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255> 바로 다툴 준비를 하고 사시나요?
십여 년 전 모 지방 큰 도시에 갔을 때 택시 정거장 부근에서 본 장면이다. 두 대의 택시가 서 있었는데, 뒤에 선 택시가 앞 차에게 경적을 울렸다. 내 차 좀 나가게 앞으로 차를 좀 빼달라는 의미 같았다. 그러나 앞 차는 꿈적도 하지 않았다.
아마 ‘네가 후진 했다가 돌아 나가면 되는데 왜 나보고 비키라느냐’ 반발하는 것 같았다. 화가 난 뒷 차는 수 차례 반복해서 경적을 울려댔다. 잠시 후 앞 뒤 차의 문이 열리더니 두 차의 운전자가 내렸다. 그러더니 두 사람은 거두절미(去頭截尾) 하고 바로 서로 치고 받기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와! 나는 두 사람의 성격 급함에 기가 질려버렸다.
얼마 후 다른 지방 큰 도시에 갔을 때의 일이다. 택시를 탔는데 얼마나 운전이 난폭 하던지 택시 뒷좌석 창문 위에 달린 손잡이에 결사적으로 매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 기사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얼마 전 약국에 감기약을 사러 갔는데 약사가 몇 가지 불필요(?)한 약의 구입을 권유하기에 화가 나서 바로 약사의 멱살을 잡고 끌고 나와 차도에 팽개쳤다고 한다. 마치 자기 자랑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와! 이 동네 사람들 성질 한번 대단하구나. 내가 만약 여기 와서 약국을 열었다면 그런 꼴을 당할 뻔 했구나’ 하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사람들은 잘도 다툰다. 별 일도 아닌 것에 용케도 싸움을 한다. 물론 살기가 각박해진 데에 첫 번째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같이 체격이 왜소한 사람은 싸우고 남을 만큼 억울한 일을 당해도 아무 말 못하고 속으로만 삭이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나는 평생 남에게 싸움을 걸지 못하는 체질이 되어 버렸다.
약 40년전 낙성대 근처에 살 때, 두 옆집 사람이 후딱 하면 싸우길래 하루는 어떡하면 저렇게 잘 싸울 수 있나 한 수 배울 참으로 아내와 함께 유심히 관찰하였다. 들어 보니 우리 같으면 도저히 싸울 깜도 되지 않는 걸 가지고 용케도 잘 싸우고 있었다. 그 때 깨달았다. 우리는 싸움 체질이 못 된다는 것을. 그 때부터 싸움하는 법 배우기를 아예 포기하였다.
서울 모처에 있는 처가에 갔을 때의 일이다. 부득이 주택가 어느 집 앞에 잠시 주차를 하려 드는데 어떤 젊은이가 나오더니 눈을 부라리며 화를 내는 것이었다. 남의 집 앞에 차를 새우면 자기 차가 어떻게 나가느냐는 것이었다. 잘하면 사람을 칠 기세이었다.
물론 내가 잘못을 하긴 했지만 그토록 난폭하게 나올 일까지는 아니었다. 체격이 왜소한 나는 그 젊은이에게 그저 미안하다고 굽실거리며 얼른 차를 빼는 것이 고작이었다.
한번은 남부순환도로에서 까치고개를 넘어 사당역 쪽으로 차를 운전해 내려가는데, 갑자기 차도(車道) 한 선이 밀리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내다 보니 젊은 남자가 늙수그레한 남자 한 명의 멱살을 잡고 봉고 차 옆면에 짓누르고 있었다.
그러면서 젊은이는 “그래 나 몇 살 안 먹었다. 어쩔래 이 XX야” 하며 소리를 질렀다. 순간 나는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십중팔구 두 사람은 운전 중 누군가 때문에 언쟁을 하게 되었다. 차를 세우고 서로 당신이 잘못한 거라고 다투다가, 바락바락 덤비는 젊은이에게 ‘너 몇 살이냐? 어딜 어른한테 그 따위로 덤비느냐?’고 연장자가 야단을 쳤을지 모른다.
이 말이 젊은이의 화를 돋구었는지 결과적으로 백주 대로(白晝大路)에서 젊은이에게 목을 졸리는 망신을 당하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을 본 이후 나는 ‘나이를 먹을수록 비굴하게 사는 게 인생의 지혜’라는 평소의 신념을 더욱 공고히 하게 되었다.
뉴스는 매일 같이 말다툼, 주먹다짐, 칼부림 같은 다툼 소식을 쏟아낸다. 나라간에는 무역전쟁, 외교전쟁 또는 진짜 전쟁이 끊이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도 나라도 누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바로 싸울 수 있는 만반의 준비, 즉 임전태세(臨戰態勢)를 갖추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정녕 하나님 뜻대로 서로 사랑하며 살 수는 없는 일일까? 하나님 섭리의 결말이 두려워진다. 모든 힘있는 사람들과 나라들의 각성이 절실해 보인다.
2018-08-22 09:38 |
[기고] <254> 통일약학연구회의 창립
지난 6월 26일 오후 3시 30분, 서울대학교 21동 414호실 (약학역사관 자료실) 앞에 이봉진 서울대 약대 학장 외 8명의 교수 등이 모여 조촐하게 서울대약대 ‘통일약학센터’의 현판식을 거행하였다. 이어 4시부터는 신약개발센터 (143동)에서 ‘통일약학연구회’ 창립기념 심포지엄 및 창립 총회를 개최하였다.
이 연구회의 창립에 앞서서 1) 서울대 약대 박정일 교수의 ‘북한 약용식물 자원의 산업적 활용을 위한 기반연구’ (2017. 4,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지원), 2) 이혜경 약사의 ‘북한의 약학제도’ 세미나 (2018. 1. 13, 호암교수회관), 3) 박태춘님의 ‘북한의 약학교육’ 세미나 (2018. 2. 27, 호암교수회관), 4) 박정일 교수의 ‘북한의 약사양성제도’ 연구 (2018. 4,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지원), 5) 박태춘님의 ‘북한의 약학교육과 악사제도’ 세미나 (2018. 4. 20, 제8회 약학사분과학회 심포지엄, 코엑스) 등의 통일약학 관련 학술 활동이 있었다.
여기에서 이혜경 약사는 1990년 함흥약대를 졸업한 북한 약제사로 탈북 후 2009년에 대한민국의 약사면허를 취득하였고, 박태춘님은 탈북하기 전에 함흥약대 교원이었다.
이상과 같은 관련 학술 활동이 거듭되면서 약학자들 간에 통일약학연구회의 설립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알고 보니 이미 서울대학교는 2016년부터 통일부의 ‘통일교육 선도대학’으로 선정되어 활동하고 있었고, 2011년 4월에 ‘통일포럼(2000년 11월 출범)을 모태로 출범한 통일평화연구원(IPUS)은 산하에 통일학 센터와 HK평화인문학연구단을 두고 교내 33개 통일 연구기관을 하나로 묶어 통일 관련 교육 및 연구를 선도하고 있었다.
또 2012년에는 서울대 의대에 통일의학센터가, 2013년에는 치과대학에 통일치의학센터가 설립되어 있었다. 이처럼 서울대학교 안에서만도 이미 본부 및 여러 단과 대학 차원에서 통일 관련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금년도에는 남북정상회담(판문점, 4.27) 및 북미 정상회담(싱가포르, 6.12)의 개최로 통일이 그 어느 때보다도 국가적 화두가 되었다. 이러한 주변 상황을 토대로 통일약학연구회 및 통일약학센터가 출범하게 된 것이다.
마침내 2018년 6월 12일, 박정일 교수를 중심으로 12명의 교수 등이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서 모여 창립 준비회의를 갖고, 2018년 6월 26일에 이 연구회의 창립 총회 및 기념 심포지엄을 열기로 결정하였다.
그 결과로 6월 26일 오후 4시부터 신약개발센터 1층에 있는 신풍홀에서 다음 순서로 연구회의 창립 기념 심포지엄이 개최되었다. 개회 순서에서는 이봉진 학장의 개회사와 전직 및 현직 서울대통일평화연구원장의 축사가 있었다.
16:00 개회
16:10 서보혁(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한반도 평화의 길
16:30 김진숙(보건복지부): 통일약학의 현황과 시사점,
16:50 정소현(가천대 약대): 통일시대 의약품안전관리체계 구축 및 운영방안
17:10 백우현(KPDA): 내가 본 북한의 제약
17:30 창립총회 및 기념촬영
18:00 간친회(신약개발관 143동)
이 심포지엄은 아침부터 시작된 장마에도 불구하고 전국 각지에서 약 70명이 넘는 청중이 참석하는 대 성황을 이루었다. 이메일 등을 통해 이 연구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하겠다고 회신한 사람도 120여명에 이르렀다.
