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강의가 많았다.
내가 1967~1971년에 약대에 다니면서 느꼈던 첫 번째 소감은 강의가 너무 많다는 거였어요. 일주일에 52시간씩이나 수업을 들었으니까요. 월~금요일까지는 매일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8시간씩 강의를 듣거나 실습을 했고 토요일에는 5시간 강의를 들었어요. 수강 신청이란 개념도 없었어요. 마치 고등학교처럼 주 52시간짜리 강의 시간표에 따라 수업을 받았거든요.
강좌명도 무지하게 많았어요. 문화사, 사회과학개론, 영어, 국어, 독일어, 약학라틴어 같은 교양과목들과, 정성분석화학, 정량분석화학, 약용식물학, 생약학, 자연과학개론, 동물학, 화학공학개론, 농약학, 신약학, 물리약학, 천연물화학, 생화학, 위생화학, 식품위생학, 약품미생물학, 약제학, 이론약제학, 무기제약, 유기제약, 통계학, 본초학, 약물학 같은 전공과목들 및 실습과목이 있었어요. 덕분에 재학 중 주워들은 잡다한 지식들이 많았어요. 지식의 깊이는 별로 없었어요. 그래서 당시 약대 졸업생들은 ‘모르는 것도 아는 것도 없다’는 평(評?)을 듣곤 했어요.
그때부터 왜 약대에서 이렇게 많은 걸 가르치는 걸까? 이게 늘 미스테리였어요. 다른 학과, 예컨대 화학과(化學科) 같은 데는 약대처럼 과목수가 많지 않다고 들었어요. 아무튼 약대는 정신이 혼란스러울 정도로 강의 과목 수가 너무 많았어요. 오늘날까지 약대에 과목 수가 많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강의 후반부에서 설명하겠습니다.
2) 강의 수준이 높지 않았다.
다음으로는 당시의 강의 수준에 대해 언급하겠습니다.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의 약학 교육을 담당하게 되면서 부닥친 첫번째 어려움은 교수진의 확보였을 거예요. 경성약학전문학교(경성약전)가 문을 닫은 후, 잠시 과도기를 거치고 6.25 전쟁 중에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이 문을 열었지만, 그 와중에 교수진을 구해야 했으니까요.
경성약전 졸업생들 중에서 교수로 초빙된 된 분이 많았어요. 그런데 그분들은 사실 본격적인 연구나, 논문 쓰기를 해 본 경험이 별로 없는 분들이시잖아요. 그러니 그분들의 강의 수준이 그다지 높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요. 교과서를 읽어주는 수준의 강의도 있었어요. 게다가 무슨 대단한 이론에 대한 이해보다 단순히 암기해야만 성적을 받을 수 있는 과목들이 많았어요.
에피소드 하나 소개할까요? 동경대학에서 약학박사 학위를 받고 오셔서 3학년 생화학을 강의하시는 교수님이 계셨는데, 1년 내내 효소 한 챕터 밖에 안 가르치셨어요. 덕분에 ”효소는 단백이데이”라는 말씀이 귀에 박혔습니다만, 생화학 전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래저래 학생들은 학교 공부에 염증을 느끼곤 했지요. 일부 학생은 화학과로 전과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제가 2013년 정년퇴직을 전후하여 약학대학의 역사를 좀 공부해 보니까 옛날 은사님들께 이러한 불평 불만을 할 상황이 아니더라구요. 경성약전을 나오신 그분들께서 약학 불모지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학문 체계를 세우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강의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은사님들의 노고에 새삼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60년대 후반부터 김병각, 이상섭, 김낙두 교수님 같은 분들이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오기 시작하면서 강의 내용과 수준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1975년 약대가 관악캠퍼스에 합류한 이후, 즉 많은 약대 졸업생들이 미국, 독일, 일본 등 외국에 가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교수가 된 이후에는 강의 내용과 수준이 급격히 좋아졌어요.
예컨대 1982년에 K 교수가 부임해서 생화학을 가르쳤는데 학생들을 아주 혹독하게 훈련시켰어요. 그때부터 약대 학생들의 생화학 실력이 비약적으로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후로는 물론 다른 교수님들도 다 열심히 강의를 하셔서 약대생들의 실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했어요. 한 10여년전부터는 약대가 연구를 잘하는 대학이라고 소문이 나기 시작헸어요. 옛날 우물안에서 놀던 시절에 비하면 실로 놀라운 발전이지요 (다음호에 계속)
1) 강의가 많았다.
