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대·약학] <24> 21세기 아편전쟁
21세기 아편전쟁에스토니아와 같은 유럽의 소국을 제외한다면, 그리고 비교적 약한 효과로 인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대마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나라에서 문제가 되는 마약은 각성제인 코카인이나 메스암페타민, 진정제인 헤로인이다. 그런데 미국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마약은 이런 전통의 강자가 아니라 최근 들어 미친 존재감을 보이는 마약, 펜타닐이다.통계자료에 따르면 미국에서 펜타닐 등의 합성마약으로 인한 사망자가 평균적으로 하루에 백 명 정도다. 많은 사람이 날마다 죽지만, 같은 사유로 꾸준히 죽으니까 문제다. 가령 911사태로 사망한 사람은 2944명이다. 따라서 미국은 지금 매달 911급 사태를 겪고 있다. 심지어 하루 백 명이라는 숫자는 통계적인 평균치다. 최근에는 200명 가량으로 늘어나서 관계 당국을 더욱 고심하게 만들고 있다. 펜타닐은 1960년에 만들어진 약이다. 1991년에 혁신적인 패치제로 거듭나서 시장을 강타했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일까? 여기에는 2000년대 초반 풀렸던 처방 마약이 큰 역할을 했다. 말기 암환자를 대상으로 처방하던 마약성 진통제를 어느덧 일반 환자들에게 처방하기 시작했고 이 사람들은 이후 마약 중독자가 되어 병원을 들락거렸다. 그전까지 헤로인을 찾아 뒷골목을 전전하던 사람들도 병원에 찾아와 처방전을 요구하며 마약성 진통제를 받아가곤 했다.이후 규제가 심해지며 이런 처방 마약을 받기 어려워지자 중독자들이 찾아낸 대안이 펜타닐이다. 그리고 펜타닐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자 마약상들이 펜타닐을 불법적으로 공급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기존의 패치를 받고서 어떻게 쓰는지 몰라서 씹어먹거나 우러먹던 마약 중독자들이 예쁘게 생긴 펜타닐 알약을 먹고서 천천히 중독되어 갔다.펜타닐로 인한 외교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한 것은 2010년대 중반의 일이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트럼프는 트위터를 통해 중국을 저격했다. 중국에서 펜타닐을 소량으로 보내면서 미국인이 죽어나가고 있다고 비난한 것이다. 당시는 극미량의 펜타닐 가루를 우편시스템을 이용해 미국으로 보내는 방식으로 미국에 펜타닐이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중국 내에서 불법 펜타닐 생산 시설을 적발하고 사형을 선고하기도 하던 시절이다. 마약이라면 청나라 시절의 트라우마로 인해 중국도 지금 강력하게 단속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항상 구멍은 있는 법이고 이 구멍을 통해 미국으로 흘러들어오는 펜타닐을 트럼프가 저격하였다.하지만 중국의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미국에서 펜타닐이 퍼지게 된 계기는 미국 회사가 미국인에게 처방마약을 팔았기 때문이고, 그 과정에서 미국 정부 당국이 손을 놓았기 때문인데 왜 중국을 탓하냐는 말이었다. 중국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미국 외의 다른 나라에서 펜타닐로 인한 문제가 당시까지는 잠잠했던 것도 고려하면 더 그렇다.이렇게 외교적 분쟁이 이어졌지만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내지는 못 했다. 미중 갈등이 정점으로 치닫던 상황이었고 펜타닐 말고도 중요한 현안들이 많았기 때문이리라 본다. 하지만 이 틈을 타고 펜타닐은 진화하고 있다. 소량으로 펜타닐을 보내던 마약제조업자들이 캐나다와 멕시코 등 미국의 접경 지역에 펜타닐 생산 시설을 마련해서 직접 생산한 후 마약 판매루트를 통해 펜타닐을 팔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백여 년 간 헤로인으로 재미를 봤던 마약업자들이 나름의 혁신을 통해 더욱 강력한 물질을 팔고 있다.단속은 안 될까? 마약단속국에서 2022년 한 해 동안 압수한 불법 펜타닐이 대략 3억 7천만 정이다. 전 미국인이 한 번씩 복용해도 남을 양이 한 해에만 적발되었다. 적발되지 않은 양을 감안하면 훨씬 더 많은 양의 펜타닐이 퍼져 있을 것이다. 원래 강한 마약으로 가기는 쉬워도 다시 약한 마약으로 돌아가기는 어려운 법이다. 미국의 마약 문제는 앞으로 더 심해질 것으로 판단한다.미국이 펜타닐 생산 시설을 적발하면서 파악한 사실이 있다. 펜타닐 생산을 위한 원료 물질이 중국을 통해서 들어오고 있다는 점이다. 마약 생산을 위한 원료 물질은 여러모로 규제가 많다. 이 위험한 물질의 수입 경로를 확인한 미국 마약단속국과 정부는 다시금 중국에 대한 압박을 걸고 있다. 19세기 아편전쟁의 복수를 왜 미국에게 하느냐는 식이다. 하지만 중국은 이에 대해 책임을 자신들에게 떠넘기지 말라며 반발하고 있다. 21세기 아편전쟁으로 나아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필자소개>백승만 교수는 서울대학교 제약학과 졸업후 동 대학원에서 생리활성 천연물의 화학적 합성에 관한 연구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사우스웨스턴 의과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11년부터 경상국립대학교 약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의약화학을 강의·연구하고 있다. 현재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를 연구 개발하고 있으며 약의 역사도 함께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 ‘분자 조각자들’ 등이 있다.
2024-12-27 09:18 |
[약대·약학] <23> 펜타닐
<23> 펜타닐아편전쟁 이후 아편이 어떻게 진화했는지는 잘 알려진 역사다. 아편에서 모르핀이 분리되고 헤로인으로 변신해 많은 중독자들을 양산한 것은 이미 이 칼럼을 통해서 한 번 소개한 적이 있다. 그런데 헤로인으로 평생 만족할 것만 같던 마약 중독자들에게 새로운 길이 열렸다. 바로 펜타닐이다.펜타닐이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아니다. 1960년 벨기에의 제약회사 얀센에서 개발한 이 마약성진통제는 그 근원을 메페리딘(페치딘)에 두고 있다. 메페리딘은 1930년대 독일에서 아편 공급이 끊기자 자체적으로 개발한 진통제다. 처음에는 복부 진통을 막기 위해 사용했는데 어느덧 모르핀을 아쉬운대로 대체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자 얀센에서 이 물질의 구조를 개선해 모르핀을 능가하는 마약성 진통제 펜타닐로 변신시켰다. 그렇게 우리는 어느덧 자연의 생산력을 따라가고 있었다.처음 펜타닐이 만들어졌을 때 사람들은 우려를 표했다. 모르핀의 백배 가량 진통 효과를 보이므로 부작용도 그만큼 커질 것이고 따라서 중독성도 강할 것이라는 지적이었다. 이처럼 시대를 초월한 통찰력으로 물질을 바라본 사람은 미국의 관련 분야 최고 전문가였던 로버트 드립스. 당시 얀센을 이끌던 파울 얀센은 드립스와 면담을 하고 중재를 통해 불쾌감을 유발하는 물질을 펜타닐과 섞어서 판매하는 방식으로 합의안을 도출했다. 그렇게 펜타닐이 수술용 마취제로 세상에 나왔다.이후 펜타닐을 견제하던 드립스가 사망하고 펜타닐에 대한 의료 현장의 수요가 높아지면서 펜타닐은 자연스럽게 시장에 안착하였다. 혁신이 일어난 것은 1991년. 펜타닐이 경피흡수제로 개발된 것이다. 그전까지는 주사제로 사용하곤 했는데 피부에 붙여서 투과하는 제품이 개발되자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펜타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다만 경피흡수제, 즉 패치제로 사용하는 과정에서 우리나라에서는 피해자도 제법 나왔다. 일반적인 파스와 헷갈려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접착면에 약효 성분이 함유되어 있는 파스는 붙이는 즉시 효과가 나타나지만 제형 특성상 접착 부위에만 약효를 보인다. 반면 패치는 어느 부위를 붙이든지 별 상관없이 피부를 통해 약효성분이 흡수되어 혈액을 순환한다. 피부를 통해 흡수되어 효과를 보이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대략 13시간. 이 둘을 헷갈리면 약화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 펜타닐 패치를 붙였는데 바로 효과가 나타나지 않아 한 장을 더 붙이는 식이다. 물론 펜타닐은 암이나 중증 환자들에게 처방하는 약이라서 쉽게 구입하기 어렵다. 하지만 암환자가 사적으로 아는 사람에게 ‘좋은 파스’라며 건네는 경우가 있어서 피해가 나타나곤 한다.펜타닐이 전쟁과 관련하여 이슈가 된 적도 있다. 우선 에스토니아. 러시아와 접해 있는 유럽의 소국 에스토니아는 헤로인이나 코카인이 주류인 유럽 사회에서 특이하게 펜타닐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계기는 2001년 일어난 911사태. 당시 탈레반을 보복하기 위해 미국은 한 달만에 아프가니스탄을 공습했고 전쟁은 일방적으로 마무리됐다. 전 세계 양귀비 재배의 80%를 담당하던 아프가니스탄이 초토화되자 연쇄적으로 아편 공급에 차질이 생긴 것도 당연한 귀결이다. 따라서 아편을 가공해서 만들던 헤로인 수급도 어려워줬고 전 세계의 헤로인 중독자들은 힘든 시간을 참아내야만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힘든 시기는 오래 가지 않았다. 이듬해인 2002년 먹고 살기 힘들어진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대거 양귀비 재배에 몰려들면서 아편 생산량이 예전 수치를 회복했기 때문이다. 오매불망 헤로인을 기다리던 중독자들에게 얼마나 고마운 뉴스였을까. 어쨌든 그들은 새로이 공급되는 헤로인을 어둠의 경로로 구매해 다시 중독을 즐겼다.하지만 대략 일년의 이 기간을 참지 못하고 다른 마약으로 갈아탄 사람들도 있었다. 에스토니아 사람들이 대표적이다. 이 지역의 중독자들은 당시 새로이 공급되던 펜타닐을 즐기기 시작했는데 누가 펜타닐을 공급했는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국경을 맞댄 러시아의 마약상이 공급하지 않았을까 추측하고 있을 뿐이다. 어쨌든 펜타닐이라는 신세계를 맛 본 에스토니아의 중독자들은 일 년이 지나 헤로인이 다시 들어왔어도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그렇게 유럽에서도 펜타닐을 즐기는 나라가 나타났다.하지만 펜타닐로 인해 더 큰 문제를 겪고 있는 나라는 바로 미국이다. 미국은 지금 21세기 아편전쟁의 기로에 놓여 있다. <필자소개>백승만 교수는 서울대학교 제약학과 졸업후 동 대학원에서 생리활성 천연물의 화학적 합성에 관한 연구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사우스웨스턴 의과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11년부터 경상국립대학교 약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의약화학을 강의·연구하고 있다. 현재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를 연구 개발하고 있으며 약의 역사도 함께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 ‘분자 조각자들’ 등이 있다.