통일약학 연구에 대한 참석자들의 뜨거운 기대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어 열린 총회에서는 회칙을 통과시킨 후, 서울대 심창구 명예교수를 회장으로, 이은방 명예교수를 감사로 추대하였다.
앞으로 이 연구회 및 센터가 약학 교육 및 연구, 약사 양성, 의약품의 인허가 및 안전관리, 의약품 제조 및 유통, 병원 약사 업무, 개업 약사 업무 등 약무(藥務) 전반에 걸쳐 남북 간의 차이를 파악하고, 남북간의 제 분야에 걸친 교류와 협력을 통하여 동질성 확보에 기여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끝으로 이 연구회 및 통일약학 센터의 출범을 시종 주도한 서울대 약대 박정일 교수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린다.
2018-08-08 09:38 |
[기고] <253> 섭씨, 와사등, 낭만적
지난 5월초 대엿새 동안 친구들과 캐나다 밴프에 가서 록키 산맥을 구경하고, 귀국 길에 미국 Davis에 들러 3주간 손녀들과 꿈 같은 시간을 보내고 귀국하였다. 그 동안 생각해 봤던 두 가지를 적어 본다.
1. 미국에서는 기온(氣溫)을 이야기할 때 우리처럼 섭씨 온도(攝氏, ˚C)로 말하지 않고 화씨 온도(華氏, ˚F)로 말한다. 섭씨 온도는 과학적인 표현을 할 때에만 사용한다. 또 미국은 우리에게는 미터법을 쓰라고 해 놓고는 자기들은 마일법을 쓰고 있다.
힘센 나라이니 우리가 안 따를 순 없지만 이런 것들이 미국에 간 우리나라 사람들을 어느 정도 귀찮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미국에서 날씨 예보를 듣다가 어느 날 섭씨(攝氏)란 말이 어디서 유래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화씨는 독일 사람 Fahrenheit의 첫 발음에 경칭 씨(氏)를 붙인 것인 줄 금방 알겠다. 그런데 섭씨 온도는 영어로 Celcius라고 하는데 그럼 왜 세씨나 셀씨라고 하지 않고 섭씨(攝氏) 온도라고 부르게 되었을까 궁금해 진 것이다.
처음에는 섭씨가 일본어에서 유래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일본어에서 攝氏라고 라고 써 놓으면 아마 세츠씨로 읽지 섭씨라고는 절대로 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인터넷을 뒤져 보았더니 ‘섭씨 온도는 1742년 스웨덴의 천문학자 셀시우스가 처음으로 제안한 것으로, 중국 사람들이 셀시우스를 중국어로 음역(音譯)하여 ‘섭이수사(攝爾修斯)’라고 한 데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써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셀시우스씨를 섭씨라고 불러야 할 이유가 전혀 없지 않은가? 우리는 셀씨 온도라고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참고로 Fahrenheit의 중국 음역어는 ‘화륜해특 (華倫海特)’이라고 한다. 요컨대 섭씨와 화씨는 각각 Celcius씨와 Fahrenheit 씨의 첫 자를 비슷한 발음의 한자어로 표시한 것이었다.
2. 옛날 을지로에 있던 경성약학전문학교(1930~1946) 설계도를 보면 와사실 (瓦斯室)이라고 써 있는 방이 나온다. 또 당시 교지(校紙)인 약전(葯箋) 제3호를 보면 독와사 방호법 보급회(毒瓦斯 防護法 普及會)가 쓴 ‘독와사(毒瓦斯) 연구’란 학술 논문이 나온다(개정판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100년사,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123-124).
나는 와사(瓦斯)가 무엇을 가르치는지 몰라 답답하였다. 그러다가 일본어 사전을 통해 瓦斯란 가스(gas)를 일본어로 음역(音譯)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본어에서는 瓦斯라고 써 놓고 가스라고 읽었던 것이다. 그래서 와사실은 가스실, 독와사는 독가스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김광균(金光均) 시인이 와사등(瓦斯燈)이란 제목의 시를 발표한 것이 생각난다.
<와사등>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려 있다
내 호울로 어데로 가라는 슬픈 신호냐
(중략)
내 어디를 어떻게 가라는 슬픈 신호기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이 시는 1939년 그가 펴낸 첫 시집 <와사등>에 실렸는데, 와사등이 가스등임을 알고 읽으면 한결 시의 의미가 명료해진다.
3. 가스를 ‘와사(瓦斯)’로 쓰는 것은, 마치 영어의 ‘romanti’c을 ‘浪漫的(낭만적)’으로 쓰는 것만큼이나 어색한 일이다. 일본 사람들은 ‘浪漫的’을 ‘로만테끼’ 라고 읽지만, 우리는 ‘낭만적’으로 읽는다. ‘낭만적’하고 ‘romantic’하고 무슨 관련이 있는가?
우리는 ‘섭씨’, ‘와사등’, ‘낭만적’이라고 쓰고 읽을 이유가 없다. 이보다는 각각을 ‘셀씨 온도)’, ‘가스등’, ‘로맨틱’ 등으로 적고 읽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다.
얼마 전 대한약전(大韓藥典)에서는 일본어 풍의 ‘엑기스’와 ‘캅셀’이란 용어를 각각 ‘엑스(Ex.)’와 ‘캡슐’로 바꾸었다. 그러나 캡슐과 달리 엑스는 아직 대중의 사랑을 받지 못 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섭씨 온도를 ‘셀씨 온도’로 바꾸자고 우기지 않는다. 瓦斯가 오늘날 저절로 ‘가스’로 바뀌었듯, 섭씨도 바뀔 만하면 훗날 저절로 바뀔 것이기 때문이다.
만사(萬事), 억지로 하는 것이 능사(能事)가 아닌 모양이다.
2018-07-18 09:38 |
[기고] <252> 한반도의 평화와 월드컵
지난 두 달은 우리나라에 엄청난 뉴스가 넘치는 기간이었다. 4월 27일에는 판문점에서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이 있었고, 4월 24일에는 예정되었던 북미회담이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에 의해 취소되었다. 북미회담은 한미 정상회담 등의 우여곡절 끝에 6월 12일 원래의 합의대로 싱가포르에서 개최되었다.
6월 12일은 공교롭게도 서울약대 개교 기념일이었다. 103년 전인 1915년 6월 12일, 서울대 약대의 전신인 조선약학강습소가 을지로에 있던 장훈학교에서 문을 연 것이다. 6월 13일에는 지방 선거 및 국회의원 보궐선거로, 6월 14일에는 그 개표로 시끌벅적하였다.
남북 및 북미회담은 우리나라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이벤트라 전 국민의 뜨거운 관심을 끌었다. 특히 북미회담이 예정, 취소, 재 성사 과정을 거치면서 사람들은 기대와 실망의 롤러코스터를 탈 수 밖에 없었다.
북미회담의 결론을 보고서도 어떤 사람들은 아시아 대륙횡단 철도 개통과 같은 성급한 희망을 꿈꾸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평화가 그리 쉽게 오겠느냐, 오히려 우리나라가 공산화 되는 것이 아니냐며 지나친 걱정을 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에 완전한 평화가 정착되고 통일을 이룰 수만 있도록 노력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이 과정에서 행여 천려일실(千慮一失)의 실수가 없도록 조심 또 조심해야 할 것이다.
크리스찬들은 역사(歷史)를 쓰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역사를 history, 즉 His story 라고 이해한다. 실제로 역사에는 하나님의 간섭의 결과가 아니라고 볼 수 없는 기적과 같은 일들이 너무나 많은 것이 사실이다.
나는 우리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축복을 기도 드리는 가운데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을 묵상하게 되었다.1. 에스라서를 보면 보면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 갔던 유대 사람들의 귀환을 허용한 고레스 왕의 이야기가 나온다.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키루스 2세)은 바빌로니아를 포함한 오리엔트를 통일하고 인더스 강에서 에게 해와 남쪽 이집트에 이르는 오리엔트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이루었다. 고레스 왕은 BC 538년,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 온 유대사람을 비롯한 여러 민족을 풀어주라는 칙령(勅令)을 내렸다. 유대인들이 상상도 하지 못한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고레스 같은 이방인도 사용하셨다.
2. 또한 역대하(歷代下)를 보면 유대의 여호사밧 왕 때 모압, 암몬 및 마온 족속의 연합군이 유대를 침공해 온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전투로는 엄청난 규모의 연합군에 대항할 수 없음을 깨달은 여호사밧 왕은 기도 끝에 예복을 입힌 찬양대를 조직하여 군사들 앞에서 행진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하였다. 그랬더니 믿기 어려운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연합군들이 자기들끼리 싸워 스스로 전멸하는 것이 아닌가? 연합군은 한 민족이 아니었기 때문에 얼굴도, 전략도 달라서 서로 싸우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 결과로 유대 사람들은 피 한방울 안 흘리고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 (대하 19-20장)’이라는 찬양을 하였다.
