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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대·약학] <107> 환자를 우롱하는 미국 건강보험
“약사님, 이 약을 꼭 복용해야 하나요?”
Mr. T가 당뇨병 치료제인 엠파글리플로진(empagliflozin; 상품명: 자디앙) 약병을 집어들고 물어본다. 75세인 그는 작년 여름 엠파글리플로진을 처방받은 이후 아무 부작용없이 잘 복용해 오고 있었다.
“무슨 문제가 있나요?”
“네. 지난 주에 약국에 가서 한달치를 받아 왔는데 160달러(우리돈으로 약 20만원)를 본인부담금(copay))으로 내야 했어요. 작년에는 한달치가 30달러(우리돈으로 3만8천원)였는데 금년에 너무 비싸져서 경제적으로 부담스럽습니다.”
매년 초, 나는 Mr. T와 같이 그동안 복용하고 있던 약에 대해 본인이 내야 하는 금액이 갑자기 크게 증가한 환자들을 본다. 이는 미국 건강보험제도의 문제점에 기인한다.
Mr. T와 같이 65세 이상의 환자들은 미국 연방정부가 제공하는 공보험인 메디케어(Medicare)에 가입할 수 있다. 그런데, 메디케어는 우리나라의 건강보험과 달리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건강보험은 가입자 병원 진료와 처방약에 대한 지불을 통합하여 운영한다. 즉, 건강보험 가입자는 보험증 하나로 병원과 약국을 모두 이용할 수 있다. 반면, 미국의 메디케어 가입자는 병원 진료와 처방약에 대한 보험이 각각 다를 수 있다. 그래서, 병원 진료에 대한 보험만 가지고 있고, 처방약에 대한 보험이 없으면 가입자는 처방약값 전액을 자비로 내야 한다.
이처럼 메디케어가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는 이유는 정부가 사보험에 메디케어 가입자를 위한 처방약 보험상품의 개발과 판매를 위탁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가입자가 처방약을 구매하면 건강보험이 직접 지불해 준다. 반면, 미국의 처방약 보험의 경우, 가입자는 일단 메디케어의 승인을 받은 사보험에 가입해야 한다. 그리고, Mr. T처럼 가입자가 처방약을 구매하면 사보험은 정부로부터 받은 돈으로 지불해 준다. 즉, 정부는 사보험에 처방약 보험에 대한 외주를 주는 것이다.
이러한 메디케어의 처방약에 대한 지불 구조는 우리나라와 비교할 때 몇 가지 이론적인 장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처방약에 대한 다양한 보험 상품이 개발될 수 있다. 가입자는 자신의 형편과 상황에 맞는 상품을 고를 수 있다. 예를 들어, 2023년 전국적으로 801개의 메디케어 처방약 보험 상품들이 판매되고 있다.
둘째, 처방약 사용을 좀 더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있다. 사보험은 처방약에 대한 지불을 적게 할수록 이익을 더 남길 수 있다. 그래서, 사보험은 사전승인(prior authorization) 등 여러 제도를 이용하여 처방자들이 약을 함부로 처방하지 못하도록 관리한다.
이와같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실제 운영에서는 단점이 훨씬 더 많다. 왜냐하면, 사보험은 기본적으로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이기 때문이다. 사보험은 가입자의 건강보다는 이익을 더 우선한다. 그 좋은 예가 Mr. T의 경우이다. 그리고, Mr. T의 사례는 사보험인 실손보험이 크게 인기를 얻고 있는 우리나라에 타산지석이 될 지도 모르겠다.
Mr. T가 그동안 복용해 오던 약에 대한 본인부담금이 갑자기 증가한 이유는 그가 가진 사보험이 금년부터 다른 약을 우선적으로 지불해 주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 배경을 보면 사보험은 메디케어 처방약 중에 지불해 주는 약들의 목록 (formulary)을 매년 새로 정한다. 정부의 규정에 따라 비슷한 종류의 약들 중 두 개를 선택해서 지불해 주어야 한다. Mr. T가 가진 사보험은 금년에 엠파글리플로진과 더불어 다파글리플로진 (dapagliflozin; 상품명 -포시가)을 지불해 준다. 그런데 작년과 달리 그의 보험은 다파글리플로진을 우선적으로 지불해 주기로 결정했다. 이는 아마도 다파글리플로진을 제조, 판매하는 제약회사와 좀 더 좋은 조건으로 보험사가 계약을 맺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파글리플로진을 더 많이 쓰도록 유도하기 위해 엠파글리플로진에 대한 본인부담금을 크게 올린 것이다.
다파글리플로진과 엠파글리플로진은 당뇨병 치료 효과에 있어 크게 다르지 않다. 처방약을 바꾸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지도 모른다. 알아보니 한달치 다파글리플로진에 대한 Mr. T의 본인부담금은 89달러 (우리돈으로 약 11만원)으로, 여전히 크게 부담스러운 가격이었다. 그러면, 왜 같은 종류의 약에 대한 본인부담금이 갑자기 크게 올랐을까?
Mr. T가 처방약 보험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아서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사보험들이 써 왔던 상술을 고려할 때 다음과 같이 추측할 수 있다.
보험 가입자가 연간 처방약에 대해 지불해야 하는 총비용은 약국에서 약을 교부받을 때 내야 하는 본인부담금외에도 두 가지가 더 있다.
첫째, 보험을 유지하기 위해서 가입자는 매달 보험료를 내야 한다(영어로 이를 premium이라고 부른다). 사보험의 월보험료는 무료부터 40~50달러 (우리돈으로 6만원)에 이르기까지 상품마다 다르다.
둘째, 가입자는 매년마다 보험이 약값에 대해 지불을 시작하기 전에 일정 금액을 본인이 먼저 부담해야 한다 (영어로 이를 deductible이라고 부른다). 이 deductible제도는, 우리나라의 경우, 건강보험에는 없지만 자동자 보험에 널리 사용되는 자기부담금과 같은 것이다. 즉, 자동차 수리를 할 때 가입자가 우선 자기부담으로 일정금액 (예를 들어, 50만원)을 내고 나면 나머지 수리금액에 대해 자동차 보험이 지불을 해 주듯이 미국 사보험 가입자도 약관에 정해진 일정금액을 먼저 약값으로 낸 뒤에야 보험이 그 해 나머지 기간동안 지불을 해준다. 따라서, 보험 가입자가 연간 처방약에 대해 지불해야 하는 총비용은 본인부담금, 월보험료, deductible 세 개의 합인 것이다 (이 글에서는 생략하지만 이 세 개의 합은 환자가 어떤 약들을 복용하고 있느냐에 따라 다르다).
이와같이 처방약에 대한 총비용 계산법이 복잡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가입자들은 이를 잘 모른다. 가입자들은 당장 매달 지불해야 하는 월보험료를 보고 보험상품 가입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Mr. T의 월보험료를 보면 미국 전체에서 판매되고 있는 처방약 보험들의 평균인 약 33달러 (우리돈으로 약 4만원) 보다 훨씬 낮은 13달러 (우리돈으로 약 만6천원) 이었다. 그런데, 이처럼 낮은 월보험료를 가진 상품들은deductible이나 본인부담금이 비싼 것이 보통이다. 다시 말하면, 낮은 월보험료는 가입자를 유인하기 위한 미끼인 것이다.
Mr. T의 보험은 deductible이 103달러 (우리돈으로 약 13만원)로 처방약 보험들의 평균인 약 384달러 (우리돈으로 약 48만원)보다 훨씬 쌌다. 따라서, 이 보험은 비싼 본인부담금으로 돈을 버는 상품이었다. 그런데, 엠파글리플로진의 본인부담금이 작년에는 저렴했던 것으로 보아 Mr. T가 가입할 때에는 월보험료, deductible, 그리고 본인부담금까지 모두 저렴했던 것 같다.
작년 말 보험을 갱신하는 시기가 되어 올해의 월보험료를 기존 가입자에게 알려줄 때, Mr. T는 월보험료가 비싸지 않자 보험을 바꾸지 않고 같은 회사의 것으로 유지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사보험이 올해 월보험료를 알려줄 때 인상된 본인부담금도 명시했었겠지만 여러 정보와 섞여 있어 혼동되기 쉽고, 처방약에 대한 총비용 계산법을 숙지한 가입자가 아니라면 이를 잘 눈여겨 보지 않는다.
Mr. T의 보험은 싼 가격으로 일단 가입자들을 유인한 다음, 가입자들이 처방약에 대한 총비용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을 이용해 다음 해의 본인부담금을 크게 올림으로써 이익을 내는 상술을 쓴 것이다.
메디케어 처방약 사보험은 계약기간이 매년 1월1일부터 12월31일까지이다. 따라서, 일부 저소득층을 제외한 일반 가입자들은 연중에 다른 회사의 것으로 바꿀 수 없다. 즉, Mr. T는 본인부담금이 아주 비싼 현재의 보험을 연말까지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다행히 지난 주 측정한 그의 헤모글로빈 A1c 수치가 6.2%로 아주 좋았다. 그래서 비싼 엠파글로플로진을 당분간 중단하고 기존에 복용하고 있던 메트포민 (metformin)와 글리피지드 (glipizide) 등 본인부담금이 싼 제너릭 약들만 계속 쓰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만약 헤모글로빈 A1c 수치가 다시 높아지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만 할 뿐이다.
