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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17> 일등들의 돌이키기
요즘 한 때 잘 나가던 사람들이 국회, 검찰, 특검이나 헌재에 불려 나가는 모습이 티브이에서 끊이지 않는다. 이들을 보면서 “잘 나갈 때가 위험한 때”라고 하신 고 하용조 목사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그 분은 ‘잘 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 위험한 순간에 처해 있음을 깨달아라’ 하셨다. 그러면서 “인생에서는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는 말씀도 강조하였다.
사람들은 일등을 좋아한다. 특히 부모는 자식들이 모든 면에서 일등(一等) 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일등만 좋아하다가는 큰 코 다칠 수 있다 아프리카 밀림에 간 두 사람(A, B)이 갑자기 사자를 만났단다.
A는 체념을 하고 가만히 서 있었으나, B는 A보다만 빨리 도망 가면 잡아 먹히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잽싸게 내달렸다. 결과는 어찌 되었을까? 놀랍게도 사자는 이왕이면 싱싱한 먹이가 좋겠다고 생각하여 발이 빠른 B를 잡아 먹었단다. 일등을 하는 것이 죽을 수가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약창춘추 32. ‘일등의 운명’ 참조).
우리는 우리의 인생 항로의 끝에 영광이 기다리고 있을지 아니면 사자의 입이 기다리고 있을지 잘 알지 못한다. 사자의 입이 기다리고 있다면 발길을 돌려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은 그 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생각도 해 보지 않고 그저 무조건 빨리 달리라고만 한다.
부모가 자식에게 강요하는 그 일등의 길이 어쩌면 아이를 ‘죽음에 내 모는 길’일지도 모르는 체 말이다. 요즘 법정에 불려 다니고 있는 사람들이 대개 한 때 엄청 잘 나가던, 말하자면 ‘일등’을 하던 사람들임을 생각해 보면, 무조건 일등을 추구하는 ‘일등 철학’이 얼마나 믿을 것이 못 되는지 실감하게 된다.
오래 전 일본 정계에서 부패 스캔들이 터졌을 때 “스캔들의 주역들이 대개 동경대학 출신이니 특히 동경대 교수들은 입을 다물라. 제자들을 잘못 가르쳐 놓고 이제와 무슨 염치로 정의를 떠드는가?”라는 취지의 글을 일본 신문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나는 요즘 우리나라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사람들의 상당수가 서울대 출신인 사실을 보면서,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서울대 교수나 출신들은 앞장 서 회개하라, 국민들에게 사과해라!”
잘 나가는 사람들은 마땅히 그 뛰어난 능력을 세상에 모범을 보이며 사는 데 사용하여야 한다. 그들이 세상에서 누린 명예와 권력과 부는 모두가 다 세상에서 받은 대접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세상에 감사하며 세상 사람들에게 빚진 자의 심정으로 살아야 한다.
만약에 그들이 그 좋은 머리와 능력을 이용하여 권력과 부를 선점(先占), 독점(獨占)하고 사람들 머리 위에 군림(君臨)하려 들었다면 그것은 그들이 받은 축복을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일뿐더러 세상의 대접에 대한 배신(背信)이다. 잘못된 길의 끝에 사자가 입을 벌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내가 출석하는 교회의 올해의 표어는 “돌이키면 살아나리라”이다. 이는 우리 교회부터 회개하여 세상을 바르게 만드는 밀알이 되자는 취지일 것이다. 이 표어를 뒤집어 보면 ‘돌이키지 않으면 죽는다’는 절박한 말이 된다.
사람이 독약을 잘못 먹었을 때 우선 그 독을 돌이키지(吐하는) 않으면 죽는 것처럼, 교회나 세상도 잘못 들어선 길을 돌이켜 바른 길로 들어서지 않으면 머지않아 다 죽을지도 모른다. 돌이키지 않고 잘못된 길로 열심히, 빨리 달리는 것은 멸망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그래서 성경은 끊임없이 가르치고 있다. ‘복을 받으려면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바른 길로 들어서라고’.
그러면 어떤 길이 바른 길일까? 나의 능력 밖의 일이지만, 감히 생각하자면 일단은 받은 은혜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정직 성실한 태도로 세상을 삶에 다름 아닐 것이다. 올해는 우리 교회와 서울대 등 소위 세상의 많은 일등 들의 돌이키기 운동이 세상을 덮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모범을 따르게 되고 마침내 나라와 세상이 살만한 곳으로 바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달리 희망이 없어 보이는 요즘에 바라는 나의 기원이다.
2017-02-08 0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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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16> ‘서울대약대100년사’ 발간 소감
서울대 약대 이봉진 학장은 조선약학강습소 설립 100주년인 2015년 6월 12일 ‘가산약학역사관’을 개관한 데 이어 ‘서울대학교약학대학 100년사(이하 ‘100년사’)’를 발간하기로 결정하고 그 편찬을 나에게 부탁하였다.
나는 이상섭, 김낙두, 김종국, 김병각, 이은방 명예 교수님 등의 자문과 김진웅, 박정일 교수의 도움을 받아 2016년말 원고를 탈고하고 마침내 2017년 1월 20일 100년사 발간기념회를 열게 되었다.
이 책의 발간에 있어서 역사적 사실 하나하나에 대한 근거 자료를 발굴해 준 장윤이 학예사의 탁월한 수고에 특별히 감사한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100년사는 야담(野談) 수준을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원고 수정 및 보완 과정을 잘 참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원고의 미세한 오류까지 찾아내고 개선안을 제시함으로써 책의 완성도를 대폭 높여 준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의 수고에도 특별한 감사를 드린다.
단언컨대 다른 출판사라면 이 과정을 감당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또한 약학사 연구발전기금 또는 발간비 후원을 통해 이 책의 발간을 격려하고 후원해 주신 동문 여러분께 머리 숙여 감사 드린다.
처음에 이 책을 구상할 때에는 100년의 역사 중 초반부에 중점을 둘 생각이었다. 초반부의 역사는 가산약학역사관을 개관하면서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모처럼의 기회이니 관악산 캠퍼스 시절도 함께 다뤄달라는 주변의 부탁이 있어 결국 최근의 역사까지도 기술하게 되었다.
그런데 관악 캠퍼스 시절은 42년이나 될 뿐만 아니라 교수와 학생들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다뤄야 할 내용이 방대하였다. 이 과정에 대해서는 현직 교수들의 협조를 받기는 하였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 책은 원래 2016년 9월말까지만 다룰 생각이었다. 그러나 편찬 과정이 지연되면서 2016년 연말까지 일어난 사항을 일부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을 발간하면서 100년간의 발자취에 대한 자료가 제대로 보존되어 있지 않음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예컨대 약학대학의 을지로 캠퍼스나 연건동 캠퍼스에 대한 전경 사진도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을 정도이었다.
한편 이 책을 편찬하면서 몇 가지 특별한 소득을 얻었다. 우선 전에는 은사님들의 강의가 부실하였다는 등 학교에 대한 불만을 많았었는데, 이번에 100년간의 역사 전체를 개관하다 보니 은사님들은 그 때 그 때 주어진 여건 속에서 나름대로 학교 발전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셨음을 깨닫게 되었다.
예컨대 부산 피난 시절에도 휴강도 없이 강의와 실습을 성실하게 진행하신 은사님들의 열정에는 가슴이 뭉클하였다. 오늘날 서울대 약대의 연구력이 세계 일등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 바탕에는 은사님들의 피땀 어린 노력이 있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두 번째 소득은 다수의 조선약학교 학생들이 일제 하 1919년의 삼일운동에 적극 참여한 자료를 처음으로 발굴해 낸 것이었다. 그러나 이 분들이 학교를 졸업하지 못하는 바람에 약학대학 동창회 명부에 그 이름이 빠져 있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하루 속히 학적을 복원하여 그 분들의 명예를 높여드려야 할 것이다.
세 번째 소득은 선배님들이 1960년의 4.19 혁명에 참여한 일을 밝힌 일이었다. 당시 동아일보에 ‘가운을 입은 서울대 의대생들’ 이라는 설명과 함께 흰 가운을 입고 데모하는 사진이 실렸었는데, 실은 이는 약대생들이 데모하는 장면이었다.
편찬위는 17회 김병년 선배 등의 도움을 받아 사진 중 인물 하나 하나에 실명을 붙임으로써 사진 중 학생들이 약대생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었다. 이 기사는 추후 동아일보에서 정정해 주어야 할 것이다.
