을 식별할 수 있게 해 준다. 빛이 없으면 실족(失足)한다. 폭풍우 치는 캄캄한 바다에서 배에게 비추는 한 줄기 등대 빛은 그야말로 생명 줄이다. 빛의 또 다른 특징은 따듯함이다. 한 겨울 햇빛은 햇볕, 곧 양지(陽地)를 만들어 사람이나 짐승들을 모여들게 만든다. 그래서 상대방을 대화의 장으로 이끌어 내는 정책을 햇볕정책이라고 부른다. 햇빛은 젖은 것을 말려 곰팡이 등을 죽이는 방부, 살균 작용도 한다. 농수산물이나 옷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햇빛에 잘 말려야 한다. 햇빛은 치료 작용도 한다. 내가 1994년 개복 수술을 받은 후 2년 가까이 복부에 장루(腸瘻)를 차고 지낼 때, 상태가 좋지 않으면 그 부위를 햇빛에 쪼이곤 했었다. 그러면 장루의 색갈이 신속하게 정상으로 회복되었다. 한 발 더 나가면 햇빛은 생명이다. 요즘 우리 집 옥상에 심은 채소가 무럭무럭 자란다. 햇볕이 잘 들기 때문이다. 햇볕이 안 드는 지하실 같은 데에선 아무리 물을 잘 주어도 식물이 죽는다. 또한 일광욕은 우리 몸에 필요한 비타민 D를 생합성 해 주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햇빛은 식물이나 동물에게 공히 생명이다. 햇빛은 표백 작용도 한다. 얼룩이 진 흰 옷을 빨아서 그늘에서 말리면 얼룩이 잘 안 없어진다. 그러나 햇볕에 널어 놓으면 신기하게도 말끔하게 없어진다. 빛은 얼룩뿐 아니라 사람의 죄를 들어냄으로써 죄를 없애준다. 죄는 대개 어둔 밤에 짓는다. 그래서 죄는 어둠의 자식이다. 밝은 곳에서는 사람이 죄를 잘 짓지 않는다.밝은 새벽부터 술 마시고 죄짓는 사람은 없다. 밤에 몰래 쓰레기를 버리는 어두운 곳에 밝은 조명을 해 놓으면 몰래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이 없어진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교회 기도는 밝은 새벽에 시작되고 술집은 어둔 저녁에 문을 연다. 지금 어둠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몸을 돌려 빛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 어떤 목사님의 설교 내용이다. 2. 다음으로 소금에 대해 생각해 본다.소금의 대표적인 작용은 방부(防腐)작용이다. 소금은 음식을 썩지 않게 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만일 소금이 짠 맛을 잃어버리면….. (마 5:13).”처럼 성경은 믿는 사람들에게 세상을 썩지 않게 하는 소금의 방부 역할을 하라고 가르친다. 소금의 미덕은 겸손과 절제에도 있어 보인다. 소금은 배추의 숨을 죽여 부드럽게(겸손하게) 만들어 주지만, 과(過)하면 고혈압을 유발하기 때문에 최소량만 사용하여야 한다. 요즘 내가 새삼 주목하는 것은 소금의 조미제(調味劑)로서의 역할이다. 음식이 싱거우면 맛이 없다. 적당량의 소금을 넣어야 비로소 음식 맛이 제대로 난다. 그런 의미에서 소금은 가장 기본적인 조미제이다. 고 홍문화 교수님은 1952년 1월, 피난지 부산에서 대학을 졸업하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세상의 소금이니…. 세상에 들끓는 온갖 싱거움과 오탁(汚濁)을 도맡아 조미(調味)하고 방부하여 주려무나!” (축하시, ‘소금에 붙이는 독백’ 중에서). 아! 전쟁 중에 졸업하는 학생들에게 ‘재주껏 살아 남으라’가 아니라 ‘세상을 썩지 않게, 세상을 살 맛 나게 만드는 사람이 되라’고 차원 높은 격려를 하신 고매한 가르치심에 가슴이 울린다. 빛과 소금은 크리스찬의 영원한 사명일 것이다.