이런 말씀을 묵상하면서, 나는 하나님께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스스로 역사를 쓰시기 시작하였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필요에 따라 이방(異邦)의 주변 강국들을 사용하실 수도 있고, 그들을 스스로 무너지게 만드실 수도 있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크리스찬이라면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이다. 염려가 기도에 앞서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이제 6월 14일부터 7월 15일까지 러시아 월드컵이 개최된다. 나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잠시 염려를 내려 놓고 월드컵을 즐길 생각이다. 바라기는 이번에도 2002년 때처럼 우리나라 축구대표팀이 선전(善戰)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그 때처럼 전 국민의 마음이 하나되는 또 하나의 기적을 경험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
2018-07-04 09:38 |
[기고] <251> 은사님 회고 2-임기흥 교수님
1967년 대학 1학년 때 임기흥 교수님의 약용식물학 첫 수업 시, 어떤 식물의 전초(全草) 그림을 그려내라는 숙제를 받았다. 나는 공책에다가 볼펜으로 대충 그려서 제출하였다. 며칠 후 공책을 되돌려 받아보니 “너는 도대체 학교엘 다니려고 하느냐?” 라는 교수님의 코멘트가 큰 글씨로 쓰여 있었다. 나는 이에 큰 충격을 받았다. 알고 보니 정태현 (鄭台鉉) 식물도감의 해당 식물 그림 위에 유산지 (硫酸紙, tracing paper)를 대고 4H 연필로 모사(模寫)해야 하는 것이었다.
임교수님은 일요일마다 근교의 산으로 약용식물 채집을 나가셨는데, 그 때마다 학생들 보고 “오기 싫은 사람은 안 와도 된다”고 하셨다. 그러나 참석하지 않으면 학점을 안 줄 것 같은 불안감을 조성하셨다. 막상 참석해 보면 교수님은 앞장 서 올라가시면서 ‘이건 무슨 풀인데 뭐에 쓴다’고 설명을 하시는데, 내가 겨우 따라 잡으면 벌써 설명을 마치시고 다시 저만치 멀리 올라가시곤 하였다.
식물 분류가 전공이던 교수님은 약용식물학 강의 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여지껏 논문을 쓸 때 계속성 초본을 continuous plants, 불계속성 초본을 uncontinuous plants라고 이름 붙여 왔는데, 최근에 알고 보니 불계속성은 영어로 uncontinuous가 아니라 discontinuous이더군, 하하하” 하시는 것이었다. 1968년경 임교수님은 육수학회(陸水學會)를 창설하여 초대 회장을 역임하셨다. 이 학회는 1982년에도 존재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어찌 되었는지 모르겠다.
임교수님은 우리가 학부 재학 중일 때에 박사 학위가 없으셨다. 당시에는 박사 학위가 없는 교수님이 더 많았다. 언젠가 약화학 전공의 채동규 교수님이 강의 중에 “임교수님이 논문을 써서 제출하였는데,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있어야 심사를 하지” 라고 말씀하셨다.
무슨 말인지 몰라 학위를 줄 수 없다는 말씀 같았다. 그 정도로 임교수님은 한글로 글을 쓰시는 것이 서투셨다. 교지(校誌)인 약원(藥苑)에 실린 교수님의 글을 읽어 본 적이 있는데, 마침표가 글 맨 끝에 단 한 개만 있을 정도로 문장이 끝나지 않고 줄줄이 연결되어 있는 등, 아닌 게 아니라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웠었다.
임교수님은 1916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나 만주에 있는 봉천제1중학교를 졸업하고 1940년 만주의과대학 약학전문부를 졸업한 후, 의예과 생물학 교실의 조교를 역임하였다. 그 후 광복 때 남하하여 서울대 사범대 강사로 지내던 중 김기우 약대 학장의 배려로 1949년초부터 약대 전임강사가 되셨다. 이처럼 임교수님은 만주에서 공부를 하셔서 중국어는 완벽하지만 우리말, 특히 글은 매우 서투셨던 것이다.
임교수님은 1968년 서울대학교 졸업식 (아마도 2월)에서 그토록 간절히 원하시던 약학박사 학위를 받으셨는데, 그 해 10월 28일 연건동 약대에서 열린 대한약학회 총회 및 학술대회에서 그논문을 구두로 발표하시고 나와서 혈압으로 쓰려져 작고하셨다. 1916년 생이시니까 그 때 겨우 만 52세이셨다. 두 형님도 다 혈압으로 먼저 작고하셨다고 한다.
한번은 조윤상 교수님 (당시 조교?)이 무슨 일인가로 청량리에 있는 임교수님 댁 (철도청 관사를 불하받음)에 심부름을 가셨다고 한다. 당시에는 댁에 전화가 없는 교수님이 많아서 용건이 있으면 직접 찾아가는 수 밖에 없었다.
가서 보니 교수님은 안 계시고 사모님만 계셨는데, 사모님은 사과 궤짝 위에 종이를 펴 놓고 아드님이 볼 참고서인 전과지도서 (全科, 전과목 참고서)를 빌려다 하나하나 베끼고 계셨다고 한다. 조 교수님은 그 절약 정신과 함께 자식 교육을 위한 정성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임교수님에 대한 회고담은 1983년 11월 1일자 ‘서울대학교 동창회보’ 제68호 6페이지에 실린 바 있다. 임교수님의 제자인 고 정보섭 교수님가 쓰신 글이다. 이 글의 일부 사항은 그 글로부터 인용한 것이다.
임교수님도, 제자인 정교수님도 이미 오래 전에 작고하셨으니, 세월의 무정함이 새삼스럽다.
2018-06-20 09:38 |
[기고] <250> 은사님 회고 1 - 이왕규 교수님
정성분석화학 및 실험을 담당하셨던 이왕규 교수님은 왕년의 별명이 왕수(王水)일 정도로 성격이 엄격한 분이셨단다. 그러나 교수님은 적어도 나에게는 인자하셨다. 교수님은 전교생의 이름을 다 외우고 계셨을 정도로 깐깐한 분이셨다.
4.19 혁명 때에는 학생과장이셨는데, 시위에 참가한 약대생들을 전원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게 하신 일을 자랑스러워 하셨다. 시위에 참가했다가 총에 맞아 죽은 대학생들이 많았던 때이었다.
나는 1971년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 분석화학 전공 (지도교수 이왕규)에 진학하였다. 한 학기 정도 수업을 받다가 입대하여 3년간의 군대를 마치고 영진약품 연구과에 취직하면서 대학원에 복학하였다. 그 후 소위 파트로 대학원에 다니면서 석사 학위 논문을 썼는데 선생님께 한번도 지도를 받지 않고 혼자서 논문을 작성하였다. 그러니 논문 수준이 오죽했을까는 불문가지(不問可知)이다.
나는 1976년 종로구 연건동 소재 서울약대 2호관 강의실에서 열린 대한약학회에서 그 논문을 발표하였다. 당시에는 아직 슬라이드가 나오지 않아서 궤도를 이용해서 논문을 발표하였다. 즉 큰 모조지에 매직 펜으로 연구 내용을 쓰거나 그린 후 종이를 한장 한장 넘겨가며 발표를 하는 방식이었다.
1976~7년 경의 어느 날 이교수님은 영진약품에 다니고 있던 나에게 생약연구소 우원식 교수님 방에 조교로 가라고 추천해 주셨다. 그러나 나는 아내와 상의 끝에 그 자리를 사양하였다. 그 후 1978년에 결국 이 교수님 연구실의 조교가 되어 1979년 문부성 시험을 보아 일본 유학 길에 올랐다. 그 때 우교수님 방에 조교로 갔으면 내 인생은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이교수님은 내 연구에 직접적인 지도를 해 주시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교수님으로부터 인생을 길게 보는 안목을 배웠다. 내가 대학원 석사 과정에 들어 갔을 때 입학 동기생이 10명이나 되었다. 나는 이 많은 사람들이 훗날 다 어떻게 풀릴 수 있을까 걱정하였다.
그런데 교수님은 ‘그냥 꾸준히 있다 보면 다들 스스로 떨어져 나간다. 그냥 기다려라’고 말씀 하셨다. 훗날 보니 정말 다들 이런 저런 이유로 학업을 중단하여 끝까지 학계에 남은 사람은 3명 밖에 안 되었다.