책이 발간 단계에 이를수록 편찬 초기에 충만했던 자신감은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편찬인의 능력 부족으로 일부 사실이 누락되거나 부정확하게 기록되었을 가능성을 느껴졌기 때문이다. 또 학교 중심으로 기술하다 보니 동문들의 활약상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 점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부디 동문을 비롯한 독자 제현의 관용을 부탁 드린다. 근하신년!
2017-01-25 09: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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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15> 믿음 이야기
1. 교회에 다니는 남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믿음이 약하다, 앞으로 갈 길이 멀다’라고 말한다. 반면에 그들의 부인은 ‘자기 남편의 믿음이 예전보다는 좋아졌지만 궤도에 오르려면 아직 멀었다’고 말한다. 남편들이 아내의 훈육(訓育) 대상인 것은 교회에서도 처지가 가정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개미끼리 모이면 큰 개미도 있고 작은 개미도 있을 것이다. 큰 개미가 작은 개미 앞에서 덩치 자랑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보기엔 개미란 그저 다 땅바닥에 붙어 있는 작은 생물일 뿐이다. 개미가 덩치가 커 봤자 얼마나 크겠는가? 마찬가지로 교인들 간에 믿음의 크기를 비교한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란 생각이 든다.
물론 모든 교인의 믿음의 크기가 다 비슷비슷하다는 뜻은 아니다. 강렬하게 예수님 향기를 풍기고 순교하신 고 손양원 목사님처럼 엄청난 믿음의 본을 보이신 훌륭한 교인들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나 같은 보통 교인들은 믿음의 크기를 비교하기에 앞서 부족함을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는 말이다.
2.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이 연약하여 교회 내에서 어떤 직분(職分)이나 사역(使役)을 맡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겸손한 마음에서 그러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 굳건해진 다음에야 어떤 일을 하겠다는 생각도 꼭 맞는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교만한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이제 내 믿음이 굳건해 졌다’라고 생각되는 순간에 도달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부족한 믿음 가운데에서나마 직분을 맡거나 사역을 감당하면 그 때부터 믿음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은 완료형이 아닌 진행형인 모양이다. 그렇다면 지나친 겸손은 오히려 완벽을 추구하는 위장된 교만이거나 반항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3. 나는 처음 장로가 되었을 때 정말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두렵고 떨리고 거북한 심정을 억제하기 어려웠다. 특히 회중(會衆) 앞에 서서 대표 기도를 할 때에는 ‘나 같은 사람이 감히 하나님 앞에 소리 내어 기도를 올려도 되는지’ 송구하고 두려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해가 지나고 대표 기도 횟수가 늘어나면서 그 두려움이 점차 줄어들고 있음을 느낀다. 정말 뻔뻔하고 두려운 일이다.
4. 나는 늘 문 아무개 목사님의 간증(干證)을 기억한다. 그 분은 옛날에 직업상 술을 마시고도 주일이면 습관처럼 예배에 참석하였다고 한다. 어느 날 예배에 참석한 그가 입을 열어 찬송가를 부르자 옆에 앉은 부인이 ‘술 냄새 나니 입을 다물라’고 했단다. 그 순간 그는 ‘나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않게 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에 생각이 미치면서 번쩍 정신이 들었다고 한다.
사실 나는 많은 기성 교인들의 행태가 기독교의 전도를 막고 있다고 생각한다. ‘교인들이 더 나빠요' 소리가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들리기 때문이다. 비교인들의 도덕 기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교인들이 남을 구원하겠다고 예수님을 전도하는 것이 얼마나 기이한 모습이겠는가? 그러므로 교인들은 전도에 앞서 우선 비교인의 모범이 되는 생활부터 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5. 주제 넘지만 내가 생각하는 믿음의 큰 바탕 중 하나는 하나님 은혜에 대한 감사이다. 나에게 주어진 모든 일이 하나님 은혜로 주어진 사실을 깨닫고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예배는 물론 이웃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생각을 하게 마련이다.
모든 것이 내가 잘나서 받은 것이 아님을 깨달은 사람은, 자신 및 이웃에 겸손하게 되고,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게 되며, 나아가 자신에게 주어진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까지 이르게 되지 않을까? 믿음 생활은 성경 구절 많이 암송하는 수준을 벗어나, 범사(凡事)에 감사하는 마음가짐으로 시작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자칫 이단(異端)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이쯤에서 내 사설 학설을 덮기로 한다.
2017-01-04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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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14> 유머의 유익성
C 교수님은 유머에 천부적인 재주를 갖고 계신 것 같았다. 한번은 ‘어떻게 그렇게 유머를 잘 하시느냐’고 여쭈었더니, 자기도 피나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하셨다. 물론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그 분의 유머는 연습해서 얻어질 수 있는 수준 그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한번은 나를 만나자 마자, “심박사, 나 이 구두 새로 샀는데, 왼쪽 한 짝에 20만원 주었어”하는 것이었다. 당시 구두 한 켤레는 비싸 봤자 20만원 하던 때이었다. 나는 놀라서 “그 구두가 그렇게 비쌉니까?” 물었다. 그랬더니 그 분은 “근데 왼쪽 하나만 사면 오른쪽은 무료로 주더군”하는 것이었다. 이 대목에서 나는 완전히 C 교수님의 유머를 숭배하는 사람이 되었다.
세상을 사는 데 유머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긴 하지만, 아직도 유머를 즐기는 사람을 조금 가볍게 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아 보인다. 나는 C 교수님과 여러 해를 함께 지내면서 그 분의 유머가 어떤 면에서 유익한가를 살펴 볼 수 있었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유머는 모임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 준다.
그러나 C 교수님과 함께 있어 보면 유머의 힘이 그 정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유머를 주고 받다 보면 근엄한 표정으로 심각한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놓치게(?) 된다. 그런 자리에서의 심각한 이야기란 누군가를 비방하거나 험담하는 내용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심각한 대화를 나누고 헤어지면 뒷맛이 영 개운치 않은 경우가 많다. 반면에 유머는 그 자리를 즐겁게 만들 뿐만 아니라 헤어지고 나서도 뒷맛을 개운하게 해 준다.
C 교수님과 함께 맥주를 마시러 갔다가 그 분의 유머에 입이 아플 정도로 계속 웃었던 적이 여러 번 있다. C 교수님이 하면 같은 이야기라도 감칠 맛이 살아난다. 과연 C 교수님은 유머의 달인이시다. 한편 C 교수님한테 들은 유머를 곧장 행정실 직원들에게 전했다가 냉소(?)를 산 교수님도 있었다고 한다. 유머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세상을 살면서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살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남을 헐뜯거나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간질하는 행위는 하지 않는 것이 사람 도리가 아닐까 한다. 그런데 심지어 교회에서도 믿음이 좋다는 사람이 ‘정의’의 이름으로 남을 정죄(定罪)하는 사례가 심심치 않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정의는 사람과 세상을 파괴시킬 뿐이다. 반면에 유머는 최소한 대화를 험담으로 이르게 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내가 C 교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깨달은 교훈이자 지혜이다. 그러므로 유머는 ‘사랑이 없는 정의’보다는 훨씬 세상에 유익해 보인다.
나는 유머 면에서 C 교수님의 수제자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한다. 그 분처럼 되도록 대화의 상대방을 즐겁게 만들어 주고 싶다. 엄숙주의는 천성적으로 나한테 맞지 않는다. 우리 아버지도 밖에서 친구분들과 대화를 나누실 때에는 의외로 유머가 많으셨다. 물론 집에서는 근엄한 척 하셨다. 그러고 보면 유머를 좋아하는 나의 성격은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은 모양이다.
아버지와 나의 또 다른 공통점은 둘 다 체격이 왜소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유머가 왜소한 사람들 공통의 생존 전략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덩치 큰 사람이 무서우니까 그 사람이 화나지 않도록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는 목적으로 유머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말이다.
문득 코미디언이나 개그맨들의 평균 체격이 다른 사람들보다 왜소하다는 통계가 있는지 알아 보고 싶어진다. 이렇게 생각하니 유머를 좋아하는 내가 조금은 비굴해 보이기도 한다. 부디 내 추론이 맞지 않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C 교수님으로부터 들은 유머 하나를 추가한다. 순경이 도망가는 도둑놈을 향해 “게 서거라” 외치며 쫓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한참을 도망가던 도둑놈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돌아 서더니 “야, 너 같으면 서겠냐?” 이렇게 말하곤 다시 도망 가는 것이었다. 얼마나 ‘말도 되지 않는 소리’ 였으면 그 바쁜 도둑놈이 이런 대꾸를 하였겠는가?