<필자소개>
-서울대 약학대학, 대학원 졸업
-University of Florida Doctor of Pharmacy-University of Miami Jackson Memorial Hospital Pharmacy Practice Residency
-Universityof Florida Cardiovascular PharmacogenomicsFellowship
-현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임상약학과 교수
2023-03-08 14: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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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대·약학] <106> 환자에게 현실적인 희망을 주어야
“오늘은 환자 보는 것을 직접 주도해 보면 어떨까?”
미라는 내 클리닉에서 외래환자 실습 (ambulatory care)을 수련중인 졸업반 학생이다. 외래환자 실습을 포함한 우리학교의 모든 실습 과목은 6주 동안 진행되는 과정이다. 나는 학생의 실습을 지도할 때 실습 첫 주에는 학생으로 하여금 내가 환자 보는 것을 관찰하도록 한다. 그리고 두번째 주에는 역할을 바꿔 학생이 환자를 주도적으로 보고 나는 학생을 관찰하면서 필요하면 도와준다. 물론 학생이 내가 환자 보는 것을 좀 더 관찰하고 싶어하는 경우에는 두번째 주에도 역할을 바꾸지 않는다. 그런데, 미라처럼 내 클리닉에 실습을 오기전에 벌써 다른 실습과정 네 개를 마친 학생들은 보통 2주차부터 환자를 주도적으로 보도록 기회를 준다.
“네, 해 볼께요.”
“첫 환자인 Ms. Z가 좋을 것 같다. 환자 차트는 다 보고 왔지?”
“예. 50대인 이 환자는 일차의료제공자로부터 당뇨병 치료를 의뢰받아 오늘 처음으로 우리를 방문하는데요. 동반질병으로 고지혈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난 12월초에 측정한 헤모글로빈 A1c수치가 12.5%로, 목표치인 7%미만보다 꽤 높습니다.”
“그래, 메트포민 (metformin)과 글리피지드 (glipizide) 두 종류의 약을 지난 12월부터 처방받아 오고 있지.”
“그런데, 인슐린을 써야 하지 않을까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가장 최근에 측정한 헤모글로빈 A1c 수치와 목표치가 너무 크게 차이가 나서 인슐린이 필요해. 아, 환자가 왔나 보다.”
간호사가 Ms. Z를 진료실로 데리고 들어 온다. 미라가 대화를 주도하기 시작한다.
“어서 오세요, Ms. Z님. 저는 UCSF 약대 학생인 미라이고 이 분은 제 프리셉터인 닥터 S입니다. Ms. Z님의 의사선생님께서 저희에게 Ms. Z님의 당뇨병 조절을 도와달라고 부탁하셔서 오셨죠?”
“네.”
“혹시 집에서 복용하고 계시는 약을 모두 가져 오셨나요?”
“아니요. 제가 깜박 잊었습니다.”
“그러면, 어떤 당뇨병약을 복용하고 계신지 기억하시나요?”
“메트포민과 글리피지드 두 종류를 처방받았습니다. 그런데, 복용을 시작하자마자 설사를 하는 등 몸이 별로 안 좋아져서 현재 아무것도 복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부작용을 겪으신 것 같군요. 메트포민을 처음 시작할 때 많은 분들이 설사 등 위장관 부작용을 겪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몸이 적응해서 부작용이 사라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럼, 다시 복용해야 하나요?”
“네. 그런데, 혹시 최근에 의사선생님으로부터 헤모글로빈 Ac1 수치에 대해 상담받으셨는지요?”
“받은 적 없습니다.”
“의사선생님이 시간이 없으셨나 봅니다. 아시다시피 헤모글로빈 Ac1 수치는 최근 석달동안 혈당이 얼마나 잘 조절되었는지 알려줍니다. 이 수치가 높을수록 혈당이 잘 조절되지 않고 있는 것이구요. Ms. Z님의 경우, 지난달 측정한 것이 가장 최근 수치인데 12.5%로 목표수치인 7%미만보다 5.5%나 더 높습니다.”
“그러면, 약을 다시 복용해야겠네요.”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혹시 인슐린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Ms. Z는 손사래를 치기 시작했다.
“저는 인슐린을 사용하기 싫습니다. 당뇨병 환자인 제 친척 중 한 분이 인슐린을 사용하다가 다리를 잘라야 했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메트포민과 글리피지드를 다시 복용하셔서 헤모글로빈 A1c수치가 목표치에 도달하면 좋겠습니다.”
이 부분에서 나는 관찰을 멈추고 개입해야 했다. 왜냐하면, 두가지 문제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첫째, 잘못된 정보를 바로 잡지 않았다. 인슐린은 다리를 절단시키는 부작용을 일으키지 않는다. 둘째, 환자에게 비현실적인 희망을 주고 있었다. 메트포민과 글리피지드만으로는 헤모글로빈A1c수치를 5.5%이상 낮추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환자가 인슐린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너무 단호하게 말하니까 아마도 미라는 환자의 뜻을 존중하기 위해 인슐린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은 것 같았다. 또 더 이야기해 봐야 환자가 거부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Ms. Z가 인슐린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인슐린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건강정보에 대한 환자의 오해를 바로 잡아주는 것은 건강관련종사자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다. 건강관련종사자는 환자에게 과학적 데이타에 바탕을 둔 정확한 건강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환자에게 비현실적인 희망을 주어서 결국에는 환자로부터 신뢰를 잃게 된다.
임상연구에 따르면 메트포민과 글리피지드는 각각 헤모글로빈 A1c 수치를 1~1.5% 정도 낮춘다. 즉, 두 약을 최고 용량으로 쓰더라도 최대한으로 낮출 수 있는 헤모글로빈 A1c 수치는 3%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 두 약으로 Ms. Z가 헤모글로빈 A1c 목표치에 도달할 가능성은 아주 낮다. 만약 우리의 말을 믿고 두 약만 복용하고 있다가 헤모글로빈 A1c 목표치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으면 Ms. Z는 우리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치료를 성공적으로 이루어내기 위해서 환자에게 희망을 주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이 희망은 현실적이어야 한다. 불편한 진실을 말하거나 듣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불편한 진실 대신 듣기 좋게 바꾸어 전달하는 것이 듣는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것으로 보일 지도 모른다.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 초기 우리나라 정부는 방송을 통해 ‘이번 주말이 바이러스 전파를 막는 고비’라는 말을 여러 번 사용했었다. 아마도 국민에게 팬데믹 종식의 희망을 주고, 방역에 대한 협조를 이끌어 내기 위한 선의에서 사용한 표현이었겠지만, 궁극적으로 정부의 방역정책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는 역할을 하고 말았다. 건강관련종사자가 환자에게 질병과 치료방법에 대한 정보를 줄 때도 마찬가지이다. 환자가 듣기에 불편하더라도 과학적 데이타에 바탕을 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환자에게 신뢰를 얻고 궁극적으로 좋은 치료결과를 낳는 방법인 것이다.
나는 Ms. Z에게 친척이 다리를 절단하게 된 것은 인슐린이 아니라 아마도 당뇨병이 잘 조절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또, 메트포민과 글리피지드를 복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들만으로는 현실적으로 헤모글로빈 A1c 목표치에 도달하기 어렵기 때문에 인슐린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우리가 인슐린을 효과적이고 안전하게 사용하도록 도와드릴 것이라고 말했다. Ms. Z는 잠시 주저했지만 곧 다음과 같이 말했다.
“두 분이 전문가이니까 두 분 말씀을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필자소개>
-서울대 약학대학, 대학원 졸업
-University of Florida Doctor of Pharmacy-University of Miami Jackson Memorial Hospital Pharmacy Practice Residency
-Universityof Florida Cardiovascular PharmacogenomicsFellowship
-현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임상약학과 교수
2023-01-31 13: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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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대·약학] <105> 병주고 약주고
병주고 약주고
“항상 이러세요.”
진료실 의자에 앉아 고개를 떨구며 졸고 있는 환자를 보면서 딸과 아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딸이 설명을 더 보탠다.
“어머님은 밤 2시쯤 주무셔서 아침 10시쯤 일어나세요. 그런데, 침대에서 일어나시자 마자 마루에 있는 소파로 가셔서 바로 누워 버리세요. 그리고는 하루종일 저렇게 졸고 계십니다.”
82세의 이 환자는 가족이 있는 두 나라에서 생활한다 - 일년에 절반은 엘살바도르에서 지내고 나머지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보낸다. 환자가 샌프란시스코에 있을 때에는 딸의 집에 머무른다. 그래서 딸이 처방약을 주는 등 어머니의 돌봄을 담당하고 있다.
환자는 지내는 나라에 따라 다른 의사를 만나고 있었다. 즉 엘살바도르에서 지낼 때에는 그곳에 있는 신경과 의사를, 샌프란시스코에 있을 때에는 샌프란시스코 종합병원의 가정의학과 의사를 보고 있었다. 환자는 치매, 우울증, 불면증, 만성통증, 당뇨병, 고혈압 등의 병력을 가지고 있는데 치매, 우울증, 불면증, 만성통증은 엘살바도르의 신경과 의사가, 당뇨병과 고혈압은 가정의학과 의사가 담당하고 있는 것 같았다.