내가 일본 유학 전인 대학원 학생이던 시절에 선생님 따님이 조선호텔 그랜드 볼룸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 후에 식사 장소에 가보니 각종 음식들이 다라이 같이 생긴 큰 그릇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요즘 말로 뷔페이지만 당시에는 바이킹 요리라고 불렀다. 그렇게 많은 음식을 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내가 1983년 3월 서울약대에 약제학 전공 조교수로 부임한 후 몇 년 안되었을 때, 아드님이 결혼하게 되었다. 이때 교수님이 나를 불러 함진 아비 역할을 해 달라고 부탁하셨다. 나는 명색이 조교수인 내가 어떻게 함을 지고 갈 수 있나 불만이었다. 대학 동기인 염정록 조교수 (중대 약대)에게 같이 가자고 하였으나 그는 사정이 있어 못 간다고 하였다.
할 수 없이 혼자 가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나는 신부 댁에서 보내 준 차에 타고 있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함은 이미 차에 실려 있었다. 청담동 신부 댁에 도착해 저녁 대접을 잘 받고 사례비도 두둑하게 받았다. 그 때 비로소 혼자 가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교수님은 1987년 5월 조기 명예퇴직을 하셨다. 미국으로 이민간 따님이 손주를 봐 달라고 하는 데다가, 본인이 대학에서 연구와 교육을 하는 데에 한계를 느끼셨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당시 정월이면 아내와 함께 청파동에 있는 교수님 댁에 가서 세배를 드리곤 하였는데 그 때 사모님으로부터 들은 내용이다.
이교수님은 관악캠퍼스 21동 약학관 103호 강의실에서 고별강연을 하셨다. 나는 그 강연내용을 전부 메모해서 약대 교지인 약원(藥苑, 29 호)에 실었다. 왜정 때인 경성약전 시절, 주석산 결정을 만드는 작업반에 감독으로 동원되어 나갔던 이야기, 신설 개성 약대 개교 전날 6.25 전쟁이 발발하여 가지 못한 이야기 등이 아직도 기억에 새롭다.
선생님이 때때로 그립다.
2018-06-06 09:38 |
[기고] <249> 제8회 약학사(藥學史) 심포지엄
지난 4월 20일 (금) 오후 3:40~5:40에 서울 삼성동 코엑스 홀 318B에서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의 제8회 약학사 심포지엄이 개최되었다. 약학사분과학회는 2014년 4월 18일 ‘한국약학의 역사 I’이라는 주제로 창립 심포지엄을 개최한 이래, 2017년 봄을 제외한 매년 봄 가을에 심포지엄을 개최해 오고 있다.
이번 심포지엄에서는 1) 북한의 약학교육과 약사제도 (전 함흥약학대학 박태춘 교원), 2) 약인(藥人) 이을호(李乙浩) (충북대자연대 이영남 명예교수), 3) 한국약학사 관련문헌 소개 (서울대약대 김진웅 교수)가 발표되었다.
박태춘 교수의 발표 내용을 약업신문 기사에서 일부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북한의 일반적인 교육 제도를 보면, 5세 미만 어린이들은 탁아소에 다닌다. 5세가 되면 유치원(2년)을 거쳐 인민학교(4년) 또는 고등중학교(6년)에 진학한다. 그 후 대부분은 군복무(10년)를 하거나 사회에 나가 경제 활동을 하며, 1~2%만이 대학교(4~6년)에 진학한다.
그 중 약학교육기관의 수는 손에 꼽을 정도이다. 1969년 창립된 함흥약학대학은 6년제로 구성돼 있으며, 연간 4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한다. 사리원 동약(東藥)대학은 4년제로, 연간 약 100명의 학생들을 배출한다. 이 외에 의학대학 내 약학부가 전국에 10개 있는데, 각각 50명씩 연간 총 500여명의 약제사를 배출한다.
약학대학을 졸업한다는 것은 곧 약제사 자격 취득을 의미한다. 이후 3년의 실습 과정을 거쳐 각 부서에 배치 받는다. 함흥약학대학에서 실제적인 약학을 가르치는 학부는 교무부학장 산하 교무과에 소속돼있는 합성학부(합성과), 제약학부(항생소과, 생물약품과), 약제학부(약제과, 동약과) 및 의료기구학부(의료기구과) 등이다.
함흥제약연구소의 연구사, 함흥약학대학의 교원․연구원, 제약공장의 기술 일군, 병원의 약무(藥務) 일군 등은 나름대로의 약학 연구 제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연구 제목과 관계없이 돈이 될 수 있는 약품을 만들어 팔아 식량을 구입하고 있다.
박태춘 교수는 앞으로 10년 내로 남북한이 통일되며, 통일 이후에는 교육과 보건의료 약학 분야의 민간 교류 활성화, 남한 약대 교수들의 북한 약대 초빙강의 등이 이뤄질 것으로 내다 보았다.
박교수의 예언이 맞으려는지 지난 4월 28일에는 역사적인 ‘판문점 선언문’이 발표되었다.
두 번째 주제인 이을호 선생은 1930년에 경성약학전문학교에 입학한 후 1933년 3월에 졸업하여 약제사 면허를 취득한 분으로, 그 후 향리인 전남 영광군 남천리에서 호연당 약국을 열어 활약을 하다가, 뒤이어 전남대 문리대에서 조교수 부교수 교수 및 학장을 역임하면서 철학 특히 다산 정약용을 연구하는 다산학 분야의 대가(大家)가 된 분이다.
발표자인 이영남 교수는 서울약대를 졸업하고 충북대 미생물학과 교수로 정년퇴직한 후, 서울시립대 국사학과에 입학하여 학사 학위를 받고 다시 동 대학원에 진학하여 약학사 등을 공부하고 있는 분이다.
세 번째 주제는 흩어져 있는 우리나라 약학사 관련 자료의 리스트를 만들고 있는 김진웅 교수가 중간 보고 성격으로 발표를 한 것이다. 약학사 관련 책자 등에 대해서 사진을 함께 보임으로써 청중들의 이해를 돕도록 하였다. 서울대 약대 김진웅 교수는 약학사 분과학회의 총무로서 분과학회의 실질적인 살림을 맡고 있는 분이다.
한편 약학사 분과학회는 금년 말에 가칭 ‘한국약학사 저널’을 창간할 계획이다. 이 저널에는 우리나라 약학사에 관한 원저 논문은 물론, 이미 다른 매체에 발표 된 약학사 관련 자료 (글이나 사진 포함)도 분야와 형식에 구분 않고 실을 예정이다. 약계에 계신 모든 분들의 적극적인 자료 기증과 함께, 저널 발간에 대한 재정 후원도 부탁 드린다.
끝으로 이번 심포지엄을 재정으로 후원해 주신 하나제약과, 참석자 전원에게 기념품(코아네 코마스크)을 기증해 주신 일동생활건강 (사장 김중효)께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
2018-05-23 09:38 |
[기고] <248> 내리 사랑
연녹색 나뭇잎에 기분이 상쾌해지는 봄이다. 봄은 아마 네 계절 중 가장 “볼만’하다고 해서 ‘봄’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 같다. 봄이 볼만한 것은 꽃도 나무도 이 때 어린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고, 그 어린 모습이 예쁘기 때문이다. 어린 모습이 예쁜 것은 식물뿐 아니라 동물도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강아지가 개보다 귀엽고, 어린이가 어른보다 예쁘다.
반면에 늙거나 오래된 것은 사람, 동식물, 물건을 막론하고 솔직히 말해서 대체로 추하다. 얼마 전 모처럼 당구장엘 가봤더니 손님이라고는 몽땅 노인들뿐이었는데, 분위기가 좀 ‘거시기’하였다. 60대에도 경로당에 가기 싫어하셨던 어머니 마음이 대번 이해되었다.
사람이나 동물은 자기 자식(새끼)을 엄청 예뻐한다. 부모에게는 새끼가 정말로 예쁘게 보이기 때문이다. 왜 하나님은 자식은 다 예쁘고, 늙으면 다 추해지도록 프로그램 해 놓으셨을까? 만약 아기가 팔구십 늙은이의 추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다면 어땠을까?
아마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기 쉽지 않을 것이고, 그 결과로 종족을 유지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또한 사람이 늙어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의 모습이 갓 태어난 아기처럼 가장 예쁘도록 프로그램화 놓으셨다면, 자식들은 부모와의 헤어짐을 지나치게 가슴 아파하며 괴로워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늙은 모습을 추하게 만들어 놓으신 이유는, 부모와의 이별을 쿨하게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것인지도 모른다. ‘종족의 보존’과 ‘쿨한 이별’을 위하여, 태어날 때 가장 예쁘고, 떠날 때 가장 추한 모습이 되게 만드신 하나님의 프로그래밍(섭리)에 감사 드린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쁜 새끼를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부모의 본능이다. 마치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부모로부터 자식으로의 ‘내리사랑’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부모들은 자신의 자식 사랑을 지나치게 자랑할 일은 아니다.