2024-12-17 17:56 |
[약대·약학] <22> 베트남에서도 이어진 말라리아 전쟁
베트남에서도 이어진 말라리아 전쟁연간 2억 명이 감염되고 60만 명이 사망하는 말라리아는 전장에서 특히 문제였다. 새로운 지역에서 싸우는 경우에는 어김없이 모기가 날아들어와 피를 뽑고 그 자리에 말라리아 원충을 심어두곤 했다. 말라리아를 정복하는 자가 전쟁을 승리한다는 말도 과언이 아니었다.베트남 전쟁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10년 넘게 남측의 자본주의권과 북측의 공산주의권이 나눠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지만 그들을 공통적으로 괴롭히던 존재는 말라리아였다. 한 문헌에 따르면 전투로 죽는 사람보다 말라리아로 죽는 사람이 네다섯 배는 더 많았다고 한다. 그만큼 말라리아를 치료하기 위한 물질이 절실하게 요구되었다.당시에도 말라리아 치료제는 있었다. 퀴닌처럼 신코나 나무에서 나오는 원조 말라리아 치료제는 이미 내성이 생길만큼 생겨 효과가 없었다. 이후 개발한 아타브린이나 클로로퀸과 같은 합성 퀴닌 유도체들이 그나마 희망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길어지고 국지적으로 약물 사용기간이 길어질수록 모기들도 살아남는 법을 터득해가고 있었다.신규 말라리아 치료제가 필요한 이 상황에서 남측의 자본주의 진영은 미국이 앞장서서 관련 연구를 주도해 나갔다. 당시 직접적으로 참전해서 전투를 선도하는 나라였고 어떻게든 빨리 전쟁을 끝내서 국내 반전 여론을 돌려야 하는 미국의 입장을 감안하면 당연한 대목이다. 그렇다면 북측의 공산주의 진영은 어떻게 했을까? 북베트남 자체적으로 말라리아 치료제를 개발할 역량은 부족했다. 소련은 전쟁과 거리를 둔 상태였다. 따라서 북베트남은 자신과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관련 기술력과 잠재력이 풍부한 나라에 도움을 요청했다. 중국이었다.사실 중국이라고 해도 그다지 상황이 좋지만은 않았던 시절이 1960년대였다. 문화대혁명을 통해 관련 기술을 사장시키고 독자적인 기술을 확보하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중국에도 말라리아는 골칫거리였다. 1964년 중국의 말라리아 환자가 대략 4천만 명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말라리아는 전지구적인 문제였다.중국 과학자들이 말라리아 치료제 개발을 위해 시도한 방법은 문화대혁명과 일맥상통하는 방법이었다. 자국의 문헌을 뒤져서 효과 있는 약초를 찾고 그중에서 활성 있는 물질을 분리해 약으로 개발하는 전략이다. 정치적으로도 별 무리 없는 접근법이지만, 과학적으로도 근거가 있다. 지금도 많은 의약품을 이런 방식으로 개발한다.많은 중국 과학자들이 연구를 하던 와중에 투유유라는 연구원이 주목했던 약초는 개똥쑥이었다. 3세기 무렵 갈홍이 집필한 <주후비급방>이란 문헌에 따르면 개똥쑥을 우러낸 물이 말라리아 증상에 좋은 치료 효과를 보였다. 그렇다면 개똥쑥에서는 관련 효과를 보이는 물질이 있음이 분명하다.다양한 물질이 뒤섞인 생약 추출물에서 효과 있는 주성분을 찾아내는 작업은 대부분 비슷하다. 물리적으로 잘게 부수고, 화학적으로 추출하고, 생물학적으로 활성을 보는 과정이다. 화학적으로 추출할 때는 주성분이 어느 유기용매에 녹을지 알 수 없으므로 다양한 유기용매를 순차적으로 사용한다. 그렇게 나온 유기용매 추출물 중 효과가 있는 유기용매 추출물을 우선적으로 추가 분리하곤 한다. 지극히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접근법이다.그런데 투유유는 이런 작업을 190번이나 반복해도 성공하지 못 했다. 물론 190번을 하는 와중에 여러 번의 변화를 줬을 것이다. 유기용매를 바꾼다거나 추출 온도를 높인다거나 다른 지역의 개똥쑥을 사용하는 식이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갈홍이 언급한 효과를 보지는 못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 새로운 말라리아 치료제를 찾을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191번째 실험에서 투유유가 시도했던 변화는 추출 용매의 온도를 낮추는 작업이었다. 보통 생약을 추출하기 위해서는 온도를 높이려 한다. 그래야 잘 녹을 것이고 따라서 분리도 쉬울 테니까. 그런데 자세히 보니 갈홍은 개똥쑥을 찬물로 우러내곤 했었다. 그렇다면 추출물의 온도가 중요한 것일까? 투유유는 찬물로 우리고 추출 용매도 낮은 온도에서 보관한 후 작업하면서 드디어 원하는 결과를 볼 수 있었다. 아르테미시닌이 세상에 나오는 순간이다.아르테미시닌을 찾아내고 나니 분리가 어려웠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구조가 불안정해 고온에서 다른 구조로 변화됐던 것이다. 그 불안정한 구조 덕분에 말라리아 원충을 죽일 수 있음도 밝혀낼 수 있었다. 투유유는 이러한 혁신을 통해 정체기에 빠져 있던 말라리아 치료제 개발을 한 차원 더 높이 끌어올릴 수 있었고, 이후 2015년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그녀의 노력과 기여에 경의를 표한다.<필자소개>백승만 교수는 서울대학교 제약학과 졸업후 동 대학원에서 생리활성 천연물의 화학적 합성에 관한 연구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사우스웨스턴 의과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11년부터 경상국립대학교 약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의약화학을 강의·연구하고 있다. 현재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를 연구 개발하고 있으며 약의 역사도 함께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 ‘분자 조각자들’ 등이 있다.
2024-11-01 09:17 |
[약대·약학] <21> 군대 가기 싫었던 청년 이야기
군대 가기 싫었던 청년 이야기군대 가고 싶어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안 갈 수 있으면 안 가는 게 낫다라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다. 하물며 자국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이역만리 타국이라면, 그것도 단순한 복무가 아니라 치열한 교전의 현장이라면 더더욱 가기 꺼려지게 마련이다. 1951년 3월 26일, 미국의 22세 청년 E. J. H.도 그랬다.이 청년은 한국전쟁에 참가하라는 징집통지서를 받았다. 하지만 이 청년은 순순히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여러모로 반항을 하기 쉬운 나이지만 당시 이 청년이 택했던 방식은 좀 더 극단적이었다. 바로 자살. 입대하기 싫은 마음이야 십분 이해하지만 그래도 자살은 좀 심했다. 그래도 어쨌든 이 청년은 한반도에서의 죽음 대신 자택에서의 죽음을 택했다. 그는 ‘디콘(d-con)’이라는 약을 먹고 죽기로 했다. 당시 갓 나와서 대대적으로 팔리던 쥐약이었다.그런데 정작 다음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는 잠에서 깨어났다. 죽는 것도 마음대로 안 돼서 화가 났던지, 그는 다음날 다시 그 쥐약을 복용했다. 이번엔 마쉬멜로우처럼 약간 달콤한 맛도 느껴졌다. 하지만 어쨌든 다음날 아침 그는 또다시 잠에서 깨어났다. 그렇게 엿새 밤에 걸쳐 대략 공기밥 반 공기에 해당하는 113그램의 쥐약을 먹고도 그는 죽지 못했다. 그리고 이것도 운명이라며 그는 체념하고 입대했다. 4월 4일 이 신병을 상담하던 의사가 이러한 사례를 듣고 이듬해인 1952년 이 결과를 논문으로 발표하면서 해당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도대체 디콘은 어떤 쥐약일까? 성분명 와파린(warfarin)이라는 이 물질은 1940년대 중반 위스콘신 대학의 약화학자 칼 링크(Karl P. Link)라는 사람이 만든 혈액응고억제제다. 개발의 계기가 된 물질은 디쿠마롤이라는 쿠마린 계열의 식물독이었다. 1930년대 미국에 흉년이 겹치자 북부지방에선 소 사료를 구하는 것조차 어려워졌다. 당시 농부들은 한해 전에 남겨뒀던 사료들도 마지못해 먹이곤 했는데 이런 사료를 먹었던 소들은 어김 없이 출혈로 죽어 나가곤 했다. 이 지역에서 근무하던 링크 교수는 상한 사료에서 원인이 되는 물질을 추출하고 순수하게 화학적으로 합성해 결과를 확인하였다. 이때가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병합하고 영국이 전쟁을 선포하며 제2차 세계대전으로 확전하던 바로 그 시기다. 대서양 건너 미국의 링크 교수도 전쟁과 관련한 연구를 진행했다. 그는 디쿠마롤을 기반으로 후속 물질을 연구했는데 이때 연구비를 댄 곳이 위스콘신 동문 연구기금(Wisconsin Alumni Research Foundation, WARF)이다. 와파린이라는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하였다.링크가 디쿠마롤을 기반으로 만들려 했던 물질이 부상병들에게 유용하게 쓰일 지혈제일지, 적군을 암살하는 데 쓰일 출혈제일지는 남아있는 자료가 별로 없다. 하지만 그가 만든 와파린은 혈액응고억제제였다. 혹시 모른다. 전장에서 살상용으로 쓰일지. 그런데 어느덧 전쟁이 끝나버렸다. 더 이상 용도가 남아 있지 않을 것 같던 이 물질, 와파린을 가지고 링크가 찾아 낸 시장이 바로 쥐약이다. 생각해 보면 쥐 때문에 우리 인류가 얼마나 고역을 겪었던가. 보건 위생부터 시작해 페스트와 같은 전염병까지, 쥐는 우리 인류에게 그닥 반가운 동물이 아니었다. 그래서 링크 교수는 이 물질을 쥐약으로 개발했고 쥐는 와파린에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작은 상처에도 피를 줄줄 흘리며 죽어갔다. 그렇게 민간에서 널리 사용되다 어느덧 군대 가기 싫은 청년의 손에 들어간 것이다.쥐는 잘 죽는데 사람은 왜 안 죽는 걸까? 이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사람은 체내에서 지혈 효과를 담당하는 물질이 많이 있다. 가령 비타민K 같은 물질이 대표적인 혈액응고제다. 따라서 약간의 와파린이 들어와도 하지만 상쇄해낼 수 있다. 소동물인 쥐는 혈액응고체제가 사람만큼 강력하지 못 하다. 그래서 죽는다. 앞서 언급한 논문에 따르면 자살을 시도했던 청년에게도 부작용은 있었다. 코피가 났다. 와파린의 효과와 정확하게 부합한다.혈액 응고 억제 효과가 탁월하고 코피 정도의 부작용이 있다면, 그리고 죽지 않는다면 나름대로 활용 가치가 높은 것 아닐까? 이런 사례가 보고되면서 수술 시의 혈액 응고를 막는다거나 혈전 생성을 억제하기 위해 와파린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수술에 사용될 정도였으니 쥐약으로 쓰던 시절에 비하면 괄목상대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을 통해 약이 개발된, 내가 아는 한 가장 극단적인 사례다. <필자소개>백승만 교수는 서울대학교 제약학과 졸업후 동 대학원에서 생리활성 천연물의 화학적 합성에 관한 연구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사우스웨스턴 의과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11년부터 경상국립대학교 약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의약화학을 강의·연구하고 있다. 현재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를 연구 개발하고 있으며 약의 역사도 함께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 ‘분자 조각자들’ 등이 있다.