환자와 가족은 2주전 가정의학과 의사를 방문했었다. 이 때, 환자와 가족은 환자가 낮에도 매우 졸려한다고 호소했었다. 가정의학과 의사는 그 이유를 환자가 우울증과 불면증 치료를 위해 복용하고 있는 약들의 부작용 때문이라고 의심하였다. 그래서 가정의학과 의사가 나에게 약물사용에 대한 협진을 의뢰하여 환자와 가족이 나를 방문한 것이다.
“엘살바도르에서 처방받아 어머님이 복용하고 있는 약들입니다.”
딸이 내게 건내 준 종이에는 다음과 같은 약들이 적혀 있었다 (독자들에게 간결하게 전달하기 위해 용량과 복용횟수는 생략한다):
쿼티아핀 (quetiapine; 쎄로켈): 정신병 치료제
멀타자핀 (mirtazapine; 레메론): 우울증 치료제
멜라토닌 (melatonin): 수면제
가바펜틴 (gabapentin; 뉴론틴): 진통제
모다피닐 (Modafinil; 프로비질): 각성제
도네페질 (donepezil; 아리셉트): 치매 치료제
시티콜린 (citicoline; 미국에서 허가된 약은 아니며 우리나라에는 주사제로만 사용): 기억력 증진
이 약 리스트를 보니 환자가 낮에도 졸려 하는 것이 당연했다. 왜냐하면, 졸음을 유발하는 약이 쿼티아핀, 멀타자핀, 멜라토닌, 가바펜틴 등 무려 네 개나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졸음을 유발하는 약이 많이 필요했던 것을 보니 환자의 불면증이 꽤 심했던 것 같다.
리스트를 다시 찬찬히 보고 있을 때 모다피닐이라는 약이 눈에 띄였다. 모다피닐은 낮에 갑자기 졸음이 오는 기면병 (narcolepsy)의 치료를 위해 허가받은 약이다.
“혹시, 어머님이 기면병의 진단을 받으신 적이 있나요?”
“아니요.”
이로 미루어 보아 모다피닐은 환자가 낮에도 졸려하니까 이를 치료하려고 처방한 것 같았다. 즉, 다른 약의 부작용을 치료하기 위해 처방한 것이다.
이와같이 먼저 처방한 약의 부작용을 치료하기 위해 새로운 약을 처방하는 것을 전문용어로 prescribing cascade라고 한다. Cascade는 원래 시작은 하나인데 궁극적으로 여러 개로 갈라져 떨어지는 폭포처럼 하나의 일로 인하여 여러 가지 다른 일이 연속해서 벌어지는 것을 일컫는다. prescribing cascade는 처음 시작한 약의 부작용을 치료하기 위해 새 약을 더하지만 새 약도 새로운 부작용을 일으켜 이를 다스리기 위해 다른 약을 계속 추가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병주고 약주기인 셈이다.
모든 약은 부작용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약은 꼭 필요한 적응증에만 사용해야 한다. 특히 노인은 젊은 사람에 비해 부작용을 겪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약을 분해하고 배설하는 기능이 나이가 들수록 떨어지기 때문이다. 또 노인은 여러 기저 질환을 가지고 있고 이를 치료하기 위해 여러가지 약을 함께 복용하고 있어 약물간 상호작용에 노출될 위험이 높다. 따라서 노인에게 약을 쓸 때에는 훨씬 더 조심해야 한다.
다시 위 환자로 돌아가자. 비록 모다피닐이 다른 약들의 부작용인 졸음을 치료하기 위해 처방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를 중지하면 졸음이 더 악화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졸음을 유발하는 약의 숫자를 줄이고 그 다음 모다피닐을 중지하는 것이 환자와 가족들이 좀 더 받아들이기 쉬운 방법으로 보였다.
쿼티아핀, 멀타자핀, 멜라토닌, 가바펜틴 등 환자에게 졸음을 유발하는 네 개의 약 중 쿼티아핀과 가바펜틴을 중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쿼티아핀은 정신병 치료에 주로 사용하지만 우울증을 치료할 때 어떤 치료제 단독으로 우울증이 잘 조절되지 않은 경우 보조제로 더해지기도 한다. 즉 이 환자의 경우 아마도 처음에는 우울증 치료제인 멀타자핀을 처방받았지만 이것으로 우울증과 불면증이 잘 조절되지 않자 쿼티아핀을 추가한 것이다. 지금은 졸음의 부작용이 너무 심하고 졸음을 유발시키지 않는 다른 종류의 우울증 치료 보조제도 있으므로 굳이 쿼티아핀을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또, 가바펜틴은 주로 신경손상에 의해 찌릿찌릿하거나 불에 닿는 듯한 느낌을 주는 통증을 조절하기 위해 쓰이며 졸음을 가장 잘 유발하는 통증약 중 하나다. 환자는 이러한 종류의 통증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가바펜틴은 졸음이라는 부작용을 이용하여 환자의 불면증을 치료하기 위해 선택한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졸음을 유발하지 않은 다른 종류의 통증 치료제로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예, 아세트아미노펜, 타이레놀).
쿼티아핀과 가바펜틴을 동시에 중단하면 불면증이 악화될 수 있다. 또, 뇌에 작용하는 약을 중단할 때 갑자기 중단하면 금단증상이 생길 수 있다. 용량을 오랜시간에 걸쳐 천천히 줄여야 한다. 쿼티아핀과 가바펜틴의 용량을 동시에 줄이게 되면 환자와 가족이 헷갈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나를 먼저 줄여서 중단한 다음 불면증에 문제가 없으면 다음 것을 줄이고 중단하는 것이 안전해 보였다.
“일단 쿼티아핀을 중단하는 것을 시도해 보는 것이 어떨까요? 지금 드시고 계신 양의 반인 하루 50 mg을 2주동안 주셔 보세요. 이동안 불면증이 악화되면 다시 원래 용량인 100 mg을 주십시요. 만약 불면증에 아무런 영향이 없으면, 2주 뒤부터는 주시지 마시고요.”
“만약 중단한 다음 불면증이 악화되면요?”
“하루 50 mg을 다시 주시기 바랍니다.”
딸이 혼동될까봐 나는 글로 적어서 건네 주었다.
“쿼티아핀을 중단한 다음 환자의 상태를 관찰하기 위해 3주 뒤에 다시 뵙고 싶습니다. 3주 뒤면 쿼티아핀을 성공적으로 중단한 다음 일주일이 지난 때이니까 환자의 상태를 보기에 충분할 것으로 보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때 다시 뵙지요.”
<필자소개>
-서울대 약학대학, 대학원 졸업
-University of Florida Doctor of Pharmacy-University of Miami Jackson Memorial Hospital Pharmacy Practice Residency
-Universityof Florida Cardiovascular PharmacogenomicsFellowship
-현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임상약학과 교수
2023-01-02 18: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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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대·약학] <104> 집에서 측정환 혈압이 병원보다 낮은 이유
“약사님, 이 약이 뭐예요?”
SN이 약병을 내게 주면서 묻는다. 약병 라벨을 보니 지난 주에 약국에서 교부받은 것으로 개봉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암로디핀 (amlodipine)이라는 고혈압 약입니다. 아직 복용을 시작하지 않으신가 보네요.”
“제 담당의사가 지난 주에 혈압을 재어 보라고 하셔서 클리닉에 잠깐 왔었어요. 고혈압 진단을 받은 환자들을 위해 간호사가 정기적으로 혈압을 측정하는 클리닉 말이예요. 그런데, 간호사가 혈압이 좀 높다면서 약국에 가서 약을 새로 받으라고 해서 받아 놓은 것이예요. 그런데, 무슨 약인지 잘 몰라서 그동안 복용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SN은 60대의 여성환자로 고혈압 치료를 위해 내 클리닉에 한 달전 처음으로 방문했었다. 당시, SN은 리시노프릴 (lisinopril)과 히드로클로로티아지드 (hydrochlorothiazide) 등 두 종류의 고혈압약을 복용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릭닉에서 측정한 혈압은 142/93으로, 목표혈압수치인 130/80미만보다 높았다. 그런데, SN은 2주 뒤 자궁수술이 예정되어 있어서 매우 긴장한 상태였다. 마음이 긴장하게 되면 혈압도 올라가게 된다. 왜냐하면, 혈압을 상승시키는 교감신경이 흥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일 클리닉에서 측정한 혈압이 평소의 혈압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집에서 정기적으로 측정한 혈압 수치가 있으면 평소 혈압이 어떤 지 판단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런데, SN은 혈압측정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클리닉에 비치하고 있던, 집에서 측정할 수 있는 혈압측정기와 혈압수치를 적는 표를 SN에게 주었다. 그리고, 하루에 두 번, 즉, 아침에 혈압약을 복용하기 전과 저녁 식사 전에 혈압을 측정하고 이를 적어 재진때 가지고 오라고 부탁했다. 또, SN에게 혈압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 방법에 대해 설명도 해 주었다.
“SN님, 그동안 혈압을 집에서 측정하셨나요?”
