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사·약국] <121> 약을 안전하게 쓰는 법
약으로 인해 사고가 날 때가 있다. 원인은 다양하다. 효과 없는 약을 잘못 사용하거나 약 부작용 때문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약을 과용하거나 반대로 너무 적은 양을 쓰거나 또는 약과 약의 상호작용 때문에 해를 입을 수도 있다. 의사, 약사, 간호사, 환자 모두 사람이니 실수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약과 관련된 실수는 치명적이다. 의료진이 실수하지 않도록 체계를 잘 만들고 운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최근에는 약을 안전하게 사용하기 위해 꼭 필요한 환자의 능동적 참여도 강조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도 환자참여를 중요시한다. 환자가 그저 주는 대로 약을 먹고 치료를 받는 식으로 수동적으로 움직일 게 아니라 의사, 약사와 함께 팀을 이룬 것처럼 적극적으로 치료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약국에서 약을 지어올 때도 간단한 확인 절차를 통해 약의 안전성을 높일 수 있다. 우선 이름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확인해야 할 이름은 두 가지다. 처방전과 조제된 약이 자신의 것이 맞는지 체크하고 처방전에 기록돼 있는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도 자신의 것과 일치하는지 확인해야 한다. 생각보다 동명이인이 많다. 두 번째로 자신이 받은 약의 이름을 반드시 기억해 두는 게 중요하다. 특히 부작용이나 알레르기를 경험했을 때 그냥 지나치면 안 된다. 어떠한 약성분이 원인이 됐는지를 꼭 확인하여 이름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이때 구체적으로 어떤 부작용이나 알레르기 반응이 있었는지 함께 기억해두면 좋다. 두 번 다시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하기 위해서도 자신이 알레르기나 부작용을 경험한 약 이름은 평생 기억해두는 걸 습관으로 하길 권한다. 상품명이 성분명보다 더 기억하기 쉽다. 암기하기 어려울 때는 사진이라도 찍어두면 좋다.
약의 가짓수가 많아질수록 상호작용 위험도 커진다. 같은 약이 중복 처방되는 경우를 DUR 시스템으로 거르긴 하지만 완벽하진 않다. 모든 약이 처방약은 아니다. 처방약과 처방 없이 약국에서 구입한 일반약이 중복될 수도 있다. 약사라고 내가 집에 어떤 가정상비약을 두고 있는지 속속들이 알 수는 없다. 그러니 본인 스스로 자신이 복용중인 약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약의 상호작용이나 부작용, 그리고 중복 투약 등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단골 약국 한 곳에서 '약력(藥歷) 관리'를 받는 것도 좋다. 약력이란 내가 사용 중인 약의 전체 리스트를 말한다. 현재 의료체계상 의사, 약사라도 내가 어떤 약을 복용 중인지 전체 리스트를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본인이 복용 중인 처방약(또는 처방전), 일반약(처방 없이 약국에서 구입 가능한 약), 건강기능식품을 한 곳에 모아두고 사진을 찍어두면 유용하다. 캐나다와 같은 나라에서는 이런 약들을 약국에 가져가서 약사와 환자가 함께 리뷰하면서 혹시 모르고 있는 약과 관련한 문제들이 있는지 점검하는 서비스를 국가 차원에서 지원해주기도 한다. 2019년 네덜란드 연구에 따르면 이렇게 하여 약 관련 문제를 한 건 찾아낼 때 무려 1100만원(8270유로)의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고 한다.
약사와 환자의 만남을 두 전문가의 만남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약사는 약의 전문가이고 환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전문가이다. 누구든 자기 자신에 대한 정보는 본인이 제일 많이 알고 있다. 환자 본인이 그런 개인 정보를 의료진과 공유하고 치료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어 알약의 색깔이나 이름이 바뀌었을 때 의도적인 것인지 실수인지 환자가 체크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실수를 줄일 수 있다. 질문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지 말자. 의사나 약사가 질문을 기피하는 경우에는 더 좋은 병의원이나 약국을 찾아가자. 미래에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예방하는 길이다.
약의 올바른 복용방법과 부작용을 알아두는 것도 환자 스스로 챙겨야 할 몫이다. 아무리 친절하고 자세한 설명을 해도 약의 실제 사용자인 환자가 그걸 기억못하면 소용이 없다. 약의 보관방법과 사용기한에 대해서도 잘 알아둬야 한다. 어린이의 손이 닿지 않게 약을 안전하게 보관하는 것도 중요하다.
2022-11-24 22:44 |
[약사·약국] <120> 혈압 측정이 중요한 이유
겨울이 오고 있다. 건강을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하나만 꼽으라면 집에서 혈압을 체크해보는 것이다. 가정용 혈압계가 아직 없는 사람이라면 다른 모든 비용을 절약해서라도 하나 구입하는 게 좋다. 나에게 고혈압이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혈압을 측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혈압인지 모르고 지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쓰러지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2008년 분당서울대병원 연구 결과 노인 고혈압 환자 33.9%는 자신이 고혈압인 줄 모르고 생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20년 미국 연구 결과도 이와 비슷하여 성인 35.3%가 자신이 고혈압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대한고혈압학회에 따르면 40~49세 성인이 자신이 고혈압인줄 아는 비율은 44.8%에 불과하다. 이삼십대 환자의 경우는 더 심각하다. 고혈압인 줄 아는 사람 비율이 17.4%밖에 되지 않는다.
나이가 들수록 혈압이 상승한다. 수축기 혈압이 20 mmHg, 확장기 혈압이 10 mmHg 올라갈 때마다 심장병, 뇌졸중 위험이 두 배로 높아진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더 있다. 고혈압을 방치하면 인지 기능이 저하되고 치매 위험이 높아진다. 신장에도 부담을 주어 신장 기능이 저하되고 신장병을 앓게 될 위험이 커진다. 혈관 내피에 지나친 압력이 가해지면 미세한 손상이 생긴다. 손상이 제대로 복구되지 않으면서 지방, 콜레스테롤, 칼슘이 쌓여 플라크가 만들어진다. 이로 인해 혈관이 좁아지고 혈압은 더 높아지는 악순환이 일어난다. 날씨가 추운 겨울이 되면 좁아진 혈관이 막히거나 터지기 십상이다. 2015년 독일 연구에 따르면 24시간 동안 기온이 2.9°C 내려가면 뇌졸중 위험이 11% 높아진다. 심혈관질환 위험이 높은 사람의 경우는 무려 30%가 높아진다.
불행히도 증상으로는 자신이 고혈압인지 알 수 없다. 고혈압이 침묵의 살인자라고 불리는 이유다. 그러니 응급상황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방지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자신의 혈압을 정기적으로 체크하는 것이다. 혈압에 쓰이는 용어는 알고 보면 쉽다. 흔히 수축기 혈압은 위쪽 혈압, 확장기 혈압은 아래쪽 혈압이라고 부른다. 위쪽 혈압이 더 중요하다. 2021년 미국심장협회지에 실린 성인 107,599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 위쪽 혈압이 심장병 사건이나 사망 위험을 예측하는데 더 중요한 지표인 것으로 나타났다. 아래쪽 혈압은 50세 미만일 경우에 추가적 의미가 있다. mmHg는 수은 밀리미터라고 읽는데 과거에 수은을 이용한 혈압계를 사용하던 시절을 기준으로 해서 만들어진 단위이다. 요즘에는 환경 문제로 인해 수은 혈압계를 사용하지 말도록 권장한다.
집에서 혈압을 재면 병의원에서보다 5에서 10 정도 낮게 나오는 경우가 있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를 보면 긴장하여 혈압이 높게 나오기 때문인데 이를 가리켜 백의(white coat) 고혈압이라고 부른다. 음식을 먹거나 커피나 술을 마신 뒤, 운동 직후에도 혈압이 높게 나온다. 흡연도 마찬가지다. 이런 활동 뒤에는 최소한 30분 또는 1시간 뒤에 혈압을 측정해야 한다. 다리를 꼬고 앉거나 팔을 탁자에 받치지 않고 늘어뜨려도 혈압이 높게 측정될 수 있다. 편안한 의자에 등을 받치고 양발은 바닥에 평평하게 대고 앉아서 5분 정도 기다렸다가 혈압을 재는 게 좋다. 화장실에 가고 싶으면 혈압을 재기 전에 다녀와야 측정에 영향이 없다. 혈압을 재는 도중에는 조용히 있자. 말하면 정확한 측정이 어렵다. 커프가 너무 느슨하거나 꽉 조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가끔 양팔 혈압을 모두 재어 보는 것도 좋다. 2020년 연구 결과 양팔 측정치가 10 mmHg 이상 차이가 나면 사망 위험이 10%까지 더 높아질 수 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양팔 혈압 측정치가 다를수록 동맥 혈관이 경직되어 있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한다.
혈압은 시시각각 변한다. 그러니 매일 비슷한 시간대에 측정하는 게 좋다. 1-2분 간격을 두어 두 번 이상 측정하는 것을 추천한다. 하지만 집에서 혈압을 쟀는데 고혈압이 의심된다고 해서 자가 진단을 내려서는 안 된다. 가까운 병의원에 방문하여 상담 뒤에 정확한 진단을 받아야 한다.
