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기고] <355> '박사 과정을 시작하며' - 삶 속의 작은 깨달음 10
(13) 박사과정 입학
유학을 갔지만 6개월 후에 박사과정 입학시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문제는 생화학이었다. 대학 다닐 때 학장이셨던 K교수님으로부터 효소(酵素)한 챕터밖에 배운 것이 없어서 걱정이 되었다. 할 수 없이 일본어로 된 생화학책 하나를 사서 열심히 공부했더니 다행히 합격되었다.
마침내 1979년 9월1일, 나의 박사 과정이 시작되었다. 당시 제제학(製劑學) 교실의 교수님은 하나노(花野?)셨다. 드물게 도쿄대학 출신이 아닌 교수님은 약주를 좋아하고 학생들과 담소하기를 좋아하셨다. 매주 목요일 오후면 얼음 덩어리를 넣은 위스키 잔을 흔들며 실험실로 오시곤 했다. 그럴 기미가 보이면 약삭빠른 일본 학생들은 황급히 집으로 도망쳤다. 교수님께 한번 걸리면 두세 시간 붙잡히는 것은 예사였기 때문이다. 대신 애꿎은 나와 타이완 출신 유학생이 교수님과 대작(對酌)해 드려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좀 민망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간에 교수님의 인생관이나 학문관(學問觀) 같은 좋은 말씀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예컨대 “일본의 지도자는 미국과 소련(당시) 사이에 전쟁이 나면 언제 어느 편으로 어느 정도 가담해야 일본 국익에 도움이 될지를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제제학 교실에는 교수님 밑에 조교수 1명, 조수(助手) 2명과 교무직원 1명이 팀을 이루고 있었다. 조교수로는 훗날 도쿄대학 병원약제부장(교수)을 거쳐 일본약제사회 회장을 역임한 이가(伊賀立二) 박사가, 조수로는 니시가키(西坦) 박사와 스기야마(衫山雄一) 박사가 있었다.
스기야마 박사는 나중에 도쿄대 교수 겸 세계적인 학자가 된 대단한 학구열의 소유자로 시종일관 학생들을 다그쳤다. 나는 니시가키박사 밑에서 지도를 받게 되었는데, 그는 학문에 대한 실력이나 열정은 스기야마만 못했지만 인품이 점잖았다. 실력이 부족하고 기(氣)가 약한 내가 스기야마 대신 니시가키의 지도를 받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 같다.
(14) 와신상담(臥薪嘗膽)과 명예회복
박사과정에 들어가자마자 서울대 석사과정에서 수행한 연구를 발표해 보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눈앞이 캄캄하였다. 도쿄대학에 와 보니 서울대와의 실력 차이가 하늘과 땅만큼 나는데다가, 특히 내 석사학위 논문의 수준이 형편없이 낮았기 때문이었다. 정말 발표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쩌겠는가? 1~2주간의 괴로운 나날을 보낸 후 안면몰수(顔面沒收)하고 발표를 하였다. 그런데 막상 발표를 마치고 나니 교수님이나 대학원생 중 질문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질문할 가치도 없다는 것 같았다. 나는 평생 이때의 창피함을 잊지 않고 와신상담해 왔다.
하나노 교수님은 박사 과정 과제로 이온 대 화합물(ion-pair complex)에 대해 조사해 보라고 하셨다. Chemical Abstract을 찾아보니 이 키워드가 들어 있는 논문은 제목만 해도 수십 페이지에 달할 정도로 많았다. 이 중에서 구체적으로 무슨 공부를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고심하던 어느 날, 교수님은 ‘이온 대 화합물과 생체 흡수’에 대해 조사해 보라고 2차 지시를 하셨다. 이 주제에 한정해서 조사해 보니 그림이 좀 그려지는 것 같았다.
과제를 받은 지 석 달쯤 지났을 때 그동안 조사한 내용을 교실 세미나에서 발표하게 되었다. 나는 이온 대 화합물의 흡수에 대한 기존 학설을 몇 개로 분류한 다음 각 학설을 그림과 함께 간단명료하게 설명하는 유인물을 만들었다. 물론 발표하는 연습도 성실히 하였다. 발표를 마치고 둘러보니 청중의 반응이 매우 좋았다. 다들 잘했다고 칭찬해 주었다. 대학원 후배이자 뒷날 도호쿠(東北)대학 약학부 교수를 역임한 데라사키(寺崎) 박사는 지금도 그날의 내 발표에 감동하였다고 말하고 다닌다.
이 발표를 통해 석사 논문 발표로 구겨진 내 명예(?)를 상당 부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훗날 세계적인 학자가 된 스기야마 등 당시의 동료와 평생 학문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교류할 수 있었다. 할렐루야!
2022-09-14 16:18 |
![]() |
[기고] <354> '일본 유학을 떠나다' - 삶 속의 작은 깨달음 9
(11) 유학의 길이 보이다
영진약품에 다닐 때 대학 동기이자 약대 조교인 C군이 일본 문부성(文部省) 장학생 시험에 붙어 도쿄 대학으로 유학 가는 것을 보았다. 우연히 유학가는 방법을 발견한 나는 그 길을 따라가기로 마음먹었다. 그 시험은 정식 조교(助敎) 발령을 받은 사람만 응시할 수 있는 시험이었다. 당시 약대 전체에 조교 TO가 3~4명밖에 없어 조교 발령을 받기가 매우 어려웠다. 나는 1년이상 대학원 분석실에서 백의종군하며 기다린 끝에 1977년 12월 9일 조교 발령을 받았다.
다음 해인 1978년 문부성 시험에 원서를 냈다. 시험 당일, 시험 장소인 한국외국어대학교에 가 보니 전국에서 응시생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인하대 출신인 이종 사촌 동생도 와 있었다. 집안에 소문이 날 걸 생각해서라도 시험에 꼭 붙어야만 했다. 시험과목은 일어, 역사, 상식이었다. 다행히 얼마 후 발표된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이 들어 있었다. 더구나 내가 이과(理科)에서 1등이란다. ‘목표가 있으면 길이 나타난다’고 했던가? 마침내 장학금을 받으며 유학을 갈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박사학위를 공부할 곳으로 도쿄(東京)대학 제제학(製劑學) 교실을 지원하였다. 석사학위를 받은 약품분석학에서 제제학으로 전공을 바꾼 것이다. 제제학이란 약효가 잘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는 제제(製劑)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영진약품 근무 시 그 필요성을 절실히 깨달았다.
(12) 천식(喘息)의 나라 일본
1979년 4월 9일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난생처음 타보는 비행기였다. 유학생 일행은 모두 33인이었다. 아내와 두 아들은 일단 두고 가기로 하였다. 도쿄 나리타(成田) 공항에 내린 우리 일행은 버스를 타고 고마바(駒場) 캠퍼스에 있는 도쿄대학 기숙사(瞭)에 도착하였다.
약 석 달이 지나 도쿄 생활에 조금 감(感)이 잡혔을 때, 이타바시(阪橋)구 시무라사카우에(志村阪上)역 근처에 있는 다이쪼소(大長莊)라고 하는 2층짜리 허름한 아파트 하나를 빌려 가족을 불러들였다. 집세는 월 4만엔 정도였는데,당 시 월 17만엔인 내 장학금에 비추어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당시 엔:원 환율은 약 3:1이었다. 문부성 장학생은 고맙게도 학교 수업료와 각종 세금 일체를 면제받았다.
일본에서 아파트란 우리나라의 연립주택 비슷한 다세대(多世帶) 주택을 말한다. 이 아파트는 훗날 유학생인 C군, S군을 비롯하여 모교에서 도쿄대학을 방문하는 교수님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1층에 있는 우리 아파트는 6조(다다미 6장) 크기의 방 하나에 조그만 부엌과 화장실이 딸려 있었다. 다다미는 낡았고, 벽에서는 종이흙(紙粘土) 부스러기가 끊임없이 떨어지는 오래된 아파트였다. 고온다습(高溫多濕)한 도쿄 날씨에 1층 방이라 더욱 습기가 많았다. 당시에는 일본에도 아파트나 학교에 에어컨이 없었다.
결국 이 집에서 산 지 3개월쯤 되었을 때 두 아들이 모두 천식에 걸렸다. 알고 보니 일본은 소아(小兒)천식의 나라였다. 아이들이 모여 놀다가 천식 발작을 일으키면 스스로 동네 의원에 가서 현관에 설치되어 있는 분무기를 입에 대고 천식약을 흡입할 정도로 소아 천식이 만연(蔓延)하고 있었다. 두 아이의 천식은 일본에 사는 3년 6개월 동안 집요하게 우리를 괴롭혔다. 세월이 갈수록 발작이 심해져 한밤중에 아이를 들쳐 업고 응급실로 뛰어간 적도 몇 번 있었다. 구청으로부터 아이 당 매달 4만엔씩의 위로금을 받을 정도였다. 아이들때문에 라도 한시바삐 일본을 떠나고 싶었다.