2024-09-24 11:45 |
[약대·약학] <20> 독가스와 항암제(2)
독가스와 항암제(2)이탈리아를 장화처럼 생긴 나라라고 하는데, 그 장화의 발뒤꿈치에 위치한 도시가 바리(Bari)다. 로마, 피렌체, 베니스, 밀라노 등 이탈리아 중심지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는 까닭에 유럽여행에서 소외되기 일쑤고 심지어 폼페이나 나폴리같은 이탈리아 남부투어를 통해서도 가지 못하는 도시지만, 아드리아해를 바라보는 풍경과 남부 이탈리아 특유의 기후가 더해져서 현지인들에게는 중요한 관광지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이탈리아 반도 수복을 위한 연합군의 주요 거점 도시이기도 했다.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12월 2일, 바리 항에 수상한 전함이 들어오고 있었다. 당시 이 지역은 연합군이 점령했던 곳이고 지리적인 특성상 각종 전쟁 물품을 선적하던 장소였다. 독일군 입장에서는 적군의 주요 항구에 들어오는 물품이 무엇이든 간에 본인들에게 도움되진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전함을 포착하는 순간 나치 폭격기들은 성실하게 폭탄을 투여하였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폭탄 비에 전함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 전함들은 목적지를 눈 앞에 두고 원통하게도 바다에 가라 앉아야만 했다. 그런데 이때 바다에 가라앉지 않고 목적지까지 도착한 선적품이 있다. 바로 질소겨자가스다.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는 전장에서 독가스를 사용하지 않았다. 아우슈비츠 등의 포로수용소에서 저항력 없는 유대인을 학살하는 용도로 사용하긴 했지만, 전투 목적으로 사용한 기록은 없다. 생산은 했지만, 사용은 하지 않았는데 이유는 불명확하다. 대체적으로는 연합국의 화학무기 사용을 두려워하지 않았을까 추론하는 정도다. 어쨌든 냉전시대의 핵무기처럼 당시는 화학무기를 서로 생산만 하고 사용하지는 않던 시절이었다.그런데 연합국의 상징인 미군이 연말에 몰래 질소겨자가스를 전장에 들여오고 있었다. 어쨌든 화학무기는 국제적으로 사용금지였기 때문에 이러한 이동이 알려지면 여러모로 피곤한 일이 발생할 것도 분명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선적물 중 질소겨자가스와 같은 화학무기가 있다는 것은 비밀로 해둔 상태였다. 알고 있던 사람들은 고작해야 해당 선박인 존 하비호의 일부 승무원들 뿐이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나치의 공습과 함께 현장에서 즉사했다. 화학무기는? 안타깝게도 화학무기는 바람을 타고 코앞에 있던 바리항으로 들어와 버렸다. 이후 파도를 타고 바리 해안가로 들어온 질소겨자가스까지, 바리항은 폭격 이후 더 큰 참사를 겪어야 했다.이때 바리항의 참사가 커진 것은 들어온 것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화학무기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면 어떻게라도 대응을 했을 터인데 현장에서 수습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정보도 가지지 못한 상태였다. 하긴, 미군이 몰래 독가스 들어오려다 나치한테 걸려서 유출되고 아수라장이 됐다는 사실을 어떻게 공표하겠는가. 그러다 보니 수습에 더 큰 시간이 걸렸다. 가령 해안가로 들어온 부상병을 치료하려면 의사들이 부상병을 옮겨야 하는데 이때 의사들도 함께 독가스에 노출되었다. 12월의 추위를 이겨내려면 부상병에게 이불을 덮고 따듯하게 해줘야 하는데 이때 질소겨자가스가 피부를 통해 더 빠르게 흡수되었다. 알면 대처를 하는데 모르면 속수무책이다. 당시 2,000명 가량의 사망자가 발생했는데 이는 진주만 습격의 2,400명에 버금가는 수준의 사망자였다. 그리고 진주만 습격과는 다르게 의료진들의 피해가 컸다는 게 더 안타까운 일이었다.그런데 이처럼 질소겨자가스가 대규모로 유출되자 역설적으로 생존자들에 대한 검사 결과도 늘어났다. 비교적 가볍게 노출되어 회복한 사람들을 조사해본 결과 혈액 중 백혈구 수치가 감소한 것도 알 수 있었다. 질소겨자가스의 고유한 특징이긴 했지만 대규모 임상시험에 돌입하기에는 여러모로 근거가 부족했던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그런데 바리항의 대참사가 발발하면서 의료계 관계자들은 질소겨자가스에 대해서 한층 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이후 군의관이자 약물학자였던 알프레드 길만은 또다른 약물학자 루이스 굿맨과 함께 관련 연구를 진행했다. 이들이 백혈병 치료를 위해 사용했던 물질은 질소겨자가스 그 자체였다. 단지 농도를 다르게 해서 약으로서의 가능성을 타진했다는 차이점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가능성을 본 연구진은 이후 질소겨자가스를 다른 구조로 변화시킨다. 처음 질소겨자가스가 개발될 당시 질소의 세 번째 치환지는 간단하기 짝이 없는 메틸(CH3)기였지만, 어느덧 다양한 치환기를 바꿔가며 약으로서 변신을 거듭해가기 시작했다. 사이클로포스파미드(Cyclophosphamide)와 같은 약이 이러한 과정을 통해 개발한 대표적인 약이다. <필자소개>백승만 교수는 서울대학교 제약학과 졸업후 동 대학원에서 생리활성 천연물의 화학적 합성에 관한 연구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사우스웨스턴 의과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11년부터 경상국립대학교 약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의약화학을 강의·연구하고 있다. 현재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를 연구 개발하고 있으며 약의 역사도 함께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 ‘분자 조각자들’ 등이 있다.