2022-11-11 10:21 |
[약사·약국] <119> 왜 졸린가
약이 독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실제로 독성이나 부작용이 강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보통 졸음을 유발하는 약을 독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왜 어떤 약은 먹어도 졸리지 않은데 어떤 약은 복용하고 나면 졸린 걸까? 약성분이 뇌로 들어가서 진정 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인체가 뇌로 모든 약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뇌는 혈관뇌장벽(Blood-brain barrier)라는 보호장치로 둘러싸여있다. 혈액 속에 약물 분자가 있다고 해도 뇌 속으로 전부 들어가지는 못한다. 혈관뇌장벽에 의해 투과성이 선택적으로 제한된다. 이런 식으로 관문을 통해 필요한 것들만 들여보내고 나머지는 걸러내는 방식으로 뇌를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다. 뇌의 에너지원이 되는 포도당은 받아들이고 고분자 물질은 통과하지 못하게 한다. 세균이나 독성 물질은 뇌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뇌 손상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는 관문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약이라고 특별대우를 받지 못한다. 약물 분자도 혈관뇌장벽을 통과하지 못하면 뇌 바깥의 혈관을 타고 나머지 조직이나 장기에서만 작용한다.
비슷한 효과를 내는 약이어도 중추신경계에서 졸음을 유발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혈관뇌장벽 때문이다. 감기나 알레르기비염에 자주 사용되는 항히스타민제가 대표적이다. 1세대 항히스타민제로 감기약에 주로 쓰이는 클로르페니라민, 트리프롤리딘 같은 약성분은 혈관뇌장벽을 통과한다. 그래서 졸음을 유발한다. 로라타딘(클라리틴) 같은 2세대 항히스타민제는 혈관뇌장벽을 잘 통과하지 못한다. 하지만 약간은 통과할 수 있어서 사람에 따라 졸음 부작용을 경험할 수도 있다. 3세대 항히스타민제로 불리는 펙소페나딘(알레그라)은 혈관뇌장벽을 전혀 통과하지 못한다. 이런 경우에는 약을 복용한 사람과 위약(플라시보)을 복용한 사람에게서 졸음, 진정 부작용을 경험하는 빈도에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다.
대체로 분자 크기가 작고 지방에 잘 녹는 약물일수록 혈관뇌장벽을 통과하여 뇌 속으로 전달되기 쉽다. 반면 덩치가 큰 분자나 물에 잘 녹는 약물은 통과하기 어렵다. 같은 항히스타민제여도 3세대 약물은 뇌혈관장벽을 통과하지 못하고 1세대 약물은 잘 통과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감기약에 사용되는 1세대 항히스타민제가 독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혈관뇌장벽을 통과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MSG(monosodium glutamate)는 혈관뇌장벽을 거의 통과하지 못한다. 인체가 만들지 못하는 필수아미노산은 뇌로 들여온다. 하지만 글루탐산은 뇌에서 만들어 쓸 수 있다. 굳이 혈관뇌장벽을 통과시켜 들여올 필요가 없는 것이다. 1968년 뉴 잉글랜드 의학 저널(NEJM)에 중국계 이민자 의사인 로버트 호 만 쿽이 짧은 레터로 의문을 제기한 이후 지난 50여 년 동안 많은 과학자들이 이에 대해 연구했다. 이때부터 중국음식증후군이라는 말이 널리 퍼졌다. 하지만 결론은 명확하다. 음식을 통해 섭취하는 정도의 글루탐산으로는 뇌 속의 글루탐산 레벨에 별다른 영향이 없다.
1970년 사이언스지에 실린 연구에서는 11명의 남성을 대상으로 하루에 131에서 147g까지 MSG를 섭취하도록 했다. 조미료 범벅인 음식을 먹는다고 해도 섭취할 수 없는 엄청난 양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많은 양의 MSG를 매일 같이 14일~24일 동안 먹고 나서도 아무도 건강상 이상이나 중국음식증후군 증상을 경험하지 않았다. 식당에서 이 정도로 많은 양의 조미료를 쓰면 수지타산도 안 맞겠지만 쓴다고 좋아할 손님도 없다. MSG는 설탕과 달라서 너무 많은 양을 쓰면 불쾌하게 여길 수 있다. 미국 피츠버그 의대 존 펜스트롬 교수는 그런 이유로 실제 일상에서 섭취하게 되는 MSG의 양은 한정적이라고 지적한다. 펜스트롬 교수는 2018년 리뷰 논문에서 일상식으로 섭취하게 되는 MSG가 뇌 속 글루탐산 농도를 상승시키거나 뇌 기능에 악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뇌 속으로 들어가서 뇌에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졸음을 유발하기는 어렵다. 조미료가 들어간 음식을 먹고 졸리면 그건 조미료 때문이 아니라 그저 식곤증이란 얘기다.
2022-10-27 20:15 |
[약사·약국] <118> 사람만 통풍에 걸리는 이유
사람은 왜 통풍에 취약한가? 요산을 대사하는 효소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사람을 포함한 일부 영장류는 요산을 알란토인으로 대사하는 효소를 만들 수 없다. 유전자가 있기는 한데 기능을 잃어버린 위유전자(pseudogene)이다. 알란토인은 요산보다 소변에 10~100배 더 잘 녹는다. 요산을 알란토인으로 대사하는 효소(uricase)를 가지고 있는 다른 동물에게는 통풍이 생기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람은 왜 이런 중요한 효소를 잃어버렸을까? 아직 정확한 답은 모른다.
일부에서는 영장류가 비타민C를 합성하는 능력을 상실하면서 이를 보완하기 위해 요산을 축적하는 쪽으로 진화했다고 추측한다. 요산은 인체 내에서 강력한 항산화물질로 작용할 수 있으니 비타민C를 못 만들어서 부족한 부분을 요산으로 채우는 방향으로 한 게 아니냐는 거다. 하지만 2021년 <분자 생물학과 진화> 학회지에 실린 미국 연구팀의 논문에서는 비타민C 합성 능력 상실과 요산 대사 효소 상실에 별다른 연관성이 없다고 지적한다. 비타민C가 모자란 부분을 요산으로 채우려고 했다는 것은 가설일 뿐 신빙성이 낮다는 것이다.
반대로 비타민C를 섭취하면 통풍 위험을 낮출 수 있을 것으로 보는 연구자들도 있다. 미국임상영양학회지에 2022년 5월 실린 연구 결과 하루 비타민C를 500mg 섭취하는 사람은 통풍으로 진단 받을 가능성이 12% 줄어들었다. 이런 효과는 체질량지수(BMI)가 25 미만인 정상체중인 사람에게서 두드러졌다. 이 연구는 미국 남성 의사 14,641명을 대상으로 한 자료를 분석한 것으로 인과 관계를 알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통풍 위험을 낮추는 효과가 그리 크지 않은 편인데다가 다른 연구에서도 이미 통풍 진단을 받은 사람에게서는 비타민C에 별 효과가 없다는 쪽 결과가 다수이다. 비타민C 보충제를 통풍환자에게 권장하기에는 근거가 부족하다.
또 다른 가설은 인체가 요산을 더 많이 만들어내는 게 산화적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한 반응이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 요산이 인체를 보호하기 위한 물질이라는 설명이다. 통풍으로 고통받는 사람에게는 크게 와 닿지 않는 이야기다. 하지만 동물 실험 연구 결과를 놓고 보면 아주 틀린 설명은 아니다. 2018년 발표된 연구 결과, 요산분해효소가 작동하지 않도록 유전자를 조작한 암컷 생쥐의 수명이 정상 생쥐보다 연장되는 효과가 나타났다. 2020년 발표된 다른 연구에서는 요산이 예쁜꼬마선충(C. elegans)의 수명을 연장하는 효과가 나타났다. 불행히도 이러한 동물 실험 결과를 사람에게 적용하기는 힘들다. 요산은 양날 선 검이다. 인체 내에서 항산화제로서 작용할 수도 있지만 산화를 촉진하기도 한다. 사람에게서 혈중 요산수치가 높게 나타나는 것은 고혈압, 내장 비만, 인슐린 저항성, 이상지질혈증 위험이 높아지는 것과 연관된다. 2022년 8월에 미국의사협회저널(JAMA)에 실린 연구 결과 급성 통풍 발작이 있고 나서 뇌졸중, 심근경색과 같은 심혈관계 질환을 겪을 위험이 크게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통풍 발작 직후 60일 이내에 이러한 심혈관계 문제가 생길 가능성은 통풍 발작이 없었던 사람에 비해 거의 두 배 정도로 높았다. 요산이 인체 내에서 어느 정도까지 항산화물질로 작용하든 간에 그 효과가 산화적 스트레스가 높아진 상황을 극복하는데 큰 도움을 주지는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요산분해효소를 잃어버린 게 과당을 섭취하면 지방으로 대사, 축적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거라고 보는 과학자들도 있다. 과일로 먹는 거야 무방하지만 음료로 액상과당을 과잉섭취하는 것은 통풍 위험을 높일 수 있다.
