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창구 서울대 명예교수 2017년 9월 27일 서울대병원은 그 동안 ‘식후 30분’에 먹으라던 약의 복용 규정을 ‘식사 직후’로 바꾸기로 했다고 밝혔다. ‘식후 30분’에 대한 근거가 부족하며, 식약처의 허가사항에도 ‘30분’이라는 기준은 없기 때문이란다.
나는 환자가 정확히 식후 30분에 약을 복용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나 자신도 식후 30분 맞추려다가 복용을 잊어먹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이번 서울대 병원의 조치가 ‘30분 지키려다가 복용을 잊어먹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현실적인 조치일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식사 직후나 식후 30분이 정말로 약물의 흡수면에서 동일하다는 인식이 보편화 되어서는 안될 일이다. 특히 약물요법의 최적화를 공부하는 약학인들이 이렇게 인식한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그래서 오늘은 이 문제를 논의해 보고자 한다.
음식물을 먹으면 우선 위내용배출시간(胃內容排出時間, gastric emptying time: 위 안에 들어있는 물질이 소장으로 내려가는데 걸리는 시간)이 연장된다. 음식물을 반죽하고 소화시키는 데에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시간이 연장되면 식사 직후에 먹은 약이 위장 내에 오래 머무르기 때문에 약에 따라서는 위액에 의해 분해된다. 또 약의 흡수부위인 소장(小腸)에 늦게 도달하기 때문에 약효가 늦게 나타나기도 한다. 예컨대 타이레놀 정은 굶고 먹으면 30분 이전에 최고 혈중농도가 나타나지만 아침 식사 후에 복용하면 2시간이 지나서야 최고혈중농도가 나타난다.
식사, 특히 밥을 먹으면 위장관 내액(內液)이 밥의 연화(軟化) 과정에 사용되기 때문에, 약물의 붕해(崩解, 부스러짐)나 용해(溶解, 녹음)에 사용될 위장관 내액이 부족해져 약물의 흡수가 지연될 우려가 있다. 또 음식물은 위장관 내용물의 점도(점도, viscosity)도 증가시킨다.
그러면 위장관 내에서 약물의 확산속도(擴散, disffusion)가 낮아져 약물의 흡수가 낮아지기도 한다. 마치 물이 들어 있는 비이커에 잉크 한방울을 떨어트리면 금방 확산되어 비이커 기벽(器壁)에까지 잉크가 도달하지만, 비이커에 죽을 담아 놓은 경우에는 좀처럼 비이커 기벽에까지 잉크가 퍼지기 어려운 것과 같은 이치이다. 밥을 먹은 직후의 소장 안의 상태는 비이커에 죽을 담아 놓은 상태와 비슷해 지는데, 이런 상황에서는 약물이 흡수 부위인 소장벽에까지 확산되지 못하고 분해되거나 대변으로 나가기 쉽게 된다. 즉 흡수의 속도와 양이 감소하는 것이다.
어떤 음식을 먹느냐도 흡수에 영향을 미친다. 예컨대 고(高)지방식을 하면 담즙분비가 촉진되기 때문에 담즙에 의해 녹는 grisefulvin(먹는 무좀약)같은 약물의 흡수를 촉진한다. 일반적으로 설탕은 약물의 흡수를 지연시킨다. 술은 위장관 혈류를 증가시킬 뿐만 아니라 용해를 촉진하기 때문에 어떤 약물의 약효를 빠르고 강하게 만들어 준다.
자몽 주스를 계속해서 마시는 사람이 고혈압약을 먹으면 주스를 안 마신 사람보다 4배 이상 혈중약물농도가 높아진다. 자몽 주스가 약물을 분해하는 효소의 역가를 낮추기 때문이다.
말이 나온 김에 첨언하자면 음식물뿐만 아니라 제제(製劑)를 만들 때 어떤 첨가제를 얼마나 사용했느냐에 따라 약의 흡수가 현저하게 달라지는 경우도 있다. 약의 성분과 함량이 같다고 해도 제제 설계에 따라 약효에 차이가 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에 주목하여 이런 변동요인들을 엄격하게 컨트롤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을 제제학 또는 약제학(藥劑學)이라고 한다.
요컨대 ‘식후 30분’은 ‘식사 직후’와 위장관 내 상황이 동일하지 않으므로 약물의 흡수에 차이를 보인다고 생각해야 한다. 엄격한 척 30분을 고집하다 약 먹기를 잊어먹는 문제가 더 심각하기 때문에 서울대 병원이 ‘식후 30분’을 ‘식사 직후’로 바꾸었을 것으로 짐작이 가지만, 이를 모든 약, 모든 음식에 대해 적용 가능한 ‘보편적인 진리’로 생각해서는 결코 안될 것이다. 이번 조치가 행여 약학이나 약물요법학 발전에 역행하는 부작용을 일으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