반면에 자식의 부모 사랑, 즉 효도는 물을 상류로 역류(逆流)시키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효도는 인간의 본능이 아닌 모양이다. 나이 먹어 추한 모습으로 바뀐 부모를 예쁜 어린 새끼 사랑하듯 사랑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어느 정도는 억지로 해야 한다.
효도(孝道)! 오죽하면 효(孝)하기가 도(道)를 닦는 만큼이나 어렵다고 생각했을까? 그러므로 누구라도 부모를 자식의 반의 반만큼, 아니 자신이 매일 산보시키고 목욕시키는 애완견의 반의 반만큼만 챙겨드리는 사람은, 온 천지의 효자 칭송을 받아도 결코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요즘 세태는 꼭 그렇지도 않지만, 지금까지는 자식들이 섭섭해지기 시작할 때쯤이면 손주들이 태어나기 시작한다. 쓸쓸한 늙은이에게 천만 다행한 일이다. ‘내리사랑의 법칙’에 따라 자 손주들이 자식보다 훨씬 더 예쁘다. 손주들은 재롱을 떨어주고 아직 자식처럼 덤비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손주들도 머지 않아 할머니 할아버지 품을 떠난다. 그래도 자식보다는 손주들이 더 오랫동안 사랑해 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착각이라 해도 관계없다.
손주가 자식보다 더 예쁘므로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비결은 간단하다. 자주 손주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문제는 요즘 손주들이 학원을 다니느라 너무 바빠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놀아 줄 시간이 없다는 점이다. 국가 사회적으로 큰 문제인데, 정치지도자 중 이 측면을 고려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래서 내가 만약 집권하면(?) 반드시 이 문제를 해결할 생각이다.
나는 가끔 자식들이 섭섭해지면 ‘나는 부모님께 잘 했는가’ 되돌아 본다. 늘 편찮다고 하시던 어머니를 귀찮아 하고, 부모님께 말대꾸 한 내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자꾸 부모님이 그리워진다. 곧 자식들에 대한 섭섭함이 중화(中和)된다.
어린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 늙은 부모님을 귀찮아 하는 것은 사람의 본능이자 원죄(原罪)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성경을 비롯한 모든 도덕이, 자식 사랑은 억제하고 부모 사랑은 억지로라도 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아닐까?
‘내리사랑’은 이러한 모습으로 반복되며 또 다음 세대(世代)로 흘러 내려 갈 모양이다. 예쁜 봄은 언제나 짧았다.
2018-05-09 09:38 |
[기고] <247> 참고 견딤 위에 세워진 사랑
1. A장로는 50세 중반에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 체육교사 직을 사직하고 부인인 B권사와 함께 아프리카에 있는 보츠와나라는 나라에 선교사로 떠났다.
1년만에 혼자서 일시 귀국한 그는 “그 곳이 너무 덥고 힘들어 빨리 돌아 가고 싶지 않은데 B권사가 자꾸 빨리 오라고 재촉한다”고 고백하였다. 그 때까지 나는 선교사는 ‘예수에 미쳐서, 그리고 자기가 좋아서’ 나가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나는 A 장로의 말을 듣고 그들도 가기 싫은데 참고 가는 거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 때부터 나는 그 분들을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
우리 부부는 A 장로 내외분이 부탁한 대로 두 분이 현지에서 사역하는 모습의 사진을 화장실 변기 맞은 편에 붙여 놓고, 변기에 앉을 때마다 기도하였다. 이렇게 훌륭한 분들과 20년도 넘게 교제하고 있다는 사실은 큰 자랑거리이다. 그러나 말로만 예수를 믿는 내 자신을 부끄럽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2. 여수에 있는 애양원(愛養院)은 고 손양원(孫良源) 목사님이 한센병 환자들을 섬기던 곳이다. 그곳에서 그는 1948년 여순반란 사건 때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C 등의 고등학생들에 의해 두 아들을 잃었다.
반란이 진압된 후 C는 군경에 붙잡혀 사형장으로 끌려 가게 되었는데, 손목사님은 “이 아이를 죽이면 내 아들들의 죽음이 헛된 것이 됩니다. 이 아이를 회개시켜 내 아들로 삼고 사람 되게 하겠습니다”라며 살려주기를 애원하였다.
덕분에 C는 목숨을 건졌고 손목사의 양자(養子)까지 되었다. 손 목사의 딸은 ‘목숨을 살려 주는 것은 몰라도, 살인범을 오빠라고 부르게까지는 하지 말라’고 아버지에게 대 들었다. 그러나 손 목사는 ‘성경에 원수를 용서까지만 하라고 했더냐? 사랑하라고 하지 않았더냐?’며 끝내 C를 양자 삼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딸은 골방에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꺼이 꺼이 소리 죽여 우는 아버지를 보게 되었다. 그제서야 딸은 아버지도 두 아들을 잃은 말할 수 없이 큰 슬픔과 분노를 참으며 C를 양자 삼았음을 깨닫게 되었다.
애양원을 떠나지 않고 환자들을 돌보던 손목사는 끝내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던 날 인민군에 의해 피살당했다. 그의 장례식 때 상주를 맡은 이는 살인범이자 수양 아들인 C 였다. 훗날 C의 아들은 긴 방황을 마치고 목사가 되었다고 한다 (약춘 212 참조).
3. 한국전쟁 때 3살이었던 나는 어머니 등에 업혀 김포에서 평택으로 피난을 갔다고 한다. 어느 추운 겨울날, 어느 집의 비좁은 방에 들어 가 밤을 지새게 되었는데, 어머니는 밤새 벽의 냉기를 자신의 등으로 막고 나를 안고 앉아 계셨다고 한다. 방이 좁아 눕지도 못 하였단다.
이 일로 인해 어머니는 그 후 상당히 오랫동안 몸이 편치 않으셨다. 또 한번은 주안 염전 근처에 임자 없는 밀가루 자루가 쌓여 있다는 소문을 듣고 삼십리 길을 달려 가 몇 자루를 머리에 이고 집으로 날라 오신 일도 있었다고 한다.
어깨와 허리가 끊어지게 아팠지만, 오직 자식과 식구를 먹일 욕심으로 그 고통을 참아내신 것이다. 어머니의 그 욕심은 자식에 대한 사랑이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4-7)”.
4. 사랑을 위한 참고 견딤에 예수님의 십자가에 견줄 것이 있을까? 신성(神性)과 함께 인성(人性)을 가지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날 밤, “아버지,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막 14:36)”라고 기도하였다.
예수님도 십자가가 두려우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그 밤에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34)”는 새 계명을 주셨다. 아! 예수님은 우리에 대한 사랑으로 십자가의 두려움을 견뎌내신 것이다.
A장로님, 손목사님, 우리 어머니,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은 모두 어렵고 힘듬을 ‘참고 견뎌 내’ 세운 고귀한 것이었다. 돌아 보면 세상에 이와 같은 사랑이 적지 않음을 발견하고 감동하게 된다. 하나님 감사 합니다.
2018-04-25 09:38 |
[기고] <246> 故 김기우 학장의 가족사
김기우(金基禹)는 경성약학전문학교(京城藥專) 출신은 아니지만 독학으로 조선약제사 시험에 합격하여 조선총독부 위생시험소에 근무하다가, 1941년 금강제약 전용순(全用淳) 사장의 후원으로 동경제국대학 약학과로 유학을 떠났다.
그 후 일본이 일으킨 전쟁으로 인해 중도 귀국하여, 광복 후 당시 경성약전에서 사립 대학으로 승격된 서울약대의 교수 (1949.1~1949.12) 및 학장 서리를 (1949.1~1950.3?) 역임하였다 (서울대학교약학대학 100년사).
최근 서울약대 김진웅 교수가 발굴한 자료에 의하면, 김교수는 1911년 11월 26일 경기도 개풍군(開豊郡) 남면(南面) 수우리(修隅里) 58번지 (본적)에서 출생하였고, 1950년 7월 16일 자택인 종로구 관훈동 84번지 11호에서 납치되었다.
부인 박보렴(朴寶奩) 여사는 14살 연상으로 1897년 11월 8일생인데 1950년 7월 30일에 역시 자택에서 인민군 3명에 의해 납치되었다. 당시 박여사는 60세로 대한여자국민당 부위원장이었다. 이는 김기우 교수의 장남인 김우종(金宇鐘)이 1956년 6월 19일 대한적십자사에 제출한 ‘피납치인 신고서’에 기재되어 있는 내용이다.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의 자료를 보면, 경남 진주군 진주면 평안동 77번지를 본적으로 하는 박여사는 독립운동을 하다 붙잡혀 23세인 1919년 1월 2일 기소유예 판결을 받았다.