학교까지는 미타(三田)선이라는 지하철을 타고 다녔다. 편도에 1시간 이상 걸리는 먼 거리였다. 점심과 저녁은 학교 구내식당이나 아까몽(赤門)밖에 있는 모리카와(森川)식당에서 사 먹었다. 아직도 문을 열고 있는 모리야 식당의 400엔짜리 참치덮밥은 정말 맛있었다.
좀 비싸더라도 학교 근처에 아파트를 정했더라면 통학 시간도 절약되고, 점심과 저녁을 집에서 먹을 수 있어 오히려 경제적이었을 텐데, 이를 깨달은 것은 한참이 지나서였다.
2022-08-25 21:50 |
![]() |
[기고] <353> '학교 연구실에서' - 삶 속의 작은 깨달음 8
(10) 박사 학위의 위력을 깨닫다.
영진약품에 다니던 어느 날, 대학 동기K의 약혼식에 갔다가 한 초등학교 여교사를 만났다.충청도 공주(公州)에서였다. 그녀와 편지를 주고받은 끝에 1975년 11월 2일, 종로 5가에 있는 이화예식장에서 결혼하였다. 그때 나와 아내는 만 27세였다. 그리고 수유동 화계사 아래 작은 기와집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하였다.
이 집은 초등학교 졸업 후 줄곧 떠돌이였던 내가 ‘이제는 서울에 거점(據点)을 마련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아버지가 그해 7월에 사주신 집이었다. 삼백만 원 정도에 샀는데, 그 집이 오늘날 내가 서울에 집을 갖고 살 수 있는 기본 자산이 되었다. 우리는 출가(出嫁)한 누님댁 등에 흩어져 살고 있던 동생들(여동생 2, 남동생 1)을 불러들여 함께 살았다. 그때는 그게 장남의 도리였다.
그 집에서 뚝섬 경마장 옆에 있던 영진약품에 출근하려면 새벽에 버스를 타고 왕십리까지 간 다음 거기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야 했는데, 회사에 도착해보면 가끔 양복 단추가 떨어져 있을 정도로 승객이 많았다. 여성인 차장(車掌)이 버스에 사람이 못 타게 막아야 할 지경이었다. 퇴근해 집에 오면 거의 컴컴한 밤이었다.
나는 회사에 다니면서 ‘적정법(滴定法)에 의한 앰피실린의 정량’이라는 논문을 써서 1976년 2월 26일 석사학위를 받았다. 불행히도 학위 과정 중 지도(指導)교수님의 지도를 거의 받지 못했다. 1947년에 경성약전(京城藥專)을 졸업하신 지도교수님은 실험에 사용할 시약도 사 주지 못하셨다. 그래도 나는 교수님이 나를 신뢰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행복하였다.
3년 가까이 회사에 다녀보니 아무래도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1977년 사표를 냈다. 회사는 처음엔 만류하였지만, 내 결심이 확고함을 알고는 끝내 양해해 주셨다. 퇴사 후 바로 서울대 약품분석화학 전공 박사과정에 풀타임 학생으로 들어갔다. 때마침 지도교수님이 나보고 본인의 지도 학생인 Y선배님의 박사학위 논문 실험을 수행해 달라고 부탁하셨다. Y선배님이 모 제약회사의 영업부장이라 학교에 나오기 어려웠던 때문이었다.
1977년 7월 낙성대 근처의 작은 기와집으로 이사를 왔다. 700만 원을 주고 산 집인데, 1년 전만 해도 400만 원이면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이곳으로 이사를 온 것은, 나중에 혹시 서울대 교수가 될 생각이라면 서울대 바로 앞에 진(陣)을 치고 사는 것이 유리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신기하게도 정말로 나는 1983년 이 집에서 서울대 교수가 되었고, 훗날 집 앞에 낙성대 전철역이 생기는 바람에 집값도 많이 올랐다(1988년 4천만원).
회사를 그만두고 학교로 돌아오니 두 아들을 비롯한 4식구가 살 길이 만만치 않았다. 쌀은 농부인 아버지가 대주셨지만, 생활비는 매달 Y선배님이 실험 수고비 조로 주는 3만 원으로 해결해야만 했다. 고도의 절약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나는 하루에 10원도 쓰지 않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래서 출퇴근은 학교 버스로 하고, 점심은 도시락을 싸가 먹었다. 이렇게 지내도 마음이 가난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Y선배님의 실험 주제는 ‘자근(紫根) 성분시코닌(shikonin)의 변색(變色) 지시약 특성에 관한 연구’였다. 시코닌의 이성체(異性體)인 알카닌(alkannin)이 pH에 따라 변색한다는 사실이 이미 알려져 있어서 그리 독창성이 큰 연구는 아니었다. 우선 자근으로부터 시코닌의 결정을 얻어야 했는데 이게 영 쉽지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냉장고를 열어 보니 벤젠 추출액 중에 시코닌의 침상(針狀) 결정이 예쁘게 생겨 있었다. 기뻐서 사진을 찍으며 흥분했던 추억이 새롭다.
이로써 시코닌을 산-염기(酸-鹽基) 적정시의 변색 지시약으로 쓸 수 있다는 내용의 논문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 논문으로 Y선배님은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이 학위로 얼마 후 신설된 지방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당시의 박사 학위 위력은 이처럼 신묘(神妙)하였다. 박사학위를 받아야겠다는 내 결심도 더욱 굳어만 갔다.
2022-08-11 14:03 |
![]() |
[기고] <352> '회사에서' - 삶 속의 작은 깨달음 7
(9) 평가기술이 제조기술이다
제대 후 대학원에 복학하여 약품분석 연구실에 나갔다. 당시 나의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돈을 벌며 대학원에 다닐 수 있을까’였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난 어느 날 영진약품에 다니는 2년 선배 J가 학교로 찾아와, ‘영진약품에 취직하면 대학원에 다니게 해 준다’며 입사를 권유하였다. 이 말에 바로 영진약품을 찾아가 취직하였다. 1974년 7월 2일이었다.
입사부터 하고 얼마 후에 김생기 사장님의 면접을 보았다. 10분간 면접을 마치고 나오니 C 부장님이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봉투에는 현금 20만원이 들어 있었다. 20만원이면 당시 한 달 봉급(6만원)의 3배가 넘는 거금이었다. 놀라서 웬 돈이냐고 했더니 “그냥 학비에 보태 쓰라”고 했다. 아마 사장님 질문에 꼬박꼬박 대답하는 모습이 기특해 보였던 모양이다. 나는 이 돈의 일부로 흑백 TV를 사서 시골의 부모님께 보내드렸다. 우리집이 월남전에서 돌아온 선배댁에 이어 동네 두 번째로 TV가 있는 집이 되었다. 그때의 흐뭇함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당시(1975년) 회사는 앰피실린이라는 항생물질을 함유한 펜브렉스라고 하는 분말 시럽제를 제조 판매하고 있었다. 복용 시 물을 넣어 흔들어 녹인 후 어린이에게 투여하는 약이었다. 나는 이 약 중의 앰피실린 함량(含量)을 정량(定量) 분석하는 업무를 맡고 있었는데, 어느 날 늘 하던대로 시럽제에 물을 넣어 실험대 선반에 올려 놓았더니, 시간이 지나면서 이 약 고유의 핑크 색이 점점 엷어지는 것이었다. 이를 상사에게 보고하였더니 회사에 난리가 났다. 그리고 내게 그 원인을 신속히 찾아내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러나 이 시럽제에는 첨가제(添加劑)가 20가지나 들어 있어서 탈색(脫色)의 원인을 밝히기가쉽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탈색이 일어났다는 것은 환원제(還元劑)의 혼입(混入) 때문일 것 같았다. 그래서 시럽제의 원료를 칭량(稱量)하는 원료실에 가보니 첨가제 중의 하나인 sodium sulfate(SS)통 옆에 환원제인 sodium thiosulfate(ST)통이 놓여 있었다. 그렇다면 혹시 제조시에 SS대신 착오로 ST를 넣은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어, 실험실로 돌아와 SS 대신 ST를 넣어 시럽제를 조제하고 물을 넣어 보았더니 앞서 발견한 것과 똑 같은 탈색 현상이 나타났다. 그래서 다시 원료실에 가 살펴보았더니 예상대로 SS는 장부보다 많이, 그리고 ST는 장부보다 모자라게 남아 있었다. SS 대신 ST를 잘못 첨가한 것이 탈색의 원인이었던 것이다.이 사고의 원인을 명쾌하게 밝혀낸 공로로 나는 다음해인 76년 1월 4일 ‘제1회 창의상(創意賞)’을 받게 되었다. 상금이 무려 10만원이나 되었다. 다음 해(1977년)에도 나홀로 이 상을 또 받아 좀 민망하였다.