2024-08-14 09:41 |
[약대·약학] <19> . 독가스와 항암제
독가스와 항암제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5년 4월 22일 벨기에의 이프르 지역에서 수상한 연기가 솟아올랐다. 독일군이 염소(chlorine) 가스의 실린더를 열어버린 것이다. 그전부터 화학무기를 발사하는 것에 대해 국제적으로 규제가 가해지고 있었지만 독일군은 규정의 허점을 이용해 화학무기를 ‘발사’하지는 않고 공기 중에 풀어놓았다. 애타게 기다리던 동풍이 불어왔기 때문이다. 이후 바람을 타고 조조군을 물리친 제갈량의 화(火)공처럼, 독일군의 화(化)공은 참호 속에 웅크리고 있던 서쪽의 연합군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화학무기가 더욱 강력해진 것은 그로부터 2년 뒤 유황겨자가스(sulfur mustard)가 나오면서다. 이 물질은 가스라는 말과 어울리지 않게 녹는점이 14도 정도인 액체다. 이 무시무시한 액체를 분무하는 방식으로 연합군에게 사용하면, 손쓸 방도도 없이 죽음에 이르게 된다. 가령, 초기에 사용하던 염소 가스는 방독면을 착용하거나 적절한 중화제를 부직포에 덧대는 방식으로 걸러낼 수 있다. 하지만 유황겨자가스는 이런 연합군의 전략을 비웃듯이 호흡기 외에 일반적인 피부를 통해 몸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천적 없는 세상을 만난 생태계 외래종마냥 우리 몸을 휘젓고 다녔다.그리고 1년 뒤인 1918년, 전쟁의 막바지에서 유황겨자가스는 다시 질소겨자가스(nitrogen mustard)로 변신한다. 여기에는 당시 전세계에서 가장 질소를 잘 다루는 자였던 질소의 왕, 프리츠 하버(Fritz Haber)가 관여한다. 하버는 당시 하버법을 통해 반응성이라고는 1도 없던 공기 중 질소를 반응시켜서 암모니아로 전환하는 방법을 개발한 터였다. 이 암모니아는 반응성이 뛰어나 화학비료에도 쓰고 화약에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 술 더 떠서 독가스로도 사용한 것이다. 얼마나 질소가 풍부하면 이렇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하지만 어쨌든 당시로서는 한 차원 앞선 기술이었음이 분명하다.유황겨자가스에 비해 질소겨자가스가 가지는 차이점은 화학적 다양성이다. 황은 일반적인 화학결합을 두 개까지 하지만, 질소는 세 개까지 가능하다. 따라서 독가스의 구조를 다양하게 할 수 있고 독성도 극대화할 수 있다. 물론 초기에 사용하던 질소겨자가스는 질소가 가지는 추가적인 치환기를 화학적으로 가장 간단한 구조인 메틸(CH3)기로 제한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것만 가지고도 충분한 살상력을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일은 전쟁에 졌다. 독가스로 뒤엎을 수 있는 전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후 베르사유 조약 등을 통해 전쟁을 수습한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그런데 의약품 개발과 관련해서도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이 드러난다. 겨자가스에 노출된 사람 중 살아남은 사람들에게서 특별한 변화가 나타난 것이다. 바로 백혈구의 감소다.제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군의관으로 참전했던 크롬바르(E. B. Krumbhaar) 대령은 전쟁 당시 겨자가스 피해 군인의 백혈구 수치가 극적으로 줄어들었음을 종전 후인 1919년, 논문으로 발표했다. 백혈구가 줄어들면 안 좋은 것 아닌가? 백혈구가 너무 많아도 위험하다. 비정상적으로 백혈구가 늘어나 손쓸 새도 없이 죽는 병을 백혈병이라 부른다. 암이다. 대부분의 암은 조직을 제거해 버리는 게 최선이다. 꼭 원인을 알아야 대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잘라내 버리면 되겠지만 그럴 수 없는 암도 있다. 백혈병과 같은 혈액암이다. 피를 뽑아낼 수는 없으므로 수술이 불가능하다. 초기부터 학자들이 수많은 암 중에도 백혈병 치료제를 개발하려고 했던 이유다. 또 백혈병 치료제는 효과를 관찰하기가 비교적 용이하다. 절개를 통해 암조직을 관찰하는 번거로운 작업 없이 그저 채혈해서 백혈구 수치를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치료제가 잘 작용하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하지만 이런 기대와는 다르게, 백혈구 수치를 줄이는 물질 자체가 별로 없었다. 고작 찾아낸 물질이 벤젠이다. 지금은 대표적인 발암물질이지만 당시의 의학 수준은 이런 물질에라도 기대야 할 정도의 처참한 수준이었다. 벤젠이 싫다면? 말라리아를 감염시켜 백혈구 수치를 줄이는 방법도 진지하게 연구되었다. 참고로 말라리아 감염으로 매독을 치료한 사람은 노벨상도 받았다. 말라리아 원충이 무섭다면? 수혈도 가능했다. 단, 일란성 쌍둥이만 쓸 수 있는 방법이었다. 방사선 치료도 있긴 했지만, 역시 지금처럼 최첨단 장비가 아님을 염두에 두길 바란다.여러모로 답이 없던 시절에 독가스가 백혈구 수치를 낮춘다는 사실은 여러모로 의미있는 결과였다. 하지만 의약품으로 개발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임상시험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후속 단계로 이어지기에 겨자가스는 어쨌든 독가스였다. 피해자들이 버젓이 눈뜨고 지켜보던 바로 그 물질, 독가스의 대명사가 겨자가스였다. 다음 단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여론을 반전시킬 거대한 한 방이 필요했다. <필자소개>백승만 교수는 서울대학교 제약학과 졸업후 동 대학원에서 생리활성 천연물의 화학적 합성에 관한 연구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사우스웨스턴 의과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11년부터 경상국립대학교 약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의약화학을 강의·연구하고 있다. 현재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를 연구 개발하고 있으며 약의 역사도 함께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 ‘분자 조각자들’ 등이 있다.
2024-07-19 09:49 |
[약대·약학] <18> 아타브린을 둘러싼 신경전
아타브린을 둘러싼 신경전제2차 세계대전은 지구상 대부분의 영역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하늘에선 폭격기와 전투기가, 땅에선 탱크와 보병이, 바다에선 군함이, 그 밑에선 잠수함이 진을 치고 있었다. 열대우림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오직 순수하게 전략적 목표만을 위해 몰려드는 군인들에게 그 지역의 기후는 춥건 덥건 별 문제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 틈을 타고 기승을 부린 존재도 있다. 말라리아다.말라리아는 온대지방에서도 유행하긴 하지만 그래도 더 빈발하는 지역은 열대나 아열대지역이다. 덥고 습한 이 지역에서 모기는 말라리아 유충을 품고 잘 살고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늘어난 군인들의 피를 빨며 물리적인 반대급부로 말라리아 유충을 선사했다. 총, 칼, 화약을 대비하던 군인들이 예상치 못한 자연의 습격에 당황한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군인들도 대처법을 찾았다. 말라리아는 고대 로마 시절부터 알려진 질병이었고 이에 대한 치료법도 경험적으로 나와 있었다. 대표적인 방법이 신코나(키나) 나무껍질 추출액이었다. 근대 화학이 발전하면서는 이 추출액에서 실제 약효를 띄는 성분을 분리해서 퀴닌이라는 이름으로 복용하고 있었다. 쓰디쓴 물질이었지만 죽는 것보다는 낫다. 사람들은 퀴닌을 술에 타서 먹거나 토닉 워터와 함께 복용하곤 했다.문제는 퀴닌의 보급이었다. 남미 안데스 산맥 인근에서 생산되던 신코나 나무의 종자를 밀반출해서 동남아시아 일대에서 재배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래도 제2차 세계대전의 폭발적인 수요를 따라가긴 어려웠다. 보다 효과적으로 이 물질을 생산·보급하는 방법은 없을까? 화학자들이 다시 힘을 낼 때였다.퀴닌은 식물이 생산하는 화합물이었다. 구조는 복잡하기 짝이 없지만 복잡한 구조 모두가 실제 약효와 관련이 없을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어쩌면 간단하지만 비슷한 구조를 배열하면서 비슷한 효과를 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신코나 나무가 아니라 화학공장에서 생산하는 것도 가능하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 아는가? 꿈은 이루어지는 법이다.1930년대 독일의 화학자들은 퀴닌의 분자 구조를 기반으로 보다 만들기 쉽고 간단한, 그러면서도 어느 정도 구조적으로 유사한 물질들을 만들어냈다. 지금까지도 개발도상국에서 널리 사용하는 클로로퀸이나 아타브린이 여기에 해당한다. 드디어 방법이 생겼다. 만들고 싶다고 이렇게 뚝딱 만들어내는 걸 보면 사람의 힘도 대단하다.그런데 1930년대 후반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런 물질들은 연합국과 추축국을 가리지 않고 모든 나라에서 사용하게 된다. 특허 문제는 없었을까? 전쟁 중인 상황이었다. 특허 말고도 여러 가지 이유로 싸울 이유가 많았다. 독일에서는 이런 상황이 못마땅했다. 자신들이 애써 만들어놓은 물질을 그냥 쓰는 것이 싫었던 독일의 과학자들은 어느덧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아타브린을 복용하면 불임이 된다는 식의 소문이었다. 순진한 미국의 병사들은 이 헛소문에 낚여서 열대지역에서도 아타브린의 복용을 거부하는 경우가 이어졌고, 이는 다시 해당 부대의 말라리아 창궐 및 전투력 급감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이런 흑색선전을 차단하기 위해 미군 부대는 다시 군인들을 교육시켜야만 했다.말라리아의 폐해는 현재 진행형이다. 연간 2억 회 이상 감염이 일어나고 60만명 이상이 사망하는 질병이 말라리아다. 빌 게이츠 등의 자산가나 거액을 후원하고 각국 정부가 연구비를 편성해 지구상에서 말라리아를 박멸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별다른 진척은 보이지 않는다. 어느덧 모기는 인류의 천적으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르렀다. 말라리아는 우리나라에서도 자연적으로 발병하는 질환이다. 매년 300~400명 가량 감염되곤 했는데 해외 유입이 아니라 순수하게 국내에서 감염된다는 사실이 무섭다. 그리고 코로나 엔데믹을 맞은 2023년 국내 말라리아 환자가 무려 700명을 넘었다는 사실은 더 무섭다. 그래도 마냥 희망은 있다. 1970년대 우리나라 말라리아 발병 건수는 1만5천 건을 상회했다. 공중보건이 개선되고 약물을 개발하며 어느 정도는 통제 가능한 수준까지 내려왔다는 사실에 조금은 안도해도 된다. 이런 약물 개발의 이면에 전쟁이 있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지만 말이다. <필자소개>백승만 교수는 서울대학교 제약학과 졸업후 동 대학원에서 생리활성 천연물의 화학적 합성에 관한 연구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사우스웨스턴 의과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11년부터 경상국립대학교 약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의약화학을 강의·연구하고 있다. 현재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를 연구 개발하고 있으며 약의 역사도 함께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 ‘분자 조각자들’ 등이 있다.