2017년 어느 날 서울대 가산약학역사관의 장윤이 학예사가 김기우 교수의 손녀딸 (Alison Kim Flageul)이 프랑스 보르도에 살고 있다는 내용의 신문 기사를 보았다. 이에 김진웅 교수는 우여곡절 끝에 Alison의 이메일 주소를 알아내 연락을 주고 받은 후 프랑스로 ‘서울대 약대 100년사’ 한 권을 보냈다.
마침 딸 Alison을 보러 갔던 미국에 사는 Alison의 어머니 (김기우 교수의 며느리) 장유경이 그 책에 실린 김기우 교수의 이야기를 읽고, 3월 8일 김진웅 교수에게 한글로 쓴 이메일을 보내 왔다. 장유경을 통해 알게 된 김기우 교수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김기우 교수는 김우종(金宇鐘)을 아들로 두었다. 김우종은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대 공대 화공과에 입학, 1958년 화공과를 우수한 성적 (총장상)으로 졸업(12회)한 다음 1959년에 도미(渡美)하여 Carnegie Mellon에서 화공학 박사 및 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35년간 Stony Brook University에서 응용수학과 교수 및 Graduate Studies의 Director로 근무한 후 2004년 뇌암으로 작고하였다. 1981년쯤 김우종 부부는 미국 적십자사로부터 어머니(박보렴)가 평양에 살아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러나 찾아 뵈려고 준비하던 중, 어머니가 작고하셨다는 전보를 받았다. 아버지(김기우)소식은 언젠가 중국에 계시다는 소문을 들은 것이 전부이었다.
장유경은 이화여중 1학년 때(13세)인 1963년에 미국 줄리어드에 유학하였다. 이는 당시 장안의 화제이었다. 졸업 후 그녀는 25년간 Stony Brook School에서 교편을 잡았다. 현재는 은퇴하여 뉴욕과 플로리다를 오가며 살고 있다. 그녀의 아버지는 연세대 상대 학장을 지낸 장희창 교수로 그 역시 한국 전쟁 때 납북되었다.
김기우 교수에게는 김우종 교수가 낳은 손자 손녀가 있다. 손자인 Jason Kim은 Princeton 대학을 졸업하고 현재 Stony Brook 대학 병원의 비뇨기과 의사 겸 Women’s Pelvic Health and Continence Center의 Co-Director로 근무하고 있다. 그와 한국인 부인 사이에 돌맞이 아들이 있다.
손녀인 Alison은 Jason의 동생으로 Harvard 대학을 졸업하고 프랑스에 유학 갔다가 와인 사업을 하는 프랑스인 남편과 결혼하여 2남 (10살 8살)을 두었다.
3월 16일, Alison이 감사의 뜻으로 남편 회사 Chateau Brillette의 와인을 보내 왔다. 지구촌을 감싸 도는 역사의 물결에 감회가 깊다.
2018-04-11 09:38 |
[기고] <245> 서열(序列)과 질서
몇 해 전 재미있는 건배사를 하나 배웠다. 그것은 잔을 들고 짧게 “얘들아, 마시자” 라고 외치는 것이다. 참석자들이 이에 호응하여 “예, 형님”, 또는 “예, 오빠”라고 외치면 상황 끝이다.
그러면 참석자들, 특히 “얘들아!”하며 건배사를 외친 사람은 자기가 무슨 조폭(조직폭력단)의 우두머리 (그들 말로 ‘형님’)라도 된 듯한 착각에 빠져 야릇한 쾌감을 느낀다. 그래서 나는 요즘도 “얘들아”를 외치고 다닌다..
1967년 대학에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한 학생이 갑자기 강의실 단상에 올라가더니 ‘나는 여러분과 입학 동기이지만 이런 저런 사유로 몇 살 더 먹었으니, 나를 야! 자! 하며 부르지 말아달라’는 취지의 부탁을 하였다. 그 후 우리들은 그를 ‘형’이라고 부름으로써 오늘날까지 그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처럼 사람을 만나면 누가 형 (또는 언니)이고 동생인지 서열부터 정해야 한다. 서열이 결정되면 연하(年下)인 사람은 연상(年上)인 사람을 ‘형님’ 또는 ‘선배님’ 이라고 부르며 대우를 해야 한다. 만약 연하인 사람이 슬슬 반말을 트려고 나오면 연상인 사람은 금방 심기가 불편해 진다. 결국 두 사람의 관계도 좋은 방향으로 진전되지 못한다.
이처럼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우두머리나 형으로 대접받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진짜 나이보다 몇 살 더 먹었다고 속이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다가 운 나쁘게 주민등록증이 공개되어 진짜 나이가 들통(?)나면, 예외없이 ‘아버지가 출생신고를 늦게 해서 그렇다’고 둘러댄다.
나는 한 해 재수(再修)해서 대학에 들어 갔기 때문에 고등학교 1년 후배들하고 같은 학년이 되었다. 후배들은 고래(古來)로 당연한 관습에 따라 나를 ‘형’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나는 1살 빠른 7살에 초등학교에 들어 갔기 때문에 일부 후배와 나이가 같았다.
어떤 후배는 나보다 생일이 빨라 실제로는 그가 몇 달 ‘형’인 경우도 있었다. 그런 후배들이 나를 ‘형’이라고 부를 때면 은근히 마음이 거북하였다. 그래서 그런 후배들하고는 지금까지 서로 야! 자! 하지 않고 올림 말도 내림 말도 아닌, 문자 그대로 ‘반말’을 사용하기로 하는 등 나름대로 예의를 지키고 있다.
서열이 중요한 것은 가족 간에도 마찬가지이다. 부모 자식 간에는 물론이고, 형제 남매 간, 동서 간 등에도 서로 서열에 합당한 말을 사용하여야 한다. 가족 간에는 나이에 앞서 어떤 관계인가가 서열을 결정짓는다. 자식은 부모님께 경어를 써야 하고, 제수(弟嫂)는 나이 적은 형수(兄嫂)에게도 ‘형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해야 집안이 제대로 돌아 가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서열이 가장 엄격한 곳은 아무래도 군대와 직장이다. 거기에서는 나이가 아니라 누가 계급이 높으냐, 누가 상사(上司)이냐가 서열을 결정한다. 그렇다고 나이나 관계 등이 전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내가 사병으로 군에 복무할 때, 이종사촌 동생의 친구가 우리 부대에 ROTC 소위로 부임하였다. 당연히 나는 그를 상사로 모셨지만, 그는 나를 제 친구의 형님으로 대접해 주지 않았다. 그 죄(?)로 그는 지금까지 내 기억에 인간성이 별로인 사람으로 남게 되었다.
서열 사회, 즉 누가 형이냐, 어른이냐, 상사이냐에 따라 사람의 서열이 결정되는 사회는 일견 불합리해 보인다. 모든 사람은 다 평등한데, 왜 자식은 부모에게 경어를 써야 하고, 동생은 형의 말을 들어야 하며, 왜 젊은이는 어르신에게 공손해야 하고, 부하는 상사를 깍듯이 모셔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그래서일까? 사회의 서열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과거에 비해 엄청나게 파괴되었다. 그런데 세상살기는 전에 비해 오히려 더 각박해졌다. 오죽하면 나이 좀 먹었다고 젊은이를 훈계하다가는 큰 화를 당할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하겠는가? 비굴하게 살아야만 안전한 세상이 되어버렸다.
돌이켜 보면 적절한 서열은 우리 사회의 질서를 지켜주는 버팀목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질서의 파괴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면, 서열 파괴가 꼭 좋은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얘들아, 안 그러냐?”
2018-03-28 09:06 |
[기고] <244> 대학원 신입생들에게
얼마 전 서울대학교 약학과 석박사 과정 신입생들에게 강의(2월 28일)를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학생 중에 타 학과 출신도 많은 점을 고려해서 그들에게 약과학자로서의 책임감과 자긍심을 불어 넣어 달라는 주문이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자신은 ‘바담 풍(風)’ 하면서도 학생들에게는 ‘바람 풍’ 하기를 바라던 훈장님과 같은 처지이지만, 용기를 내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강의를 준비하였다.
1. 인생을 조금 긴 안목(眼目)으로 바라 보라 – 젊을 때는 1~2년이 긴 세월로 느껴진다. 그래서 빠른 시일 내에 성취를 이루고자 조바심을 내기 쉽다. 그러나 나이 70이 되어 지나온 길을 돌아보니 1~2년 정도는 인생에서 그리 긴 시간이 아닐 수 있더라. 그러니 행여 출발이 남보다 1~2년 늦었더라도 너무 초조해 하거나 배우기를 포기하지 마라. 늦었다고 생각할 때, 실은 전혀 늦지 않은 경우가 많음을 믿어라.