사장님은 처음부터 평사원인 나를 간부회의에 참석시킬 정도로 예뻐하셨다. 회의에 참석해 보니 간부들은 사장님이 무서워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회사 물정을 몰랐던 몰랐던 나는 의견이 있으면 그냥 발언을 하였다. 그 결과 준(準)사원 채용이 공정해지는 등 내 의견이 업무에 반영된 사례도 몇 건 있었다. 아무튼 영진약품 시절은 철부지인 내가 일생을 통해 가장 자신감있게 지내던 시절이었다.
1976년에 시험과(試驗課)를 떠나 연구과(硏究課)의 주임 대리로 승진하였지만 사원 1명, 보조원 1명이 부하의 전부였다. 이 때 일본에서 팔리고 있던 어린이 생약(生藥) 감기약인 ‘남천(南天) 시럽’을 모방해 만들라는 지시를 받아 시행착오 끝에 당시 보건원의 제품허가를 받아냈다. 요즘 말로 제네릭을 만드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만든 시럽제의 품질, 즉 유효성과 안전성을 평가하는 방법을 알 수 없어 답답하였다. 당시 회사에는 그런 기술을 가르쳐 주는 선배가 없었다.
나는 이 경험을 통하여 ‘좋은 약을 만드는 기술이란, 어떤 약이 좋은 약인지 평가(評價)하는 기술’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깨달음은 훗날 내가 약제학을 대하는 기본 정신 자세가 되었다.
2022-07-27 21:19 |
![]() |
[기고] <351> '군대에서' - 삶 속의 작은 깨달음 6
(8) 부조리와 세월에 대한 인내를 배우다.
대학 졸업 후 석사 과정에 들어가 1학기를 마칠 즈음인 6월 20일 원주 38사단의 신병교육대에 입소하였다. 7월 2일 군번(65023447)을 받고 8월 15일까지 6주간 신병 훈련을 받았다. 내가 받은 M1 소총, 판쵸 우의(雨衣), 군복, 훈련화 등은 다 내게 너무 컸다. 구보 때 신발이 맞지 않아 발에 피가 나는 날도 적지 않았다. 워낙 더운 때라 다른 훈련병들의 고생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6주 후 훈련소 문을 나설 때는 모두 가슴 뜨거운 감동을 느끼고 있었다. ‘진짜 사나이’가 된 기분이었을까?
훈련소를 떠나 기차를 타고 천리길 사천(泗川)에 가서 육군항공학교에 입학하였다. 항공학교는 모든 면에서 모범적인 부대였다. 거기서 12주 동안 육군 항공기 정비 기술을 배웠다. 부대 안에 공군 사관학교(空士)를 졸업하여 파일럿트 자격까지 딴 목사님이 담임을 맡은 교회가 있었다. 처음 들은 설교 주제는 “수고하고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였다. 감동적인 이 설교는 훗날 내가 크리스챤이 되는 출발점이 되었다.
1971년 10월 16일 육군항공학교를 졸업(111기)하고 다시 진해에 있는 육군수송학교에 가서 14주 동안 추가로 항공기 정비 교육을 받았다. 수송학교는 항공학교와 딴판으로 말할 수 없이 부패한 부대였다. 입학 첫날 교육생들을 모아 놓고 ‘돈은 중대(中隊) 본부에 맡겨야 안전하다’고 협박하여 돈을 갈취하였다. 일과(日課) 후에는 아무 말 없이 매일 빵 1개씩을 주었다. 그리고 월말에 한 푼의 봉급도 주지 않았다. 내가 먹은 빵값을 빼고 나면 줄 돈이 안 남는다고 했다.
수송학교의 저녁 점호(點呼)는 더 가관(可觀)이었다. 각종 기합이 따르는 점호는 공포의 시간이었는데, 부대 내 PX에서 막걸리를 사 마신 사람은 점호에서 빼 주는 것이 아닌가! 나는 군대가 썩어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남북 간에 전쟁이 나면 국군이 어느 쪽을 향해 총을 쏠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각종 부패가 이 정도로 척결된 것은 정말 다행한 일이다.
1971년 12월 11일 수송학교를 졸업(10기)하였다. 그 중 18명이 원주에 있는 항공기 정비 중대로 배치되었다. 나는 경남 사천과 진해를 돌아 다시 원주로 돌아온 것이다. 항공기 정비 중대에서 제일 힘들었던 것은 고참(古參), 즉 항공학교 선배(104기)들의 괴롭힘이었다. 그들로부터 제대할 때까지 개인당 약 500대의 빳다를 맞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은 참 못된 사람들이었다.
빳다가 아니더라도 군생활은 충분히 고되었다. 부대원 전원이 매일 낮에 2시간, 밤에 2시간씩 활주로 보초를 서야만 했다. 게다가 나는 비행기 정비 시간과 경비 등의 통계를 내는 정비소대(整備小隊) 서무로서의 기본 업무 외에, 산더미 같은 비행기 정비 매뉴얼(영어)을 번역하는 일, 군수지원사령부로부터 의약품을 수령하여 부대원들에게 나눠주는 일까지 했다. 일 잘 한다고 평이 나면 점점 할 일이 많아지는 것은 군대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나는 요령을 피우지 않고 모든 일을 성실하게 하였다. 유격 훈련도 두 번이나 받았다. 그 와중에 천하의 농땡이가 모범사병 표창을 받는 코메디도 보았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11월 21일 유신헌법의 찬반을 묻는 국민 투표를 시행하였다. 부대에서는 일반국민들에 앞서 부재자 투표를 하였다. 그런데 투표용지를 보니 “나는 대통령의 중요 정책을 (1) 지지한다( ), (2) 반대한다( )” 중에서 하나를 고르게 되어 있었다, 헌법 개정에 대한 찬반 여부를 묻고 있지 않았다. 기가 막혔다. 그래도 결국 국민 91. 9%의 투표, 91. 5%의 찬성으로 유신헌법이 확정되고 제4공화국이 출범되었다.
군 생활 중인 1972년 김포 시골집에 전기가 들어오고, 1973년에 지붕이 기와로 바뀌었다. 1974년 5월 2일 정확히 34개월만에 병장으로 만기 제대하였다. 군대는 내게 온갖 부조리와 세월을 인내하는 법을 가르쳐 준 곳이었다.
2022-07-13 11:42 |
![]() |
[기고] <350> 삶 속의 작은 깨달음 5
(7) 대학에서는 열심히 공부해야
1967년 대학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아버지가 인천에 있던 집을 파셨다. 그때부터 인천과 서울에서 가정교사 입주, 자취, 친척집을 전전하며 학교에 다녔다. 주 3~5회 가정교사를 해서 학비와 용돈을 벌었다. 무대는 주로 인천이었지만 서울 서교동의 한 교회 종탑방에서 입주 과외를 하기도 했다. 가정교사 자리가 없는 방학에는 그때까지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시골집에서 보냈다. 지루한 생활이었다.
학기 중에는 인천이나 부평에서 경인선을 타고 연건동에 있는 약대까지 통학하였다. 서울역에서 내린 다음 미아리행 20번 시내버스를 타고 동숭동 대학본부 앞에서 내려, 길을 건너 의대를 지나 약대까지 가는데 1시간 반 이상이 걸렸다. 아침마다 헐레벌떡 달려가도 지각하는 날이 많았다. 월~목요일에는 아침 9시부터 8시간의 수업이 있었고, 토요일에는 9시부터 5시간의 수업이 있었다. 수업이 끝나면 가정교사를 가야 했다. 그래서 당시 세시봉 같은 음악 다방이 인기였다는 소리는 훨씬 훗날에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통학과 가정교사에 지쳐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배우는 학과목들도 암기 과목이 많아 재미가 없었다. 약용식물학이나 생약학 등이 특히 그랬다. 게다가 ‘노는 것은 대학가서 놀아라’ 하신 고3 때 담임 선생님의 말씀을 청개구리처럼 잘 들은 것도 잘못이었다. 물론 진짜 이유는 내가 철이 덜 든 탓이었다.