인체에서는 만들 수 없는 요산분해효소를 투입하면 통풍을 치료할 수 있을까? 그런 취지로 만든 약이 있다. 유전자재조합 기술로 돼지와 개코원숭이의 요산분해효소를 변형하여 만든 약(Pegloticase)이다. 하지만 고가인데다가 면역 반응이나 부작용 문제로 잘 쓰이지 않는다. 최근에는 사람이 아주 오래 전 상실한 효소를 되살려 약으로 쓸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연구도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 사용되는 약과 생활습관 조정으로도 통풍을 더 잘 관리할 수 있다. 과음, 비만, 과체중은 모두 산화적 스트레스를 증가시킨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인체가 요산을 더 많이 만들도록 방치하지 말자. 체중 조절, 금연, 운동, 식이 조절로 혈중 요산 수치를 10~18%까지 낮출 수 있다. 비록 통풍을 완치할 수는 없지만 잘 관리하면 삶의 질이 달라진다는 걸 기억하자.
2022-10-13 09:28 |
[약사·약국] <117> 항산화제 이야기
세상에는 선악을 가르기 어려운 것들이 많다. 항산화제는 건강에 좋은가 나쁜가? 그때그때 다르다. 운동을 열심히 하고 난 뒤에 항산화제를 섭취하는 것은 운동 효과를 떨어뜨릴 수 있다.
운동을 하면 인체가 에너지를 소비하는 과정에서 활성산소종이 생겨난다. 산소가 쇠를 녹슬게 하듯 우리 몸의 노화를 촉진한다는 바로 그 산화물질이다. 그러니 운동을 하고 나서 비타민C, 비타민E 같은 항산화제를 섭취하면 몸에 활성산소종이 끼치는 영향을 줄여 건강에 더 유익할 것만 같다. 운동 뒤에 항산화제가 근육 통증을 줄이고 빠른 회복을 돕는다는 생각에 운동을 마치고 나서 바로 항산화제를 삼키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2017년 코크란 리뷰에서 50건의 연구를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내놓은 결론이다. 운동 뒤에 항산화제를 보충해줘도 근육통이 특별히 더 빨리 줄어들지 않는다. 운동 뒤 6시간이 지나도 그렇고, 하루, 이틀, 사흘, 나흘이 지나도 별다른 효과가 없다. 예상과는 정반대의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2014년 노르웨이 연구팀이 54명의 젊은 성인 남녀를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항산화제가 운동 효과를 오히려 떨어뜨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쪽은 비타민 C 1,000mg, 비타민 E 235mg을 주고 다른 한쪽에는 플라시보를 주어 비교한 결과이다. 일주일에 3~4회 고강도 운동 프로그램을 11주 동안 계속한 뒤에 보니 세포의 발전소로 불리는 미토콘드리아의 생성과 관련된 지표가 플라시보 그룹 쪽에서 더 분명하게 증가한 것이다. 반대로 항산화제를 운동 뒤에 섭취한 쪽 참가자에게서는 증가가 덜 나타났다.
적포도주 속 항산화물질로 잘 알려진 레스베라트롤을 섭취한 경우에도 결과가 비슷했다. 2013년 덴마크 연구팀은 27명의 60대 남성을 대상으로 한쪽에는 레스베라트롤 250mg, 다른 한쪽에는 가짜약을 주고 2개월의 운동 뒤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비교했다. 운동은 확실히 건강에 유익했다.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나 동맥 혈압과 같은 심혈관계 건강 지표가 향상됐다. 하지만 운동하면서 가짜약을 먹은 플라시보 그룹에 비해 레스베라트롤 투여 그룹은 그 효과가 떨어지거나 아예 나타나지 않았다.
운동을 한 뒤에 생겨나는 활성산소종을 절대악으로 생각한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결과다. 하지만 활성산소종은 절대악이 아니다. 인체에 침입한 세균과 바이러스를 제거할 때도 사용되고 손상된 인체 세포의 복구를 위한 신호로 작용할 수도 있다. 운동은 근육을 미세하게 손상시킨다. (같은 맥락에서 회복하지 못할 정도로 인체에 부담을 주는 과도한 운동은 해로울 수 있다.) 하지만 손상된 근육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근육이 더 튼튼해지며 인체는 더 건강해진다. 운동 뒤에 항산화제를 고용량으로 섭취하면 이런 복구과정을 이끄는 신호가 약해져서 운동의 건강 증진 효과가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이다. 설득력 있는 가설이다.
그렇다고 항산화제를 섭취하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면 섣부르다. 한 가지 항산화제를 너무 고용량으로 섭취하지 않는 정도면 충분하다. 사실 항산화물질은 어디에나 있다. 채소, 과일에 풍부하고 커피에도 많이 들어있다. 채소를 많이 먹지 않는 사람의 경우 하루 섭취하는 항산화물질의 절반 이상이 커피에서 온다. 커피 한 잔에는 200~550mg의 항산화물질이 들어있다. 음식, 음료 속의 항산화물질은 다양하다. 음식을 하나의 성분처럼 여기는 환원주의를 피해 골고루 다양한 음식을 섭취하면 된다. 염증을 줄이고 노화를 지연시키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 당뇨치료제 메트포르민의 경우에도 운동의 효과를 떨어뜨린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작용기전상 추측이 가능한 결과이다. 메트포르민은 미토콘드리아에서 일어나는 세포호흡을 줄인다. 미토콘드리아에서 에너지대사 반응이 제한되니까 인체 세포는 그에 대한 반응으로 미토콘드리아 기능을 더 활성화하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메트포르민이 암 예방이나 수명 연장과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게 과학자들의 생각이다. 하지만 운동을 할 때 미토콘드리아에서 에너지를 더 많이 만들어내면서 건강이 향상되는 효과는 줄어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당뇨병 환자들이 메트포르민을 중단해야 한다는 연구 결과는 아니지만 장수에 도움이 될까 봐 메트포르민을 복용 중인 사람이라면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할 내용이다. 약에는 절대선도 절대악도 없다. 유익을 최대로 하고 해를 최소로 줄이는 용량과 용법이 있을 뿐이다.
2022-09-29 12:36 |
[약사·약국] <116> 운동해도 살빠지지 않는이유
수렵 채집인과 도시인의 하루 소비 칼로리는 얼마나 다른가? 별 차이가 없다. 아프리카 탄자니아 북부 초원 지대에서 평균적으로 하루 14km를 걷는 하드자족 남성과 산업화된 국가에 사는 성인 남성의 에너지 소비량은 동일하다. 체중이 같다면 아프리카 초원에서 매일 수렵과 채집을 하며 살든, 도심의 빌딩 숲에서 거의 대부분을 앉아서 생활하든 일일 소비 칼로리가 같다는 이야기다. 미국 듀크대학교의 인류학자 허먼 폰처가 10년에 걸쳐 여러 차례 하드자족 야영지에서 생활하면서 직접 연구한 결과이다.
폰처의 연구 결과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하루 3000kcal를 소비하면서 운동은 거의 하지 않던 성인이 하루 500kcal를 운동으로 소비한다고 가정하면 칼로리 소모가 늘어난 만큼 살이 빠져야 맞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 몸은 마치 하루 일정한 금액만 생활비로 지출하는 사람처럼 움직인다. 안 하던 운동에 하루 500kcal를 소비하면 나머지 2500kcal을 가지고 어떻게든 맞춰 생활한다. 제한된 일일 에너지 소비량은 사람에게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온혈동물에게 공통적으로 관찰되는 것이다. 실험실에서 쥐를 계속 빈둥거리도록 하거나 또는 쳇바퀴를 주어 돌리면서 활동량을 늘려도 에너지 소비량은 처음에만 조금 증가할 뿐 일정하게 유지된다.
운동을 안 하던 사람이 운동을 해도 에너지소비량이 비례해서 늘어나지 않는다. 처음에는 체중이 조금 줄어들 수 있지만 인체는 곧 운동에 소모한 열량에 맞춰 다른 항목의 에너지 소비량을 줄인다. 그러므로 운동으로는 살을 뺄 수 없다. 하지만 바로 이 같은 사실이 운동이 건강에 유익한 이유가 된다. 운동으로 열량을 소비하는 만큼 다른 활동에 사용할 에너지의 양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운동으로 에너지 예산이 줄어들면 생명 유지에 필수적 활동에 우선순위를 두고 쓰게 된다. 그러니 우선순위가 낮은 일에는 에너지 소비가 줄어든다. 염증에 쓸 에너지가 없다는 이야기다. 규칙적 운동이 만성 염증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이유다. 반대로 과식으로 칼로리가 남아돌 때는 체중만 증가하는 게 아니라 염증도 증가한다. 같은 맥락에서 스트레스에 대한 반응도 덜 민감해진다. 운동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스트레스에 반응할 에너지가 넘쳐나지만 운동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일에 에너지를 낭비할 겨를이 없다. 그래서 규칙적으로 운동하는 사람은 스트레스 반응에 더 적은 에너지를 쓰게 된다. 하루 제한된 에너지를 용돈으로 받은 사람이라면 운동에 적당량을 써서 몸이 나머지 칼로리를 아껴 쓰도록 만들 때 건강에 더 유익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운동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할 경우에는 생명에 필수적 활동에도 사용할 에너지가 모자라서 건강에 도리어 해로울 수도 있다. 2022년 2월 아일랜드 연구팀의 메타분석 연구결과에 따르면 이삼 분 걷는 정도로도 충분히 유익하다. 식후 60~90분 내에 2~5분 정도 가볍게 걷는 것만으로도 혈당치를 개선하는 데 유의할만한 효과가 나타났다.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피트니스센터에 가지 않아도 된다. 평소에 몸을 좀 더 자주 움직여서 소비 칼로리를 늘려주는 정도로도 건강에 충분히 유익하다.