“예. 혈압수치를 적은 표를 가져왔어요.”
자궁수술을 마친 후, 지난 2주 동안 SN이 집에서 측정한 수축기 혈압은 대부분 120대였으며 이완기 혈압도 70대가 주를 이루었다. 뿐만 아니라, 수축기 혈압이 110대인 적도 몇 번 있었다. 반면, 오늘 클리닉에서 측정한 혈압은 146/88로 높았다.
“SN님, 리시노프릴과 히드로클로로티아지드는 어떻게 복용하세요?”
“하루에 한 번씩 복용하고 있습니다.”
“지난 일주일동안 혹시 복용을 잊으신 적이 있으신가요?”
“없습니다.”
“언제 마지막으로 혈압약을 드셨나요?”
“오늘 아침에 복용했습니다.”
고혈압 약은 복용후 효과가 나타나기까지 한 시간에서 두 시간쯤 걸린다. SN은 클리닉을 방문하기 3시간 전에 고혈압약을 복용했으므로 클리닉에서 혈압을 측정했을 때 약이 충분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SN이 집에서 측정한 혈압은 클리닉에서 측정한 것보다 훨씬 낮다. 그러면, 클리닉에서 측정한 SN의 혈압은 왜 높은 것일까? 또, 클리닉에서 측정한 혈압이 높으니 SN은 혈압약을 하나 더 복용해야 할까?
집보다 병원에서 측정한 혈압이 높은 현상을 백의 현상 (white coat effect)라고 부른다. 그리고, 집보다 병원에서 측정한 혈압이 고혈압으로 판정될 수 있을 정도로 높은 경우도 있는데 이를 백의 고혈압 (white coat hypertension)이라고 한다. 이 용어들에 백의라는 단어가 들어 있는 이유는 우리가 병원에서 만나는 의사와 간호사가 하얀 가운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샌프란시스코 종합병원과 UCSF 대학병원의 경우, 여러 이유로 의사와 간호사가 하얀 가운을 더 이상 입지 않는다).
집보다 병원에서 측정한 혈압이 높은 이유는 심리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대부분의 사람들은 병원에 오면 긴장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혈압이 올라간다는 것이다 – “ 오늘 측정할 혈압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혈압이 높아질 수 있다는 말이다.
이처럼 병원에서 측정한 혈압은 평소의 혈압과 다를 수 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혈압은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면 오르기 시작해서 오후에 최고점에 올랐다가 밤에 잠자는 동안 가장 낮아지는 등 시간의 영향을 받는다. 뿐만 아니다. 혈압은 감정 상태, 통증 등의 신체조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병원에서 한 번 측정한 혈압 수치는 이와 같이 시시각각 변하는 환자의 혈압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할 수 있다. 실제로,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환자가 하루 두 번씩 집에서 측정한 혈압이 병원에서 측정한 혈압보다 환자의 평소 혈압에 더 가까운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환자가 집에서 하루에 여러 번 측정한 혈압 수치를 이용하는 것이 고혈압을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치료하는 방법이다.
“SN님, 지난주와 오늘 클리닉에서 측정한 혈압이 좀 높기는 합니다. 하지만, 집에서 매일 측정하신 혈압이 좋기 때문에 새로 받으신 혈압약인 암로디핀을 복용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 기존에 복용하던 리시노프릴과 히드로클로로티아지드만 복용하면 되는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잘 해 오신 것처럼 매일 하루 두 번씩 혈압을 측정해서 적어 오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 달에 뵙겠습니다.”
<필자소개>
-서울대 약학대학, 대학원 졸업
-University of Florida Doctor of Pharmacy-University of Miami Jackson Memorial Hospital Pharmacy Practice Residency
-Universityof Florida Cardiovascular PharmacogenomicsFellowship
-현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임상약학과 교수
2022-11-29 10: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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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대·약학] <103> 짠음식을 많이 먹은 다음 물을 많이 마시면 ‘희석’되어 혈압을 낮출 수 있을까?
짠음식을 많이 먹은 다음 물을 많이 마시면 ‘희석’되어 혈압을 낮출 수 있을까?
“내가 오늘 음식을 짜게 먹었어. 그런데 소금이 혈압을 올리잖아. 그래서 이를 희석해보려고 물을 평소보다 많이 마셨는데. 잘 한 거지?”
가깝게 지내던 한국인 어른께서 물어 보신다. 이 분은 고혈압, 당뇨병, 고지혈증의 병력을 가지고 계시다. 그래서, 혈압약으로 암로디핀 10 mg을 하루에 한 번, 당뇨병약인 메트포민 500 mg을 하루 두 번, 그리고 고지혈증 치료를 위해 아토바스타틴 20 mg을 하루 한 번 복용하고 계신 중이다.
“무슨 음식을 드셨어요?”
“오늘 오랜만에 한국 마트에 가서 청국장을 사와서 끓여 먹었어. 김치하고. 자네도 내가 청국장을 좋아하는 것을 잘 알잖아.”
“맛있었겠네요. 그런데, 혈압은 재어 보셨어요?”
“아니. 혈압계 쓰는 게 좀 귀찮아서. 대신에, 아까 말했듯이 물을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이 마셨어. 그러면, 희석되지 않을까해서…”
소금은 크게 세 가지의 방법으로 혈압을 높인다: 혈액의 양을 증가시키고, 혈관을 수축시키며, 혈관을 뻣뻣하게 만든다.
우리몸의 혈액은 혈관을 통해 이동한다. 그리고 이 혈액을 이동시키는 원동력은 심장이 제공한다. 즉, 심장이 수축할 때 만들어지는 압력이 혈액을 이동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심장에서 나간 혈액은 온 몸의 혈관을 통해 흐르다가 다시 심장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혈액은 폐쇄회로 (closed circuit)안에서 흐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왜 혈액의 양이 혈압에 영향을 끼치는지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심장을 모터펌프, 혈관을 파이프라고 생각해 보자. 그리고, 이 모터펌프와 파이프로 이루어진 폐쇄회로안에 물(혈액)이 흐른다고 하자. 이때, 물의 양이 증가하면 모터펌프는 더 많은 압력을 가해야 물을 이동시킬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물의 양이 증가하면 파이프가 받는 압력이 증가한다. 만약 심장에서 나간 혈액이 다른 곳으로 빠져 나가서 대부분 심장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면, 즉 열린 회로인 경우, 혈액양이 늘어나도 혈관에 걸리는 압력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혈액은 심장과 혈관으로 이루어진 폐쇄회로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회로안을 흐르는 액체인 혈액의 부피가 증가하면 혈관이 받는 압력이 증가한다.
그러면, 소금은 어떻게 혈액의 양을 증가시킬까? 소금을 많이 섭취하면 혈액내 소금의 농도가 높아진다(정확하게는 삼투압이 높아지지만 이해의 편이를 위해 소금의 농도로 표현하기로 한다). 그런데, 혈액내 소금의 농도가 너무 높거나 낮으면 세포가 죽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몸은 신장과 뇌를 통해 혈액내 소금의 농도를 정교하게 조절하는 장치를 마련해 놓았다. 즉, 신장은 오줌으로 배출되는 소금과 물의 양을, 뇌는 우리가 물을 마시게 하는 신호를 조절함으로써 혈액내 소금의 농도를 조절하는 것이다.
소금을 많이 섭취하면 신장은 오줌으로 배출되는 소금의 양을 증가시킨다. 뿐만 아니라 아래에서 설명하듯이 뇌의 도움을 받아 오줌으로 배출되는 물의 양을 줄인다. 그래서, 짠 음식을 많이 먹으면 오줌의 양이 줄어드는 것이다. 오줌으로 나가는 소금의 양은 늘리고 물의 양은 줄임으로써 신장은 혈액을 '희석'시켜 혈액내 소금의 농도를 낮춘다.
그런데, 소금을 많이 섭취하면 뇌는 갈증을 유발하여 물의 섭취를 늘린다. 그래서, 소금을 많이 섭취하면 물을 마시고 싶게 되는 것이다. 또, 뇌는 항이뇨호르몬 (antidiuretics hormone)도 분비한다. 이 항이뇨호르몬은 신장에 작용하여 물이 오줌을 통해 배출되는 것을 줄인다. 즉, 뇌는 물의 섭취를 늘리고 오줌으로 나가는 물의 양을 줄임으로써 혈액을 희석시켜 소금의 농도를 낮추는 것이다.
이처럼 신장과 뇌는, 소금의 섭취가 늘었을 때 궁극적으로 혈액내 물의 양을 증가시켜 소금의 농도를 낮춘다. 그런데, 혈액내 물의 양, 즉 혈액의 양이 증가했기 때문에 혈압은 높아진다.
또, 소금은 혈관을 직접 수축시킴으로써 혈압을 높인다. 혈압은 혈관이 넓을 때 (이완)보다 좁을 때 (수축) 더 높다. 마치 파이프가 좁을 때보다 넓을 때 압력이 덜 걸리는 것처럼. 우리몸은 필요할 때 혈관을 이완시키는 물질 (즉, 산화질소)을 만들어서 혈압을 조절한다. 그런데, 소금은 혈관을 이완시키는 물질이 만들어지는 것과 이 물질이 혈관을 이완시키는 것을 방해한다.