2024-06-11 11:06 |
[약대·약학] <17> 기적의 생존자
기적의 생존자독일군이 전면전을 개시해 프랑스를 침범하고 전격전을 앞세워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을 몰아붙인 1940년 5월, 제2차 세계대전 초반의 전황은 이미 결정이 났다. 앞뒤로 고립당한 연합군은 밀리고 밀려 도버해협까지 후퇴했고 이제 곧 독일군의 기갑사단이 밀어붙이면 항복하는 것 외의 선택지가 없었던 상황이다. 등 뒤에는 바다가, 눈앞에는 탱크부대가 도사리고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 그 어떠한 엄폐물도 전술도 쓸 수 없던 상황이었다.그런데 돌연 독일군의 진격이 멈췄다. 훗날 수많은 군사 전문가들의 머리를 쥐어 짜게 만드는 미스테리한 결정이 베를린의 수뇌부에서 날아들었고, 현장 지휘관들의 아우성을 뒤로 한 채 탱크는 단 한 대도 진격하지 않았다. 이렇게 알 수 없는 대치 상태가 이어진 열흘 간 영국은 쓸 수 있는 배는 모조리 징발해 도버해협을 건넜고 패퇴한 군인 30여만 명을 안전히 후퇴시킬 수 있었다. 이후 이 군인들의 대부분은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전장에 복귀하였다. 어쩌면 전쟁의 양상이 초반에 결정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승기를 놓쳐버린 이 사건을 덩케르크 탈출사건 또는 덩케르크의 기적이라고 부른다.독일군이 노려보기만 하고 있던 7일째인 5월 31일, 프랑스의 한 전함도 자국 군인을 후송하기 위해 접안했다. 하지만, 패잔병을 수습해 작전 지역을 벗어나던 이 전함은 불행히도 독일 잠수함에 발각되고 말았다. 눈앞에 있는 적함을 그냥 보내는 배는 없다. 독일 잠수함도 프랑스 전함을 요격했고, 피격당한 전함은 별다른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바다 밑으로 가라 앉았다. 간절하게 탈출을 원했던 패잔병이나 잠수함의 승조원들 대부분이 죽었음도 당연한 수순이다.그런 면에서 헨리 라보리는 운이 좋았다. 우선 전함이 가라앉는 와중에도 살아남았다. 라보리 외에 살아남은 사람들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 떠다니는 것을 찾아서 싸우다가 자멸하기 일쑤였다. 라보리는 이런 다툼과 한발 떨어져 있으려 했다. 5월 말의 차가운 밤바다에 누워 별을 바라보며 구조선을 기다렸다. 어차피 차분히 기다리는 것 외에 별로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그는 조용히 명상에 잠겨서 기적을 기다렸다.영국 구조선이 다가온 것은 새벽이었다. 라보리는 마지막 힘을 짜내서 구조선으로 올라갔고 그 직후 탈진했다. 이후 구조선에서 기력을 회복한 그는 살아남았음에 감사하며 본업으로 돌아갔다. 그는 외과의사였다.아프리카 튀니지에서 외과의사로 일하며 그는 수술 성공률을 높이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성공률을 높일 수 있을까? 왜 수술이 실패할까?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진정시키면 수술이 더 잘 될 것으로 보았다. 어떻게 하면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을까? 그가 찾았던 해법은 본인의경험이었다. 덩케르크 탈출 시에 그는 차가운 밤바다에서 마음을 진정시켰다. 어쩌면 체온과 관련된 것은 아닐까?그는 환자의 체온을 낮추기 위한 방법부터 시도했다. 하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본인의 경험은 탈출 시에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수술대 위의 환자에게 쓸 수 있는 방법은 아니었다. 수술 부위를 차갑게 하는 형태의 처치로는 환자를 안정시킬 수 없었다.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로 돌아온 라보리는 이제 온도보다는 약물에 주목했다. 당시는 항히스타민제가 개발되어 알러지 환자들을 무척이나 졸립게 만들던 시절이었다. 라보리는 초기 항히스타민제를 이용해 외과 수술에 사용했다. 혹시 아는가? 졸리면 진정될지. 그리고 진정되면 수술 성공률이 올라갈지.물론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외과 수술과 진정제는 별 상관이 없다. 그런데 신기한 사례가 있었다. 조현병 환자에게 외과 수술 목적으로 항히스타민제를 투여했을 때 조현병 환자의 증상이 개선된 것이다. 정신은 형이상학적인 것이라, 약물과 같은 물질로 조절할 수 없다고 믿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라보리는 분명히 달라짐을 알 수 있었다.라보리는 이 결과를 바탕으로 정신병 치료제를 개발하고자 하였다. 관련 학계에서 이슈가 된 것은 당연한 노릇이다. 외과의사가 개발한 정신병 치료제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전문가들이 검증을 이어가고 결과가 재현성 있게 나타나자 이 물질은 이후 그래도 정신병 치료제가 된다. 클로르프로마진이 탄생한 순간이다. <필자소개>백승만 교수는 서울대학교 제약학과 졸업후 동 대학원에서 생리활성 천연물의 화학적 합성에 관한 연구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사우스웨스턴 의과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11년부터 경상국립대학교 약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의약화학을 강의·연구하고 있다. 현재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를 연구 개발하고 있으며 약의 역사도 함께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 ‘분자 조각자들’ 등이 있다.
2024-05-24 10:05 |
[약대·약학] <16> 마약류 각성제가 지배한 전쟁
마약류 각성제가 지배한 전쟁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이자 이후 극심한 사회·경제적 혼란을 겪었던 독일은 어떻게 제2차 세계대전 초반의 흐름을 장악할 수 있었을까? 초반에 프랑스를 이겼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프랑스를 이겼을까? 제1차 세계대전에서 4년간 참호 밖으로 제대로 전진하지도 못한 채 패했던 프랑스를 독일이 이긴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보통 전격전으로 대표되는 독일 기갑부대의 신화는 제2차 세계대전 초기 전황을 결정짓는 주요 변수였다. 지리한 참호전으로 가기 전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치고 들어가는 전술이다. 적군이 뒤를 둘러싸면 전멸당할 수도 있지만, 이 위험을 넘어서는 속도로 적군 진영을 전진하며 혼란에 빠뜨리는 이 전격전은 전쟁 초기 느긋하게 대응하려뎐 프랑스군을 궤멸시키는 주요 전술이었다. 탱크의 질도 양도 부족했던 패전국 독일은 어느덧 승전국 프랑스를 점령하였다. 전술이 이래서 중요하다.그러면 독일군의 전격전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체계적인 훈련과 시스템 정비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한다. 그런데 여기에 마약류 각성제도 한 몫 한다. 당시 독일군이 애용하던 각성제는 퍼비핀(Pervitin)이란 이름의 약이었다. 전쟁 초기 장교들이 직접 나눠주며 복용을 권장하던 이 약의 성분은 메스암페타민. 비슷한 시기 일본군이 필로폰이라는 상품명으로 애용하던 바로 그 물질이다. 일본이 필로폰을 개발한 시기, 대륙 반대편 독일의 화학자는 같은 물질을 퍼비틴이라는 이름의 각성제로 만들어 팔고 있었다. 그리고 군에 납품되어 전쟁의 초반을 결정짓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메스암페타민은 일본인 약화학자가 생약재인 마황을 연구하던 와중에 개발한 물질이다. 이후 이 물질에 집중력과 체력을 일시적이긴 하지만 올려주는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고서 일본에서는 193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팔리기 시작하였다. 이 제품은 심지어 일본 정부도 권장하던 물질이다. 전투원 뿐 아니라 후방에서 군수물자를 조달하던 사람들부터 생업에 종사하던 사람들까지 일시적인 생산력 향상을 느끼며 만끽하던 물질이다. 도파민 증가로 인한 신경계의 과잉 활성화 때문이다. 물론 이런 효과는 오래 지속하지 못 한다. 우리 몸은 도파민 과잉을 인지하고 신경세포의 수를 줄이거나 수용체를 조절하는 형태로 넘쳐나는 도파민에 적응해 간다. 따라서 같은 양의 메스암페타민을 복용해도 처음 느꼈던 그 쾌감과 활력을 느끼지는 못 한다. 결국 더 많은 양을 원하게 되는데 우리는 이것을 내성이라고 부른다.약물 내성과 중독에 빠진 군대가 강군일리는 없다. 독일군도 이를 인지하고 2년여가 지나자 퍼비틴을 금지시켰다. 잘 보급되던 각성제가 어느날 갑자기 공급이 끊겼다. 금단증상에 시달리던 군인들이 더욱 더 공황상태에 빠졌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일본은 조금 늦게 끊었다. 전쟁 중 대량생산했던 필로폰이 패전과 함께 민간인에 풀리고 그 폐해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1951년 마약법을 제정해 본격 단속에 나섰다. 하지만 일본인 역시 쉽사리 끊지 못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필로폰은 지금도 일본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물질이다.마약류 각성제에 힘을 빌린 건 연합군도 마찬가지다. 연합군이 애용했던 물질은 암페타민이고, 이를 주로 사용했던 사람들은 파일럿이었다. 잠깐의 순간에 생사가 결정되는, 약간의 타격 만으로도 추락해 즉사하거나 포로가 되는 파일럿들에게 각성제는 필수품이었다. 독일군이 퍼비틴에 취해 출격한 이상 연합군도 약물로 무장하는 게 어느 정도 이해는 된다. 전쟁이라는 극단 속에서 상식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법이다.이후 마약류 각성제는 지금까지도 살아 나았다. 승전국인 연합국에서 암페타민은 의사 처방전 하에서 ADHD 치료제로 승인되어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이런 합법적 용도 외에 불법적인 용도로도 여전히 존재감을 나타내고 있다. 역시 전쟁이다.2010년대 IS가 이슬람에서 전쟁을 일으키던 당시 IS는 조직원들에게 ‘캡타곤’이라는 약물을 지급했다. 캡타곤은 어떤 약일까? 암페타민과 카페인을 화학적으로 결합시킨 물질이다.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암페타민을 커피에 타서 마신다고 생각하면 조금 비슷하다. 각성제와 각성제라니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전투를 앞두고서 몇 알을 먹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금단의 약물까지 꺼낸 상황이 야속하기 짝이 없다.IS가 패퇴한 지금도 캡타곤은 사용되고 있다. 2023년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다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보복 공격한 전쟁에서 캡타곤이 다시 발견되었다. 이쯤 되면 전쟁에서 이기는 게 사람인지 약물인지 헷갈릴 지경이다.<필자소개>백승만 교수는 서울대학교 제약학과 졸업후 동 대학원에서 생리활성 천연물의 화학적 합성에 관한 연구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사우스웨스턴 의과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11년부터 경상국립대학교 약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의약화학을 강의·연구하고 있다. 현재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를 연구 개발하고 있으며 약의 역사도 함께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 ‘분자 조각자들’ 등이 있다.
2024-04-15 14:29 |
[약대·약학] <15> 코르티손에 낚이다.