물론 운동이 다는 아니다. 현대인의 식생활이 원시인과 달라져서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는 주장은 흔하다. 폰처는 원시인의 식단이 저탄고지라고 주장하는 자칭 전문가에 대해 개탄한다. 모를수록 더 용감하다는 것이다. 식물성 식품은 화석으로 잘 남지 않는 경향이 있고 20세기 초 인류학이 여성이 기여한 식품 공급량을 과소평가했기에 생긴 오해일 뿐, 수렵채집인의 식탁은 저탄고지와는 거리가 멀다는 게 폰처의 설명이다. 현존하는 수렵채집인 인구집단의 대표라 할 수 있는 하드자족, 치마네족, 슈아르족의 매일 섭취 칼로리에서 65% 이상이 탄수화물이라는 그의 지적은 저탄고지에 흔들린 사람이라면 눈여겨볼 만하다. 본래 인간은 구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먹는 잡식동물이지 탄수화물과 지방의 비율을 생각하며 먹는 동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
폰처는 자신의 방대한 연구 결과를 모아 2021년 <운동의 역설>이란 책을 냈다. 2022년 7월 한국어판이 출간되었다. 칼로리, 체중, 운동의 관계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일독을 권한다.
2022-09-14 16:22 |
[약사·약국] <115> 알츠하이머 논문조작 논란
과학철학자 칼 포퍼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이론이 가능한 유일한 것으로 보인다면 그 이론이나 그 이론으로 풀려는 문제를 잘 모른다는 신호로 여겨야 한다.” 알츠하이머 연구에 딱 맞는 말이다. 그동안 아밀로이드 베타 플라크가 치매의 원인이라는 가설은 치매 연구에 가장 큰 주목을 받았다.
1906년 독일의 정신과의사이며 신경해부학자인 알로이스 알츠하이머가 기억 상실, 인지장애와 치매 증상을 겪은 사망자를 부검하여 뇌에서 단백질 덩어리를 발견했다. 전체 치매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진 알츠하이머 병은 최초 발견자인 알츠하이머 박사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후 과학자들은 아밀로이드 베타라고 불리는 끈끈한 단백질이 뭉쳐서 플라크(plaque)를 만든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아밀로이드 베타 플라크가 염증을 유발하여 신경세포의 오작동을 유발하고 종국에는 신경세포를 죽여 치매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게 이제까지 가장 유력해 보이는 가설이었다. 하지만 지난 7월 21일 사이언스지에 실린 기사가 학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2006년에 발표되어 2,300회 이상 인용된 중요 연구논문이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소식이었다. 논문에 실린 이미지가 복사-붙여넣기 방식으로 조작된 걸로 보인다는 지적이었다. 해당 논문뿐만 아니라 후속 논문에서도 비슷하게 수상한 점이 보이고 조사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이어졌다.
아직 조사가 진행 중이며 결과를 기다려봐야 한다. 하지만 이번 의혹 제기에는 흥미로운 점이 많다. 2006년 논문이 실린 학술지는 <네이처>이다. 의혹 제기 기사는 <네이처>의 유력한 경쟁학술지 <사이언스>에 실렸다. 2006년 연구를 주도한 실뱅 레스네와 캐런 애쉬는 이후 명성을 얻으며 저명한 연구자의 반열에 이름을 올렸다. 이번 연구에 의혹을 제기한 미국 밴더빌트 대학의 매튜 슈레그 교수는 공매도 투자자의 변호인에게 의뢰를 받아서 레스네와 애쉬의 연구논문을 분석했다. 공매도 투자자 두 명도 저명한 신경과학자이다. 이들은 처음에 카사바 사이언스라는 미국의 바이오기업이 신약으로 개발 중인 시무필람(simufilam)이란 물질과 관련한 연구가 조작되었을 가능성을 의심하여 조사를 의뢰했다. 그런데 그걸 파헤치는 과정에서 16년 전 화제가 되었던 주요 연구논문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영화 한 편을 만들 수 있을 것만 같은 스토리이다.
학계에서는 자성하는 목소리가 크다. Aβ*56 (아밀로이드베타 스타 56 또는 에이베타 스타56으로 읽는다)라는 단백질이 알츠하이머 병의 원인이라는 논문 내용은 당시 아밀로이드 베타 가설이 흔들리고 있던 상황에서 가설을 옹호하는 쪽에 힘을 실어줬다. 이 연구논문이 아니어도 아밀로이드 베타 연구의 큰 축이 흔들리지 않았을 거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그건 모르는 일이다. 학계에는 “Publish or Perish”라는 말이 있다. 논문을 출판하거나 아니면 멸망하거나 둘 중의 하나라는 이야기다. (주요학술지에 논문을 출판하거나 아니면 망한다는 말이 더 정확하다며 자조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그렇지만 학술지에는 대중매체와 비슷한 속성이 있다. 실패한 연구결과는 관심 밖이고 그래서 잘 싣지 않는다. 과학자들도 사람이어서 저명한 연구자를 반박하기란 쉽지 않다. 레스네가 발견했다는 Aβ*56를 재현한 과학자는 없었다. 하지만 Aβ*56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연구논문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하버드 대학의 저명한 학자인 데니스 셀코의 2008년 논문 두 건이 고작이다.
과학자들도 사람이다. 잘못을 범할 수 있다. 물론 과학은 그런 오류를 걸러낸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곧 진실이 밝혀질 것이다. 하지만 <네이처> 같은 저명한 학술지에 실린 연구논문도 조작될 수 있다면 수많은 다른 학술지는 이런 조작에 얼마나 취약할 것이란 말인가. 다행히 요즘은 Pubpeer처럼 출판된 연구논문에 대해 토론하고 검토하여 의혹을 제기할 수 있는 사이트가 있다. 놀라운 발견과 스타연구자에게만 주목할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팩트체크를 하는 과학자들에게 더 많은 지원이 필요하다.
2022-08-25 21:52 |
[약사·약국] <114> 팍스로비드 리바운드 이야기
팍스로비드 리바운드가 화제로 떠올랐다. 지난 7월 30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코로나19에 다시 확진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부터다. 무증상이지만 검사 결과 코로나19 양성으로 나왔다는 것이다. 앞서 앤서니 파우치 미국 국립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장도 팍스로비드 치료를 받고 나서 재확진이 된 바 있다. 이번에 바이든 대통령까지 재확진되면서 팍스로비드 치료 효과에 대한 논쟁이 촉발됐다.
팍스로비드 치료를 받고 난 뒤에 재확진이 되었다고 해서 바이든이 다시 새로운 신종코로나바이러스 변이에 감염이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활동을 멈췄던 일부 바이러스가 다시 증식을 재개하면서 재확진되었다고 보는 게 맞다. 평생 바이러스 연구에 전념한 의사이며 바이러스 학자인 데이비드 호 박사는 자신이 코로나19에 걸린 것을 기회로 삼아 이를 조사했다. 팍스로비드 투약 기간 중에 바이러스 검사 결과가 어떻게 변하는지 매일 검사해본 것이다. 69세인 호 박사는 팍스로비드 처방 대상자였고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바로 다음날부터 팍스로비드 복용을 시작했다. 2일차에는 PCR 검사 결과 양성이 나타났지만 4일부터 9일까지는 신속항원검사 결과 음성이었고 5일차, 7일차 PCR 검사도 음성이었다. 그러다가 10일째 다시 가벼운 코로나19 증상(두통, 콧물, 기침)이 나타나고 집에서 신속항원검사로 양성이 나왔다. 이어진 PCR 검사로도 양성이었다. 하지만 유전자 시퀀싱으로 비교 결과 그가 새로운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은 아니었다. 바이러스가 변이하여 약에 저항성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낫고 나서 다른 변이바이러스에 감염된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가 된다. 이전 감염이 팍스로비드 투약으로도 완전히 낫지 않고 있다가 재발한 것으로 봐야 맞다는 것이다.
호 박사는 동료 과학자들과 함께 팍스로비드 리바운드를 더 자세히 들여다봤다. 자신을 포함해 10명의 리바운드 경험자를 대상으로 쓴 연구논문은 아직 프리프린트 단계로 공개된 상태이다. 제조사인 화이자에서는 이런 재발을 경험하는 사람이 전체 투여 환자의 1-2% 정도라고 하지만 실제 임상에서는 그보다는 훨씬 높게 나타난다고 보는 전문가 의견이 많다. 10-15%까지 달할 것으로 내다보기도 한다.