뿐만 아니라, 소금은 혈관을 뻣뻣하게 만든다. 심장이 혈관에 압력을 가할 때 혈관이 탄력성이 높으면 받는 압력을 완충시킬 수 있다. 하지만, 혈관이 뻣뻣하면 심장이 가한 압력을 그대로 받는다. 앞에서 예를 든 모터펌프와 파이프로 비유해 보자. 만약 파이프가 잘 늘어나는 고무로 만들어졌다면, 모터펌프가 압력을 가할 때 파이프는 압력을 덜 받을 것이다. 하지만, 파이프가 탄력성이 전혀 없는 쇠로 만들어졌다면 모터펌프가 가한 압력을 그대로 받을 것이다. 즉, 소금은 혈관을 쇠로 만든 파이프처럼 만들어 혈압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그러면, 물을 더 마셔서 희석이 되더라도 혈압은 올라가는 거야?”
“네. 물을 더 마시면 신장은 오줌으로 배출해야 하는 물의 양을 크게 줄일 필요가 없어지죠. 그래서, 오줌으로 나가는 물의 양이 상대적으로 더 늘어납니다. 그런데, 물을 더 마시면 이것만 달라질 뿐 혈압은 여전히 올라갑니다. 왜냐하면, 혈관내 혈액의 양이 늘어난데다 혈관은 좁아지고 뻣뻣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
“안타깝지만 비법은 없습니다 - 말씀드린 바와 같이, 소금이 왜 혈압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지 이해하시고, 소금 섭취의 양을 줄이시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필자소개>
-서울대 약학대학, 대학원 졸업
-University of Florida Doctor of Pharmacy-University of Miami Jackson Memorial Hospital Pharmacy Practice Residency
-Universityof Florida Cardiovascular PharmacogenomicsFellowship
-현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임상약학과 교수
2022-10-31 18: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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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대·약학] <102> 일차의료제공자 제도: 우울증을 효율적으로 치료하기 위한 컨트롤 타워
일차의료제공자 제도: 우울증을 효율적으로 치료하기 위한 컨트롤 타워
집사님의 형수님이 첫번째 자살 시도를 했을 때 입원치료를 받았었다. 그런데 퇴원후에는 우울증에 대한 외래치료를 전혀 받지 못했다. 물론 본인이 치료를 완강히 거부했기 때문에 외래치료가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도 있다. 하지만, 중증 우울증 환자가 퇴원 후 외래치료를 전혀 받지 못했다는 것은 우리나라 의료제도가 우울증 환자를 제때에 적절하게 치료하는 데 있어 여러 문제점이 있다는 보여준다. 그 중 가장 큰 문제점은 환자돌봄에 대한 콘트롤 타워가 없다는 것이다.
만약 그 형수님이 샌프란시스코 종합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했다면 어떤 돌봄을 받았을까? 자살시도와 같은 중증 우울증 환자의 입원치료를 담당했던 팀은 환자가 퇴원할 때 두 명의 외래 의사에게 진료예약을 해준다. 하나는 정신과 전문의이고 다른 하나는 환자의 일차의료제공자 (primary care provider)이다. 이 둘 중 환자의 일차의료제공자가 환자돌봄에 대한 콘트롤 타워 역할을 한다. 그래서, 미국의 대부분의 건강보험들은 가입자들이 반드시 일차의료제공자를 선택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종합병원의 모든 환자들도 자신이 선택한 일차의료제공자를 가지고 있다.
일차의료제공자는 일차의료 (primary care)를 제공하는 건강관련종사자이다. 미국에서 일차의료제공자 역할을 하는 건강관련종사자는 가정의학과 및 일반내과와 산부인과 의사, 전문간호사 (nurse practitioner), 의사보조사 (physician’s assistants)들이다. 그러면, 일차의료제공자는 어떻게 환자돌봄에 대한 콘트롤 타워 역할을 할까?
일차의료제공자는 크게 네 가지 일을 수행한다. 첫째, 일차의료제공자는 환자가 의료시스템을 접할 때 제일 먼저 만나는 의료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환자가 아프면 증상에 따라 동네에 있는 여러 의사들 중 하나를 만날 수 있지만 샌프란시스코 종합병원에서는, 응급한 경우를 제외하고, 일차의료제공자를 먼저 만나야 한다. 일차의료제공자는 우울증을 포함한 흔한 질병들을 진단, 치료할 수 있도록 수련받은 의료진들이다. 따라서, 이들은 환자가 필요로 하는 의료서비스 (예를 들어, 우울증과 같은 흔한 질병의 진단과 치료)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일차의료제공자는 환자의 건강을 일회적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 돌본다. 이들은 환자를 아플때에만 보는 것이 아니라 정기적으로 오랜기간동안 보기 때문에 환자들에 대해 잘 알고 협력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세째, 일차의료제공자는 치료뿐만 아니라 환자의 질병 예방과 건강 증진을 도모한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의 환자를 위해 건강검진 오더를 내고 예방접종도 주도한다.
마지막으로, 일차의료 제공자는 다른 의료 제공자들과의 협진을 연결하고 조정한다. 이들은 환자가 전문의의 진단과 치료가 필요할 경우 전문의에게 진료의뢰를 요청한다. 그리고, 환자가 여러 의료제공자들의 돌봄이 필요한 경우 이들의 역할을 조정한다. 이처럼 일차의료제공자는 환자의 특정 질병만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의 건강문제를 종합적으로 돌보는 역할을 수행한다.
일차의료제공자가 환자돌봄에 대한 콘트롤 타워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샌프란시스코 종합병원에서 입원환자를 담당하는 팀은 환자가 퇴원한 후 2주내에 일차의료제공자를 만날 수 있도록 진료예약을 해 주는 것이다. 즉, 환자가 입원하는 동안 입원팀이 환자돌봄을 책임지지만, 외래에서는 일차의료제공자가 이 책임을 맡는 것이다. 따라서, 환자가 퇴원하더라도 우울증이라는 질병에 대한 치료가 일차의료제공자의 주도하에 계속 지속될 수 있다.
물론, 집사님의 형수처럼 돌봄을 아예 거부해 버리면 외래에서 치료가 지속되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 이런 경우 나는 일차의료제공자가 환자에게 좀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것을 자주 본다. 예를 들어, 작년에 샌프란시스코 종합병원의 환자들 중 코로나바이러스 백신접종을 거부한 이들이 있었다. 이 때, 일차의료제공자는 자신의 환자들에게 직접 전화를 거는 등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어 이들의 접종율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우리나라처럼 환자의 일차의료제공자가 정해져 있지 않은 경우 환자가 치료를 거부해 버렸을 때 이들에게 다가가 설득할 수 있는 의료진이 아무도 없는 것이다.
일차의료제공자 제도는 환자가 사회적 편견으로 말미암아 정신과 전문의를 만나는 것을 꺼릴 때에도 환자의 우울증 치료가 지속되도록 도와 줄 수 있다. 왜냐하면 일차의료제공자 자신이 정신과 전문의의 자문을 받으면서 직접 환자의 우울증을 치료하면 되기 때문이다. 샌프란시스코 종합병원처럼 모든 환자들이 일차의료제공자를 가지고 있는 경우 모든 환자들이 일차의료제공자를 만나야 하므로 환자가 일차의료제공자를 만나는 것은 정신과 전문의를 만나는 것처럼 특별한 사건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일차의료제공자가 우울증을 치료하게 되면 환자가 사회적 편견 때문에 우울증을 제때에 적절히 치료받지 못하는 사례를 줄일 수 있는 것이다.
일차의료제공자가 없다는 것은 우리나라 의료제도의 가장 큰 약점이다. 환자돌봄의 컨트롤 타워가 없기 때문에 특히 입원에서 퇴원처럼 환자돌봄의 책임을 담당하는 의료진이 바뀔 때 치료의 지속성이 떨어지기 쉽다. 그리고 이 약점은 그 형수님의 예처럼 환자들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물론 일차의료제공자 제도는 단기간 내에 확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차의료를 담당할 의료인들을 양성하고 의료서비스 제공체계를 바꾸는 등 자원과 시간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차의료제공자의 부재로 인한 의료자원의 비효율적인 운영과 환자들에게 미칠 치명적인 결과들을 고려할 때 일차의료제공자 제도의 도입을 더 이상 미루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필자소개>
-서울대 약학대학, 대학원 졸업
-University of Florida Doctor of Pharmacy-University of Miami Jackson Memorial Hospital Pharmacy Practice Residency
-Universityof Florida Cardiovascular PharmacogenomicsFellowship
-현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임상약학과 교수
2022-09-30 16: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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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대·약학] <101> 대형종합병원에서 근무중 뇌출혈으로 사망한 간호사 사건 – 당근과 채찍을 병용해야
대형종합병원에서 근무중 뇌출혈으로 사망한 간호사 사건 – 당근과 채찍을 병용해야
지난 7월말 서울의 한 대형종합병원에서 일하던 간호사가 뇌출혈으로 사망한 사건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것 같다. 당시 간호사는 자신이 일하던 병원에서 쓰러졌음에도 당일 그 병원에는 개두수술을 할 수 있는 의사가 아무도 없었다. 이 병원에는 개두수술을 할 수 있는 의사가 두 사람 있었지만 사건 당일 한 사람은 해외학회에, 다른 한 사람은 지방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간호사는 수술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사망한 것이다. 의료시스템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병원에서 일하던 사람조차도 의사가 없어서 적기에 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할 수밖에 없다면 의료시스템에 접근하는데 시간이 더 걸리는 일반 사람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실제로 작년에 이와 비슷한 사건이 내 주변에서도 벌어졌었다. 경기도 남부에 사시던 친척어른께서 추석 이틀전 뇌출혈으로 쓰러지셔서 근처에 위치한 큰 대학병원으로 급히 옮겨졌었다. 하지만 그 병원에 수술할 의사가 없어서 어르신은 경기도 북부의 다른 대학병원으로 이송되어야 했고 이 바람에 수술시기를 놓쳐 약 6개월간 의식을 잃고 지내시다가 돌아가셨다.