2020-07-15 09:30 |
[기고] <302> 객(客)과 빈(賓)
종가(宗家)에서는 종종 객과 빈을 달리 대접한다고 한다. 오래 전 경주 김씨 17대 종손(宗孫)인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객이나 빈은 둘 다 종가를 찾아 온 손님이지만, 객은 과객(過客)의 용례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주인의 사전(事前) 초청을 받지 않고 지나가다 방문한 나그네 급 손님을 말한다.반면에 빈은 주인의 초청을 받고 온 손님을 말한다. 손님이 종가에 들어서면 종부(宗婦)는 객에게는 식혜를, 빈에게는 수정과(水正果)를 대접한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식혜는 손님을 맞는 순간 항아리에서 한 그릇 떠 내 오면 그만이지만, 수정과는 손님이 오기 전에 미리 곶감을 한 두 개 집어 넣고 풀어지기를 기다렸다가 떠 와야 하기 때문이란다. 아무리 봉제사 접빈객(奉祭祀 接賓客, 제사를 받들고 손님을 대접하는 일)을 첫번째 사명으로 삼는 종가라 하더라도 갑자기 들이닥친 객에게는 식혜를 떠 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혹시 종가를 방문할 경우, 식혜가 나오나 수정과가 나오나를 보면 내가 객인지 빈인지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식혜가 나온다면 ‘아! 나는 그저 객이구나’ 깨닫고 알아서 처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옛날에는 그랬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요즘도 초청 받은 손님인 빈은 각종 행사장에서 내빈(來賓), 내빈(內賓) 또는 외빈(外賓)으로 불리며 제대로 된 대접을 받는다. 접수 테이블의 안내인들이 가장 큰 임무는 빈을 정중히 안내하는 일이다. 빈을 객으로 오인하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된다. 눈치 빠르게 빈을 식별하여 꽃 장식을 윗 주머니에 달아 드린 다음 빈 전용의 지정석으로 안내해야 한다.그러나 객에게는 대개 꽃을 달아주지 않으며 단 아래(壇下)있는 일반석에 알아서 앉으라는 안내(?)를 한다. 요컨대 객은 옛날에는 종가에서 수정과를 못 얻어 먹었고, 오늘날에는 행사장에서 빈보다 한 단계 낮은 예우를 받고 있다. 30여년전인 1987년, 1년간 미국 퍼듀대학에 체류했었는데 그 때 내 신분이 영어로 visiting professor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visiting professor를 객원교수(客員敎授)라고 부르고 있었다. 고위층 인사가 일정 기간 미국 대학에 가는 경우 ‘객원교수로 갔다’라는 기사가 언론에 나곤 하였다. ‘객원’ 교수라고 하면 어딘지 모르게 상대 기관이 대단한 손님으로 모셔갔다는 이미지가 풍긴다. 그러나 내 경우는 퍼듀대학이 나를 대단하게 여겨 모셔 간 것까지는 아니기 때문에 나를 ‘객원교수’라고 표현하는 것은 좀 건방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내 신분을 영어 표현대로 방문교수(訪問敎授)라고 표기하였다. 그러나 훗날 종손인 친구로부터 빈과 객에 대해 배우고 나니 ‘객원교수’가 방문교수 못지 않게 매우 적절한 번역어임을 깨닫게 되었다. visiting professor가 상대기관으로부터 정중하게 초청을 받은 빈 급 교수가 아니라, ‘뭐 오시려면 오세요’ 정도의 방문 허락을 받은 객 급 교수를 말하는 용어라면 말이다. 말이 난 김에 교환교수(交換敎授)라는 용어에 대해서도 잠시 살펴 보자. 한 때 교수가 미국에 가면 ‘교환교수로 간다’는 표현이 많이 사용되었다. 교환교수란 문자 그대로 내가 그 대학으로 가는 대신 그 대학에서도 누군가가 우리 대학으로 오는 교환 프로그램(exchange program)에 따라 오고 간 양 쪽 교수를 지칭해야 옳을 것이다.그런데 실은 객원교수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교환교수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뭔가 좀 있어 보이려는 허영심의 산물은 아니었을까? 요즘은 그런 용어에 미련을 두는 교수도 좀 줄어든 것 같다. 교수들의 내용이 충실해짐에 따라 이름에 대한 허영이 줄어든 것 같다. 바람직한 현상이다. 사족 하나. 어떤 직함 앞에 명예, 겸임, 객원, 초빙 같은 군더더기(?) 수식어가 붙으면, 오히려 수식어가 없는 직함보다 실속이 없는 것 같다. 내가 ‘명예’교수가 되고 나서 깨닫는 사실이다. 그나저나 깨끗이 끝나지 않는 코로나 사태가 걱정이다.