팍스로비드 리바운드는 왜 일어날까? 정확한 기전은 아직 모른다. 하지만 현재까지 나와있는 연구 자료를 보면 약효에 특별히 문제가 있다고 보이진 않는다. 일부 바이러스가 약으로 인해 증식하기 어려워진 상태에서 활동을 정지하고 있다가 약 복용을 중단하는 시점에 다시 활동을 재개하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이를 두고 팍스로비드 투여 기간을 늘려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하지만 검사결과가 다시 양성이 된다고 해서 증상이 심하거나 치명적인 것은 아니어서 치료기간은 그대로 5일을 유지해도 된다는 의견이 아직 대다수이다. 다만 검사에서 다시 양성이 나오는 사람은 바이든 대통령이 그랬던 것처럼 다시 자가격리를 해야 감염 확산을 막을 수 있다. 실제로 호 박사의 케이스 리포트에서도 재확진 기간 동안에 가족에게 바이러스가 옮은 사례가 두 명 있었다.
간혹 재확진이 된다고 하여 팍스로비드로 치료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중증으로 갈 가능성이 높은 고위험군이 백신에 접종하지 않은 상태로 코로나19에 감염될 경우 약물 치료는 입원 및 사망 위험을 크게 낮춘다. 반면에 건강하며 백신 접종을 마친 사람의 경우에 팍스로비드를 투여한다고 얻는 이득은 크지 않다.
과학은 진보한다. 과학에 근거를 두는 현대의학도 그와 함께 변한다. 코로나19의 예방과 치료에 대한 지식도 지난 2년 반 동안 크게 늘었다. 하지만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으면서 모든 사람의 건강을 위협하는 게 딱 하나 있으니 바로 돌팔이 유사의학이다. 1976년부터 2022년까지 무려 46년 동안 뉴욕타임스 건강 칼럼을 쓴 제인 E. 브로디는 독자에게 작별 인사하며 마지막 칼럼에서 이렇게 썼다. 머리에 새겨두고 싶은 명언이다.
2022-08-11 14:07 |
[약사·약국] <113> 왜 남자가 단명하는가
남자가 나이 들면서 잃어버리는 것은 머리털과 근육만이 아니다. Y염색체도 잃어버린다. 남성의 노화가 진행되면서 일부 체세포에서 Y염색체가 사라진다. 남성은 여성보다 기대수명이 짧다. 세계적으로 남성의 기대수명이 여성보다 5년 짧다. 한국인의 경우 2020년 남성의 기대수명은 80.5세로 남성의 86.5세에 비해 6년이 짧다. 이런 기대 수명의 차이는 흡연, 음주, 위험 추구 성향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행태 차이보다는 염색체가 더 큰 문제일 가능성이 크다. 과학자들은 남성의 노화과정에서 Y염색체가 사라지는 현상이 남성이 여성보다 단명하는 주요 원인이라고 추측한다.
Y염색체가 사라지는 현상은 1960년대에 처음 발견됐다. 인간의 혈중 백혈구 수를 측정하는 과정에서 일부 백혈구에 Y염색체가 없다는 사실을 관찰한 것이다. 원래 사람의 체세포에는 염색체가 23쌍으로 모두 46개 들어있다. 이 중 성염색체는 여성의 경우 XX, 남성의 경우 XY로 들어있다. 그런데 일부 남성의 백혈구에서는 Y염색체가 사라지고 없어서 염색체가 45개만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적혈구, 혈소판에는 핵이 없으며 따라서 염색체도 없다. 미토콘드리아에만 염색체가 관찰된다.) 이런 현상은 모든 체세포에서 일어날 수 있지만 백혈구를 검사하면 확인이 제일 쉽다. 2019년 영국 연구 결과, 70세가 되면 남성의 43.6%에서 일부 혈액세포 중 Y염색체가 사라지는 걸 볼 수 있다. 93세가 되면 남성의 57%에서 Y염색체가 사라진 혈액세포가 관찰된다. 일부 노인 남성의 경우 세포의 80%에서 Y염색체가 사라진다. 비유하자면 세포가 분열하는 과정에서 유전자 책들을 복사하는데 Y염색체 책은 빼놓고 하는 일이 벌어지는 거다.
Y염색체가 사라지는 것과 남성의 노화가 관련되었을 것으로 보는 연구는 전에도 많았다. 2020년 호주 연구팀은 229종의 생물을 대상으로 성 염색체를 조사하여 수컷보다 암컷이 평균적으로 17.6% 더 오래 산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하지만 2022년 7월 14일 사이언스지에 실린 연구는 남성이 Y 염색체를 가지고 있는 게 문제가 아니라 잃어버리는 게 문제일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연구팀은 생쥐의 유전자를 조작하여 골수세포에서 Y염색체를 제거했다. 실험군 생쥐 38마리에게는 골수를 제거한 뒤 Y염색체를 제거한 골수세포를 이식했고 대조군 생쥐 37마리에게는 Y염색체가 그대로 들어있는 골수세포를 이식했다. (백혈구는 골수에서 만들어진다.) Y염색체가 사라진 골수세포를 이식한 생쥐의 백혈구 모두에게서 Y염색체가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대다수에서 사라졌다. 백혈구 세포 중에 Y염색체가 안 보이는 것들이 49~81%였다. 인간 남성이 노화할 때 나타나는 현상을 생쥐 실험을 통해 시뮬레이션으로 확인해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실험 결과 백혈구에서 Y염색체가 사라진 생쥐는 단명했다. 골수 이식 600일 뒤에 대조군 생쥐의 60%가 살아남았지만 Y염색체가 일부 사라진 생쥐 쪽은 겨우 40%만 생존했다. 심장 근육의 수축력에서도 차이가 컸다. 15개월 뒤에 심근 수축력을 비교해보니 Y염색체가 소실된 생쥐의 경우 20% 가량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더해 심장근육에 질긴 결합조직이 쌓이는 섬유화증이 Y염색체를 소실한 생쥐에 나타나기도 했다. 흥미롭게도 2009년 영국 연구에서 인간 남성의 경우 나이 들면서 심장의 펌프 기능이 젊었을 때보다 20-25% 줄어들지만 여성의 경우에는 70대에도 별 차이가 없었다. 이번 동물 실험 결과를 통해 유추해본다면 인간 남성의 심장이 노화에 더 민감한 것도 Y염색체 소실 때문일지 모른다.
Y염색체 소실 때문에 암, 심장병, 사망률이 증가하는 것인가 아직 확실치는 않다. 이번 실험에서도 Y염색체를 소실한 생쥐의 심장에 나타난 변화가 치명적인 정도는 아니었다는 반론이 있다. 더 장기적인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 하지만 Y염색체 소실이 남성의 건강에 좋을 것 같지는 않다. 남성의 Y염색체 소실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현재까지 확실히 밝혀진 것은 딱 하나 금연뿐이다. 흡연하면 Y염색체가 사라진 혈액세포가 나타날 가능성이 비흡연자보다 최대 네 배 크다. 금연하자.
2022-07-27 21:21 |
[약사·약국] <112>자외선차단제 이야기
오늘 날이 흐리다. 바깥에 나가는데 자외선 차단제를 발라야 할까. 오늘의 자외선 지수를 검색하면 내가 있는 지역의 자외선 지수를 확인할 수 있다. 여름에는 자외선 지수가 매우 높음 또는 위험인 날이 많다. 날씨가 흐린 날은 보통 단계로 낮아지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자외선 차단에 유의해야 한다. 2-3시간 노출 시 피부화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구름은 자외선을 모두 막아내진 못한다. 자동차 유리창은 UVB는 차단할 수 있지만 UVA는 투과시킨다. UVA는 피부노화의 주범이다. 28년 동안 트럭을 몬 운전사의 한쪽 뺨이 두껍고 주름지도록 변한 것도 그 때문이다. 2012년 4월 뉴잉글랜드 의학저널에 이 분 사진이 실린 이후 이 트럭 운전사는 여름이면 매년 호출된다.
옷도 마찬가지다. 옷으로 가려주는 게 햇볕 노출보다는 낫다. 긴 소매 옷을 입는 게 자외선 차단에 좋은 이유다. 하지만 옷으로 자외선을 모두 차단할 수는 없다. 옷감에 따라 자외선을 흡수, 차단하는 정도가 다르다. 2010년 메모리얼 슬론 케터링 암센터 리뷰 논문에 의하면 폴리에스터나 울이 면, 아마실, 레이온보다 자외선 흡수력이 더 좋다. 하지만 여름에 폴리에스터나 울로 만든 옷을 입으면 열이 잘 방출되지 않아서 더울 수 있다. 연구진은 폴리에스터를 다른 섬유와 혼방하면 그런 단점을 보완하면서 자외선 차단 효과도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 설명한다.