신장은 우리 몸의 변화를 가장 잘 인지하는 조직이다. 혈류의 흐름을 감지하며 혈압을 조절하기도 하고 필요한 영양분을 재흡수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많은 호르몬이나 신경전달물질도 생산해서 직접적으로 우리 몸의 변화를 이끌어내기도 한다. 아드레날린이나 레닌 등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마법의 스테로이드, 코르티손도 여기에 해당한다.코르티손은 처음 추출될 때부터 각광받았던 물질이다. 소의 신장 위 부신이란 조직에서 나온 추출액은 ‘코르틴(cortin)’이란 상품명으로 시판되었다. 애디슨씨 병 치료제 용도였는데 이 병이 코르티손 부족으로 인해 발병하는 것을 감안하면 적절한 치료법이라 볼 수 있다. 직전까지는 불치병이었던 애디슨씨 병의 치료제가 개발되면서 코르틴은 마법의 스테로이드로 각광받았다. 이에 따라 코르티손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이 시작되었다.코르티손이 소의 부신에서 나오기 하지만 어쨌든 화합물이다. 소의 고환에서 나오던 테스토스테론을 콜레스테롤 유도체에서 합성하는 방법을 개발한 사람들이 1930년대의 과학자들이다. 이 사람들은 연이어 코르티손도 화학적으로 합성하려 했는데 테스토스테론에 비해 코르티손의 구조는 조금 더 복잡하다. 그만큼 만들기도 어려웠다. 테스토스테론으로 대박을 쳤던 당대의 과학자들은 코르티손의 난해함에 두 손을 들어야만 했다. 오히려 소의 부신에서 추출하는 방법이 더욱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도축장에서 버려지는 장기도 많던 시절이다. 전세계적으로 생각한다면 어쩌면 더 현실성 있는 대안일 수도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1941년 미국 정보부는 한 첩보를 입수하게 된다. 나치가 아르헨티나에서 소의 부신을 대량으로 확보해 본국으로 가져가고 있다는 정보였다. 예나 지금이나 정보부에 들어오는 모든 정보가 진실은 아니다. 다각적으로 분석해 정확한 정보를 가려내고 규합해서 실체적 진실을 알아내는 것이 정보부의 역할이다. 하지만 연이어서 들어오는 공작원들의 정보는 무섭기 짝이 없었다. 나치가 부신 추출물을 이용해 코르티손을 대량생산하고 이를 바탕으로 슈퍼 파일럿을 양산한다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파일럿들이 보다 높은 고도에서 활동한다면 어떻게 될까? 폭격기가 전투기의 활동 고도를 넘어서서 무차별 폭격한다면? 이것이 불가능했던 이유는 산소 농도가 낮아서 작전을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인데, 만약 코르티손이란 마법의 스테로이드를 복용하고 이를 현실화한다면? 제공권을 바탕으로 전쟁을 수행하던 연합국 수뇌부에게 이러한 정보는 위험하고 공포스럽기 짝이 없었다. 연합국도 대책을 세워야 했다. 하지만 어디서 코르티손을 얻는단 말인가? 현실적인 방법인 소의 부신은 이미 전세계적으로 나치가 다 수거해 갔는데? 미국의 과학자들인 다시 화학적 합성법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원료가 될 콜레스테롤 유도체 등에서도 확보가 수월했다. 미국 정부가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프로젝트였기 때문이다. 제약회사까지 참여한 이 프로젝트를 통해서 에드웨드 켄달 같은 전문가들은 그전과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풍족한 조건에서 화합물 분리 및 합성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원천기술까지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그런데 정작 히틀러가 자살하고 독일이 항복했다. 연합군이 확인한 결과 나치 정권은 코르티손을 이용해 슈퍼 파일럿을 양산하려고 한 적이 없었다. 거짓 정보에 제대로 놀아난 미국 정보부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의 코르티손 관련 연구도 접어야만 할까? 하지만 앞서도 언급했듯이 코르티손은 그 자체로 마법의 약이었고 경위야 어쨌든 상당한 수준의 기술적 진보를 이뤄낸 상태였다. 미국 정부의 관심이 나치에서 공산주의자로 옮겨가며 관심이 차갑게 식어버린 이 시기, 제약회사가 본격적으로 코르티손 개발의 바통을 이어받았다.이후 머크와 같은 제약회사는 코르티손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수준으로는 상상도 하기 어려웠던 36단계의 합성법을 개발해 코르티손을 합성해 낸 것이다. 이후 이렇게 개발된 코르티손 9그램은 애디슨씨 병을 넘어서 관절염 치료 등 보다 광범위한 질환에 사용된다. 속고 속이는 전쟁의 흐름 속에서 뜻하지 않게 개발된 코르티손이지만 어쨌든 우리 인류에겐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 의약품이다. <필자소개>백승만 교수는 서울대학교 제약학과 졸업후 동 대학원에서 생리활성 천연물의 화학적 합성에 관한 연구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사우스웨스턴 의과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11년부터 경상국립대학교 약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의약화학을 강의·연구하고 있다. 현재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를 연구 개발하고 있으며 약의 역사도 함께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 ‘분자 조각자들’ 등이 있다.
2024-03-13 09:17 |
[약대·약학] <14> 미국으로 건너간 페니실린
미국으로 건너간 페니실린‘페니실린’ 하면 떠오르는 이름이 보통 ‘알렉산더 플레밍’이고 실제로 유례없는 기적 끝에 페니실린을 발견한 사람이긴 하지만 개발은 이야기가 다르다. 플레밍이 포기하고 잊어버렸던 물질 페니실린에 의미를 발견하고 가치를 부여한 사람들은 하워드 플로리, 에른스트 체인, 노만 히틀리 등으로 대표되는 옥스퍼드 병원의 연구진들이다.에른스트 체인은 유대계 화학자였다. 나치가 집권한 후 유대인이 악의 근원으로 지목되며 대거 축출되자 영국으로 넘어온 상태였다. 그가 영국에서 찾고자 하는 물질은 항생제. 독일에서 넘어오기 직전 들었던 프론토실과 같은 항생제를 영국에서도 만들고 싶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프론토실은 시판 직후 설파제에 영광의 자리를 물려준 상태였고, 그 설파제 역시 잦은 내성 등으로 인해 한계를 보이고 있었다. 이런 때에 설파제를 능가하는 항생제를 만들어낸다면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는 옥스퍼드 병원 내과장이던 하워드 플로리의 지휘 아래 관련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좋은 물질 어디 없을까’하고 관련 문헌을 공부하던 체인의 눈에 플레밍의 논문이 들어왔다.플레밍도 나름 페니실린을 정제한다고 했고 병리학자임을 고려하면 최선을 다하긴 했지만, 전문적인 화학자의 눈으로 봤을 때 플레밍의 연구는 허점이 많았다. 어쩌면 플레밍의 동물실험이 한계를 보였던 이유도 이처럼 화합물의 순도 때문일지도 몰랐다. 검증이 필요한 상황이다. 체인은 관련 실험을 독자적으로 진행했고 플레밍의 연구 수준보다 높은 순도로 페니실린을 정제할 수 있었다. 이 상태에서 동물실험을 진행했을 때, 기존의 항생제와는 비교도 안 될 항균 활성이 나오는 것도 관찰할 수 있었다. 베일에 가려진 페니실린이 다시 한 번 기적적으로 세상에 소개된 순간이다.이후 플로리의 연구팀은 인력을 보강하여 페니실린의 대량 생산에 나섰다. 배양 접시의 수를 늘리고 푸른곰팡이가 최대한 편안하게 증식할 수 있도록 온도, 습도, 양분 등의 조건을 최적화했다. 일용직 노동자를 추가로 고용하여 생산량을 늘렸고, 전문 화학자를 섭외해 순도를 높이는 노력도 병행하였다. 그렇게 1941년 2월 12일 사람을 대상으로 페니실린을 투여할 수 있었다. 대상자는 패혈증으로 죽음을 눈앞에 둔 전직 경찰관이었다.페니실린의 항균 효과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하지만 양이 모자랐다. 이 환자는 5일여 간 기적처럼 증상이 개선됐지만 이후 페니실린이 부족해지면서 투여를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환자의 소변에서 페니실린을 다시 확보하려는 시도도 별 소용이 없었다. 그는 총알이 떨어져 허무하게 죽음을 맞은 군인처럼 죽었다.한 명의 환자를 구하지 못한 약이 세상을 구할 수는 없다. 획기적으로 생산 시설을 확장하지 않는 한 페니실린은 그럭저럭 좋은 논문 한 편으로 끝나버릴 연구 주제였다. 하지만 1941년 당시는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 진행되던 시절이었고,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논문이 아닌 현실에 쓸 수 있는 치료제였다. 따라서 옥스퍼드의 연구진은 미국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매일 밤 쏟아지는 나치 공습기의 공습 하에서는 지속적 연구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미국에서 페니실린은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관련 연구진이 모여들어 푸른곰팡이의 페니실린 생산 효율을 높이기 위해 주야를 가리지 않고 연구했다. 푸른곰팡이 표본을 고르고, 엑스선으로 돌연변이를 만들어 수득률을 높이기도 했다. 배양액에 옥수수 추출물을 넣어서 생산효율이 올라가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배양접시를 벗어나 배양탱크를 적용한 것이 결정적 변화였다. 당시 미국 최고의 발효 노하우를 가지고 있던 원료 생산업자 화이자사는 자신들의 구연산 생산 기술을 페니실린에 적용해 발효 탱크 차원에서 생산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1942년 11월 미국 보스턴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유일한 출입구인 회전문에 사람들이 탈출을 위해 몰려들면서 회전문이 멈추고, 피해 규모가 더 커진 이 사건은 이후 멈춰버린 회전문 앞에서 대량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전국적인 관심을 끌었다. 500명에 가까운 사망자가 발생했으니 이슈가 안 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사건은 페니실린의 개발 측면에서도 의미를 가진다. 당시 중증 화상환자의 치료를 위해 페니실린이 사용됐기 때문이다. 당시 극비로 개발중이던 페니실린은 시의 적절하게 생산되어 보스턴 지역의 사망자를 줄이는데 일조하였다.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비롯해 제2차 세계대전 후반 페니실린은 전쟁의 양상을 바꾸는 데에도 기여했다. 전쟁이 아니었다면 페니실린이 이토록 빠르게 개발될 수 있었을까 싶지만, 이렇게 개발된 의약품이 전투 중 부상병의 치료를 위해 사용된다는 점 또한 인상적이다. 전쟁과 약의 관계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의약품이 바로 페니실린이다. <필자소개>백승만 교수는 서울대학교 제약학과 졸업후 동 대학원에서 생리활성 천연물의 화학적 합성에 관한 연구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사우스웨스턴 의과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11년부터 경상국립대학교 약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의약화학을 강의·연구하고 있다. 현재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를 연구 개발하고 있으며 약의 역사도 함께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 ‘분자 조각자들’ 등이 있다.