대학교 3학년 때는 편집부장이 되어 교지인 ‘약원(藥苑)’ 제15호를 편집 발간하였다. 이때 싸게 해 준다는 브로커 말에 넘어가 을지로5가에 있는 조그만 출판사와 덜컥 계약을 하였다.계약 후 방문해 보니 말이 출판사이지 대중가요 가사집 같은 소책자나 만들 수 있는 매우 영세한 곳이었다. 영어와 한자, 그리고 화학구조식이 많은 약원 같은 책의 출판은 애당초 그 출판사 분수에 넘치는 일이었다. 예컨대 조판을 하려면 납으로 주조된 활자판에서 정확한 활자를 골라내야 하는데 문선공들이 영어나 한자를 잘 몰라 쩔쩔매기 일쑤였다. 그래서 계획보다 한참 늦게서야 조판이 완성되었다. 나는 그 무거운 납판들을 리어카에 싣고 손수 을지로 입구에 있는 ‘청풍인쇄소’까지 끌고 갔다. 일을 서두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인쇄소는 500부도 안되는 책의 인쇄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윤전기 옆의 종이 더미 틈 속에서 밤을 지새며 잠시 우리 책을 인쇄에 걸어달라고 애원을 했다.
나는 편집부장이라는 학생회 임원 자격으로 3선개헌 반대 데모에도 참여하였다. 그때는 해마다 휴교령이 내릴 정도로 데모가 심하였다. 휴교령이 내리면 학생들은 전국 각지로 무전여행(無錢旅行)을 떠났다. 나도 친구들과 무주 구천동에 다녀오는 호사를 누려봤다.
이런 식으로 지냈는데도, 1971년 2월 졸업할 때 보니 내 성적이 제약학과 40명 중 5등이었다. 의외로 성적이 좋아서 놀랐다. 다른 친구들은 나보다도 공부를 안 한 모양이었다. 당시는 “노나 공부하나 마찬가지다”라는 노래가 약대에 유행할 때였다. 그때에 비하면 요즘의 약대 학생들은 정말 열심히 공부한다. 교수들의 강의내용이 충실해진 데다가, 공부를 안 하고는 배겨날 수 없는 시대가 된 덕분일 것이다.
막상 졸업을 앞두고 보니, 뭐 하나 제대로 아는 것도 없이 학교에서 쫓겨나는 기분이 들었다. 일찍이 20세에 인생의 방향을 정하셨다는 아버지 말씀이 충격이 되어 머리에 맴돌았지만, 일단 대학원에 진학해 시간을 벌어보기로 하였다. 전공으로는 당시 미국에서 미생물약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신 K교수님의 연구실을 택하고 싶었지만, 동기인 C군이 먼저 지원했다고 해서 포기하였다. 대신 1학년 때부터 낯이 익은 약품분석학 연구실을 택하였다. 그때 미생물 연구실로 갔으면 내 인생은 어찌 되었을까?
돌이켜 보니 역시 대학에서는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 정답이었다. 젊었을 때 열심히 공부한 걸 후회하는 사람을 내 평생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하는 것 같다.
2022-06-22 12:10 |
![]() |
[기고] <349> 삶 속의 작은 깨달음4
(5) 선생님이 잘 가르쳐야 한다.
양영학원에 다니며 눈만 뜨면 공부하는 생활을 3개월 정도 해서 12월이 되니, 이제 시험 범위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항을 다 알게 되었다. 특히 여태껏 나를 괴롭혔던 수학에 100% 자신이 생겼다. 그것은 전적으로 학원의 수학 선생님의 덕분이었다. 어찌나 간단 명쾌하게 잘 가르쳐 주시는지 듣고 보는 대로 머리에 쏙쏙 들어왔다. 그분은 소수(少數)의 전형적인 문제를 정선(精選)하여 풀고 그 문제 유형(類型)을 기억하도록 가르치셨다. 이 선생님을 통해 선생님의 역할이 정말 지대(至大)하다는 사실을 절감하였다. 그 선생님을 통해서 왜 내가 고등학교 때 수학을 잘 못했는지도 깨닫게 되었다. 고등학교에서는 미처 소화(消化)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문제를 풀게 한 것이 잘못이었다.
이때 수학의 요령을 깨달은 덕분에 대학에 들어가서 가정교사를 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 학생이 왜 수학을 잘 못하는지 내 경험에 비추어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에 그 급소를 찔러 효과적으로 지도할 수 있었다. 그 학원에서는 수학 외에 국어나 화학도 잘 가르쳤다. 국어의 독해(讀解)는 유명한 소설가가 가르쳐 주셨고, 화학은 ‘완전화학’이라는 참고서를 쓴 김종대 육사 교수께서 가르치셨다. 김 교수님은 늘 ‘화학은 당량(當量)입니다’ 라고 강조해 주신 덕분에 화학의 원리(原理)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자 화학의 잡다한 지식이 간결하게 정리되었다. 특히 수학이나 과학은 원리를 확실하게 이해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공부 방법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과적으로 양영학원은 내 일생의 탁월한 선택이었다.
(6) 서울대 약대 수석 입학 - 자신감을 부어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축복
내가 졸업한 제물포고등학교(제고)는 매년 11월경 재학생은 물론 졸업한 재수생들에게도 모의고사를 치르게 하여, 그 성적을 보고 입시 지도를 해 주었다. 나도 1966년 11월, 제고 재학생들과 함께 모의고사를 보았다. 그 결과 총 350여 명 중에서 20여 등의 성적을 받았다. 이는 미처 못다 배운 ‘일반사회’ 과목 성적을 빼고 보면 전교에서 10위 안에 드는 뛰어난 성적이었다. 고3 때 담임이셨던 K 선생님으로부터 ‘그 정도면 서울대 아무 과(科)에 지원해도 다 합격하겠다’는 말씀을 들었다.
당시에는 그 정도로 좋은 성적이면 대개 서울대 공대를 지원하던 시절이었다. 공대 화공과가 최고의 인기를 끌고 있었다. 공대에 관심이 없는 나는 서울대 약대 제약학과에 지원하였다. 그러나 약대에서 무얼 배우는지, 졸업하면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고 지원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거의 모든 고등학교가 합격 가능성만을 척도 삼아 입시 지도를 하고 있었다. 제약학과를 선택한 것은 학과 이름이 그럴듯해 보여서였다.
서울대 약대에 응시하여 수학, 영어, 국어, 화학, 일반사회의 다섯 과목 시험을 보았다. 시험 후 집에 가서 신문에 난 모범답안과 맞추어 보았더니 수학은 주관식 10문제 중 기하 문제를 제외한 9문제를 풀었는데 다 맞았고, 화학과 일반사회는 모두 100점이었다. 국어와 영어는 좀 어려운 편이었다. 며칠 지나자 각종 신문에 내가 서울대 약대에 내가 수석으로 합격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시험을 잘 봐서 떨어지지 않을 줄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수석이라니!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수석으로 합격하자, 내가 9월 이전에 6개월간 다녔던 세종학원은 ‘축, 서울대 약대 수석합격, 심창구’라는 대형 플래카드를 학원 건물 옥상에서부터 지상에 이르기까지 위아래로 내걸었고, 4개월 정도 다닌 양영학원에서는 세종문화회관 별관에 SKY 대학 합격자들을 모아 놓고 축하식을 열어 주었다. 그 식에서 수석합격 기념 금반지도 받았다. 모두 추억 속에만 있는 장면이다. 당시 카메라가 없었던 때문이다.
이 수석 입학이라는 사건을 통해 거의 처음으로 나 자신에 대해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이제 와 돌아보니 내가 인천중학교나 연세대 의대에 떨어진 것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최선의 길로 나를 인도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개입(介入)이셨다.
2022-06-08 22:04 |
![]() |
[기고] <348> 삶 속의 작은 깨달음3
제물포고(제고)는 다녀볼수록 훌륭한 학교였다. ‘양심(良心)은 민족의 소금, 학식(學識)은 사회의 등불’을 교훈으로 갖고 있는 학교였다. 모자에 달린 모표(帽標)도 소금 결정 3개 위에 등대가 서 있는 모습이었다. 도서관은 완전 개가식(開架式)으로 늘 열려 있었고, 시험은 무감독(無監督)하에서시행되었다.이런 명예로운 제도하에서 공부하는 것이 제고 학생들의 큰 자부심이었다. 제고에서 배운 양심이 평생 내 삶의 방부제가 되었다.
제고는 1학년이 300명이고 이과(理科)가 세 반으로 총 240명이었는데, 입학 후 첫 시험에서 나는 이과에서 110등 정도를 하였다. 기분이 좋았다. 130명 정도의 수재들을 제친 것이 아닌가! ‘한번 해 볼 만한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제고에는 공부뿐이 아니라 글이나 그림 또는 음악 등에 뛰어난 재주를 가진 학생들이 많았다. 당시 교지인 ‘춘추(春秋)’에 실린 글을 읽어보면, 어떻게 같은 또래의 친구들이 이렇게 유식하고 멋있는 글을 쓸 수 있을까 기가 죽을 지경이었다. 제고에 다니는 동안 나는 성적도 그저 그렇고 인천중학교 출신이 아니어서 친한 친구도 별로 없어 전반적으로 약간 주눅이 들어 지냈던 것 같다.