이 두 사건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대형병원은 응급환자가 발생했을 때 언제든지 치료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 놓고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필수의료인력이 모두 자리를 비울 수 있도록 허락했다는 것이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것과 무관한 일반회사도 회사 운영에 반드시 필요한 부서의 인력은 공백이 없도록 하는 것이 기본적인 운영원칙이다. 그런데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병원이 이런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니... 더욱 심각한 것은 그 간호사와 친척어른의 예로 보아 이는 어느 특정한 병원에 국한된 것이 아닌 우리나라의 많은 병원들에 만연한 문제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 문제의 원인으로 낮은 의료 수가와 의사들의 필수의료 기피현상을 드는 것 같다. 의료 수가가 원가보다 훨씬 낮기 때문에 병원이 비용은 많이 들고 이를 보전하기 힘든 부서의 의료인력, 예를 들면, 개두수술을 할 수 있는 신경외과 의사들을 적게 둔다는 것이다. 또 의료인력도 수련기간은 상대적으로 길지만 업무량과 위험도가 높고 수가가 낮아 수입은 적은 신경외과와 같은 분야로 진출을 꺼린다는 것이다. 나도 낮은 수가와 필수의료기피현상이 문제의 중요한 원인이라는 것과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의료 수가를 현실화하고 의료진이 필수의료분야로 진출하는 것을 정책적으로 지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당근만으로는 병원들이 이익의 극대화라는 목적 달성을 위해 인력을 고용하고 배치하는 관행을 충분히 제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병원이 응급환자가 발생했을 때 언제든지 치료할 수 있도록 준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어난 의료사고에 대해 병원이 받아야 할 징계와 벌칙도 함께 강화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미국과 비교할 때 의료수가가 낮지만 징계와 벌칙도 낮다. 어쩌면 징계와 벌칙의 정도는 수가에 비해 훨씬 더 낮은 지도 모른다. 의료기관이 정부가 운영하는 보험 (즉, 우리나라의 건강보험과 미국의 메디케어)에 고의로 부당청구해서 받는 징계와 벌칙의 예를 들어 보자. 이 경우, 우리나라와 미국 모두 해당 의료기관이 민사와 형사소송을 당할 수 있도록 규정해 놓고 있다. 그런데, 징계와 벌칙의 수준은 우리나라가 미국에 비해 훨씬 낮다. 우리나라의 경우 의료기관은 부당청구한 금액 또는 일부를 되돌려 주고 형사처벌로 3년이하의 징역이나 최대 3000만원의 벌금형을 받을 수 있다.
반면, 미국의 의료기관은 일단 부당청구한 금액의 세 배에 달하는 금액까지 정부에 돌려 주어야 한다. 이와 더불어 부당청구건당 벌금을 따로 내야 한다. 즉, 부당청구가 10건 있었으면 각 건에 대해 벌금을 따로 내야 하는 것이다. 또 형사처벌로 징역형, 벌금형, 또는 둘 다 받을 수 있다. 우리나라는 징역형 또는 벌금 중 하나만을 받지만 미국은 둘 다 받을 수 있다는 점이 다르다. 그런데, 이것으로 다 끝나는 것이 아니다. 미국에서는 해당 의료기관이 일정기간동안 정부보험을 가진 환자들을 받지 못할 수 있다.
65세이상의 사람들은 모두 메디케어 가입자이기 때문에 의료기관이 이들을 받지 못하게 되면 큰 시장을 잃게 된다. 이처럼 정부보험에 대한 부당청구관련 벌칙과 징계가 중하기 때문에 미국의 의료기관 중 일부는 의료기관 내부종사자가 정부보험에 청구를 요청했을 때 그 내역에 법률적으로 문제가 없는지 검토하는 감사부서를 자체적으로 두고 있을 정도다.
또, 미국의 의료기관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환자가 사망했을 경우 환자의 가족이 제기한 민사소송에서 지게 되면 금전적 배상을 해야 한다. 이 금액도 상당해서 우리돈으로 10억원이 넘는 금액을 배상해야 하는 경우가 흔하다. 만약 개두수술을 할 수 있는 의사를 상주시키지 않아 간호사가 사망한 우리나라의 대형종합병원이 15억을 배상해야 한다면? 아마도 병원은 자진해서 개두수술을 할 수 있는 의료진을 키우고 고용할 지도 모른다.
물론, 모든 문제를 징계와 벌칙 같은 채찍만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하지만 병원이 이익의 극대화라는 목적을 위해 운영하는 것을 제어하려면 수가인상과 같은 당근과 더불어 채찍도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그 채찍은 병원의 재정적 상태에 상당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이런 황당한 일로 환자가 사망하게 되는 안타까운 사건을 막을 수 있다.
<필자소개>
-서울대 약학대학, 대학원 졸업
-University of Florida Doctor of Pharmacy-University of Miami Jackson Memorial Hospital Pharmacy Practice Residency
-Universityof Florida Cardiovascular PharmacogenomicsFellowship
-현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임상약학과 교수
2022-08-23 15: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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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대·약학] <100> 우울증도 당뇨병과 같은 “질병”입니다.
<100> 우울증도 당뇨병과 같은 “질병”입니다.
“네? 극단적 선택을 하셨다고요?”
교회 집사님 형수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집사님의 형님 부부는 한국에 살고 계셨다. 형수는 코로나 팬데믹의 영향으로 우울증을 앓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악화되어 두 달 전에 자살시도를 하였다. 다행히 일찍 발견되어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형수는 병원에 일주일 입원하였고 상태가 호전되어 퇴원하였다. 형수의 자살시도 후 집사님의 형은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고 부인을 돌보는데 전념하였다. 덕분에 많이 좋아진 것으로 들었었는데 며칠 전 집사님 형이 잠시 집을 비운 사이 형수는 자살을 했다고 한다.
“두 달전 병원에서 퇴원하신 후 어떻게 치료를 받으셨어요?”
“외래 정신과 치료를 전혀 받지 않았어. 본인이 완강하게 거부했나봐 – 자기는 정상이라고. 아직 정신질환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남아 있어서 본인이 정신과에 가는 것을 꺼려했던 것 같아.”
이 안타까운 이야기에서 나는 우울증에 대한 두 가지 이슈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사회적 편견이고 다른 하나는 의료제도의 문제점이다. 이번 글에서는 사회적 편견에 대해 다루기로 하겠다.
아직도 우리나라 사회에는 “우울증은 정신력이 약해서 생긴다”, “정신과 치료받는 환자들은 미친 사람들이다” 등의 편견이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사회적 편견은 우울증과 같은 정신질환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데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울증과 같은 정신질환들은 질병이다. 왜냐하면, 정신질환들은 뇌가 정상적인 기능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신경전달물질에 문제가 생겨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뇌세포들은 뇌의 정상적인 기능을 위해 서로 긴밀하게 소통한다. 이 때 이들은 여러가지 화학물질을 만들어 이용하는데 이를 신경전달물질 (neurotransmitter)이라고 부른다. 세로토닌, 도파민, 노르에피네프린, 가바 등이 신경전달물질의 예이다. 뇌가 정상적으로 기능할 때에는 이러한 신경전달물질들의 양이 정밀하게 균형을 이루어 조절된다. 정신질환은 이 균형을 잃게 되면 발생한다. 우울증의 경우 주로 세로토닌, 도파민, 노르에피네프린 양의 균형이 무너져서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정신질환의 발생과정은 다른 질병과 크게 다르지 않다. 1형 당뇨병은 인슐린이라는 물질의 양이 줄어들어 발생한다. 즉, 몸이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데 필요한 인슐린 양의 균형이 무너져서 발생하는 것이다. 또, 암은 세포의 증식을 조절하는 물질들이 균형을 잃어서 생긴다. 따라서, 우울증과 같은 정신질환은 당뇨병, 암과 같은 질병인 것이다.
정신질환들과 비정신질환들은 발생과정 뿐만 아니라 다른 면의 공통점도 가지고 있다. 당뇨병, 암과 같은 만성질환들의 원인이 완벽하게 밝혀져 있지 않듯이 정신질환들도 현재 그 원인이 완전히 확인되어 있지는 않다. 다행인 점은 치료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울증의 경우, 현재 부작용이 적으면서 치료효과가 우수한 여러 종류의 약들이 나와 있다. 따라서 적절한 치료를 받으면 우울증과 같은 정신질병은 완치되거나 많이 좋아질 수 있다.