삼베, 모시, 성긴 면으로 만든 옷은 공기가 잘 통하여 시원한 느낌을 주지만 동시에 햇빛도 더 잘 통과시킨다. 자외선 차단이 더 잘되는 촘촘하게 짜인 원단으로 만든 얇은 옷을 안에 하나 더 입으면 도움이 된다. 흰옷이 자외선을 반사하니까 좋을 거라고? 그렇지 않다. 색이 진한 파랑, 검정색 옷이 자외선 흡수를 더 잘하여 차단 효과가 크다. 대신 적외선도 잘 흡수하니까 더 덥게 느껴진다는 문제가 있다. 같은 맥락에서 원단이 두꺼우면 얇은 옷보다 자외선 차단이 잘 되지만 더위를 이겨내기 힘들다. 여러 번 세탁한 옷은 탈색으로 자외선 흡수가 덜 될 수 있지만 대신 옷이 줄어들면서 섬유가 더 촘촘하게 되어 자외선 차단이 나을 수도 있다. 세제 속에 들어있는 형광 증백제 성분도 자외선을 흡수하여 차단에 도움이 된다. 옷이 물에 젖으면 옷감이 빛을 산란시키지 못하여 자외선 차단 효과가 떨어진다. 물놀이할 때 티셔츠를 입어도 일광화상을 막을 수 없는 이유다.
옷은 입으면 즉시, 그리고 입고 있는 동안 자외선을 차단해주며 UVA, UVB를 모두 차단해주는 면에서도 장점이 있다. 모자도 그렇다. 하지만 자외선 차단제는 외출 30분 전에 발라줘야 하고 2시간마다 다시 발라줘야 한다. 제품에 따라 UVB는 차단효과가 좋은데 UVA 차단은 약한 경우도 있어서 선택에 주의가 필요하다. UVB는 SPF(Sun Protection Factor) 수치가 높을수록, UVA는 PA(Protection grade of UVA) 다음에 +가 여러 개 붙을수록 차단율이 더 좋다. 전에는 SPF를 시간으로 환산하여 1시간에 일광화상을 입는 사람이라면 SPF15인 제품으로 15시간 동안 화상 없이 햇볕에 머물 수 있다는 식으로 설명했다. 하지만 미국 FDA(식품의약국)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햇빛 에너지 자체가 시간별로 다르다. 오전9시에 1시간 햇볕 노출로 받는 에너지의 양은 오후1시로 치면 15분에 불과하다. 자외선 차단제로 사용되는 화학물질은 자외선을 흡수하여 열에너지로 방출한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자외선 차단제 자체의 효과도 떨어질 수 있다. 흔히 물리적 자외선 차단제로 불리는 미네랄(징크 옥사이드, 티타늄 디옥사이드) 함유 제품은 주로 빛을 산란, 반사하는 식으로 자외선을 차단하므로 효과가 좀 더 오래갈 수 있다. 하지만 야외 활동을 하면서 땀이 나거나 물에 씻겨서 자외선 차단제가 벗겨지면 효과가 줄어드는 것은 마찬가지다. 실내나 그늘에 주로 머문다면 서너 시간마다 한 번씩 덧발라줘도 무방하다. 하지만 수영하고 나서 또는 땀을 많이 흘린 뒤에는 즉시 다시 발라야 할 수도 있다. 대개 자외선 차단제를 바르고 나서는 피부에 흡수될 때까지 시간이 필요하므로 외출 15-30분 전에 미리 바르는 게 좋다. 참고로 미네랄 성분 자외선 차단제는 바르자마자 효과를 낼 수 있다. 피부노화, 피부암 예방을 위해 자외선 차단제는 부지런히 바르도록 하자.
2022-07-13 11:38 |
[약사·약국] <111> 생선 피부암 뉴스의 진실
어제는 좋다고 하더니 오늘은 나쁘다는 건가? 이런 의문을 갖게 하는 식품 뉴스가 또 나왔다. 이번에는 생선이야기다. 생선을 많이 먹을수록 피부암 발병 위험이 증가한다는 미국 브라운 대학 연구 결과다. 미국에서 50~71세 성인 491,367명의 식습관과 건강에 대한 15년 동안의 자료를 분석했더니 이런 상관관계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생선을 제일 많이 먹는 사람은 하루 평균 43g (1주일에 2번 생선 140~150g을 먹는 사람)을 섭취했는데 생선을 거의 안 먹는 사람(하루 3.2g)보다 피부암의 하나인 악성 흑색종이 생길 위험이 22% 높았다.
왜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일까? 연구를 주도한 브라운대 의대 피부과 조은영 교수의 추측에 따르면 생선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생선 속에 들어있는 오염물질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수은, 비소와 같은 중금속이 발암 위험을 높일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볼 점이 있다.
연구자들은 생선을 많이 먹는 사람의 체내에 실제로 중금속 수치가 더 높은지 확인하지 못했다. 그냥 추측에 불과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연구는 연구자들이 직접 참가자를 추적 관찰하는 방식으로 진행된 게 아니다. 기존에 미국인 50만 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NIH-AARP Diet and Health)에서 나온 자료를 이용하여 분석해본 것이다. 이런 연구는 설문지를 통해 참가자들이 무엇을 먹었는지 답하는 방식이다. 어제 뭐 먹었는지도 전부 기억이 나지 않으니 신뢰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지난 1년 동안 특정 식품을 얼마나 자주 먹었는지 물어보는데 정확히 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작년 한 해 동안 1주일에 감자샐러드를 몇 번 먹었는지 나는 도무지 알 수 없다. 하지만 2007년 연구 결과 1년 동안 식습관에 대한 응답은 24시간 동안 뭘 먹었는지 물었을 때 얻는 대답과 비교하여 신뢰성이 크게 떨어지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주 정확하진 않지만 대강의 추정은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이번 연구 결과 때문에 굳이 생선을 적게 먹으려고 할 필요는 없다. 연구자 조은영 교수는 뉴욕타임즈와 인터뷰에서 그렇게 말했다. 실제로 많은 전문가들과 관련 학회에서도 생선 섭취를 권장한다. 미국 암협회는 적색육보다 생선을 먹으라고 권한다. 미국 심장협회는 심장 건강을 위해 일주일에 2번 생선을 먹도록 권한다. 대한민국 식약처에서도 단백질과 오메가-3 지방산이 풍부한 식품으로 생선 섭취를 권장한다.
이번 연구는 관찰연구이다. 관찰연구로는 특정 식품 섭취가 암 유발 위험을 증가시키는 인과관계를 알아내기 어렵다. 영화 '올드보이'에서 오대수는 군만두만 15년을 먹었지만 실생활에서 그런 사람은 드물다. '올드보이' 방식으로 사람의 식습관을 연구할 수는 없다. 성인 50만 명이 24시간 내내 무엇을 먹는지 관찰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그 정도로 많은 참가자를 실제로 대면 인터뷰하기도 힘들다. 우편으로 설문지를 보내서 50만 명의 연구 자료를 모은 것도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관련한 모든 질문을 넣을 수도 없었다. 피부암을 유발하는 가장 큰 요인은 햇볕 노출이다. 일광화상을 자주 입을수록 피부암 위험이 증가한다. 피부암 위험을 줄이는 제일 좋은 방법은 생선을 적게 먹는 게 아니라 과도한 햇볕 노출을 줄이는 것이다. 하지만 설문지에는 햇볕 노출과 관련 질문이 없었다. 생선을 자주 먹는 사람이 햇볕 노출이 많은 생활 습관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쉽게 말해 이 연구 결과에서 나타난 상관성이 다른 요인 때문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이면 22%라는 수치가 상대 위험이라는 사실도 고려해야 한다. 이번 연구 참가자들에게 평생 동안 악성 흑색종 발생 위험은 약 1~2%로 추정됐다. 그렇다면 22%의 위험 증가는 실제로 절대위험은 0.2~0.4%가 증가한 1.2~2.4%에 불과하다는 의미가 된다. 만약 생선 섭취가 정말 피부암 발생 위험을 증가시킬 수 있다고 치더라도 그 영향은 미미한 수준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위험 증가에 대한 인과성이 증명된 것도 아니지만 생선 섭취로 인한 다른 건강상 유익을 생각하면 무시해도 좋을 정도의 크기이다. 뉴스에 너무 놀라지 말자. 골고루 균형 잡힌 식단이면 충분하다.
2022-06-22 12:13 |
[약사·약국] <110> 다이어트 신약이야기
엄청난 다이어트 신약이 곧 세상에 나올 것 같다. 제약회사가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과체중이나 비만인 사람이 이 약을 72주 사용하면 체중이 22.5%(24kg)까지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에 위약(플라세보)을 준 그룹에서 체중 감소는 2.4%에 불과했다.
아직 학술지에 실린 연구 결과는 아니다. 개발사인 일라이 릴리가 신약 티제파티드(tirzepatide)의 임상 3상 연구결과를 발표했을 뿐이다. 하지만 22.5%라는 수치는 기대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2021년에 또 다른 다이어트 신약 세마글루티드가 참가자 체중을 15%까지 감소시킨다는 연구논문이 뉴잉글랜드의학저널(NEJM)에 실려 화제가 되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더 놀랍다. (세마글루티드 임상시험에서도 위약군의 체중 감소는 2.4%로 나타났다.) 아직 둘을 일대일로 비교한 임상연구 결과는 없지만 일단 체중 감소만을 놓고 보면 티제파티드의 감량 효과가 더 큰 것으로 보인다. 다만 부작용 면에서는 세마글루티드가 나을 수도 있다. 당뇨 치료약으로 둘을 비교한 임상시험(SURPASS-2)에서 부작용으로 인해 약 사용을 중단한 참가자 비율이 티제파티드 그룹(6.0~8.5%)에서 세마글루티드(4.1%)보다 더 높게 나타났다. 두 약 모두 구역, 구토, 설사와 같은 위장관계 부작용이 가장 흔했다. 부작용이 전혀 없는 약은 아니지만(그런 약은 없다) 그래도 기존의 펜터민과 같은 중추신경 흥분제에 비하면 훨씬 나은 다이어트 약이다.