(4) 대학입시 낙방(落榜):다른 길이 열리기 시작하다
제고 졸업 시 전교 60등 정도를 했다. 그때 동기생 11명이 연세대 의대에 응시했는데 9명이 붙고 나를 포함한 2명이 떨어졌다. 내가 떨어진 것은 수학 때문이었다. 수학은 고등학교 때 내 등수를 떨어뜨린 주범이기도 했다.
나는 재수하기로 하고 서울의 세종로 네거리에 있는 세종학원에 등록하였다. 돈만 내면 누구나 다닐 수 있는 학원이었지만 강사 선생님들의 강의 수준은 괜찮았다. 특히 ‘정통고문 교실’이라는 참고서의 저자인 하희주 선생님의 문법 강의가 재미있었다. ‘이’모음역행동화, 히아투스 현상, 움라우트 현상 등이 재미있어 앞으로 국어를 전공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학생들의 수준은 내 기대치보다 많이 낮았다. 그래서 기회가 되면 명문학원으로 옮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침 그해 9월에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는 양영학원에서 4명 정도의 편입생을 뽑는다는 공고가 났다. 얼른 응시 원서를 내고, 시험 당일에 종로1가 낙원동에 있는 양영학원 건물에 가 보니 와! 수백 명의 응시자가 모여 있는 것이 아닌가! 기가 질린 상태에서 2~3시간에 걸쳐 영어와 수학 시험을 치렀는데, 놀랍게도 결과는 합격이었다. 수십 대 일의 경쟁률을 뚫은 그 일을 지금도 나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양영학원에 들어가 보니 소문대로 수업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1지망으로 서울대 의대에 지원했다가 성적이 약간 모자라 2지망인 서울대 치대로 밀려 합격한 사람도 여럿 있을 정도로 학생들의 수준이 매우 높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학 시험이 있었다. 수준이 높다는 학생들도 대부분 30~40점을 맞을 정도로 문제가 매우 어려웠다. 그런데 L이라고 하는 경기여고를 나온 삼수생이 90점을 맞았다는 소문이 들렸다. 이런 어려운 문제에서 90점을 맞는 사람도 있다니, 충격이었다.
그때부터 독한 마음을 먹고 온종일 오직 공부만 하였다. 인천에서 기차를 타고 통학하는 시간이 아까워, 학원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청계천 변의 사설 독서실에서 먹고 자면서 오직 학원에만 다녔다. 잠은 독서실의 의자 서너 개를 붙여 놓고 잤다. 그때 부실해진 허리가 지금껏 나를 괴롭히고 있지만, 원 없이 공부해 본 시절이었다.
밥은 근처의 허름한 음식점에서 사 먹었다. 한 끼에 30원 하는 잡채밥을 사 먹었는데 한 달치 식권을 한꺼번에 사면 한 끼에 25원으로 할인해 주었다. 그런 잡채밥도 하루에 두 끼밖에 못 먹고, 한 끼는 골목에 있는 포장마차에서 호떡 2~3개를 사 먹었다. 지나보니 미련스러웠지만, 워낙 근검절약을 솔선수범하시는 아버지께 ‘돈을 주십사’ 말씀드리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2022-05-25 20:17 |
![]() |
[기고] <347> 삶 속의 작은 깨달음2
(2)불합격에 낙심하지 마라, 축복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1960년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인천에 있는 인천중학교에 입학원서를 냈다. 길영희 선생님이 교장으로 계시는 이 학교는 인천은 물론 경기, 충청도의 인재들이 몰려드는 최고의 명문 공립 중학교였다. 그런 학교에 나와 동창 2명(L군, N군)이 겁도 없이 원서를 냈다. 내가 3명 중에 가장 성적이 좋았다. 입학시험날, 시험지를 받아보니 아는 문제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내 시험 결과는 당연히 불합격이었다. 나는 우리 세 명이 다 떨어진 줄 알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셋 중 가장 성적이 안 좋은 L군만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알고 보니 담임이셨던 K선생님이 자신의 조카인 L군의 성적을 ‘전교 1등’으로 조작해 무시험으로 합격하게 한 결과였다. 인중에는 국민학교를 전교 1등으로 졸업한 학생은 무시험으로 입학을 시켜주는 특이한 제도가 있었던 것이다.
인천중학교에 입학한 L군은 두 번 연거푸 낙제한 끝에 결국 퇴학을 당하고 말았다. 만약 그때 담임선생님이 나를 전교 1등으로 만들어 내가 무시험으로 합격하였다면 내 운명은 어찌 되었을까? 모르기는 해도 결말이 L군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그래서 그때 나를 전교 1등으로 만들어 주지 않은 담임선생님께 감사한 마음이 든다. 이 일을 계기로 나는 감당치 못할 일류 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반드시 좋은 일은 아니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3)꿈을 갖게 해 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인천중학교 입학시험에 낙방한 나는 같은 인천에 있는 사립 D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학교는 간단한 면접만으로 신입생을 뽑았다. 그 무렵 아버지는 ‘인천여상고’에 다니는 누님과 나의 공부를 위해 인천시 금곡동에 허름한 기와집 한 채를 사주셨다. 나는 그 집에서 누님이 해주는 밥을 먹으며 학교에 다녔다. 그 집은 워낙 지대가 낮은 곳에 있는 낡은 집이라 부엌 바닥은 물론 연탄아궁이 속까지 물이 고여 연탄불이 꺼지는 날이 많았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거의 사람이 살 수 없는 환경이었다. 그 집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6년 이상을 살았다.
D중학교의 한 반은 정원이 80명을 넘는 콩나물시루였다. 나는 첫 시험에서 84명 중 50여 등을 하였다. 아무리 시골 학교 출신이긴 하지만 국민학교 때 반에서 3~4등을 하던 나에게 이 등수는 충격이었다.
당시 1살 위인 외사촌 형이 인천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가끔 십정동에 있는 외갓집에 가면 그로부터 인천중학교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들을수록 그 학교가 너무나 멋있어 보였다. 그래서 고등학교는 그 학교에 딸린 제물포고등학교(제고)로 진학하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 그 꿈을 갖고 중학교 3년 동안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하였더니 졸업 시에 우등상을 받게 되었다. 1학년 첫 시험에서 반에서 50여 등 하던 촌놈이 졸업 때에는 500여 명 중에서 5등 안에 들어 우등상을 받은 것이다.
졸업을 앞두고 3학년 담임선생님께 “제고로 진학하고 싶습니다”고 했더니 “D중학교에 딸린 D고등학교로 진학하면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데 뭐하러 제고로 가려느냐?”며 입학원서를 써 주지 않으셨다. 그러나 이미 제고에 대해 흔들릴 수 없는 환상을 갖게 된 나는 아버지를 동원(?)하여 제고 입학원서를 써 받았다.
그런데 그해인 1963년부터 고등학교 입시에 두 가지 큰 변화가 생겼다. 우선 입시제도가 ‘학교별 입시’로부터, 모든 응시생이 같은 시험 문제를 푸는 ‘연합고사’로 바뀌었다. 기존의 학교별 입시는 아무래도 제고에 딸린 인천중학교 졸업생들에게 유리한 제도였다. 그다음으로 그 해부터 제고의 입학 정원이 240명에서 300명으로 늘어났다. 나는 이처럼 유리한 변화에 힘입어 꿈에도 그리던 제고에 합격하였다.
외사촌 형을 통해 제고의 꿈을 갖게 해 주시고, 나의 제고 합격을 위해 입시 제도와 입학 정원까지 늘려 주신 하나님 은혜에 감사한다. 이로써 인생에서 꿈을 갖게 해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았다.
2022-05-12 00:23 |
![]() |
[기고] <346> 삶 속의 작은 깨달음1
서울대학교 명예교수협의회는 해마다 명예교수 6명의 글을 모아 『학문 후속세대를 위한 ‘나의 학문, 나의 삶’』이라는 제목의 책을 낸다. 나는 지난해(2021년)에 발간된 제4권에 ‘한 칸씩 오른 사다리길’ 이란 제목의 글을 실었다. 내가 그 글을 쓴 이유는 다음과 같다.
“나는 1983년 3월에 모교 약학대학 제약학과에 조교수로 임용되어 2013년 8월 말 교수로 정년퇴임 할 때까지 30년 6개월간 교수직에 재직하였다. 그동안 나는 머리도 그다지 뛰어나지 못하고, 체력이나 노력도 부족해서 크게 자랑할 만한 업적을 내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내가 여기에 글을 쓰는 명분은, 나 같은 사람이 걸어온 인생도 나와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는 후학(後學)들에게 혹시 타산지석(他山之石)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다.”