모든 질병은 적절한 치료가 이루어지지 못할 경우 자연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이 있다 (natural history of a disease). 그리고 이 진행과정에 따라 궁극적으로 이르게 되는 결과가 있다. 당뇨병이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여 오랜 기간동안 진행되면 대부분 신장질환, 실명, 신경질환 등이 나타나고 심근경색, 뇌경색 등이 발생하여 사망할 수 있다. 암도 적절한 치료를 하지 않으면 진행하여 결국 사망에 이를 확률이 높다. 즉, 당뇨병과 암의 자연적 진행과정의 결과는 궁극적으로 대부분 사망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울증의 자연적 진행과정에 따른 결과는 무엇일까? 이는 자살이다 – 우울증 환자들이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악화되면 결국 대부분 자살하고 만다.
우울증이라는 질병의 자연적 진행과정의 결과가 궁극적으로 자살이라는 것은 우울증 환자들이 자살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우울증 환자들은 삶과 죽음을 본인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질병 진행의 결과로 자살에 이르고 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울증에 따른 자살을 언론 등이 “극단적인 선택”으로 표현하는 것은 우울증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지속시키는데 기여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극단적인 선택”은 자살의 순화된 표현이기는 하다.
하지만 “극단적인 선택”은 우울증 환자 본인의 의지로 삶을 선택할 수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선택했다는 뉘앙스를 담고 있어 죽음의 책임을 환자에게 돌리는 것처럼 들린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도 암으로 사망한 사람에게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망이 암환자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암이라는 질병의 궁극적인 진행결과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살을 “극단적인 선택”보다는 “우울증에 따른 사망”과 같이 표현하는 것을 제안하고 싶다.
우리나라는 2020년 현재 인구 10만명당 약 25명이 자살하는 등 전세계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이다. 그리고, 자살의 가장 큰 원인은 우울증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우울증 치료율은 전체 환자의 10%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처럼 낮은 치료율의 원인 중 하나로 우울증과 같은 정신질병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자리잡고 있다. 이와 같은 사회적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당뇨병과 같이 우울증도 치료가 필요한 질병으로 보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즉, 우울증은 정신력이 약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당뇨병의 경우처럼 몸에서 정상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물질들의 문제로 인해 발생하는, 치료를 요구하는 질병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또 자살은 환자의 선택이 아니라 우울증이라는 질병의 진행과정의 결과로 보아야 한다. 이와 같은 우울증에 대한 인식의 전환으로 환자와 사회가 우울증에 대해서도 당뇨병과 같은 만성질병처럼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고 조기에 진단,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필자소개>
-서울대 약학대학, 대학원 졸업
-University of Florida Doctor of Pharmacy-University of Miami Jackson Memorial Hospital Pharmacy Practice Residency
-Universityof Florida Cardiovascular PharmacogenomicsFellowship
-현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임상약학과 교수
2022-07-25 17: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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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대·약학] <99> 우울증으로 약을 복용하지 않는 환자
“어서 오세요.”
GL이 아무 말없이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지난 주 초진때처럼 검은색 선글래스를 쓰고 있었다.
“오늘은 약들을 모두 가져오신 것 같군요.”
그녀는 약병이 든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네. 이 약들이 제가 복용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63세의 GL은 최근 당뇨병이 크게 악화되었다. 2021년초만해도 그녀의 당화혈색소 수치가 6.7%로 당뇨병이 잘 조절되었지만 2022년 2월에 측정한 것은 무려 14.7%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당뇨병이 조절되지 않자 그녀의 일차의료제공자는 나에게 당뇨병 치료에 대한 협진을 의뢰했던 것이다.
지난 주 초진때 GL은 복용하고 있는 약들을 가져 오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 종합병원은 환자들이 클리닉을 방문할 때 복용하고 있는 약들을 모두 가져오도록 한다. 그 이유는 안전하고 효과적인 진료와 치료를 위해 환자의 치료에 관여하는 모든 사람들이 환자가 집에서 복용하고 있는 약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약을 가지고 오지 않았더라도 자신이 복용하고 있는 약들을 잘 알고 있으면 진료와 치료에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GL처럼 잘 모르는 경우에는 안전하고 효과적인 진료 및 치료를 수행할 수 없기 때문에 재진때 복용하고 있는 약들을 꼭 가져오도록 요청한다.
GL이 가져온 약들은 다음과 같았다:
메트포민 (metformin) 1000 mg 하루 두 번
엠파글리플로진 (empagliflozin) 10 mg 하루 한 번
프라바스타틴 (pravastatin) 40 mg 하루 한 번
로사탄 (losartan) 50 mg 하루 한 번
약병을 살펴보니 약들이 꽤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 약들은 모두 4개월 전에 약국에서 받은 것들이었다.
“이 약들은 모두 3개월치 분인데 아직도 많이 남아 있네요. 혹시, 이 약들에 대해 우려되는 것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요.”
GL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런데 GL의 표정을 살펴보니 좀 피곤하고 어두워 보였다. 낮은 복약순응도, 표정, 행동 등을 고려할 때 우울증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울증은 슬픈 기분 이외에도 잠자는 패턴과 식욕이 변하는 등 다른 증상을 동반한다.
“혹시, 잠은 잘 주무세요?”
“잘 못 잡니다.”
“식욕은 어떠신가요?”
“잘 먹지 못하고 있습니다. 몸무게가 5 kg 빠졌습니다.”
“기분이 우울하거나 슬프신가요?”
“네.”
약간 머뭇거리며 대답하던 GL이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에게 자신의 지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3년전, GL은 남편과 사별했다. 자신에게 정성을 다해 잘 해 주었던 남편을 잃은 이후 그녀는 일에 집중할 수 없었고 우울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자식들이라도 가까이 살면 이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겠지만 그들은 멀리 텍사스 주에 살고 있었다. 주변에 사는 친구들에게 자신의 기분과 상황을 여러 번 이야기해 본 것 같았다. 하지만, 친구들은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것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 해서 그녀는 더 외롭게 느꼈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누구나 슬픔에 빠진다. 그리고 시간에 지남에 따라 이를 극복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런데 GL처럼 3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우울감을 지속적으로 가지면서 우울증과 관련된 다른 증상을 나타내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치료를 필요로 한다.
나는 약사이므로 진단을 내릴 수 없다. 그래서, 가정의학과 클리닉 주치의 (attending physician)에게 가서 GL의 상황을 알리고 공식적인 진료를 요청했다. 주치의는 나와 함께 진료실로 와서 기다리고 있던 GL을 만나보았다. 그 동안 나는 다른 진료실에서 다른 환자를 보고 있었다. 곧 주치의가 나를 불렀다.
“약사님, GL에게 우울증 진단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우울증 약인 설트랄린 (sertraline)을 처방해서 약국으로 보냈고 인지치료 (cognitive therapy) 의뢰도 넣었습니다. 또, GL의 일차의료제공자도 이를 알고 있어야 하므로 GL이 일차의료제공자를 빠른 시간안에 만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우울증 치료를 받을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GL이 그동안 처방대로 약을 복용하지 않았던 가장 큰 원인은 우울증인 것 같기 때문입니다.”
“저도 약사님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우울증 환자들은 복약 순응도가 높지 않다. 기분이 우울하면 자기 자신을 잘 돌보지 않게 된다. 그리고 제 시간에 약을 복용하기 위해 필요한 집중력이 떨어진다. 이 때문에 GL은 약을 처방대로 복용하지 않았고 당뇨병이 악화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일단 우울증이 호전된 다음에야 당뇨병 등의 다른 동반질환의 치료를 제대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GL님,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셨겠지만 우울증은 약물과 인지치료를 통해 호전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의사 선생님이 처방하신 것들을 꼭 따라 주십시요. 그리고, 당뇨병은 우울증이 호전된 다음 본격적으로 같이 치료하기로 합시다.”
*****
6주 뒤, GL이 다시 내 클리닉을 방문했다.
“어서 오세요.”
GL이 진료실을 들어설 때 나는 이전 두 번의 만남에서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미소였다. 오늘은 당뇨병 치료에 대해 이야기해도 될 것 같다.
<필자소개>
-서울대 약학대학, 대학원 졸업
-University of Florida Doctor of Pharmacy-University of Miami Jackson Memorial Hospital Pharmacy Practice Residency
-Universityof Florida Cardiovascular PharmacogenomicsFellowship
-현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임상약학과 교수
2022-06-27 14: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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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대·약학] <98> 환자 중심적인 치료 (3) – 직역간 협력
‘NP는 2형 당뇨병, 고혈압, 고지혈증. 퇴행성 관절염 등을 만성질환으로 가지고 있는 환자입니다. 혈당 조절이 잘 안되고 있어 당뇨병에 대한 협력 치료를 의뢰합니다.’