2. 생명 현상의 본질적인 의문에 도전하라 – 일생을 걸고 해명할 가치가 있는, 예컨대 생명 현상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에 도전하라. 때로는 저널을 덮고 혼자 생명의 신비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라. 기성 연구자들과 다른 시각에서 생명을 바라보라. 석사 과정 때부터 자기 연구 주제에만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젊을수록 자연과학 전반에 대한 건강한 상식을 갖도록 노력하기 바란다.
3. 세계적인 학자가 되어야 한다 – 서울 약대 연구진이 국제 저널에 발표하는 연구 논문은 그 수(數)로는 이미 세계 최고이다. 이제는 연구의 질(質)을 높이는 것이 과제이다. 앞으로 여러분은 질적인 면에서 세계적인 과학자가 되지 않으면 스스로 만족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여러분은 충분히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다. 자신감을 가져라. 여러분은 장차 외형적으로는 권위 있는 국제학회에 특별강연 연자로 초청받는 연구자로 성장하여야 한다.
4. 머리만 쓰지 말고 수고를 아끼지 마라 – 꾀 많은 연구자는 흔히 실험이라는 수고를 아끼려 든다. 우직한 연구자가 10번 반복 측정할 때에, 꾀돌이 연구자는 3번만 측정해도 결론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수고를 아끼면 결과의 재현성(再現性, reproducibility)이 낮아지고, 덩달아 결론의 설득력도 떨어진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손이 게으른 자는 결코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없는 법이다.
5. 연구 윤리를 지켜라 – 세계적인 학자가 되려는 야심을 갖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논문 발표가 급해도 생명의 존엄성을 허술히 생각하거나, 또 불확실한 실험 데이터를 발표해서는 안 된다. 데이터를 조작해서, 또는 생명윤리를 지키지 않아서, 저 높은 곳에서 나락으로 추락한 스타 연구자들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라. 욕심이 지나치면 죄를 낳는 법이다.
6. 초고령화(超高齡化) 시대를 상정하라 – 2017년 Lancet 2월호를 보면 2030년대에는 우리나라 남녀의 평균 수명이 90세를 넘게 된다고 한다. 문자 그대로 초고령화 시대에 살게 되는 것이다. 이는 곧 우리나라 인구 중 일상생활기능이 저하된 노인이 차지 하는 비중이 엄청나게 커진다는 말이다. 여러분의 연구는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선도하거나 또는 적어도 그 변화에 부응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연구는 현실에서 외면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7.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라 – 연구에 몰두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그런 생활 중에서도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해야 한다. 나는 연구에만 몰두하고 나머지 인생 문제는 남이 다 해결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상황은 절대 오지 않는다. 여러분은 아무리 바빠도 인간으로서의 도리는 다 하며 살아야 한다.
때를 놓쳐 끝내 결혼을 하지 못하는 연구자들이 많다. 가정을 이루지 못하면 오히려 계속 연구에 몰입하려는 초심을 지키기 어려워진다. 그러니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일찍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라. 결혼과 육아는 사람이 마땅히 거쳐가야 하는 하는 필수 과정이다. ‘결혼하라!’ 이는 내가 가장 확신을 갖고 젊은이에게 권하는 말이다.
2018-03-14 09:38 |
[기고] <243> 하목사님
2011년 8월에 소천하신 온누리 교회의 고 하용조 목사님은 유연하고 푸근한 분이셨다.
1. 그럼 그만 두세요
외교관인 M 집사는 뉴욕에 근무할 때 교민들을 상대로 ‘성경의 맥을 잡아라’라는 주제의 성경공부를 인도하고 있었다. 인기가 매우 높았는데 어느 날, 교민들로부터 항의를 받았다. 공무원이 특정 종교에 대한 강의를 해도 되느냐? 일과 후에 한다고는 하지만 강의 준비로 일과 시간을 뺏길 것 아니냐? 하는 것이었다. 고민에 빠진 M 집사는 얼마 후 하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 ‘어찌하면 좋겠냐?’고 물었다.
하 목사님은 “그럼 그만 두시죠”라고 대답했단다. ‘믿음의 길에는 고난이 따르기 마련이니 흔들리지 말고 밀고 나가라’ 라는 대답을 기대했던 M집사는 예상 외의 대답에 몹시 놀랐다. 뒤이어 감동과 마음의 평강을 누리게 되었다. 결국 M 집사는 나중에 더욱 유명한 성경공부 강사가 되었고 현재는 목사가 되었다.
2. 너무 뜨거우면 데어요
세브란스 병원에 근무하던 L교수가 장로 피택(被擇)을 권고 받고 하 목사님에게 말했다. “저는 믿음이 뜨겁지 못해 장로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자 하 목사님은 “너무 믿음이 뜨거우면 옆의 사람들이 데어요” 하였다.
L 교수는 다시 “저는 병원 의사라 바빠서 교회에 자주 나갈 수가 없습니다”라고 사양의 뜻을 밝혔다. 그러자 하 목사님은 “교회 오지 마세요, 그냥 병원에서 사역하세요” 했단다. L 교수는 그만 할 말이 없어졌다고 한다. 결국 그는 그 후 교회의 대표적인 장로가 되었다.
3. 그냥 주고 나오세요
교회의 원로 장로님한테 들은 이야기이다. 사업을 하던 그 분은 하 목사님의 부탁으로 가까운 섬에 교회를 개척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몇 년간 온갖 수고를 다 해 드디어 교회를 지을 땅을 확보하였다.
그런데 막상 교회를 지으려 하자 그 섬의 다른 교단 책임자들이 찾아 와, ‘이 섬에 온누리 교회를 세우면 우리 교단 교회들이 살아 남을 수 없을 것 같으니 제발 교회 건립을 취소해 달라’고 하였단다. 그래서 장로님은 하 목사님을 찾아가 ‘어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하 목사님은, “그럼 그냥 포기하고 나오시죠” 하더란다. ‘아니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고생을 해서 마련한 땅인데, 그냥 포기하고 나오라니?’ 장로님은 어이가 없어 맥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할 수 없어 ‘포기하겠다’고 말하고 섬을 나왔다.
그랬는데 그 후 어느 날 그 교단에서 사람들이 장로님을 찾아 와, ‘제발 원래 계획대로 온누리 교회를 세워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웬일인가 알고 보니 ‘만약 이 섬에 온누리 교회를 못 세우게 하면, 우리들도 기존의 교회에 안 나겠다’고 섬 주민들의 반발하였던 모양이다. 결국 장로님은 기존의 교단과 아무런 갈등 없이 그 섬에 교회를 세울 수 있었다.
4. 세미나하지 마세요
생전 하 목사님 설교 중에 이런 말씀이 있었다. “여러분, 교회 현관에 누가 X을 싸 놓았거든, 근본적인 재발 방지대책 세운다고 세미나 하지 마세요. 그냥 본 사람이 조용히 치우세요”
지금까지도 울림이 있는 말씀이었다.
5. 그 놈이 그 놈
어느 날 지구촌 교회 이동원 목사님이 온누리 교회에 와서 설교를 하게 되었다. 사회자는 무심코 버릇대로 “오늘 설교는 하용조 목사님이 하시겠다”고 소개하였다.
뒤이어 강단에 선 이 목사님은, “방금 사회자가 나를 하용조라고 잘못 소개했는데, 뭐 괜찮습니다. 다 그 놈이 그 놈입니다” 하였다. 그 말에 참석자들은 박장대소하였다. 이동원 목사의 아량과 재치, 두 사람의 격의 없는 우정과 마음 그릇의 크기가 감동을 주는 해프닝이었다.
이처럼 유연하고 푸근해서 사람들을 다가 오게 만들던 하 목사님이 새록새록 그립다.
그 분의 병세가 깊어졌을 때 내게 두 번 전화를 주셨다. 한번은 일본에서, 한번은 세브란스 병원에서였다. 두 번 다 내게 하신 말씀은 “책을 쓰세요” 뿐이었다. 신앙 간증 같은 책을 쓰라는 말씀 같았지만, 나는 당황해서 “네?” 소리밖에 할 수 없었다. 지금껏 감히 그런 책을 쓸 수 없는 내가 부끄럽고 죄스러울 따름이다.
2018-02-28 09:38 |
[기고] <242> 혼자서도 잘 산다구요?