그 글에서 나는 어려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나의 삶과, 그 삶을 통해 얻은 작은 깨달음들을 적어 보았다. 앞으로 몇 회에 걸쳐 그 책에 쓴 나의 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1) 마음껏 뛰어놀던 초등학교 시절 - 어릴 땐 놀아야 한다.
나는 1948년에 경기도 김포군 검단면 당하리 649번지에서 태어났다. 우리 동네는 한자로는 신기(新基) 부락이지만 다들 ‘새텃말’이라고 부르는, 초가집 스무 채가 전부인 작은 농촌 마을이었다. 김포군에 속해 있었지만, 행정구역상 서울인 김포공항과는 당시의 감각으로는 거리도 멀었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문명이 낙후된 오지에 가까운 마을이었다. 1991년 3월 1일 그 일대가 인천광역시에 편입되면서 덩달아 나도 인천시민이 되었다. 얼마 전 검단 신도시로 개발되면서 흔적도 없이 모습이 사라졌지만 내 마음속 우리 동네는 아직도 옛날 모습 그대로다.
나는 1954년 3월, 만 5살에 ‘창신국민학교’에 입학했다. 학교에 가려면 산을 넘고 논밭을 지나 개울을 건너 30분 이상 걸어야 했다. 나는 원래 키가 작은 집안에서 태어난 데다가 너무 일찍 학교에 들어가는 바람에 반(班)에서 제일 키가 작았다. 그 학교는 한 학년에 한 반밖에 없었기 때문에 1학년 때 만난 아이들과 6년간 같은 반에서 다녀야 했다. 우리 반 학생은 6년 내내 50여 명이었고, 전교생은 300명 남짓이었다.
학교에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전등이나 마이크 같은 것도 없었고, 피아노는커녕 제대로 된 축구공이나 야구공 같은 것도 없었다. 학교에 가서는 틈틈이 닭이나 오리, 거위, 돼지를 키웠다. 또 산에 가서 토끼를 잡아 인공적으로 흙을 덮어 만든 동굴에서 키웠고, 개울에 가서 메기 같은 물고기를 잡아 연못을 파서 길렀다. 짐승이나 물고기는 선생님들이 요리해 잡수셨을 것이다.
아이들은 집안 농사일 돕기에 바빴다. 일부 선생님은 농업학교 졸업 후 준(準)교사(?) 자격증을 딴 분이셨다. 국어 맞춤법을 정확히 모르는 선생님도 계셨다. 이런저런 이유로 학생들의 교과(敎科) 실력은 매우 낮았다. 예체능 실력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나는 그런 학교에서조차 재학 중 한 번도 1, 2등을 해 보지 못하였다. 학년이 올라가도 구성원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내 등수(等數)도 거의 바뀌지 않았다. 우리 반에서는 S란 친구가 6년간 1등을, K란 친구가 6년간 2등을 했고, 나는 졸업할 때 일종의 우등상인 국회의원상을 받는데 그쳤다. 그런데 그 벽지 학교에서 나중에 K군은 서울대 법대에 들어갔고, 나는 서울대 약대에 들어갔다. 요즘 말로 대박이 난 것이다.
한참 지나고 보니 내가 마음껏 뛰놀 수 있는 그런 초등학교에 다닌 것은 큰 축복이었다. 요즘 아이들이 주말도 없이 밤늦게까지 학원에 다니며 공부에 시달리는 것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지나친 학원 수업 때문에 아이들의 건강과 발육에 지장이 생기고, 나아가 창의력도 규격화되지 않을지 심히 걱정되는 상황이다.
그래서 외쳐본다. 아이들을 마음껏 뛰놀게 하라. 아울러 바라건대 할머니 할아버지도 자주 만나게 하라.
2022-04-27 21:47 |
![]() |
[기고] <345> 교지(校誌)의 부활
대부분의 약대는 교지를 발간하고 있을 것이다. 그 중 어떤 것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발간이 중단된 것도 있을 것이고, 다시 발간되고 있는 것도 있을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교지에 애틋함을 느낀다. 어렵거나 기뻤던 당시의 상황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학마다 중단없이 교지를 발간해 나가기를 기원한다. 이런 마음에서 올해 초에 발간된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의 교지 약원(藥苑) 제47호에 동창회장 자격으로 쓴 나의 ‘축하의 말씀’을 소개한다.
약원 제47호의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스누팜프레스’(회장 이유선)를 비롯하여 발간에 참여한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유구한 약원의 발자취를 잠시 돌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6.25 전쟁 중인 1950년 9월 모교의 전신인 사립 서울약학대학이 국립 서울대학교에 편입되었습니다. 약 3년 후인 1954년 1월, 많은 학생들의 호응 속에 약원이 창간되었습니다. 당시는 6.25 전쟁의 휴전 직후라 모든 것이 어렵던 시절이었습니다. 약원은 창간호로부터 제4호(1959년)까지는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학도호국단의 하부 기구인 학예부가 발간을 담당했습니다. 그 후 3년간 1960년 4.19 혁명과 1961년의 5.16으로 인하여 약원이 발간되지 못했습니다. 1960년 학도호국단이 해체되자 제5~18호(1962~1976년)는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학생회 편집부 이름으로, 1976~1983년(제19~24호)에는 다시 생긴 학도호국단 이름으로, 그 후 1984~2007년(제25~43호)는 다시 학생회 편집부 이름으로 발간되었습니다. 그 후 여러 사정으로 인하여 학생들의 호응이 식자 43호를 끝으로 더 이상 약원을 발간하지 못했습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약원이 숨을 거둔 것입니다.
그러다가 무려 12년이 지난2019년, 약원의 종간(終刊)을 아쉬워하던 후배 학생들에 의해 약원이 다시 나왔습니다. 제44호로 부활한 것입니다. 그때 동창회 홈커밍 대회 자리에서 이 소식을 들었습니다. 1970년 약원 13호의 편집인이었던 필자는 뛸 듯이 기뻤습니다. 다른 동문들도 모두 약원의 부활을 진심으로 기뻐했습니다. 동문들에게 약원은 그저 단순한 모교의 교지에 불과한 책이 아닙니다. 모교와 후배에 대한 사랑이고, 학창시절에 대한 향수이며, 모교를 통한 미래 약학에 대한 기대입니다. 44호부터는 학도호국단이나 학생회라는 다소 딱딱한 이름이 아닌 ‘스누팜프레스’라는 모교의 동아리의 이름으로 발간되고 있습니다.감사하게도 그 후 약원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발간되어 이번에 47호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부활된 약원은 책의 크기도 커졌지만 책의 내용도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시게 업그레이드 되었습니다. 부활된 약원을 읽어보면 모교 후배들의 지적 욕구 수준이 얼마나 높아졌는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이는 전쟁의 잿더미를 딛고 기적적으로 선진국이 된 우리나라의 위상(位相)의 변화와 궤(軌)를 같이 하는 것이겠지만, 과거 첨단 약학에 대한 지식 욕구를 채울 수 없던 선배들의 입장에서 보면 기쁘기 한량없는 변화입니다. 앞으로도 우리 약원이 후배님들의 지식욕을 무한 자극하는 교지로 더욱 발전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동창회에서도 약원의 발전을 위해 물심양면의 지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을 생각입니다. 다만 한마디 욕심을 첨언한다면, 매 호마다 학생들의 활동상이 압축되어 실렸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100년 후의 후배들에게 지금 학생들의 호흡과 고뇌를 보여주는 것이 역사 발전에 매우 유익할 것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중략)감사합니다.
2022-04-13 17:42 |
![]() |
[기고] <344> 김수만(金壽萬) 선생
2022년 1월 18일, 조선약학교 특별과 7회 졸업생 고 김수만 선생의 후손들이 그의 저서인‘鮮漢藥物學(선한약물학, 행림서원)’과 ‘藥物學講義(약물학강의,경성약학강습소)’, 그리고 사진 등 총 7점을 서울대학교 약학역사관에 기증하였다.
이날 학장실에서 열린 기증식에는 선생의 차남 김창선님, 장손 김명환(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장, 인문대학 영문과 교수), 손자 김명준(김창선님의 아들, 한남대 교수), 증손녀 김아영(김명환 교수의 딸, 서울대 대학원생)양과 오유경 약대 학장, 주승재 약학역사관장, 심창구 명예관장, 김진웅 명예교수 등이 참석하였다.
김수만은 1899년 서울 종로구 재동에서 태어났으나 선대에 벼슬을 못하여 전남으로 낙향하였기 때문에 학적부에 본적이 전남으로 되어 있다.