신약이 개발되는 것 자체도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그 기틀이 되는 과학 지식이 축적되는 데는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 티제파티드는 인체에서 만들어내는 호르몬인 인크레틴(incretin)을 본떠 만든 약이다. 인크레틴은 호르몬이 과학으로 입지를 굳히기 시작한 1930년대에 만들어진 용어다. 1932년 벨기에의 생리학자 장 라 바래(Jean La Barre)는 장에서 분비되어 인슐린, 글루카곤과 같은 췌장 호르몬의 분비를 자극하는 호르몬이 있을 거로 추측하며 여기에 인크레틴이란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실제로 인크레틴이 존재하는지 입증하기는 당시 기술로는 쉽지 않았다. 콜레시스토키닌(CCK)을 발견한 당대의 생리학자이며 의사 앤드류 아이비(Andrew Ivy)가 인크레틴이 존재할 가능성이 낮다고 단언하면서 1940년대부터 20여 년 동안 인크레틴에 대한 연구는 거의 중단되다시피 했다.
그러다가 1960년대에 와서 로절린 얠로와 솔로몬 버스의 획기적 기술을 개발한다. 방사면역측정법(RIA)으로 인체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을 측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호르몬 연구는 엄청난 발전을 이루게 된다. 때맞춰 인크레틴도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포도당을 먹었을 때 주사로 정맥에 주입했을 때보다 인슐린이 더 많이 분비된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먹었을 때 장에서 인크레틴이 분비되어 췌장이 인슐린을 더 많이 내놓도록 자극하기 때문이라는 게 과학자들의 추측이었다. 이어 1970년대 초에 GIP가 발견되고 1980년대 중반에는 GLP-1(glucagon-like peptide-1)이라는 또 다른 인크레틴이 발견되었다.
GLP-1과 GIP는 모두 짧은 동안만 존재했다가 금방 사라지는 호르몬이다. GLP-1의 반감기는 약 5분, GIP는 약 2분이다. 짧은 시간 동안만 작동하기 때문에 이들 인크레틴을 약으로 쓰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들 호르몬의 모양과 유사한 분자를 만들고 효소(DPP-4)에 의해 분해되는 것을 막는 구조로 하면 약효를 길게 할 수 있다. 효소의 활동을 막아 인체가 만드는 GLP-1, GIP가 분해되는 것을 늦추는 약이 글립틴이라고 불리는 약이다. GLP-1 유사체로 만들어진 약이 세마글루티드와 같은 약이다. GIP 유사체는 약으로 만들어도 효과가 시원찮다는 게 이제까지의 중론이었다. 그런데 GIP와 GLP-1의 양쪽 모두와 비슷하게 만든 이중 작용제의 경우 GLP-1 작용제보다 효과가 더 좋다는 게 티제파티드라는 신약의 개발 과정에서 알려진 것이다. 길고 복잡하지만 흥미로운 이야기다. 신약 하나가 세상에 나오기까지는 이렇게 오랜 과학자들의 발견과 지식의 축적이 필요하다.
2022-06-08 21:56 |
[약사·약국] <109> 염증과 통증 약이야기
만성 염증은 만성 통증을 부른다. 운동하다가 다쳐서 염증이 생긴다면 염증을 완화하기 위해 소염진통제를 쓰는 게 낫다는 게 이제까지 전문가들의 공통적 견해였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의견을 제시한 연구자들이 있다. 지난 5월 11일 자로 학술지 사이언스 중개의학에 실린 연구 결과이다. 급성 통증이 있을 때 이전에 생각한 것과 달리 소염진통제보다 해열진통제가 나을 수도 있단 얘기다.
급성 염증이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염증이 있을 때 아프다고 얼른 소염진통제를 사용하면 그게 인체의 자연스러운 회복을 막아서 도리어 더 오래 아프게 된다는 연구 결과이다. 이런 연구가 가능하게 된 것은 RNA 시퀀싱 비용이 전보다 저렴해져서 세포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더 잘 알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연구진은 이탈리아에서 급성 요통 환자 98명의 혈액을 채취하고 이들 환자를 3개월 동안 추적 관찰했다. 이들 중 절반은 회복하면서 통증이 사라졌고 절반은 두 번째 방문 시에도 통증이 계속됐다.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났는지 보기 위해 연구진은 RNA 시퀀싱 기술을 이용해 면역 세포 속에서 어떤 RNA가 만들어졌는지 조사했다. 세포 속 유전 정보는 DNA로 들어있지만 이걸 꺼내쓸 때는 RNA로 전사된다. 따라서 어떤 RNA가 만들어졌는지 보면 세포 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추론할 수 있다. 이렇게 RNA를 분석해본 결과 통증이 만성화한 요통환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 차이가 있었다. 면역세포 속에서 염증과 관련한 유전자가 활성화한 환자의 경우 만성 통증이 없었다. 반대로 면역세포 속에서 아무 일이 없었던 환자의 경우 만성 통증이 나타났다.
보통 아프면 소염진통제나 스테로이드를 써서 염증을 치료한다. 불을 얼른 꺼서 만성 통증으로 발전하는 걸 막으려는 의도이다. 그런데 이번 연구 결과는 정반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단기간 염증이 굵고 짧게 나타난 사람이 예상과 반대로 회복이 좋다는 거다. 반면에 그런 염증 반응이 없었던 사람이 오히려 더 만성 통증으로 갈 가능성이 높다. 사실 연구진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과여서 이번에는 동물 실험을 진행했다. 실험동물로 생쥐의 좌골신경을 손상시켜서 통증, 염증을 유발하고 한쪽은 염증을 줄여주는 코르티코스테로이드 덱사메타손을 투여하고 다른 집단에는 소금물을 주사했다. 처음에는 항염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은 쪽 생쥐가 통증 증상이 더 적게 나타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관찰한 결과 항염 주사를 맞은 쪽 생쥐가 회복이 더뎠다. 소금물만 주사한 쪽 생쥐의 경우 이삼 주 만에 통증이 사라졌지만 항염 주사를 맞은 쪽은 통증이 낫는 데 150일까지 걸렸다. 정말 염증을 낮춘 게 문제였나 확인하기 위해 염증은 낮추지 않고 통증만 완화하는 진통제(가바펜틴, 모르핀, 국소 리도카인)를 쓴 경우와 소염진통제(디클로페낙)을 쓴 경우도 비교했다. 이 경우도 마찬가지로 소염진통제를 투여한 실험동물만 만성 통증으로 진행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서 잠깐, 위의 연구 결과가 실린 중개의학이 뭔지 살펴보자. 중개의학은 실험실에서 주로 진행되는 기초과학을 실제 환자를 돌보는 임상에 적용할 수 있도록 다리를 이어주는 학문이다. 동물실험으로 기전을 추론하는 것뿐만 아니라 실제 환자에게 같은 현상이 나타나는지도 살핀다. 그러니 연구진이 영국의 급성 요통 환자 2,163명의 자료까지 들여다본 것도 이해할 만하다. 이들 중에 461명의 급성 요통은 만성 통증으로 진행했다.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 소염진통제(NSAID)를 복용한 사람은 다른 약 또는 약을 먹지 않은 사람에 비해 만성 통증으로 진행할 확률이 거의 두 배 더 높았다. 이런 비교만으로 인과 관계를 알 수는 없지만 다른 두 연구 결과를 함께 고려하여 추론하면 비슷한 결론을 얻을 수 있다. 갑자기 요통이 올 때는 소염진통제보다 해열진통제가 통증의 만성화를 피하는 데 더 나은 선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운동 뒤에 염증으로 아픈 건 정상적 회복 과정이며 이런 염증을 가라앉히면 오히려 통증이 더 오래갈 수 있다는 게 연구자들의 추측이다. 물론 이 연구 결과만으로는 부족하다. 더 많은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 심한 급성 통증이 있을 때는 병원에 방문하여 정확한 진단부터 받아야 한다. 하지만 염증의 역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하는 연구 결과다.
2022-05-25 20:20 |
[약사·약국] <108> 성욕저하장애약 이야기
세상은 복잡하다. 우울증은 성욕을 저하시킬 수 있다. 항우울제를 복용해서 우울증 증상이 나아지면 저하됐던 성욕도 다시 정상 수준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반대로 항우울제의 부작용으로 성욕 저하 장애를 경험할 수도 있다. 특히 SSRI 계열 약에서 잘 나타나는 부작용이다. 이들 약물은 세로토닌의 재흡수를 막아서 그 작용을 강화한다. 세로토닌은 흔히 행복 호르몬으로 알려져 있는 물질이지만 성기능 장애와도 관련된다. 테스토스테론, 도파민은 성욕 증가, 세로토닌은 성욕 감퇴와 연관된다. 세로토닌 수치가 높아지면 반대로 테스토스테론과 도파민 수치가 낮아질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되면 성욕 감퇴와 같은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항우울제의 부작용으로 인해 성기능 장애가 의심될 때는 우선 약을 처방한 의사와 상담해봐야 한다. 부프로피온, 미르타자핀 또는 SNRI와 같은 다른 계열의 약으로 바꾸면 부작용이 줄어들 수 있다. 이들 약물은 세로토닌 외에도 도파민, 노르에피네프린 같은 다른 신경전달물질에도 영향을 주므로 성기능 장애 위험이 더 낮게 나타난다.