말 되는 일만 일어나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2016-12-21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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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13> 관악 약대의 아버지 김영은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은 현재 세계의 약대 중에서 교수 1인당 발표 논문수가 가장 많은 대학으로 공인 받고 있다. 1915년에 첫걸음을 뗀 조선약학강습소 시절은 말할 것도 없고, 1980년대까지만 해도 존재감이 미미하였던 우리나라의 약학이 이처럼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것은, 1975년 8월 서울대 약대를 연건 캠퍼스에서 관악 캠퍼스로 이전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1968년에 마련된 서울대학교 종합화 10개년 계획에 따르면 당시 서울대학교는 서울, 경기 등지에 분산되어 있던 각 단과대학들을 세 개의 캠퍼스로 모으고자 하였다. 즉 농대(수원 캠퍼스), 의대, 치대, 약대, 간호대, 생약연구소 등(연건 메디컬 캠퍼스)를 제외한 단과대학은 모두 관악산에 마련하는 신 캠퍼스로 모으고자 하였다.
그러나 약대 교수들은 연건 메디컬 캠퍼스를 떠나 관악 캠퍼스로 합류하고 싶었다. 그것은 장소가 비좁아 장래 발전 가능성이 낮은 연건 캠퍼스를 벗어나 광활한 관악 캠퍼스에서 많은 타 학문들과 활발하게 교류하며 발전하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연건 캠퍼스에 남았다가는 의대의 등살(?)에서 벗어 나기 어렵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당시 약대의 김영은(金泳垠) 학장(재임기간 1969.4-1972.9)은 틈만 나면 동숭동에 있는 서울대학교 총장실을 찾아가 ‘총장님, 약대도 관악으로 보내주지 않으려거든 내 학장직을 잘라 주시오’ 하며 강경하게 관악 이전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메디컬 캠퍼스의 명분이 워낙 그럴듯하였고, 더구나 당시 서울대학교 총장이 의대 출신인 한심석(韓沁錫) 박사이었기 때문에, 약대가 메디컬 캠퍼스를 벗어나 관악으로 이전하겠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가질 수 없었다.
이 지점에서 때로는 벽창호라고 불릴 만큼 독특한 개성의 소유자이었던 김영은 학장의 성격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어느 날 그는 또다시 총장실을 방문하여 총장에게 약대의 이전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총장실 앞 복도가 시끄러워져 문을 열고 내다 보니 상과대학 학생들이 총장실을 점거하려고 몰려오고 있었다. 당시 상과대학은 관악 캠퍼스로 이전하면서 경제학과는 사회대학으로, 경영학과는 경영대학으로 나뉘게 결정되어 있었는데, 이에 결사 반대하는 상대 학생들과 동문들이 총장실로 쳐들어 온 것이었다.
갑작스런 사태에 수위 등도 당황한 나머지 어쩌지 못하고 있을 때, 김영은 학장이 총장실 문을 열고 나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학생들에게 대성 일갈하였다. “도대체 자네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이 난리를 치나? 당장 물러가지 못하나?” 갑작스런 김학장의 위세에 눌린 학생들은 주춤하게 되었고, 그 사이에 정신을 차린 수위 등이 상황을 수습할 수 있었다. 김영은 학장이 총장실 난입을 막아낸 것이다. 총장은 휴~ 하며 가슴을 쓸어 내렸을 것이다.
며칠이 지난 뒤 김 학장이 다시 총장을 찾았더니, 총장이 먼저 김 학장에게 “약대가 꼭 관악으로 가야겠습니까?” 물었다. 김 학장이 ‘물론입니다’ 대답했더니 총장은 "그럼 건설 본부장을 한번 만나 보세요” 하더란다. 총장은 총장실 점거 사태를 막아 준 김 학장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것 같았다고 한다. 당시 건설 본부장은 서울대의 관악 이전을 위해 박정희 대통령이 특별히 임명한 월남전 참전 예비역 장군이었는데, 김 학장이 사전에 설득해 놓았기 때문에 약대의 관악 이전에 순순히 찬성하였다.
마침내 1971년 4월에 시작된 1단계 건설 공사에 포함되지 못하였던 약대가, 2단계 건설 공사에 포함되어 1974년 4월에 공사에 착수, 1975년 8월 관악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당시 김영은 학장이 상대 학생들의 총장실 난입을 막아내는 해프닝이 없었다면 서울약대가 연건동을 벗어나 관악으로 이사 올 수 있었을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고 김영은 학장을 ‘관악 서울 약대의 아버지’라고 부르고 싶다.
이상은 며칠 전 당시 학생담당 학생과장이었던 김병각 교수가 김영은 학장으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라며 내게 전해 준 내용이다. 역사의 뒤안길은 돌아볼수록 흥미진진하다.
2016-12-07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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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12> 대단함과 훌륭함
지난 일요일 점심 식사 모임에 갔더니 내일 모레가 칠순인 한 친구가 아침에 10km 마라톤을 뛰고 왔다고 자랑을 하였다.
그러자 친구들은 “정말이냐? 며칠 전도 아니고 바로 오늘 아침에 그 정도 뛰었다면 앓아 들어 눕는 게 마땅하지, 어떻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스레 나와 앉아 있을 수가 있느냐, 넌 사람도 아니다” 라며 그 친구를 힐난(?) 하였다.
그러고는 모두들 그 친구 건강의 ‘대단함’에 감탄하였다. 그러나 모두들 이 친구가 진짜 ‘대단하다’고 감탄한 대목은 그가 몇 년 째 매일 저녁 10km 이상을 꾸준히 달려왔다는 사실이다.
끊임없는 꾸준함, 뛰기 싫은 날에도 뛰는 정신력, 달릴 때의 인내력, 이 모든 점에서 그 친구는 남들과 다른 “대단한”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티브이 프로그램에 “생활의 달인(達人)”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 프로그램은 신기(神技)에 가까운 재주를 갖고 있는 실로 다양한 분야의 달인들을 소개한다.
예컨대 쌀 한 톨에 여러 글자를 새기는 사람, 종이를 접어 온갖 모형을 만드는 사람, 만두를 빚어 등 너머로 던져 접시에 들어 가게 하는 사람 등 끊임없이 출연시키고 있다. 볼 때마다 “와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다” 하고 감탄을 금할 수 없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세상에 이런 ‘대단한’ 사람들이 도처에 산재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같은 보통 사람에게는 그런 방면에 타고난 재주도 없거니와 무엇보다 그런 경지에 오를 정도로 오랜 기간 동안 반복 동작을 하거나 반복 훈련을 해 낼만한 은근과 끈기가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런 ‘대단한’ 사람들을 그저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훌륭하다’고 부르기까지는 않는 것 같다. ‘대단하다’와 ‘훌륭하다’를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대단함’과 ‘훌륭함’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 잠시 생각해 보게 된다.
잘 모르기는 하지만 ‘대단함’은 ‘보통’과 ‘훌륭함’ 사이 어디쯤에 존재하는 개념 아닐까 한다. 이 가설이 맞는다면 ‘보통’이 ‘대단함’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아마 앞에서 언급한 대로 타고난 재주에 더하여 은근과 끈기, 정신력, 노력, 인내력 등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다면 ‘대단함’이 ‘훌륭함’으로 승화(昇華)되기 위해서는 무슨 덕목이 추가로 필요할까?
지난 9월 교회 식구들과 함께 여수에 있는 고 손양원 목사 기념관에 다녀 왔다. 손양원 목사는 1939년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 사는 여수의 애양원 교회에 부임하였는데, 1948년 공산주의 반란군에 의해 사범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는 두 아들을 총살로 잃었다.
반란이 진압된 후 국군에 의해 살해범이 체포 되어 총살 당할 상황이 되자 손 목사는 계엄사령관에게 간청하여 그를 살려냈다. 그리고 손 목사는 그를 바로 양자로 삼았다. 막내 딸은 ‘오빠를 죽인 살해범을 살려주는 것 까지는 몰라도 그를 양자로까지 삼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고 울며 항변하였단다.
손 목사는 그 딸에게 “네가 성경을 잘못 읽었구나. 성경 말씀에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지, 용서까지만 하라고 했더냐?” 하며 끝내 살인범을 양자로 삼았다. 손 목사는 1950년 6.25 동란 때 주변의 강권을 물리치고 혼자 남아 한센인들을 지키다가 끝내 48세 나이에 총살을 당해 순교하였다.