2020-07-01 09:50 |
[기고] <301> 홍문화 교수님의 미국 유학일기-3
1955년 9월 20일(화) 맑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전전반측(轉傳反側)하다가 새벽에 일어나 비행장으로 나오다. 간단히 요기를 하고 Box Lunch를 사 들고 TWA 를 타고 8시 30분 Chicago로 향발(向發). 도중에 Kansas에 착륙, 잠시 쉬고 다시 Chicago로 향발. 도중에 Swiss 출신이라는 아름다운 여자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무료(無聊)함을 풀다. Chicago에서 저녁을 먹고 드디어 최종 목적지인 Lafayette로 향발. Chicago의 야경 조감(鳥瞰)은 이재장재(異哉壯哉, 이색적이고 웅장함, 필자 주)! Lafayette에 착륙하니 그야말로 한적한 가운데 Prof. Christian이라는 분이 출영 나와 주어서 고마웠다. Purdue Memorial Union Club에서 1박. 불면증이 심해서 고민스럽다. 9월 21일(수) 흐림. 저녁에 비 조금 옴. 약대에 나가 학장 Jankins에게 인사를 하고 몇 사람 교수들을 만나다. 등록 완료. 화학과의 최상섭, 최규원, 김명수 씨 등을 만나다. (후략) 9월 22일(목) 비. 아침 9시에 Prof. Christian의 Radioisotope Technique 강의를 듣다. Dr. Lee와 회담. Karson Master군의 안내로 Prof. Lasco를 만나 방 문제를 의논함. (후략) 9월 23일(금) 흐림. 최상섭 씨 차로 짐을 YMCA로 옮기다. 오늘 Hospital Pharmacy 실습을 하였는데 젊은 이국 남녀 학생과 어울리니 재미있다. 수강 신청 변경을 하다. 9월 24일(토) 맑음. 오전 중에 강의를 듣고 오후부터는 Stadium에서 Pacific College 와의 축구시합을 구경하다. 이와 동시에 약 770명의 Indiana 고교 브라스 밴드(brass band)의 취주(吹奏)를 보다.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하면 다채롭다는 문자 그대로다. 이렇게도 생을 즐기는 민족이 지구상에 있었던가. 9월 25일(일) 생략9월 26일(월) 맑음. 참 여기 가을도 하늘 높고 공기 맑고 추석 생각이 저절로 나는 가을이로구나. 애 우는 소리를 길 위에서 들으니 영어만 듣던 판에 신기하다. 종일 학교에서 지내다. Particle Size 측정에 관해 문헌 조사를 하다. 9월 27일(화) 비 온 뒤 흐림. 여기 일기는 말짱하다가도 급변해서 비가 온다. (중략) 오후 4시부터는 대학원생 일동이 모여 학장 지도하에 Seminar를 하는데 오늘은 첫날이라 학장이 학생 및 교직원 일동에 대한 소개가 있었다. 화학과 도서실에서 한나절을 지냈는데 일본 저널이 수 종 있는 데 놀랐다. 아이젠하와 대통령이 심장병으로 와병하였다고 한다. 9월 28일(수) 맑음. 말은 빨리 되지 않고 당연히 초조하다. 이것이 소위 Home Sick 의 전조인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점심을 빼고 도서실에 틀어박혀 Particle Size에 관한 조사를 하노라니 맥이 난다. Prof. Belcastro와 Special Problem 문제를 상의하다. 차차 사람들의 얼굴이 낯익어 간다. 제발 말도 그렇게 되기를. 저녁 오는 길에 식료품점에 들러 포도를 25전어치 사 가지고 와서 맛을 보니 한국 것과는 전연 딴판의 맛을 가지고 있다. (후략) 9월 29일 흐림, 비 조금. 조반도 못 먹고 첫 시간에 나갔다가 10시 반에야 먹었다. 오늘 Instrumentation 실험은 Viscosity 측정인데 Calibration Standard인 Glycerol을 혼합하지 않은 채로 주어서 후에 알고 보니 헛일을 한 것이 되어 기분이 나쁘다. (후략) 9월 30일 맑음. AKF에서 송금이 오지 않아 답답하기에 Prof. Tichenor를 찾아 상의했더니 아직 안 왔다고 하며 35불을 Emergency Loan으로 얻어 주다. 오후 실습에는 세균실험도 못해 본 것 같은 애들과 같이 하려니 답답하였다. (후략)10월 15일. (전략) 저녁 때 임영신 총장(중앙대)에게 학비 부족 호소 편지를 쓰다. 이싱으로 홍교수님의 65년 전 유학일기 소개를 마친다.
2020-06-17 17:5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