그는 1924년에 조선약학교에 입학하여 1926년에 이경봉(전 대한약제사회초대회장), 이덕휘(대한약사회 2대 회장) 등 총 24명과 함께 졸업하였다.
▲‘약물학강의’ 내부 표지
그는 조선약학교 졸업 후 경성약학전문학교 조수 약제사로 근무하였다. 그 후 관훈동에서 조제실만을 갖추고 매약(賣藥)보다 전문 조제를 표방한 수성당약방(壽星堂藥房)을 개업하였다. 빨간 벽돌의 2층 (또는 3층)건물이었다. 그는 당시에 드문 약제사로서 약국의 격조를 높이려고 노력하였다. 감기 기침약인 즉효 독감산(毒感散)을 제조하여 신문에 광고하기도 하였다. 수성당 약방은 규모도 컸고 수익도 많았다. 독립운동 관련자들이 약국에 드나들며 자금을 받아가기도 하였다.
김명환 교수에 따르면, 김수만의 부인인 임영실(林英實) 여사는 평양출신으로 서울의 후견인이 숙명여고에 입학시켰지만, 아버지인 임치정(林蚩正, 1880-1932)이 일본인 학교는 안된다고 반대하는 바람에 기독교 학교인 정신여고로 옮겨 졸업한 인텔리 여성이다. 임치정은 도산 안창호와 아주 가까운 사이로, 1911년의 ‘105인 사건[일명 신민회 사건, 데라우치(寺內) 총독 암살 조작사건]과 관련하여 3년 가까이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한 바 있는 독립운동유공자이다. 임여사의 친정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으로 가족들은 광복, 분단(分斷) 후 실향민들이 많이 다니는 영락 교회에 다녔다.
▲경성약전 조수시절의 김수만 (맨 오른쪽)
김수만은 1940년, 42세의 매우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김명환 교수에 따르면, 김수만의 장남인 김창훈 (김명환의 부친)이 어릴 적에는 세발자전거를 3대나 가지고 있을 정도로 유복했다고 한다.그러나 김수만이 작고한 후가계가 기울어 임여사가 불광동에서 조산원(助産院)을 열어 가족의 생계를 어렵게 꾸렸다. 임 여사는 남편의 직업과 수성당약방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졌다고 한다. 임여사는 남편과 사별(死別) 62년 후인 2002년에 소천하였다.
김수만은 짧은 삶에도 불구하고 생약학 분야에 많은 선구자적 업적을 남겼다. 1931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생약학 교과서인 ‘선한약물학’을 한도준(조선약학교 본과 6회)과 함께 1934년에는 ‘약물학강의’라는 일본어 책을 단독으로 저술하였다. 그동안 ‘선한약물학’은 몇 권 전해져 내려왔으나 ‘약물학강의’는 이날 처음으로 공개되는 것이었다. 그는 1933년 11월 28일 사설(私設) ‘경성약학강습소’(동아일보 1933년11월 23일 및 28일자 기사 참조)를 세워 약종상(藥種商) 지망생의 수험 준비 등 교육에도 힘썼는데, 이때 이 책들을 교재로 사용했던 것 같다.
‘약물학강의’는 덕성여대 생약학 교수였던 이종사촌 김영재가 소장하다가 1970년대에 캐나다로 이민 가면서 김수만의 차남인 김창선님에게 전해 준 것이다. 김영재 교수는 이 책을 전해주며 후손 중 누군가는 꼭 약학을 공부하기를 바랐다고 한다.
김수만 선배님의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하길 기원한다.
2022-03-30 17:57 |
![]() |
[기고] <343> Dr. Lee의 워싱턴 약국일기
작년인 2021년 12월 31일 약업신문사는 ‘Dr. Lee의 워싱턴 약국일기’라는 책을 출판했다. 이 책은 이덕근 약사님이 2008년부터 2018년까지 약 10년간 ‘약업신문’에 격주로 연재한 칼럼 중 157편을 골라 한 권의 책으로 묶은 것이다.
이덕근 약사님은 현재 미국 워싱턴 DC의 CVS pharmacy에 근무하고 있는 분이다. 이 책에서 157편의 글은 ▲재미있는 약 이야기 ▲미국 약국에서 만난 사람들 ▲미국 약국 이야기 ▲마약 이야기 ▲재미있는 미국 이야기 ▲질병과 약 이야기 등 6개의 주제로 나뉘어 묶였다.
이 책은 우선 각 편의 글이 저절로 읽힐 정도로 매우 재미있다. 다음으로 책의 내용이 미국 약국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한마디로 재미있고 유익한 책이다. 이 책이 우리나라 약계 여러분들께 널리 읽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책 머리에 내가 쓴 추천사를 이하에 전재(轉載)한다.
저자인 이덕근 약사님은 1984년 서울대 약대를 졸업하고 1986년에 생약학으로 약학석사 학위를 받은 후 제일제당 연구소에서 6년간 연구를 하다가 1994년에 서울대 화학과에서 생화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3년부터 동화약품 연구소에서 약리독성실장으로 근무하고 1999년 미국 국립보건원(NIH)에 방문연구원으로 간 후 2006년 미국 약사 면허를 따면서 20년간의 연구직을 떠났다. 그 후 메릴랜드 주, 몽고메리 카운티 베데스다 시의 약국에서 9년간 근무하고 2017년부터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의 CVS Pharmacy에서 약사로 근무하고 있다. 현재 미국 약사가 된 지 15년이 지났고 미국 생활을 한 지는 22년이 됐다.
이덕근 약사님도, 인생이 다 그러하듯, 처음부터 미국 약사가 되려는 계획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마침내 매우 훌륭한 미국의 약사가 되었다. 그간 많은 경험을 통해 얼마나 깨달음이 컸겠는가? 미국생활 22년과 미국 약사 15년의 삶과 경험, 그리고 깨달음이 이번에 출판하는 ‘Dr.Lee의 워싱턴 약국일기’에 알차게 담겨 있다. 이 책은 2008년 1월부터 2018년까지 무려 10년간 2주에 한 번씩 총 243회에 걸쳐 같은 제목으로 ‘약업신문’에 연재한 글 중 157편을 골라 모은 것이다.
요즘 세상에 미국에 가본 사람은 매우 많다. 또 미국 약국을 주마간산(走馬看山)으로 구경한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히 미국 약국의 실상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한국 약사 중에서도 매우 드물어 보인다. 일찍이 이덕근 약사님처럼 미국 약국을 운영하며 미국 약국의 명(明)과 암(暗)을 생생하게 설명해 준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처럼 미국 약국 약사의 업무를 정확하고 상세하게 소개해 주는 책은 전례가 없었다고 단언한다. 이 책은 그냥 재미로 읽는 수필집이 아니다. 이 책에는 우리나라 약사들과 약국이 참고할 만한 할 사례들이 가득하다. 우리나라 약국의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지혜가 차고 넘친다.
이덕근 약사님은 생화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분이다.사안을 논리적으로 보는 훈련을 받은 분이다. 더구나 20년이나 연구직에 봉직함으로써 ‘분석하고 연구’하는 자세로 사안을 보는 습관이 몸에 밴 분이다. 책을 보면 그런 특징이 명료하게 드러난다. 근거 없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엉뚱하게 논리를 비약시키지 않는다. 그 덕분에 글의 내용과 주장에 엄청난 설득력이 있다. 군더더기 없이 흐르는 글솜씨는 독자의 시선을 책에 고정시킨다. 금상첨화다.
이 책을 통하여 미국 약사로서의 귀한 경험과 통찰력을 한국의 독자들에게 제공하고 싶어하는 이덕근 약사님의 사랑과 진정성에 감사드리며, 약계 제현의 일독과 소장을 진심으로 추천해 드리는 바이다.
아무쪼록 이 책을 통해 우리나라 약계에 대한 저자의 사랑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기를 바란다.
2022-03-16 14:35 |
![]() |
[기고] <342> 덕담과 빈말은 결코 하나마나 한 말이 아냐
양력이든 음력이든 새해가 되면 으레 주고받는 말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이다. 한 해의 시작 시점에서 이보다 더 주고받기에 좋은 덕담(德談)은 없는 것 같다. 나는 가끔 이 말을 들으면 “네, 많이 주세요”라며 웃는다. 많이 받으란다고 많이 받아지는 것이 복인가? 이렇게 생각하면 이런 덕담은 사실 조금 실없어 보이기도 한다.