여성 남성이든 여성이든 나이가 들면서 성호르몬이 감소하므로 성욕이 줄어들 수 있다. 하지만 일부 여성은 여성호르몬이 정상치인데도 성욕 저하로 인해 고통받는 경우가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우울증이나 다른 만성질환, 약 부작용으로 인해 이런 증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 원인이 있을 경우에는 원인을 먼저 치료해야 한다. 하지만 원인을 알 수 없는 성욕저하장애도 있다. 18~44세 여성의 8.9%, 45~64세 여성의 12.3%, 65세 이상 여성의 7.4%가 성욕저하장애를 경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9년 6월 미 식품의약국(FDA)는 새로운 성욕저하장애 치료제를 승인했다. 성분명이 브레멜라노타이드(Bremelanotide)이다. 어려운 이름이다. 상품명은 조금 낫다. ‘경유하여, 통하여’라는 뜻의 via와 ‘쉬운, 편안한’을 뜻하는 easy를 합하여 만든 바이리시(Vyleesi)이다. 약을 통해서 성욕저하장애로 인한 고통을 덜 수 있다는 제조사의 메시지를 담은 작명이다.
바이리시는 미국에서 두 번째로 출시된 성욕저하장애 치료제다. 첫 번째로 출시된 약 플리반세린은 애디(Addyi)라는 상품명으로 미국에서 2015년 출시됐지만 국내에는 출시되지 않았다. 플리반세린은 원래 우울증 치료제로 개발되었지만 성욕저하장애 치료제로 용도가 바뀌었다. 이 약이 세로토닌에 미치는 영향이 기존의 항우울제와는 반대로 성욕을 증가시키는 쪽이라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효과가 느리게 나타난다. 복용 4주가 되어야 효과가 나기 시작해서 최대 효과를 얻기까지 8-12주가 걸린다. 알코올과 상호작용도 있다. 술을 마시고 2시간 내에 애디(플리반세린)를 복용하면 저혈압, 실신 부작용 위험이 있다. 이에 반해 바이리시는 알코올과 상호작용이 없고 성관계 45분 전에 투여하면 효과를 낸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먹는 약은 아니다. 일회용 펜 타입의 피하 주사 형태로 의사의 처방을 받아 사용할 수 있다. 국내에서도 임상시험이 진행 중이어서 곧 출시가 예상된다. 플리반세린의 효과를 두고 논란이 있었던 데 반해 브레멜라노타이드는 효과가 나은 편이다. 24주 동안 1,247명을 대상으로 한 임상시험 결과 성욕이 증가한 사람이 약 투여군에서 51%로 위약(플라시보)의 21%보다 높게 나타났고 만족도 또한 57%로 위약(26%)보다 높았다. 다만 한 달에 만족을 주는 성관계 회수(SSE)에는 차이가 없었다.
바이리시(브레멜라노타이드)는 멜라노코르틴이라는 호르몬을 흉내 낸 약이다. 이들 호르몬이 작용하는 수용체에 작용하여 약효를 내는 것으로 추측하지만 정확한 기전은 아직 모른다. 여성의 성욕저하장애 치료에 사용이 승인되었지만 남성에게도 효과를 보인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하지만 이 약을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부작용으로 오심, 구토, 고혈압이 생길 수 있다. 얼굴이 빨개지거나 코막힘, 기침을 경험할 수도 있다. 제일 큰 문제로 피부색이 햇빛에 탄 것처럼 어두워질 수 있다. 멜라노코르틴이 자외선에 노출될 때 멜라닌 세포를 자극하는 호르몬이란 사실을 생각하면 충분히 생길 수 있는 부작용이다. 이런 피부 색소침착 부작용은 피부색이 원래 짙은 사람의 경우에 생기기 더 쉽고 약을 매일 사용하면 위험이 더 크다. 게다가 약 사용을 중지하고 나서도 색소침착이 사라지지 않을 수 있다. 약도, 그 약이 작용하는 인체도 전혀 단순하지 않다. 약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함부로 쓰지 말자.
2022-05-12 00:20 |
[약사·약국] <107> 치매약 이야기
아직 치매를 완치할 수 있는 약은 없다. 하지만 치매의 약물 치료는 빨리 시작할수록 효과가 좋다. 치매는 뇌의 신경세포가 손상되거나 죽어서 뇌 기능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뇌 신경세포가 죽고 나면 약으로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아직까지 치매약이 할 수 있는 일은 살아남은 뇌 세포가 기능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정도이다. 약물 치료가 너무 늦어져 이미 너무 많은 뇌 세포가 손상되면 약을 써도 잘 반응하지 않고 진행을 늦추기 어렵다. 영국에서 2014년 발표된 종합 분석 연구에 따르면 약물치료를 1년을 늦출 때마다 그로 인한 유익이 17% 감소한다.
보건복지부 자료에 따르면 조기 발견하여 조기 치료를 시작할 경우, 치매 환자의 가족은 향후 8년간 약 7,800시간의 여가시간을 더 누릴 수 있고 6,400만원의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 게다가 치매 초기단계부터 조기 치료하면 5년 후 요양시설 입소율이 55% 감소한다. 치매 발병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약물치료를 꾸준히 한 사람의 90%는 5년 후에도 일상생활에 별 지장이 없었던 반면 치료를 포기한 사람은 10명 중 6명이 요양 시설에 들어가야 할 정도로 치매 증상이 심해졌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치매 환자의 뇌에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 이해하면 치매 약의 작동원리도 이해하기 쉽다. 치매 환자는 뇌 신경세포가 파괴되면서 기억과 학습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메신저와 같은 신경전달물질인 아세틸콜린이 줄어든다. 신경세포 간 메시지가 제대로 전달이 안 되니까 마치 통신망이 두절된 것처럼 뇌에서 문제가 생긴다. 치매 치료에 대표적으로 사용되는 약은 아세틸콜린이 조금 더 오래 작용할 수 있도록 돕는다. 적게 만들어지니까 버리지 않고 아껴 쓰는 방식으로 인지기능이 유지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런 약을 써도 병의 진행을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인지기능이 저하되는 경과를 6개월에서 2년 이상 늦출 수 있다.
아세틸콜린 효소 분해를 억제하는 약은 오심, 구토, 설사, 두통 등의 부작용이 흔하게 나타난다. 이런 부작용은 다행히 시간이 지나면 줄어들고 낮은 용량에서부터 조금씩 약을 늘리는 방법으로도 피할 수 있다. 약을 식후에 복용하는 게 빈속에 복용할 때보다 위장관 부작용이 덜하다. 하지만 3-4주가 지났는데도 오심, 구토가 계속되면 의사와 상담해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비슷한 계열이지만 다른 약으로 바꾸거나 또는 붙이는 패치와 같은 다른 제형으로 바꿔볼 수 있다.
뇌에서 글루타메이트(glutamate)라는 신경전달물질이 과도하게 활성화되면 인지기능이 저하될 수 있다. MSG를 많이 먹으면 뇌에서 흥분독소로 작용한다는 설은 여기서 나온 말이지만 틀린 이야기다. 글루타메이트는 고농도에서도 뇌-혈관 장벽을 거의 통과할 수 없다. 뇌 속에서 만들어지는 글루타메이트가 문제다. 메만틴이라는 약물은 글루타메이트와 결합하는 NMDA 수용체를 차단하여 치매 환자의 인지기능 향상에 도움을 준다.
감기약, 요실금이나 배뇨장애를 치료하는 항콜린제는 치매 환자에게는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들 약은 치매 증상을 완화하는 약과는 반대로 인지기능을 떨어뜨리는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뇌에서 아세틸콜린의 작용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 치매를 직접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진 약은 없지만 신경안정제를 오래 복용하면 치매 위험이 커진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위산 분비를 억제하는 약(PPI)의 경우도 장기 복용 시 비타민B12 부족으로 치매 위험이 높아지지 않을까 우려하는 전문가들이 있다. 꼭 치매가 아니더라도 노년층이 이들 약물을 장기 복용하는 경우에 위험과 약물 치료의 유익 중 어느 쪽이 더 큰가에 대해서는 충분한 검토가 필요하다.
아직 치매의 진행을 늦추거나 치매의 원인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은 없다. 알츠하이머병의 원인이 무엇인지 더 확실히 알게 되고 병의 진행을 근본적으로 치유하는 약이 개발되기까지는 아마 시간이 오래 걸릴 듯하다. 아쉽지만 지금 있는 약으로 제때 치료하고 관리하는 방법을 알아 두는 게 현실적으로 제일 나은 방법이다.
2022-04-27 2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