내가 보기에 손 목사님은 우리나라에 나타나신 예수님이었다. 손 목사님은 정말 ‘대단한’ 행적을 보이며 살다 순교하였다. 그러나 그의 삶은 결코 단순한 ‘대단함’으로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는 피조물인 인간이 과연 어디까지 ‘훌륭’해 질 수 있는지 그 극대치를 보여 주는 삶을 살았다. 그러므로 그의 삶은 거룩한 ‘훌륭함’이었다고 불러도 모자랄 것이다.
그의 ‘거룩한 훌륭함’은 어디에서 어떻게 유래한 것일까? 얼핏 믿음, 감사, 겸손, 정직, 사랑, 희생 같은 단어들이 입술에 맴돌지만 이 모든 단어를 조합해서도 손 목사님의 그 거룩한 ‘훌륭함’은 제대로 설명해 낼 수 없음을 느낀다.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훌륭한’ 사람, 나아가 ‘거룩한’ 사람이 간절히 그리워지는 작금의 정국이다.
2016-11-23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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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11> 뭘 알아야 부러워하거나 감탄을 하지
1. 1989년 미국 인디애나 주에 있는 퍼듀 대학에 가 있을 때 가족과 함께 LA공항에 내린 적이 있다. 귀국 전 미국 서부에 있는 그랜드 캐니언을 구경가는 길이었다. 그 때 그 근처에 사는 대학 동기 A가 차를 가지고 공항으로 마중을 나왔다.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고 그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그의 집으로 향하였다. 한참을 달려가던 그가 내게 “야, 이 차 느낌이 좀 특별하지 않냐?”고 물었다. 무식한 나는 ‘잘 모르겠는데’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차가 속도를 낼수록 착 가라 앉는 느낌이 들지 않냐?”고 다시 물었다. 나는 잘 모르겠길래 다시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몹시 실망한 표정으로 ‘이 차가 그 유명한 독일제 BMW라는 차인데 가격이 매우 비싸지만 승차감이 최고’라는 사실 등을 자랑하기 시작하였다.
사실 나는 그 때까지만 해도 BMW라는 이름도 못 들어 보았으며 승용차의 승차감에 대해서도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촌 놈이었다. 그래서 그 차나 승차감에 대해서 감탄의 말을 하지 못 했던 것이다.
내가 BMW를 제대로 알아 보았다면, “야, 너 출세했구나, 이런 비싼 차를 타고 다니다니 얼마나 좋니, 정말 부럽다” 이렇게 반응했을 텐데…. 그 때 무식해서 친구를 부러워해 주지 못했던 일이 지금도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2. 미국에 처음 간 1988년 뉴욕에 사는 친구 B의 집을 방문하였다. 그의 집은 전형적인 미국식 2층 단독주택이었다. 우리 가족에게 자기 집 소개를 마친 그는 우리 가족의 무덤덤한 반응에 다소 실망하는 것 같았다.
그는 우리들로부터 “와, 집이 정말 크고 좋다. 이 집 비싸지? 야 너 미국 와서 진짜 출세했구나”와 같은 반응을 기대했던 모양이었다. 사실 그가 미국으로 이민 간 1970년대의 우리나라의 집들은 정말 허름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에, 미국에서 이처럼 멋진 2층집을 장만한 것은 스스로도 너무나 대견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1988년에는 이미 우리나라 집들도 제법 좋아져 있었고, 무엇보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미국집은 다 크고 멋있다는 선입감(?)을 갖고 있었기에 우리 가족은 그의 집에 놀라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자가용 차를 갖고 있느냐고도 물었다. 나는 “응, 우리도 차가 하나 있어”라고 대답하였다.
이렇게 대답하는데 왠지 조금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당시 미국으로 이민 가서 온갖 고생 끝에 성공한 동포들에게 있어서 조국 대한민국의 갑작스런 발전은 오직 반가워만 하기에는 무언가 다소 심사가 복잡한 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B가 자기 집을 보여 주었을 때 조금 더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못했던 것을 지금도 미안하게 생각한다.
3. 1989년 약 1년간의 방문교수 생활을 마치고 미국에서 귀국할 때, 늘 고마웠던 국내의 대학동기 C에게 골프 클럽 한 세트를 사다 주었다. 당시 한국에서 미제 한 세트를 미국 가격으로 사기가 쉽지 않은 시기였다. 이를 고맙게 생각한 C는 어느 날 내게 ‘머리를 얹어 준다’며 골프장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미국의 연습장에서 몇 번 연습을 해 본 이래 처음으로 내가 한국의 골프장에 나간 날이었다. 둘이서 호젓이 골프를 치는데, 어느 순간 C가 다소 흥분한 목소리로 자기가 ‘이글’을 쳤다며 떠들기 시작하였다. 나는 골프를 치다 보면 규정타 보다 한두 개 적게 칠 수도 있는 거지 뭘 그런걸 가지고 호들갑을 떠나 생각하였다. ‘이글’이라는 용어도 나는 그 때 처음 들었다.
훨씬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대부분의 골퍼 들은 이글을 치면 ‘기념패’를 만들거나 기념식수를 하는 것이 관례일 정도로 “이글”을 치기란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 후 C는 친구들을 만나기만 하면, ‘이글을 쳤는데도 내가 알아 주지 않더라’고 투덜대곤 하였다. 벌써 오래 전에 고인이 된 C를 생각할 때마다 그 때 마음껏 축하해 주고 널리 친구들에게 자랑을 해주지 못한 것이 마냥 아쉽기만 하다.
지나고 보니 뭘 몰라서 부러워하거나 감탄을 해주지 못해 상대방을 서운하게 만들었던 일들이 아쉬움으로 회상된다.
2016-11-09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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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10> 여수 밤바다
지난 9월 마지막 주말에 단체로 여수 관광을 다녀 왔다. 개인적으로 여수를 방문한 적은 두 번 있었지만 단체로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대절 버스에서 맨 처음 내린 곳은 여수시 만흥동에 있는 ‘여수레일바이크’였다.
레일바이크는 철로 위에 놓인 수레를 4~6명이 함께 페달을 밟아 달리는 기구이다. 처음 타보는 것이었지만 바닷가에 놓인 약 2km의 철길을 왕복하는데 의외로 힘도 들지 않고 무척 재미있었다. 마침 바람도 선선하였다.
요금은 승차인원수에 따라 1인당 2~3만원 정도 하였는데, 주말이라 그런지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정도로 이용객이 많았다. 레일바이크를 타고 조금 가는데 어디선가 “이쪽을 보세요” 하는 스피커 들리길래 흠칫 쳐다 보았더니 그 순간 저 만치에 설치되어 있던 자동 카메라가 “찰각” 소리를 내며 우리들을 찍었다.
그 카메라는 레일바이크 마다 사진을 찍고 있었다. 정해진 코스를 왕복한 다음 출발지점으로 돌아와 바이크에서 내려보니 아까 자동 카메라가 찍은 사진들이 컴퓨터 화면 위에서 우리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좋은 지점에서 찍어서 그런지 모든 사진이 제법 잘 나왔다. 가격을 물었더니 프린트 한 사진 1장에 5천원이고 액자에 넣으면 1만원이란다. 모처럼의 여행인데 돈 좀 쓰자 마음먹고 액자에 넣은 우리 팀의 사진 3장을 사서 팀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돈은 냈지만 레일바이크 사진도 모든 즐거운 추억이 되었다.
그 다음에는 부두에 가서 크루즈 여객선을 타고 돌산대교 밑 여수 앞바다를 1시간반에 걸쳐 왕복하였다. 바다는 잔잔하고 여객선은 제법 커서 뱃멀미는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갑판에 올라 탑승객들과 테이블에 섞여 앉으니 마침 바람도 시원하고 두루 보이는 야경도 최고이었다.
문득 ‘여수 밤바다’ 라는 노래가 있었던 것 같아 휴대폰으로 찾아 보았다. 버스커버스커라는 신기한(?) 이름의 가수가 부르는 이 노래의 가사는 이랬다.
“여수 밤바다, 이 조명에 담긴 아름다운 얘기가 있어 (중략), 여수 밤바다 이 바람에 걸린 알 수 없는 향기가 있어, 나는 지금 여수 밤바다 여수 밤바다, 아 아 아 (후략)”. 갑판 위에서 여수 밤바다를 구경하는 데 딱 맞는 분위기의 노래였다.