‘복 많이 받으세요’와 비슷한 말에 “건강하세요, 건강이 최고예요”란 덕담이 있다. 이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맞아요, 건강이 최고예요”라고 맞장구를 친다. 나이 먹은 사람치고 건강이 최고인 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러고 보면, 이 말도 하나마나 한 말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류의 덕담을 곧잘 주고받는다. 덕담은 주고받는 사람의 마음을 따듯하고 서로 친밀하게 만들어 준다. 서로에게 덕(德)이 된다고 해서 덕담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몇 십년 만에 만난 친구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어 보면 웃음이 절로 나올 때가 있다. 한 친구가 “너 하나도 안 늙었다. 옛날 고대로다”라고 한다. 그러면 이 말을 들은 사람도 “너야말로 옛날 고대로다”라고 화답(和答)한다. 몇십 년이 지났는데 옛날 그대로라고? 명백한 거짓말이다. 그래도 이런 인사를 나누고 나면 서로 기분이 좋다. 최소한 나빠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 말도 단순한 거짓말이 아닌 덕담인 것이다.
반면에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어디 아파? 안색(顔色)이 안 좋네” 하거나 “살이 왜 그렇게 많이 빠졌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본대로 느낀 대로 솔직하게 말한 것이지만, 그 말을 들은 사람은 문득 자기 건강을 염려하게 된다. 그래서 이런 류의 솔직한 말은 덕담이라고 할 수 없다.
‘언제 밥 한번 먹읍시다’, ‘차 한잔합시다’ 또는 ‘언제 얼굴 한번 봅시다’란 인사말이 있다.헤어질 때, 또는 전화 통화를 끝낼 때 으레 하는 말이다. 가끔은 정말로 약속을 잡게 만들기도 해 주지만, 대개는 꼭 약속을 잡자는 뜻은 아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그냥 ‘그럽시다’라고 응수하면 그만이다. 그래서 이런 류의 말들을 ‘빈말’이라고 한다. 이 말을 듣고 ‘날짜를 잡자’고 수첩을 펴드는 사람이 있다면 고지식한 사람이다. 그러나 빈말이라고 해서 꼭 헛소리(虛言)라고는 할 수 없다. 빈말로라도 이런 말을 못 들으면 서운할 때가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런 잡문(雜文)에 인용하기는 송구하지만, 고 하용조 목사님은 ‘말에는 권세가 있다’고 말했다. 세상에 영향력이 없는 말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예컨대 부부간에 ‘사랑한다’는 말을,빈말로라도 반복하다 보면 어느덧 서로 정말로 사랑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니 설사 본심(本心)이 아니더라도 나쁜 말보다 좋은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나는 주례를 설 때, 부부간에 솔직한 대화를 하지 말라는 주의를 준다. 솔직하게 대화를 나누다 보면 아무래도 서로 상대방의 단점을 지적하게 되기 때문이다. 솔직한 지적을 했다고 상대방의 단점은 결코 고쳐지지 않는다. 대화가 길어질수록 누가 더 상대방의 치명적인 단점을 지적하는가 하는, 상처(傷處)주기 시합으로 변질될 따름이다. 결국 대화 전보다 부부 관계가 더 나빠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남편은 부부싸움에서 이기지 않도록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남편이 승리할 경우의 후유증은 정말 심각하기 때문이다.젊은 신랑은 모르겠지만, 우리 나이쯤 되는 남편들은 체험을 통해 모두 다 아는 사실이다.
요컨대 부부싸움을 건설적으로 승화(昇華)시키기 위해서는 솔직한 대화 대신, 상대방에 대한 덕담, 즉 빈말이라도 아부(阿附)에 가까운 칭찬을 해야 한다.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니 도(道)를 닦아야 한다. 세상의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빈말이더라도 상대방의 기분을 배려하는 덕담을 주고받는, 살맛 나는 세상을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
독자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건강하세요 .언제 뵙고 식사 한 번 하십시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2022-02-23 16:14 |
![]() |
[기고] <341> 얼굴 한 번 봅시다
누구나 거울을 보거나 상대방을 볼 때에 얼굴부터 본다. 얼굴이 그 사람을 대표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모두 얼굴의 생김새,즉 용모(容貌)에 신경을 쓴다. 옛날에 ‘얼굴 뜯어먹고 사냐?’는 말이 있었지만, 얼굴의 아름다움, 즉 미모(美貌)에 대한 관심은 세월이 갈수록 더 커지는 것 같다. 신사동에 즐비한 성형외과들이 웅변(雄辯)으로 이를 증명한다.
얼굴을 보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그 사람의 감정이 얼굴에 나타난다. 웃고 있으면 기분이 좋은 것이고, 찡그리고 있으면 슬픈 것이며, 붉으락푸르락하면 화가 난 것이며, 안면(顔面)에 홍조(紅潮)를 띠고 있으면 부끄러운 것이다. 예부터 아랫사람은 윗사람의 안색(顔色)부터 살펴야 했다. 어딘가 안색이 애매하면 언행(言行)을 삼가는 것이 안전하다. 다음으로 안색으로부터 그 사람의 건강 상태도 짐작할 수 있다. 안면(顔面)이 불그레하면 건강한 것이고, 창백(蒼白)하면 아프거나 피곤한 것이고, 이상하게 검으면 병을 앓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이처럼 얼굴에 사람의 감정과 건강상태, 즉 ‘얼(魂)’이 나타난다고 해서 ‘얼’굴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사귀어 아는 사람이 많을 때, ‘얼굴이 넓다’거나 ‘안면이 넓다’고 한다. ‘발이 넓다’와 비슷한 의미이다. 다른 사람과 사귀려면 우선 안면(顔面)부터 터야 한다. 그래서 사람을 많이 알수록 유리한 사업을 안면(顔面)장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런저런 의미로 안면이 넓은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실제로 얼굴이 큰 것은 ‘얼큰이’라고해서 다들 싫어한다. 그래서 얼굴이 작아 보이도록 화장하는 것이 유행이고, 심지어 성형외과에 가서 얼굴을 작게 만드는 수술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옛날에는 어느 정도 얼굴이 넙데데해야 잘생긴 걸로 쳐줬었다.얼굴이 조막만 하면 ‘오종종하다’고 흉을 보기도 했다. 예쁜 얼굴의 기준이 세월에 따라 정반대로 바뀐 것이다.
‘얼굴이 잘생긴 사람은 언젠가는 얼굴값 한다’고 지레 비난하는 말이 있다. 대개는 시샘에서 나온 말이다. 반면에 미모가 좀 떨어지는 사람의 행동을 보고는 ‘꼴값한다’고 비아냥댔다. 비열한 말버릇이다. 옛날 다방(茶房)에서는 되도록 예쁜 여자를 ‘얼굴마담’으로 고용했었다. 일본어로 얼굴이란 뜻인 ‘가오’를 써서 ‘가오마담’이라고도 했다. 이는 ‘당시의 주 고객인 남자 손님들을 유인하여 매상(賣上)을 올리려 한 일종의 미인계(美人計)였다. 마담의 용모가 다방의 브랜드 역할을 하기도 했던 시절의 이야기다. 참, 다방이란 오늘날 커피숍의 고어(古語)이다.
그 시절에 ‘가오(얼굴)잡고 다닌다’라는 말이 있었다. 잘났다고 으쓱대며 다니는 모습을 빗대는 말이었다. 비슷한 말로 ‘목에 힘주고 다닌다’는 말도 있었는데, 이는 체력이나 권력을 과시하는 모습을 가리킨다.
얼굴이 잘생기면 대체로 범사(凡事)에 유리하지만, 너무 잘 생겨 피해를 보는 경우도 있다. 사장님보다 더 사장님같이 잘 생겨서, 사람들로부터 사장에 앞서 인사를 받는 바람에 사장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부하도 있다. 그런 부하는 대개 오래지 않아 회사를 그만두게 된다.
크게 성공한 사람은 얼굴을 들고 거리를 활보(闊步)할 수 있다. 그러나 성공했다고 죽마고우(竹馬故友)를 외면(外面)하면 안면을 바꾼 사람 또는 안면몰수(顔面沒收)한 사람이라고 욕을 먹는다. 반면에 명예를 실추시킨 사람이 부끄럼도 모르고 활개치고 다니면 ‘벼룩도 낯짝이 있지’, ‘얼굴이 두껍네’, ‘얼굴에 철판 깔았나?’ 또는 철면피(鐵面皮)라는 욕을 먹는다. 그러고 보면 어느 정도 인격적으로 품위가 있는 얼굴을 들고 살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코로나19 팬데믹 때문에 3년째 사람들과 대면(對面, face-to-face)하기가 어려워졌다. 전에는 ‘언제 밥 한 번 먹읍시다’가 인사였는데 이제는 ‘언제 얼굴 한 번 봅시다’가 전화 인사가 된 지 오래다. 얼굴을 보는 것이 만남의 첫 단계란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요즘처럼 얼굴 보기가 소중하게 느껴진 적이 없다.
여러분, 건강하시고 언제 얼굴 한 번 꼭 보십시다.
2022-02-09 11:4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