2024-02-15 17:43 |
[약대·약학] <13> 페니실린이란 기적
알렉산더 플레밍은 1차 대전 참전 용사다. 군의관으로 활약하며 후방에서 부상병들을 회복시키는데 공을 세웠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천재라도 시대의 한계를 넘을 수는 없는 법. 끝없이 밀려오는 부상병 속에서 2차 감염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부상보다도 감염으로 더 많은 병사들이 죽는 상황을 지켜보며 그는 전쟁 후 감염증을 치료할 수 있는 물질을 개발해야겠다고 다짐했다.실마리가 잡힌 건 전쟁이 끝나고 5년 후인 1923년. 실험 도중 그의 눈물이 떨어진 자리에는 균이 자라지 않는 것을 확인하였다. 좀 더 면밀히 연구해보니 눈물 외에 콧물 등의 다른 체액에서도 관찰되는 현상이었다. 여기에 균을 죽일 수 있는 물질이 있다는 말이다. 그는 이 물질을 리소자임(lysozyme)이라 명명하고 학회에 보고하였다. 하지만 학회의 반응은 놀라울 정도로 차가웠다. 리소자임으로 죽일 수 없는 균이 대부분이었고, 그나마 죽일 수 있는 균도 우리 몸에 도움이 되는 균이 대부분이었다. 학술논문으로는 가치가 있을지 몰라도 상업화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꺾일 법도 했지만 플레밍은 연구를 이어갔다. 실험방법은 간단하다. 배양접시에 균을 키우고 가능성 있는 물질을 떨어뜨려 그 주위로 균이 자라지 않으면 항균효과가 있다는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실험방법이 간단할수록 결과도 좋다. 빠른 시간에 많은 물질을 테스트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수많은 약물학자들이 고민하는 빠르고 정확한 약물 효능 평가 시스템 구축을 위해 플레밍도 많은 고민을 했다. 그리고 기적이 찾아왔다.리소자임을 찾아내고 다시 5년이 흐른 1928년 8월, 플레밍은 지친 몸을 이끌고 휴가를 떠나려 했다. 목적지는 고향인 에든버러. 언덕 위 웅장한 성채를 자랑하는 스코틀랜드의 중심지 에든버러는 지금도 런던에서 가려면 운전으로 7시간이 넘게 걸리는 지역이다. 영국을 종단하는 이 여행에 긴 시간이 걸리는 것은 1928년에도 마찬가지. 플레밍이 계획한 여행은 무려 2주였다. 열심히 일하고 긴 휴가를 떠나는 유럽인답다.그런데 정작 플레밍은 배양접시 뚜껑을 열어 놓고 가는 실수를 저질렀다. 기차 시간에 늦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굉장히 허둥지둥 나간 듯한 느낌이다. 심지어 실험실 창문도 열어놓고 가버렸다. 꼼꼼한 것으로 유명한 플레밍의 행동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틈이다. 그리고 그 틈으로 푸른곰팡이가 날아들었다. 플레밍 실험실의 아래층에 있던 미생물 배양실에서 푸른곰팡이가 날아와 실수로 열려있던 창문을 타고 들어왔다. 그리고 실수로 열려있던 배양접시 위에 살포시 내려 앉았다. 그리고 우연히도 무더웠던 런던의 8월 속에서 2주일간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리고 배양접시 속 다른 균들을 무참히 죽였다.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플레밍의 표정을 본 사람은 없다. 하지만 꿈에 그리던 실험 결과가 떡하니 자기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을 보고서 어떤 기분이었을지 짐작은 간다. 플레밍은 이런 기적을 허투루 놓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배양접시에 날아든 물질이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여러 가능성을 타진했고 범인의 흔적을 찾는 형사처럼 경로를 역추적했다. 그리고 아래층에서 날아온 푸른곰팡이를 찾아냈다. 유레카.이제 다음 단계는 푸른곰팡이에서 어떤 물질이 실제 항균효과를 띄는지 확인하는 일이다. 감염증을 치료하겠다고 푸른곰팡이를 갈아마시거나 상처에 바르는 용자는 없을테니 말이다. 꿈에 찾던 물질을 눈 앞에 두고서, 플레밍이 더욱 심도 있게 연구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잘만 한다면 1910년 마법의 탄환이란 찬사를 들었던 매독 치료제 살바르산의 영광을 다시 한 번 소환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플레밍의 후속 연구는 지지부진하기 짝이 없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푸른곰팡이가 만들어 낸 물질을 분리해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분리는커녕 물질의 정체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이 물질이 단백질인지 작은 화합물인지에 대해서도 실마리를 잡지 못했다. 정제가 안 됐으므로 동물실험에서 보이는 효과도 미미했다. 사람에게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플레밍은 이듬해에 논문을 하나 발표하는 것으로 연구를 마무리했다. 플레밍의 연구가 제대로 발전하지 못했던 이유가 하나는 아니겠지만, 가장 큰 한계는 화학자의 부재였다. 페니실린이 화합물인 만큼 정제와 개발을 위해서는 화학자의 역할이 필수적이었는데 정작 플레밍은 화학에 관해서는 전문적인 지식이 부족하였다. 그렇다면 공동연구를 통해서 한계를 극복해야 하건만 무슨 이유에선지 플레밍은 이러한 협력을 추구하지 않았다. 아마도 페니실린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화학자와의 협력을 통해 진일보한 항생제 프론토실을 선보인 독일 연구진들과 비교하면 여러모로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하지만 페니실린은 다시 돌아온다. 수많은 화학자의 도움과 함께 말이다. <필자소개>백승만 교수는 서울대학교 제약학과 졸업후 동 대학원에서 생리활성 천연물의 화학적 합성에 관한 연구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사우스웨스턴 의과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11년부터 경상국립대학교 약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의약화학을 강의·연구하고 있다. 현재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를 연구 개발하고 있으며 약의 역사도 함께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 ‘분자 조각자들’ 등이 있다.
2024-01-10 11:04 |
[약대·약학] <12> 총알과 수면제
12. 총알과 수면제코르다이트란 물질이 있다. 영국에서 19세기 후반에 만든 이 물질은 폭발력이 강해 화약으로 인기가 높았다. 만드는 방법도 간단했다. 니트로글리세린과 니트로셀룰로오스, 바세린을 아세톤에 녹여서 적당하게 섞어주기만 하면 됐다. 만들기도 쉽고 성능도 좋은 이 화약은 이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주요 화약으로 사용하게 된다.문제는 아세톤의 공급이었다. 아세톤은 당시 독일에서 원료를 수입해서 가공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쟁이 길어지자 독일이 이 원료를 전략물자로 규정해 영국에 팔지 않게 된 것이다. 영국에 아세톤이 부족해진 것은 당연한 노릇이고, 시간이 지나며 코르다이트 마저도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전장에서 총알을 아껴쏘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 기관총 사수에게 총알을 세어 가면서 발사하라고 하면 과연 참호를 지켜낼 수 있을까? 영국은 아세톤으로 위기를 맞았다.이때 영국이 자체적으로 아세톤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방법은 발효였다. 차임 바이츠만이라는 러시아 태생의 유대계 생화학자가 그전에 기막힌 방법을 개발해 놓은 것이었다. 바이츠만이 미래라도 내다본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그는 합성고무를 만들기 위해 설탕의 발효를 연구했고 그 과정에서 에탄올과 아세톤이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합성고무는 아니지만 어쨌든 괜찮은 물질이 나오는 것을 확인하고서 그는 특허를 신청했고 이후 전쟁 중 위기를 맞은 영국 정부가 아세톤에 주목해 이 과정을 전략적으로 채택한 것이다. 세상 일은 알 수가 없다.어쨌든 영국군은 더 이상 총알을 걱정하지 않고 전장에서 기관총을 난사할 수 있었고 결국 전쟁에서 승리했다. 당시 영국에서 바이츠만의 공법으로 생산한 아세톤의 양은 연간 3만톤에 이른다고 하니 그 중요함을 얼추 짐작할 수 있다. 바이츠만은 이때 영국 정부의 눈에 들어서 벨푸어 선언을 이끌어 냈고 이후 이 선언은 이스라엘 독립의 주요 근거가 된다. 그리고 바이츠만도 1948년 이스라엘 건국 후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여러모로 전설적인 이야기다.그런데 의약품 개발과 관련해서도 바이츠만 공법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가 만들어낸 공법에 따라 설탕을 발효시키면 에탄올과 아세톤 외에 부탄올도 만들어진다. 심지어 부탄올이 생성물의 60%를 차지할 정도로 많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이렇게 많이 만들어낸 부탄올을 어디다 써야 할까? 아세톤이야 전쟁 때 필수 불가결한 물질이었고 에탄올도 나름의 용도가 있지만 부탄올은 그렇지 않았다. 결국 전쟁이 길어지며 부탄올은 처치 곤란한 물질로 공장에 쌓여가고 있었다.제약회사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항상 연구비 부족에 시달리던 제약회사 연구진은 값싸게 얻을 수 있는 출발물질을 언제나 주시하곤 한다. 부탄올도 그랬다. 영국의 제약회사는 부탄올을 대량으로 사들여서 새로운 의약품 골격에 연결해서 더 뛰어난 물질을 만들고자 하였다. 대표적인 물질이 부토바비탈이다.바비탈은 20세기 초반 독일에서 개발해 판매한 수면진정제다. 이후 페노바비탈이 나오면서 그 강력한 수면효과를 앞세워 수면제의 대명사가 되었지만 나름의 불편함도 있었다. 작용시간이 길어서 낮에도 졸립다거나, 본인이 약을 먹었는지 몰라서 다시 먹게 되는 경우도 많았다. 또한 바비탈계 수면제에 중독되는 경우도 있었고, 이로 인해 사망하는 경우도 늘어나던 상황이었다. 여러모로 페노바비탈의 단점을 개선하는 물질이 필요한 시기가 1910년대 후반이었다.영국의 제약회사는 페노바비탈의 구조를 바꿔 부토바비탈을 합성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페닐기 대신 값싼 부탄올을 도입한 물질이다. 이 물질은 페노바비탈보다 작용시간이 짧아 나름의 장점이 있었다. 그리고 다음 단계 의약품으로 넘어가는 출발이 되었다. 어쨌든 전쟁 때 부랴부랴 만든 물질 아닌가. 전쟁이 끝난 후 보다 체계적으로 검증을 거치는 일이 당연한 수순이었다.부토바비탈은 이후 탄소가 하나 더 늘어나 펜토바비탈이 되었다. 바비탈계 수면제 중 그나마 페노바비탈의 명성에 비빌 수 있는 물질이 펜토바비탈이다. 그리고 펜토바비탈은 다시 정맥마취제인 소듐 펜토탈로 바뀌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게 된다. 바이츠만은 고무를 만들어 내는 데 실패했지만 정작 그의 연구가 전혀 상관없는 의약품 개발까지 영향 미친 것을 보면 세상 일은 더욱 더 알 수가 없다.<필자소개>백승만 교수는 서울대학교 제약학과 졸업후 동 대학원에서 생리활성 천연물의 화학적 합성에 관한 연구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사우스웨스턴 의과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11년부터 경상국립대학교 약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의약화학을 강의·연구하고 있다. 현재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를 연구 개발하고 있으며 약의 역사도 함께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 ‘분자 조각자들’ 등이 있다.
2023-12-07 10:27 |
[약대·약학] <11> 공기의 연금술사, 화학 무기를 만들다.