이 여객선의 탑승료는 어른 1인당 3만4천원이었다. 결코 싸지 않은 요금이었지만 사람들은 ‘돈 낼만 하네’ 하는 표정으로 여수 밤바다를 즐기고 있었다.
유람선에서 내린 다음에는 여수해상 케이블카를 탔다. 이 케이블카는 여수 돌산과 육지를 연결하고 있었다. 운임은 편도 1만원, 왕복 1만3천원이었다. 불과 10분 거리도 안 되는 거리에 대한 요금치고는 매우 비싼 금액이었다.
역시 야경은 아름다웠다. 그러나 너무 어두워 조명이 없는 곳의 경치가 잘 보이지 않는 것이 아쉬웠다. 이 케이블카는 보통 주말에는 1시간 정도 기다려야 탈 수 있을 정도로 이용객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요금이 비싸다는 생각은 곧 잊어버리기로 작정하였다.
마지막으로 돌산에 있는 여관 규모의 한 호텔에 들어갔다. 방에 들어 가기 전에 저녁부터 시켜 먹었는데, 한정식 비슷하게 나온 음식이 정갈하고 맛있었다. 역시 소문대로 ‘음식은 전라도’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방에 들어가 보니 의외로 방이 깨끗하였다.
누군가 이 호텔은 1박에 십만원 정도 하는데 인터넷으로 예약하면 오만원 이하에도 잘 수 있단다. 사실 여부를 확인해 보지는 않았다. 하루 관광을 마친 우리 일행은 모두 만족한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여수시는 단체 관광객에 대해서는 경비의 일부분을 보조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단체로 구경 오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하며 돌아 다녔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온 관광객도 엄청 많은 걸 보면 아무리 불경기라 해도 준비만 잘 해 놓으면 관광객은 오게 되어 있는 모양이다.
예컨대 레일바이크 타는 도중에 사진을 찍어 주는 것은 정말 잘 준비해 놓은 아이디어 같았다. ‘여수에 와서 돈 자랑 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더니, 과연 여수시는 돈 버는 방법을 잘 아는 도시 같았다.
아무튼 이번 여수 관광은 특별히 좋았다.
2016-10-26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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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09> 회사 맡기기, 물려주기
사례 1 - 외국 서적의 복사판 제작으로부터 시작해서 지금은 작지만 나름대로 건실해진 어느 출판사를 경영하고 있는 사장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이다. 초창기에는 회사가 너무 작아서 소위 인재들을 채용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사장은 종신고용제 도입을 선언하고 틈틈이 직원들의 직무 교육을 실시하였다. 다른 회사 사람들이 젊은 나이에 직장을 그만두고 고생하는 것을 본 직원들은 이 회사를 평생 직장으로 여기며 회사에 충성을 다하게 되었다.
이제 문자 그대로 사장과 직원간에 튼튼한 신뢰 관계가 구축된 것이다. 지금은 사장이 오전 근무해도 회사가 잘 돌아 간다고 한다. 아마 사장이 회사를 비우는 시간이 길어지면 질수록 회사는 더 발전할 지도 모른다.
이미 그 회사 직원들은 사장이 자리를 비우면 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더 열심히 일하는 회사로 바뀌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출판업계의 사정이 아무리 어려워져도 이 회사는 살아 남을 것으로 믿는다. 사장이 직원을 믿고 마음대로 돌아 다닐 수 있는 회사가 어찌 망할 수 있겠는가?
사례 2 - 우리나라 제약회사의 창업주들은 온갖 역경을 딛고 회사를 이루어 놓은 분들이다. 그분들의 노고는 ‘아무리 존경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덧 제약 환경은 그들이 창업할 때와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달라져 버렸다.
그들이 창업할 당시에는 존재하지도 않던 ‘신약개발’이란 화두를 지금은 장삼이사(張三李四)가 가볍게 입에 담는 세상이 되었다. 무엇보다 이제 창업주들이 고령이 되었다. 이제는 자의반타의반 회사를 2세들에게 넘겨 주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이다.
문제는 창업주들의 입장에서 볼 때 2세들의 경영 능력이 영 미덥지 못하다는 것이다. 자신들처럼 산전수전 다 겪어 보지 않은 2세들이 험난한 경쟁의 격랑을 헤쳐 나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2세에게 회사를 물려 주고도 이런 저런 형태로 회사 경영에 관여하는 창업주들이 많다. 물론 2세들은 창업주의 간섭을 싫어한다. 그들은 새 시대에는 새 감각을 갖고 있는 자신들이 회사를 경영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종종 창업주와 2세 간에 갈등이 생긴다. 그러나 드물지만 일찌감치 2세에게 회사를 물려주고 일선에서 완전히 손을 뗀 창업주도 있다. 대단한 용단이다.
사례 3 - 얼마 전 중견 기업을 경영하는 창업주의 고민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 사람의 아들은 회사 계승에 도통 관심이 없는 반면, 딸은 관심도 있고 능력도 있어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들에게 회사를 넘겼으면 하고 바라는 부모와 자식 간에 갈등이 생겼다는 것이다.
나는 건실한 회사 오너에게도 그런 고민이 있을 줄 몰랐다. 그리고 회사를 2세에게 넘겨 줄 때 어느 자식에게 넘겨 줄 것인가 결정하는 것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구나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요즘 청년들에게 ‘롯데 사태를 봐라, 장치 재벌이 될 생각이 있거든 아들 딸 구별 말고 한 명만 낳아라’라는 우스개 소리를 하고 다닌다. 회사는 창업도, 물려주기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닌 모양이다.
맺음말 – 누구나 번듯한 회사 하나쯤 부모로부터 물려 받으면 얼마나 좋을까 공상에 빠져 본다. 어느 초등학교 수업 시간에 담임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각자 자신의 꿈을 말해 보라고 하셨다. 한 아이가 손을 들더니 ‘자신의 꿈은 재벌 2세가 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선생님은 “그것도 좋은 꿈이지” 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 아이는 “근데 선생님 문제가 하나 있어요, 아버지가 영 노력을 하시지 않아요” 했단다. 물론 2세 경영의 어려움을 모르는 아이에 대한 우스개 소리이다.
이상에서 직원에게 맡기거나 자식에게 물려 줄 회사도 없는 주제에 창업주의 걱정, 2세의 걱정 등 별 걱정을 다 해 보았다. 문득 어느 부잣집 화재 현장에서 아버지 거지가 아들 거지에게 했다는 말이 생각난다. “얘야, 너는 평생 집에 불 날 일이 없으니 얼마나 마음이 편하냐? 이게 다 평생 재산 한푼 모으지 않은 네 아버지 덕인 줄이나 알아라. 알겠냐?”
새삼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2016-10-12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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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08> 눈물
1. 1964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의 탄광촌을 방문하여 한국인 광부들과 간호사들을 위로한 일이 있었다. 머나먼 타국에서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고 있던 그들은 대통령을 만나 서러운 눈물을 쏟았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내가 대학에 있을 때 파독 광부와 파독 간호사 부부의 딸인 학생을 만난 적이 있었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던 나는 그 학생을 만난 것이 너무 반가웠다. 그러나 정작 그 학생은 너무나 밝고 의연할 뿐 내 관심에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2. 추석 때 티브이를 보니까 김동건씨가 사회를 보는 ‘가요무대’를 방송하고 있었다. 상파울루에 사는 교민들을 위로하는 방송이었다. 브라질 교민들은 우리나라 최초로 농업이민을 간 분들이다. 초대 가수들은 ‘불효자는 웁니다’, ‘고향무정’ 또는 ‘어머니’ 같은 최루성 가요를 불러대었다.
그런데 교민들 중 눈물을 보이는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옛날 같으면 객석에 앉은 교민들의 눈물 바다가 연출될 상황이었다. 가수들은 이래도 안 울테냐는 식으로 더욱 슬픈 노래를 불러봤지만 소용없었다. 관객들은 그저 즐겁게 표정으로 고국의 노래를 감상할 뿐이었다. 나는 차라리 K-팝 가수들이 노래를 불렀으면 더 좋았겠네 생각하였다.
3. 왕년의 가수 윤항기씨가 티브이에서 회고하는 내용을 보니, 처음 그룹사운드 키보이스를 결성할 당시 연습할 장소가 없어 고생하다가 영등포에 있는 미군 부대 내에 한 장소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차중락, 차도균 등 당시의 멤버들은 매일 용산역에 모여 영등포 연습장소까지 걸어 갔다고 한다. 버스 비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걸어 가는 도중에 담배 꽁초를 발견하면 서로 주워 피우며 걸었다.