누구나 늙을수록 누군가 함께 놀아주길 바란다. 여기에서 ‘누군가’란 단연 손주, 자식, 며느리, 사위 같은 가족을 말한다. 젊어서는 혼자 사는 게 좋을 때가 많다. 혼자가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 ‘혼밥’ ‘혼술’을 즐기는 젊은이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젊은이가 모르는 게 한가지 있다. 늙으면 본의 아니게 몸이 아프고, 우울해지고, 외로움을 타게 된다는 사실이다. 또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나도 그랬었다. 어머니가 편찮으시다고 말씀하시면 ‘또 시작이신가’하고 귀찮게만 생각했었다. 이제 와 생각하니 나는 참 무심한 자식이었다.
의사도 자신이 병을 앓아 보고 나서야 환자를 살갑게 치료한다고 한다. 비로소 환자의 고통을 이해하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젊은이가 자기가 경험해보지 못한 노년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얼마 전 유행하던 노래에 “너 늙어 봤냐, 나는 젊어 봤단다”란 가사가 있다. 늙은이는 젊어 봐서 젊은이를 이해할 수 있겠지만, 젊은이는 늙어보지 못해서 늙은이를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내용이다.
아무튼 늙은이는 이런 저런 이유로 누군가 곁에 있어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자식보고 그래 달라고 하기가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우선 젊을수록 바쁜 세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손주들도 학원 다니느라 할아버지 할머니와 놀아 줄 시간이 없어졌다. 어쩔 수 없이 늙은이는 스스로 자신의 아픔과 외로움을 감당해 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대개 교양(敎養)있는 사람일수록 자식에게 덜 의존하려고 노력한다. 교양이란 음악 미술 영화의 감상, 독서, 산책 등처럼 혼자 잘 노는 기술을 말한다. 이런 기술, 즉 교양이 없을수록 자식들이 싫어한다. 자식만 바라보고 살기 때문이다. 그래서 늙은이에게 교양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늙은이는 누구나 교양 있게 늙다가 품위 있게 죽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천부적으로 교양이 없는 사람도 적지 않다. 옛날 시어머니가 흔히 했던 며느리 괴롭히기도 어쩌면 심심해서, 외로워서, 즉 교양이 없어서 할 수 밖에 없었던 행동일지도 모르겠다.
소위 교양이 있는 (척 하는) 사람은 이런 행동을 자제하지만, 아무리 교양이 있어도 더 나이를 먹어 몸이 아프거나 우울증 등이 생기면, 내심 자식들이 안 놀아주나 바라게 된다.
다만 겉으로 괜찮은 척, 교양 있는 척, 위선을 떨고 있어서 남들이 잘 인식하지 못할 따름이다. 아무튼 혼밥, 혼술은 특히 늙어서는 절대 피하고 싶은 못된 생활양식이다.
자식, 특히 손주를 간절히 보고 싶어하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무지하게 많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자식 사랑은 내리사랑이라고 하더니 우리 부부도 정말 아들딸보다 손주가 더 예쁘다. 내리사랑은 하나님의 섭리인 듯 하다.
함께 살며 수시로 손주들의 재롱을 즐기는 우리 부부지만, 우리도 몸이 아플 때면 자식이 그리워진다. 하물며 가족과 가정도 없이 평생을 혼자 사는 독거노인의 삶은 얼마나 쓸쓸하겠는가?
응급 시 119에 전화 걸어줄 사람, 아플 때 병원에 데려다 줄 사람도 없는 노년을 산다는 것은 서러운 일이다. 그것은 결코 교양 있는 삶이 아니다.
요즘 비혼(非婚)이 무슨 풍조(風潮)처럼 되어 있지만 20-30년 후, 나는 사회가 독거노인 생활의 어려움을 심각하게 인식한 다음에는 다시 모든 사람이 결혼을 하는 시대로 돌아 오게 되리라 믿는다.
2030년이 되면 인류 최초로 평균수명이 90세가 되는 나라가 출현한단다. 그리고 그 나라가 바로 우리 대한민국이란다. 작년에 Lancet이라는 의학잡지에 실린 내용이다. 머지않아 인생의 대부분은 늙은이로서 살게 될 모양이다. 그러니 젊은이들이여, 결혼해서 가족과 함께 늙어가기 바란다.
우리 부부도 교양 있게, 자식들에게 민폐 끼치지 않고 인생 말년을 잘 보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우리도 어느덧 자식의 따듯한 말과 사랑의 기도가 그리운 나이가 되었다. 늙을수록 자식들, 특히 손주들을 더 자주 만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바람이다.
2018-02-14 09:38 |
[기고] <241> 13년만의 걷기, 그리고 구세주
2001년 경미한 보행 장애를 겪고 있던 3살짜리 여아 (A양)가 대구의 한 대학병원에서 뇌성마비 판정을 받았다. 수 차례 입원치료를 받고 국내외 병원을 전전했으나 상태가 나아지지 않았다.
20세가 된 2012년 7월, 전처럼 재활치료를 받던 중 물리치료사 윤씨로부터 “뇌병변이 아닌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혹시나 하고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다시 진찰을 받았다.
의료진은 MRI 사진 등을 보더니 이 병은 ‘뇌성마비가 아니라 도파 반응성 근육긴장이상’이라고 했다. 즉 신경전달 물질과 관련된 효소의 이상으로 주로 소아에게 나타나는 소위 ‘세가와병’이라는 인데, 소량의 도파민을 투여하면 치료할 수 있는 병이라고 대구 병원과는 다른 진단을 내린 것이다.
새로운 진단에 따라 도파민을 투여 받은 A양은 투여 개시 단 1주일만에 스스로 걷게 되었다. 13년을 못 걷던 사람이 1주일 만에 기적적으로 걷게 되다니 기적이 얼마나 감격했겠는가? 지난 13년간이 누워지낸 세월이 억울하게 생각된 A양과 A양의 아버지는 대구의 그 병원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재판부는 그 당시의 의료 기술로는 세가와 병이라고 진단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고 “환자에게 1억원을 배상하라”는 강제조정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환자 가족은 이 결정을 수용했다고 한다. 이상은 2017년 12월 6일자 한국일보 기사를 가감한 것이다.
13년 누워있던 세월을 어찌 1억원에 보상받을 수 있겠는가? 100억이라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이 판결은 환자의 삶을 너무 낮게 평가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대구의 그 병원도 고의(故意)로 오진(誤診)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의료수준으로 세가와 병인 줄 알기 어려워 그리 진단한 것이라니 크게 나무랄 수도 없는 법적 상황이었던 모양이다.
A양에게 있어서 세가와 병이라고 새로운 진단을 내려 준 의료진은 구세주(救世主)였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당신의 병은 뇌성마비가 아닌 것 같으니 다른 데 가서 다시 진찰을 받아보라’고 말해 준 물리치료사는 환자를 구세주 앞으로 인도한 복음(福音)의 전도자였던 셈이다.
이 세상의 의료진은, 극히 일부 악덕(惡德)한 케이스를 제외하고는, 모두 환자의 치유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들은 모두 선(善)한 의도로 환자 치료에 임하는 것이다. 그러나 환자의 입장에서 보면 A양의 경우처럼 어느 의료진을 만나느냐에 따라 병을 고치느냐 못 고치느냐가 극명하게 달라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환자를 다른 의료진이나 다른 의료기관으로 보내는 것이 선한 의도라고 할 수 있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자기가 치료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며 환자를 붙잡아 둔 결과, 환자의 생명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였다면 그 의료진의 고집은 더 이상 선의(善意)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비슷한 의미에서 문외한(門外漢)들이 어떤 환자에게 섣부른 조언을 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 그 조언 때문에 환자가 더 좋은 진료를 받을 기회를 늦추거나 잃게 되었다면 그 조언은 결과적으로 악(惡)한 결과를 낳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지어 의료진까지도, 환자의 질병이나 건강에 관해 조언을 하거나 의술을 베풀 때에는 늘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행여 나 때문에 환자가 더 좋은 치료를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TV를 보면 건강에 대해 지나치게 단정적인 조언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행여 그들의 조언 때문에 시청자들의 건강이 훼손되지 않기를 기원할 따름이다.
며칠 전 교회에서 ‘왜 예수님만을 구세주라 하는가?’에 대한 설교를 들었다. 나에게는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영육(靈肉)을 살려 줄 진정한 구세주 단 한 명이 필요하다는 말씀으로 들렸다. 선한 의지를 가진, 그러나 환자를 살릴 능력이 모자라는 의료진을 모두 구세주라 할 수는 없다는 말씀이다.
새 해 아침, 물리치료사의 복음을 경청했던 A양처럼, 나를 구세주 앞으로 인도하는 진정한 복음에 더욱 귀와 마음을 열고 살기를 다짐해 본다. 근하신년(謹賀新年)
2018-01-31 09:3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