내가 1967~1971년에 약대에 다니면서 느꼈던 첫 번째 소감은 강의가 너무 많다는 거였어요. 일주일에 52시간씩이나 수업을 들었으니까요. 월~금요일까지는 매일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8시간씩 강의를 듣거나 실습을 했고 토요일에는 5시간 강의를 들었어요. 수강 신청이란 개념도 없었어요. 마치 고등학교처럼 주 52시간짜리 강의 시간표에 따라 수업을 받았거든요.
강좌명도 무지하게 많았어요. 문화사, 사회과학개론, 영어, 국어, 독일어, 약학라틴어 같은 교양과목들과, 정성분석화학, 정량분석화학, 약용식물학, 생약학, 자연과학개론, 동물학, 화학공학개론, 농약학, 신약학, 물리약학, 천연물화학, 생화학, 위생화학, 식품위생학, 약품미생물학, 약제학, 이론약제학, 무기제약, 유기제약, 통계학, 본초학, 약물학 같은 전공과목들 및 실습과목이 있었어요. 덕분에 재학 중 주워들은 잡다한 지식들이 많았어요. 지식의 깊이는 별로 없었어요. 그래서 당시 약대 졸업생들은 ‘모르는 것도 아는 것도 없다’는 평(評?)을 듣곤 했어요.
그때부터 왜 약대에서 이렇게 많은 걸 가르치는 걸까? 이게 늘 미스테리였어요. 다른 학과, 예컨대 화학과(化學科) 같은 데는 약대처럼 과목수가 많지 않다고 들었어요. 아무튼 약대는 정신이 혼란스러울 정도로 강의 과목 수가 너무 많았어요. 오늘날까지 약대에 과목 수가 많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강의 후반부에서 설명하겠습니다.
2) 강의 수준이 높지 않았다.
다음으로는 당시의 강의 수준에 대해 언급하겠습니다.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의 약학 교육을 담당하게 되면서 부닥친 첫번째 어려움은 교수진의 확보였을 거예요. 경성약학전문학교(경성약전)가 문을 닫은 후, 잠시 과도기를 거치고 6.25 전쟁 중에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이 문을 열었지만, 그 와중에 교수진을 구해야 했으니까요.
경성약전 졸업생들 중에서 교수로 초빙된 된 분이 많았어요. 그런데 그분들은 사실 본격적인 연구나, 논문 쓰기를 해 본 경험이 별로 없는 분들이시잖아요. 그러니 그분들의 강의 수준이 그다지 높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요. 교과서를 읽어주는 수준의 강의도 있었어요. 게다가 무슨 대단한 이론에 대한 이해보다 단순히 암기해야만 성적을 받을 수 있는 과목들이 많았어요.
에피소드 하나 소개할까요? 동경대학에서 약학박사 학위를 받고 오셔서 3학년 생화학을 강의하시는 교수님이 계셨는데, 1년 내내 효소 한 챕터 밖에 안 가르치셨어요. 덕분에 ”효소는 단백이데이”라는 말씀이 귀에 박혔습니다만, 생화학 전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래저래 학생들은 학교 공부에 염증을 느끼곤 했지요. 일부 학생은 화학과로 전과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제가 2013년 정년퇴직을 전후하여 약학대학의 역사를 좀 공부해 보니까 옛날 은사님들께 이러한 불평 불만을 할 상황이 아니더라구요. 경성약전을 나오신 그분들께서 약학 불모지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학문 체계를 세우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강의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은사님들의 노고에 새삼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60년대 후반부터 김병각, 이상섭, 김낙두 교수님 같은 분들이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오기 시작하면서 강의 내용과 수준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1975년 약대가 관악캠퍼스에 합류한 이후, 즉 많은 약대 졸업생들이 미국, 독일, 일본 등 외국에 가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교수가 된 이후에는 강의 내용과 수준이 급격히 좋아졌어요.
예컨대 1982년에 K 교수가 부임해서 생화학을 가르쳤는데 학생들을 아주 혹독하게 훈련시켰어요. 그때부터 약대 학생들의 생화학 실력이 비약적으로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후로는 물론 다른 교수님들도 다 열심히 강의를 하셔서 약대생들의 실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했어요. 한 10여년전부터는 약대가 연구를 잘하는 대학이라고 소문이 나기 시작헸어요. 옛날 우물안에서 놀던 시절에 비하면 실로 놀라운 발전이지요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