하루는 여럿이 걸어 가는데 어디서 딸그락 소리가 계속 들려 어디서 나는 소리인가 찾아 보니 차중락씨의 구두 앞창이 걸을 때마다 너덜거리며 부딪히는 소리였다고 한다. 그런 고생을 하면서도 그저 음악이 좋아 매일같이 연습에 열중하였다고 한다.
4. 리우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우리 선수들도 과거와 달리 대개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오히려 밝은 표정으로 다른 나라 선수들을 격려하며 ‘올림픽 게임을 즐겼다’고 말하기까지 하는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국민들도 이제는 금메달 소식에 눈물을 흘리지는 않는다.
1986년 임춘애 선수가 아시안 게임 육상 중장거리 부문에서 세 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고, “라면 먹으면서 운동했어요”라고 소감을 말했을 때 전 국민이 울던 때와는 딴판이 된 것이다. 참고로 임춘애는 가난은 했지만 라면은 간식으로만 먹었다고 한다.
5. 파독 광부의 딸, 브라질 교민, 윤항기 씨, 임춘애 씨, 그리고 우리 국민들은, 이제는 지독하게 어려웠던 그 시절의 눈물을 적어도 어느 정도는 극복한 게 아닌가 싶다. 그들의 고난과 슬픔은 이미 의연함으로 승화된 듯 하다.
우리는 어느덧 지나온 과거의 눈물 길을 성숙한 시선으로 되돌아 볼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된 것이다. 역설적으로 눈물을 흘리지 않게 된 우리들의 모습에 눈물이 난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새삼 감동이 밀려 온다. 그렇다. 우리들은 모두 그런 과정을 거쳐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 은혜에 감사할 따름이다.
6. 그런데 감사의 한편으로 걱정이 되는 나랏일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청년 세대는 취업난, 결혼난, 육아 및 교육난 등 기성세대가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어른들은 때때로 “요즘 애들은 얼마나 살기 좋아?” 하지만, 많은 청년들은 심지어 옛날보다 오늘날이 더 살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나는 젊은 세대에게 눈물을 강조할 생각은 없다. 다만 눈물을 흘리면서도 어떤 일에 목숨을 걸고 집중하여 결국은 승리했던 기성세대의 그 열정을 찬양하고 싶은 것이다. 독일이나 브라질, 또는 영등포나 운동장에서 불태웠던 그 열정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그 열정이 우리나라 각 분야에서 다시 한번 불타 오르기를 간절히 소원해 본다. 하나님 우리나라를 보우하고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2016-09-28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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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07> 말도 참 안 듣네
어떤 사내 아이가 방에서 놀다가 마루에 계신 아빠에게 물 좀 갖다 달라고 하였다. 아빠는 다른 일을 하고 있던 중이라 ‘네가 갖다 마셔라’ 했다. 그런데 아들은 지지 않고 몇 번씩이나 “아빠 제발 물 좀 갖다 주세요”라고 부탁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끝내 말을 듣지 않는 아들에 화가 난 아빠가 외쳤다. ‘너, 한번 만 더 물을 갖다 달라고 하면 아빠가 달려가서 한대 패준다’. 그러자 그 아들이 이렇게 대꾸하는 것이었다. “아빠 저 때리러 오실 때 물 좀 갖고 오시면 안될까요?” 라고!
이 아이를 보면 ‘말도 참 더럽게(?) 안 듣는 아이구나’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 말을 영 안 들어 먹는 사람이 이 아이 말고도 적지 않다. 그런 사례 몇 가지를 이하에 나열해 보고자 한다.
1. 자동차 운전시 자기가 갈 방향이 무슨 대단한 비밀이라고 방향 지시등을 켜지 않는 사람이 많다. 혹시 방향 지시등을 켜면 배터리가 소모되기 때문에 그러는 것일까?
그래서 운전자는 누구나 ‘저 차가 그 쪽으로 갈 줄 알았으면 나는 그냥 진행하면 되는 거였는데…’ 하는 상황을 수시로 만나게 된다. 방향 지시등을 켜야 안전하다고 그렇게 강조해도 말을 안 듣는 그들의 고집에 기가 질린다.
2. 건강에 나쁘다고 그렇게 말을 해도 기어이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많다. 나도 결혼해서 아이를 낳기 전까지 담배를 피웠는데, 돌이켜 생각하면 흡연은 정말로 백해무익한 것 같다. 건강에 해롭지, 돈 들지, 주머니 지저분해지지, 냄새까지 나서 주변 사람들이 다 싫어하지….
인권침해에 가까울 정도로 궁색한 환경의 지정장소에 가서 흡연하는 모습을 보면 실례지만 그들의 모습이 초라해 보이기까지 한다. 남들은 담배 사 피울 돈으로 건강에 좋다는 음식이나 영양제를 사 먹고 있음을 그들은 모르고 있는 모양이다.
3. 흡연가의 흉을 하나만 더 보자. 그들은 대개 운전 중 자기 차 안에 담배 재를 털지 않고 차창을 열고 차밖에 턴다. 흡연자도 담뱃재는 싫어하기 때문이다. 또 운전 중 피운 담배 꽁초를 길에다 버리는 사람이 부지기수이다.
차 밖 도로가 온통 재털이나 쓰레기 통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흡연자 여러분, 재나 꽁초는 반드시 자기 차 안에 버립시다. 우리는 담배 꽁초로 더럽혀진 쓰레기 도로를 달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4. 역사에 관련된 이야기도 하나 해 보고 싶다. 이조(李朝)라고 하면 안되고 조선이라고 해야 한다고 수없이 가르쳐도 습관을 고치지 않는 사람이 많다. 한일합방(강제병합 또는 병탄)이나 해방(광복), 또는 민비(명성왕후)라는 용어를 쓰는 사람도 아직 많다.
그 사람들이 고집 때문에 그러는 것은 아닐 것이고, 바른 용어를 잘 모르고 있거나 과거의 습관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그리 말하는 것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런 잘못된 언어 습관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역사학자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생각이다.
역사 이야기를 하는 김에, 중고등학교의 역사 선생님들이 요즘 TV의 인기 강사인 설민석 님처럼 역사를 ‘재미있게’ 강의해 주셨으면 좋겠다는 말을 추가하고자 한다. 그의 강의를 들으면 암기(暗記)의 대상에 불과했던 역사가 살아 움직이는 느낌이 들어 재미있고 잘 외워지기 때문이다.
남들을 비난하다 보니 “그럼 너는 말을 잘 듣고 사냐?”라는 반문(反問)이 귓가를 울린다. 물론 나도 여지없이 ‘말을 참 안 듣는’ 사람의 범주에 들어 간다. 예컨대 ‘운동이 건강에 좋다’고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데도 나는 운동을 잘 하지 않는다.
그것은 순전히 게으름 때문이다. 몸이 아플 때에는 ‘이러다가는 큰일 나겠구나’ 싶어 억지로라도 운동을 한다. 그러나 컨디션이 조금만 좋아지면 벌써 방안에서 뒹구는 버릇이 나온다. 건강은 타고나는 것이라고 한다. 건강이 유전이라는 이야기이다. 동감이다. 마찬가지로 운동하기를 좋아하느냐 여부도 유전이 아닌가 싶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운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집안인가 보다.
요즘 옆구리가 아픈 탓에 하루 만보(萬步)씩 걷기 시작하였다. 이번에는 옆구리가 다 나아도 걷기를 계속할 결심이다.
2016-09-13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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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06> 역사가 미래이다
강아지가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꼬리를 흔드는 이유는? 정답은 ‘꼬리가 몸통을 흔들 수 없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몸통이 꼬리를 흔드는 것이 순리(順理)이다. 그러나 세상일이 꼭 순리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다. 가끔은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주객(主客)이 전도(顚倒)된 상황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영어에도 The tail is wagging the dog이라는 표현이 있다.
내가 육군 항공기 정비부대에 근무할 때 본 OA-1이라는 정찰용 비행기는 비행기의 앞날개가 아니라 방향타(方向舵)라고 부르는 뒷날개(꼬리)가 비행기(몸통)의 비행(飛行) 방향을 결정한다. 조종면에서는 주객이 전도된 비행기인 셈이다.
그런데 꼬리로 몸통의 비행 방향을 조종하는 것은 앞머리를 움직여 비행기를 조종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왜냐하면 조종간을 움직이면 비행기의 기수(機首)가 아니라 꼬리 부분이 움직이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원리를 숙지하지 않으면 비행기는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 버린다.