전쟁 무기를 팔아서 돈을 버는 군수 산업도 엄연히 존재하지만 기본적으로 전쟁은 생산 행위가 아니다. 끝없는 소모 행위다. 적절한 보급이 없으면 하루도 버티기 어려운 게 군대다. 그 옛날 보급선이 끊겨 어이없게 패한 삼국지연의 속 원소의 군대부터 지금 벌어지고 있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까지 그 예는 숱하게 많다.전쟁 속 수많은 소모품 중에서도 가장 필요한 것은 화약과 식량이다. 그런데 19세기 후반 전쟁이 총력전으로 변해 가면서 제국주의 국가들은 화약과 식량 확보에 비상이 걸렸다. 안 그래도 인구가 늘어나면서 식량이 모자라는 상황이었다. 화약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당시 사람들이 찾은 해법은 칠레, 페루, 볼리비아가 국경을 마주한 지역에 광대하게 존재했던 질산염이었다. 수십만 년 동안 그 지역 새들이 쌓아놓은 똥이 정체였건만 그 긴 시간 지나며 완전히 말라붙어 최고의 화약 원료이자 비료로 활용할 수 있었다. 그다지 신경도 쓰지 않던 이 미지의 땅에 어느덧 사람들이 몰려와서 새똥을 캐기 시작했고 이 세 나라는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까지 치러야 했다. 이 전쟁을 19세기 태평양 전쟁이라 부르기도 한다.하지만 독일로서는 이 상황이 그저 남의 일이었다. 20세기 초반 독일이 이 새똥, 즉 구아노를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이 별로 없었기에, 그리고 그 구아노 자체가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기에 독일의 화학자들은 새로운 방법을 고안했다. 공기 중의 질소를 수소와 반응시켜서 암모니아로 만드는 방법이었다. 암모니아를 질산염으로 산화시키는 방법, 오스트발트 공정법은 이미 개발되어 있었다. 따라서 암모니아만 있으면 충분했다. 그런데 그게 될까?공기 중의 질소 가스는 대기의 79%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풍부하지만 이게 풍부한 이유는 특별히 다른 물질과 반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 개의 질소 원자가 단일도 아니고, 이중도 아닌 삼중 결합으로 존재하기에 이 결합을 끊어서 수소와 결합시켜 예쁘게 암모니아로 만드는 일은 상상속으로나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불가능한 일을 굳이 하려고 또 나선 사람들이 있었다. 프리츠 하버도 그 중의 하나였다.하버는 불가능한 일을 진행시키기 위해 온도나 압력을 조절하는 동시에 또 하나의 방법을 추가했다. 바로 촉매였다. 촉매는 일반적으로 일어나기 어려운 일도 가능하게 하는 마법의 물질이다. 당시 하버는 수많은 금속을 테스트하면서 오스뮴 촉매 존재하에서 드디어 원하던 반응이 진행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후 하버의 암모니아 생산법은 고온·고압 반응의 전문가 보슈의 도움을 받아 하버-보슈법으로 진화한다. 촉매도 구하기 어려운 오스뮴 대신에 산화철 등으로 구성된 값싼 촉매를 사용해 효율을 높인다. 그렇게 라인강 유역에서는 귀하디 귀한 질산염이 대량으로 생산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질산염은 화약으로, 비료로 사용되어 전선에 투입되기 시작했다.그런데 하버는 이후 조금씩 엇나가기 시작한다. 전쟁 승리를 위해 화약과 비료를 넘어 독가스까지 연구한 것이다. 화약과 비료는 전쟁 후에도 인류를 위해 사용하지만 독가스는 다르다. 그런데 하버는 전혀 고민 없이 독가스를 만들어 전장에 살포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악명 높은 화학무기는 이렇게 개발되었다.이후 독일이 패전하고 나치가 집권하면서 하버의 운명도 바뀌게 된다. 독일을 위해 헌신하고 노벨상도 받은 상징적인 인물이었건만 하버도 어쨌든 유태인이었다. 나치 정권 하에서 하버는 조국에 버림 받은 채 영국으로 망명을 하려 하지만 화학무기 제조 경력을 문제 삼아 영국에서는 망명을 거부한다. 이후 하버는 스위스의 한 호텔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았다.하버가 실각하고 나서 독일은 달라졌을까? 안타깝지만 그렇지 않다. 독일군은 더 강력한 무기를 만들어 전장의 비대칭 전력으로 사용하고자 했다. 질소 겨자가스와 같은 악명높은 화학무기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이 질소 겨자가스에 노출된 사람들의 백혈구 수치가 상당히 낮아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우연히 밝혀진 이런 사실들로 인해 질소 겨자가스는 백혈병 치료제로 연구되었고 이후 구조 변화를 거쳐서 지금까지도 항암제로 사용하고 있다. 하버가 뿌린 씨앗이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의약품이 된 셈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하버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일은 없을 테지만 말이다. <필자소개>백승만 교수는 서울대학교 제약학과 졸업후 동 대학원에서 생리활성 천연물의 화학적 합성에 관한 연구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사우스웨스턴 의과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11년부터 경상국립대학교 약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의약화학을 강의·연구하고 있다. 현재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를 연구 개발하고 있으며 약의 역사도 함께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 ‘분자 조각자들’ 등이 있다.
2023-10-27 11:09 |
[약대·약학] <10>. 영국 수상을 구한 독일산 항생제
영국 수상을 구한 독일산 항생제게르하르트 도마크는 편지를 교환했다. 같은 편지를 열다섯 장이나 써서 모두가 똑같이 나눠 가진 것은 열다섯 명의 전우 중 누가 살아남을지 모르는 전장이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한 명이라도 살아남는다면 유족들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도마크와 전우들은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를 편지를 쓰고 나눠 가졌다.도마크가 1914년 10월 말 제1차 세계대전 중 최대 격전 중 하나인 제1차 이프르 전투에 참가한 것은 그의 나이 고작 열여덟 살 때의 일이다. 넘치는 애국심으로 다니던 대학교도 한 학기만 마치고 입대했지만 제대로 된 훈련을 받지도 못했다. 그리고 가장 위험한 일을 수행하는 부대인 척탄병으로 배치되었다. 척탄병은 지금으로 치면 수류탄을 던지는 부대다. 다만 지금의 비교적 가벼운 수류탄과는 달리 크고 무거워 멀리 던지기 어려웠다. 따라서 적군 가까이 접근해서 던져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성공적으로 던지고 나서도 적군에게 노출되어 죽는 일이 허다했다. 당시 척탄병 연대는 가장 위험한 일을 하는 부대였고, 그만큼 자부심 높은 부대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연대에 소년병을 배치한 것이다. 당시 독일군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얼추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도마크의 부대원 중 살아남은 사람은 세 명이다. 열두 명은 적군 근처도 못 가본 채 사살되었고 도마크 역시 부상을 입었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이후 그는 야전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후 다시 전선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총을 맞았다. 머리에. 그럼에도 살아 남았다. 그가 쓰고 있던 전투모에 총알이 정통으로 맞았고 전투모가 튕겨져 날아갔지만 도마크는 무사했던 것이다. 그는 다시 병원으로 향해 치료를 받았다. 이후 이 억세게 운 좋은 학도병은 드디어 조금 더 편한 보직을 받게 된다. 바로 의무병이다. 한 학기이긴 했으나 그가 대학 다니다 온 점을 감안한 배려였다. 그는 의대생이었다.고작 한 학기 수업 들은 의대생이 의무병으로서 얼마나 활약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하지만 도마크는 그 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의무병으로 있으면서 얼마나 많은 군인이 감염병으로 죽는가를 알게 되었다.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수술을 받는 환자는 많았다. 그리고 절단이든 절개든 성공적으로 봉합을 마치고 회복하는 환자도 많았다. 하지만 그 환자들 중 상당수는 일주일 안에 수술 부위 감염증으로 인해 사망하고 말았다. 수술 부위가 빨갛게 변하고 기포가 차오르는 이 증상을 가스 괴저라고 불렀다. 수술 중 감염으로 인한 증상이었다. 전방의 참호나 후방의 병원이나 도마크에게 열악한 환경이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이 당시의 경험이 강하게 남아 있던 도마크는 전쟁이 끝난 후 의대 공부를 마치고 연구직을 택했다. 그는 바이엘사 연구팀에 합류해 이후 연구팀을 이끌었다. 화학자와 약물학자 등 전문가들이 뭉친 이 연구팀은 천 개가 넘는 화합물을 만들며 일일이 활성 검색을 하였다. 이들은 10년 전부터 연구하던 화학 염료를 기반으로 활성을 개선해가고 있었다. 바꿔 말하면 10년간 별다른 성과가 없다는 말이기도 했지만 그럭저럭 활성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1932년 겨울, 프론토실이라는 현대적 개념의 항생제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특유의 붉은 색을 띄는 이 물질은 1935년 시판되자마자 기적의 항생제로 찬사를 받으며 시장을 선도해 나갔다.그런데 정작 10여 년의 연구 끝에 나온 이 물질은 그다지 많은 매출을 올리지 못했다. 프랑스의 연구팀이 프론토실의 실제 활성 골격인 설파닐아마이드를 곧바로 발표했기 때문이다. 프론토실은 우리 몸 안에 들어가 활성 성분인 설파닐아마이드로 전환되어 세균을 죽인다. 설파닐아마이드는 비교적 간단한 물질로서 이미 1900년대 초반에 생산된 물질이다. 구조가 간단하다 보니 화학적으로 수식해 유도체를 만들기도 쉬웠다. 이렇게 만들어진 물질들은 대부분 항균활성이 뛰어났고 사람들은 이 물질들을 통틀어 설파계 항생제라고 불렀다.설파계 항생제는 이후 윈스턴 처칠이 폐렴으로 죽을 뻔 했을 때 복용 후 무사히 회복하면서 다시 한 번 유명세를 타게 된다. 독일에서 개발한 프론토실이 돌고 돌아 설파계 항생제로 진화해 영국의 수상을 살린 것이다. 처칠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을 지휘한 것을 감안하면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그래도 도마크로서는 전쟁이 끝나고 노벨상을 수상했으니 나름 해피엔딩이라고 부를 수 있을 듯도 하다. <필자소개>백승만 교수는 서울대학교 제약학과 졸업후 동 대학원에서 생리활성 천연물의 화학적 합성에 관한 연구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사우스웨스턴 의과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11년부터 경상국립대학교 약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의약화학을 강의·연구하고 있다. 현재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를 연구 개발하고 있으며 약의 역사도 함께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 ‘분자 조각자들’ 등이 있다.
2023-09-15 10: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