나는 2013년에 대학을 정년퇴임하기 조금 전부터 우리나라의 약학교육사를 정리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그 동안 대한약학회 안에 ‘약학사분과학회’를 만들어 5번의 심포지엄을 개최하였고, 서울약대 안에 가산약학역사관을 개관하는 일에 일조(一助)하였다. 이제야 비로소 약학사(藥學史)를 연구할 수 있는 작은 둥지 두 개를 마련해 놓은 느낌이다. 최근에는 탁월한 연구원의 도움을 받아 ‘서울대약대 백년사(百年史)’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나는 백년사를 집필하면서 가끔 ‘역사(歷史)란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 그 결과 ‘역사란 과거사의 단순한 나열(羅列)이 아니라, 과거사에 대한 해석(解釋)’이며, 또한 ‘과거로의 회귀(回歸)가 아니라 미래에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주는 학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마치 뒷날개로 OA-1의 비행방향을 조종하는 것처럼, 과거의 역사로부터 얻은 지혜는 우리의 나아 갈 바 바른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을 것으로 믿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학)란 과거에 대한 학문이 아니라 오히려 미래(未來)에 대한 학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백년사’를 집필하면서 가장 고민했던 부분은 어떤 사건을 어느 정도의 비중으로 다룰 것인 것 하는 문제이었다. 그것은 ‘중요한 사건이 역사에 남는 것이 아니라, 기록에 남은 사건이 역사에 남을 수 있다’는 역설(逆說)의 가능성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중요한 사건도 기록으로 남겨 놓지 않으면 후세에 망각되기 쉬운 반면, 지극히 사소한 사건도 침소봉대(針小棒大)하여 언급해 놓으면 후세에 중요한 역사로 오인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에 손을 대는 사람은 본의이든 아니든 역사를 왜곡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또 하나 어려웠던 점은 자료의 부족이었다. 심지어 불과 40년 전의 약대 연건 캠퍼스 전경(全景) 사진도 남아있지 않았다. 솔직히 일제(日帝) 때 보다 광복(光復) 후의 역사 자료가 더 부실해 보였다.
부끄러웠다. 사실 광복 후의 일이 조금 더 잘 기록되어 있었더라면, 겨우 백년에 불과한 약학사 쯤은 ‘연구(硏究)’의 대상이 아니라 단순한 ‘정리(整理)’의 대상에 불과하였을 것이다. 과거는 그렇다 치고, 그럼 지금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일들, 예컨대 한약분쟁, 의약분업, 약대 6년제 등을 충실하게 기록해 나가고 있는가?
아마 누구도 이에 대해 자신 있게 ‘예’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정이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기록을 남기고 자료를 모으는 습관을 가져야 할 것이다.
선진국이 되었다고 하는 오늘날에 와서도 정부를 비롯한 여러 기관의 정책수립이나 업무수행 행태가 아마추어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아마추어리즘(amateurism)은 미래에 나아갈 바를 제시해주는 방향타(역사서)가 없는 데에 기인하는 현상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온고지신(溫故知新)! 역사로부터 미래에 나아갈 방향(비전)을 찾아냄으로써 시행착오를 줄이는 것이 아마추어리즘을 극복하는 첫걸음은 아닐까?
2016-08-31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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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05> 최초의 여성 약학박사 함복순(咸福順)
오늘은 약춘 200(약학박사 1호)에서 다룬 바 있는 함복순 교수의 이야기를 상세하게 다루고자 한다.
그는 1913년 9월 6일 서울 성북구 동선동에서 6녀 중 3녀로 태어났다. 혼자 지내기를 좋아하던 그는 소학교에 들어가지 않고 집에서 국문을 깨쳤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와 함께 성당엘 갔다가 수녀의 권유로 뒤늦게 성당에 있는 소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그에게 공부는 너무 쉬워서 언제나 일등을 했고 반장도 하였다. 결국 학기말에 3학년으로 월반하여 5년간 소학교를 다녔다. 졸업(1923년) 후 사립학교 출신으로는 하늘의 별 따기처럼 들어가기 어려운 경기고등여학교(경기고녀)에 합격하였다.
경기고녀를 졸업(1933년)한 후 수녀가 되기 위해 카멜(carmel)봉쇄 수도원에 지원하였지만 중병을 앓은 적이 있다는 이유로 낙방되었다. 그 후 신부님의 권유로 1933년 경성사범학교 연습과에 들어가) 1934년에 졸업하였다.
그 후 1937년까지 3년간 가명(加明)보통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였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재미가 있었으나, 이에 만족할 수 없었다. 일본 동경여자약학전문학교에 편지를 보내 입학 허가를 받아 1937~1941년의 4년간 공부를 마치고 졸업하여 약사가 된 다음 귀국하였다. 1941~1948년 서울 국립중앙화학연구소에서 근무하다가, 6.25 전쟁의 와중인 1951.5.31~1952년(정식 면직은 55.1.15) 서울대 약대 전임강사로 봉직하였다.
서울약대의 전임강사까지 되었지만 오랜 꿈인 유럽 유학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전직 서울대 독일어 교수이었던 독일인으로부터 독일어를 배우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가 간첩이라는 죄목으로 잡혀 가자, 이번에는 명동 성당에 와있던 프랑스인 공벨 신부에게 3년간 매일같이 가서 프랑스어를 배웠다.
부산 피난시절, 부산에 있는 프랑스 대사관에 파리대학 입학 지원서를 써서 제출하였더니, 프랑스 대사가 차를 보내 데리고 가서 대사관 일을 보게 하였다. 그리고 외교관 특별 보따리 속에 파리대학 입학지원서를 끼워 파리대학에 전달하도록 조치하여 주었다. 그 때는 우편물의 국제 왕래가 불법이었기 때문이다.
얼마 후 파리대학으로부터 입학을 허락한다는 회신이 도착하였다. 그는 곧 동경의 요코하마 항으로 가서 프랑스로 가는 Marseillese호라는 배를 타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미 만석이라 탈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마침 일본 여자 하나가 몸이 아파 예약을 취소하는 바람에 운 좋게 탈 수 있었다.
배는 상해, 홍콩, 사이공, 싱가포르, 홍해, 수에즈 운하, 지중해를 거쳐 마르세유 항구에 도착하였다. 기차를 타고 파리에 도착하여 파리대학을 찾았는데, 교수 등의 배려로 1952부터 약대 대학원에 다니게 되었다.
1953년에 약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1955년까지 동 대학 이과대학 생물화학연구실에서 근무하였다. 1957년부터는 다시 동 대학 이과대학원에 입학하여 1961년에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1962년까지 동 대학 이과대학 유기구조화학 연구원으로 근무하였다.
귀국한 뒤에는 2년간(1962.9.15~1964.9.24) 서울대 약대 교수(약효학)를 지내며 교지인 약원(제6호, 1963.3)에 ‘빠리 약대의 약학교육’이라는 글을 남겼다. 1963~1968년에는 미국의 뉴욕대학과 컬럼비아 대학에서 생물화학 연구원으로, 1969년에는 미국 콜럼버스 병원에서 임상화학 연구원으로 근무하다가 1985년에 정년퇴직 하였다. 그 후 1년간 Cooper Union 대학에서 영문학을 수강하였다.
만 77세인 1990년 5월에는 일본 유학 시에 만났던 최재방씨와 수유 성당에서 황혼 결혼을 하고, 뉴욕에서 ‘길벗’이라는 문학 동인 활동을 하다가, 1999년 5월 29일 서울에서 심장마비 후유증으로 영면하였다. 유작(遺作)으로 ‘고독을 누리는 시간 (미리내, 2000년 4월 10일)’이라는 수필집을 남겼다. 이 글도 그 책의 ‘나는 왜 혼자 살아 왔나’라는 글에서 발췌한 것이다. 그의 천재성, 학구열 및 개척정신에 심심한 경의를 표하며 이 글을 마친다.
2016-08-17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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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04> 보스의 탄생
지난 7월 7일 일본 동경의 제국호텔에서 열린 나가이 재단(Nagai Foundation) 창립 3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 다녀 왔다. 재단 이사장인 나가이(永井恒司, Nagai Tsuneji) 박사는 약제학 분야를 포함한 약학의 영역에서 적극적인 국제적 활동을 펴 온 일본 약학계의 보스 중 한 사람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고 홍문화 박사님 비슷한 분이라고나 할까?
나가이 교수는 동경대학에서 약학박사 학위를 받고 1971년에 호시(星)약과대학에 부임할 때부터 제인(帝人)파마주식회사의 고문으로서 회사와 공동으로 HPC(hydroxyl propyl cellulose)의 새로운 용도 개발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여 HPC의 용도에 관한 특허를 받았고, 회사는 이를 이용하여 3가지 신의약품(아프타치, 리노코트, 사루코트)을 개발하여 시판하게 되었다. 이 업적으로 나가이 교수는 1984년 ‘전국발명상’을 받았고, 1986년 9월 1일 일본인 최초로 FIP의 Hoest-Madsen 메달을 수상하였다.
이때 50년 지기(知己)인 향천대학(香川大學)의 고니시(小西良士) 교수는 FIP상의 수상을 기념하여 재단을 만들라고 제안하였다. 그 해 10월에 호시약과대학의 이사장 주최로 뉴오타니 호텔에서 FIP상 수상 축하 파티가 열렸을 때, 제국제약(帝國製藥)의 아까자와(赤沢) 사장이 많은 액수의 돈을 기부하여 주었다.
이 돈이 재단이 처음으로 받은 기부금 1호이었다. 그러나 이 재단에 자금 면에서 더 큰 도움을 준 것은 제인 파마이었다. 제인 파마는 특허에 대한 공로금을 호시 대학의 구좌로 넣어 주었는데, 호시대학의 구타니 학장은 그 돈 전액을 나가이 재단이 전용(專用)할 수 있는 재산으로 처리하여 주었다.
1986년에 ‘나가이기념국제약학기금’이라는 임의단체(任意團體)로 출범한 이 단체는 그 후 재단법인으로의 변신을 도모(圖謀)하였다. 그 과정에서 문부성의 심사담당관은 ‘국제교류재단은 전국적으로 예가 드물고, 약학영역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며, 재단의 설립은 사립대학을 활성화시킬 수 있다’고 하면서 각별한 관심을 보여 주었다.
나가이 교수는 재단설립에 필요한 최소한의 자금을 확보하는 한편으로, 문부성에 드나들며 심사담당관으로부터 정관 작성에 필요한 조언을 받았다. 1993년 2월 12일에 예비심사를 신청한지 만 1년 후인 1994년 1월 28일에 ‘나가이기념약학국제교류재단’ 이라는 이름으로 재단법인 설립허가를 받았다.
그 후 법인제도가 전면적으로 개정되고 관할부서가 문부성에서 내각성(內閣省)으로 바뀌면서 2012년 4월 1일부터 공익재단법인(公益財團法人)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상의 연혁을 살펴보면 군데군데에서 남의 명예로운 성취를 잘 지켜주려고 하는 일본 사회 전체의 미덕(美德)이 느껴진다.
나가이 박사는 5년전부터 하반신 불수가 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가이 재단이 후원하는 각종 국제 약학관련 학술행사에 빠짐없이 출석하고 있다. 이는 지극 정성으로 남편을 섬기는 부인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언제나 남편의 휠체어를 밀면서 나타나는 부인이 실은 나가이 재단의 실질적인 운영자라고 한다. 나가이 이사장은 이번 심포지엄에서도 심포지엄 전날부터 초청연자들과 밤늦도록 식사와 담소를 나누는 열정을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내가 감탄한 것은 그가 심포지엄 당일 휠체어에 앉은 채로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학회장의 맨 앞자리를 굳세게 지키며 모든 강연을 경청하는 모습이었다. 국제학술회의에서 자리를 뜨지 않고 하루 종일 어려운 학술 강연을 듣는 것은 나 같은 젊은(?) 사람에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말이다.
문득 오래 전 서울에서 열린 신약개발 심포지엄에 참석했던 교토대학의 세자키 교수가 머리에 떠올랐다. 당시 정년을 앞두고 있는 고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종 학회장의 맨 앞자리를 고고하게 지키고 있었다. 이는 중견교수만 되어도 학회장 밖에서 환담(?)이나 즐기던 우리에게 따끔한 자극이 되었다.
보스는 어떤 경위로 탄생하는가? 이번 여행은 이에 대한 귀중한 힌트를 주고 있었다.
2016-07-27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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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03> 울림이 있는 말 한마디
남에게 들은 말 한마디가 내 삶에 긴 울림으로 영향을 주는 경우가 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1. D제약의 L부회장은 ‘도리 없지’란 말을 자주 한다. 이미 엎질러져서 되돌릴 수 없는 일을 포기할 때 하는 말이다. 지나간 실패를 오래도록 묵상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럴 시간이 있으면 실패를 털고 앞으로 나갈 방도를 생각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도리 없지’는 지나간 과거에 붙잡히지 않고 미래를 바라보는 긍정적인 사고 방식 소유자의 표현이다. 적지 않은 사람이 실패한 일을 오랫동안 묵상함으로써 낙심(落心)하고 좌절한다. 온누리교회의 고 하용조 목사님은 ‘실패는 그 자체보다 그로 인한 낙심과 좌절이 더 큰 문제인 경우가 많다’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도리 없지’ 하면서 실패로 인한 낙심과 좌절을 털어버리는 것은 것은 범인(凡人)에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L부회장의 ‘도리없지’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의 비범함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우리 둘째 애가 사업을 하다 큰 실패를 경험한 일이 있었다. 그 때 내가 가장 걱정한 것은 실패보다 그 애의 낙심이었다. 그 때 나도 L부회장처럼 ‘도리 없지’ 생각하며 아들을 진심으로 위로하였다. 마침내 아들은 하나님 은혜로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재기에 성공하였다. 할렐루야.
2. 고 하용조 목사님은 늘 ‘잘 나갈 때가 위험한 때’라고 설교 하셨다. ‘스스로 요즘 잘 나가고 있다고 생각되면, 위험에 빠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 그러므로 잘 나가는 사람은 겸손해야 한다’고 하였다. 반대로 교만은 패망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권력에 취해 교만을 떨다가 추락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은사 한 분은 ‘당신이 잘되는 것을 진심으로 기뻐할 사람이 세상에 몇 사람이나 될까 생각해 보라’고 하셨다. 잘 될 때 겸손하지 않으면 주변 사람이 다 싫어한다는 좀 서늘한 경고 말씀이었다. 그러나 겸손은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거죽은 겸손이나 속은 교만인, 즉 위장된 겸손은 더욱 위험하다. 위장된 교만은 곧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마련이고, 더욱 사람들의 미움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3. 오랜만에 뵌 93세의 박창환 목사님은 내게 “아직도 여기 저기 강의를 하러 다니신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셨다. 나는 정년 퇴직 후에도 할 일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는 뜻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런 뜻이 아니었다.
‘세상 사람들에게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강의하러 다닐 수 있으니 얼마나 귀한 일이냐’란 뜻으로 하신 말씀이었다. 큰 울림이 있는 말씀이었다. 나는 박 목사님과 하 목사님의 말씀대로 겸손과 정직이 인생을 바로 이끄는 중요한 나침반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4. 내가 졸업한 제물포 고등학교의 교훈은 “학식은 사회의 등불, 양심은 민족의 소금”이다. 또 이 학교 강당에는 유한흥국(流汗興國)이란 붓글씨 족자가 걸려 있었다. 모두 이 학교를 설립한 길영희 교장 선생님의 철학에서 나온 말씀이셨다. 이 학교는 무감독(無監督)시험과 같은 명예제도(honor system)를 실시해 온 것으로도 유명하다. 교훈, 족자, 무감독시험제도 등을 통한 이 학교의 가르침, 즉 근면, 성실, 정직은 나를 비롯한 많은 졸업생들의 평생 교훈이 되었다.
나는 이 가르침이 교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기를 소망한다. 교인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되는 삶을 살아낼 때, 기독교는 세상에 저절로 전도되고 세상은 성경적으로 바람직하게 바뀔 것이기 때문이다.
5. 어머니는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할 때부터 ‘나는 네가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믿는다’고 자주 말씀 하셨다. 내가 남들보다 착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열심히 공부하는 아이라고 믿는다는 말씀이셨다. 그 믿음의 말씀 덕분에 나는 책을 산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용돈을 타는 등의 유혹을 참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23년 전에 작고하셨지만, 어머니의 그 말씀은 그 후로도 평생 내 삶의 태도를 가다듬어 주었다. 어머니 그립습니다.
2016-07-13 09:3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