인구가 고령화됨에 따라 당뇨병, 고혈압, 고지혈증 등 여러가지의 만성질환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환자가 늘어나고 있다. 여러가지 만성질환을 가진 환자들은 치료를 위해 보통 다수의 약을 필요로 한다. 글머리에 언급한 NP의 경우, 당뇨병 약 두 개, 고혈압약 두 개, 고지혈증약 한 개, 관절염약 1개 등 모두 여섯 개의 약을 복용하고 있었다. 또, 만성질환 환자들은 식생활, 운동, 금연 등의 생활습관 개선도 필요하다. 왜냐하면, 약만으로는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효과적인 치료를 위해서는 환자들의 가족과 생활환경도 고려해야 한다.
이와 같이 복잡한 치료를 필요로 하는 경우, 한 명의 의사가 이를 모두 다루는 것이 비효율적일 수 있다. 왜냐하면, 가족과 생활환경을 고려하여 약물치료와 생활습관개선을 하기 위해서는 의사가 환자 한 명당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한 의사가 다양한 만성질환의 치료에 대해 전문성을 모두 갖추기도 쉽지 않다. 따라서, 여러 의사, 간호사, 약사, 영양사, 물리치료사, 사회복지사 등 여러 직역이 긴밀하게 협력하여 치료하는 것이 보다 효율적이고 환자중심적인 방법이다.
샌프란시스코 종합병원은 환자마다 돌봄 팀 (care team)이라는 것이 배정되어 있다. 이 돌봄 팀은 한 환자의 돌봄에 관여하는 모든 건강관련종사자들로 구성되며 환자의 건강상태에 따라 그 구성원이 달라 질 수 있다. 위에서 예를 든 NP의 경우, 나에게 협력치료의뢰가 오기전까지는 일차의료제공자와 사회복지사만이 돌봄 팀의 구성원이었지만 지금은 약사인 나도 포함한다. 돌봄 팀의 구성원은 환자의 일차의료제공자가 정한다. 왜냐하면, 일차의료제공자가 그 환자 치료를 주도하고 조정하는 콘트롤 타워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샌프란시스코 종합병원의 가정의학과는 돌봄 팀과 별도로 복잡한 돌봄 조절 프로그램 (complex care management program)이라는 것을 운영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동반질환, 생활 환경 등으로 치료가 쉽지 않거나 부작용과 의료실수가 쉽게 일어날 수 있는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다. 그래서, 이 프로그램에 간호사, 건강 코치 (health coach) 등이 따로 배정되어 이들이 대상 환자들의 집을 방문하고 진료예약도 해 주며 환자와 자주 연락해서 치료효과를 높이는 데에 도움을 주고 있다.
이처럼 환자 돌봄에 여러 직역이 협력하는 경우, 돌봄 팀 구성원간 긴밀한 소통이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 첫째, 양질의 의무기록이 아주 중요하다. 여러 직역은 돌봄 팀에서 각각 자신의 고유의 역할을 통해 환자치료를 담당하다. 이들이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 다른 직역이 파악한 환자의 상태와 이용한 치료방법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따라서, 의무기록은 정확해야 하며 누가 읽더라도 이해할 수 있도록 쓰여져야 한다. 둘째, 돌봄 팀 구성원이 의무기록에 빨리 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샌프란시스코 종합병원에서 사용하는 전자의무기록은 컴퓨터와 휴대폰을 통해 쉽게 접근이 가능하다. 그리고, 전자의무기록은 메시지 기능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팀의 특정 구성원에게 메시지를 보내면 휴대폰에 바로 떠서 그 구성원이 볼 수 있다. 또, 전자의무기록은 참조기능을 제공한다. 즉, 구성원 중 한 명이 자신이 전자의무기록에 쓴 내용이 다른 구성원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면 이를 이용하여 의무기록을 보낼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전자의무기록은 샌프란시스코 종합병원에서 여러 직역이 한팀을 이루어 환자를 돌볼 때 서로 긴밀하게 소통하도록 도와주는 중요한 수단이다.
환자중심적 치료를 위해 여러 직역이 협력해야 한다는 것은 건강관련종사자들이 학생일 때부터 배우는 것이 좋다. 이렇게 하면, 이들이 졸업한 다음 활동할 때 좀 더 자연스럽게 다른 직역과 협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UCSF는 의대, 치대, 약대, 간호대, 물리치료과의 모든 학생들이 학교의 interprofessional 교육과정을 반드시 이수하도록 하고 있다. 이 교육과정은 1학년때부터 시작해서 졸업할 때까지 지속되며, 다양한 직역의 학생들이 한 교실에서 함께 수업을 듣고 토론하도록 짜여져 있다. 학생들은 이 교육과정을 통해 각 직역의 역할 (여기에는 고유의 역할 뿐만 아니라 겹치는 역할도 포함한다), 효과적이며 효율적인 팀 워크, 팀원간 갈등의 조정과 조절방법 등을 배운다. 그리고, interprofessional 교육과정 말미에 학생들은 다양한 직역과의 협력 능력을 평가받는다. 즉, 여러 직역의 학생들이 한 팀에 배정되어 가상환자를 본 다음, 이들이 함께 작성해서 낸 협력 치료 계획을 평가받는 것이다.
협력 능력에 대한 평가는 학생들이 졸업하고 레지던트 등 졸업 후 수련의 과정 (postgraduate training)을 거칠 때에도 계속된다. 수련인들의 실습과정 중 협력 능력을 평가하는 방법으로 많이 쓰이는 것이 360도 평가 (360 degree assessment)이다. 이 방법은 수련인들이 실습과정 중 함께 일했던 모든 직역의 사람들에게 수련인의 활동에 대한 의견과 평가를 받는 것이다 (한 직역의 사람만이 아닌, 모든 사람들이 평가한다고 해서 360도 평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학생 때의 interprofessional 교육과 졸업 후 수련과정 중 360도 평가 등이 보여 주듯이 여러 직역간의 협력은 UCSF의 건강관련종사자들의 교육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환자 중심적 치료> 시리즈에서 지금까지 기술한 내용을 요약하면, 1) 환자 중심적인 치료는 환자 자신의 선호도, 가치, 생활환경 등을 고려하여 환자와 함께 치료방법에 대해 결정하는 것을 말하며 2) 이를 임상에서 실천하기 위해서는 환자에게 치료법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고 여러 직역이 함께 협력해야 한다. 우리나라와 미국의 의료환경과 교육제도가 다르다. 그렇다면, 환자중심적 치료를 우리나라에서 적용하기 위해서 어떤 것이 선행되어야 할까? 나는 적어도 다음의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첫째, 환자당 충분한 진료시간과 적절한 보상이 필요하다. 우리나라의 진료시간은, 낮은 수가로 인해, 3분 진료라 불릴 만큼 매우 짧다. 그리고, 이는 의사가 진단과 치료방법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주고 환자가 궁금해 하는 사항에 대해 모두 대답하는데 크게 부족하다. 샌프란시스코 종합병원의 가정의학과는 의사가 환자 한 명을 볼 때 15분에서 20분 배정한다. 따라서, 환자중심적인 치료를 위해 충분한 진료시간과 적절한 보상을 해 주어야 한다.
둘째, 충분한 진료시간과 적절한 보상은 환자중심적 치료의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진료시간과 보상이 충분해도 건강관련종사자의 직업윤리와 환자에 대한 태도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미국은 건강관련종사자에 대한 보상을 우리나라보다 훨씬 많이 주고 있지만 모든 건강관련종사자들이 환자중심적 치료를 실천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환자보다는 금전적 이익을 우선시 하거나 특권의식을 가지고 있는 건강관련종사자들이 그렇다. 따라서, 건강관련종사자는 뚜렷한 직업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성인의 의식과 태도는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에 학생선발때 직업의식이 뚜렷하지 않은 지원생은 아무리 성적이 우수하고 스펙이 특출나더라도 입학시키지 말아야 한다. 또, 뚜렷한 직업의식은 교육과 수련과정 내내 강조해야 하며 가르치는 사람들은 이에 대한 모범을 보여주어야 한다. 또, 특권의식은 직역집단 특유의 문화에서도 비롯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공부잘한 엘리트라는 집단의식이나 서열문화 같은 것은 특권의식을 만들 수 있다. 따라서, 직역집단은 이를 배제하고 없애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필자소개>
-서울대 약학대학, 대학원 졸업
-University of Florida Doctor of Pharmacy-University of Miami Jackson Memorial Hospital Pharmacy Practice Residency
-Universityof Florida Cardiovascular PharmacogenomicsFellowship
-현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임상약학과 교수
2022-05-31 14: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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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대·약학] <97> 환자 중심적인 치료 (2) – 긴밀하고 투명한 의사소통의 필요성
“NP님, 제 견해로는 이제 인슐린을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NP는 일차의료제공자가 당뇨병 치료에 관해 내게 협진의뢰를 해서 만나게 된 환자이다. 3개월전 처음 만났을 때 당화혈색소가 목표치인 7%미만 보다 약 두 배가량 높은 13.3%여서 나는 처음부터 인슐린을 권했었다. 하지만, NP는 식사 등 생활습관 개선요법을 우선 시도해 보고 싶어 해서 인슐린 치료를 미루었었다. 하지만, 오늘 측정한 NP의 당화혈색소는 11.3%로 약간 개선되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목표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제가 인슐린에 대해 좀 말씀드려도 될까요? 인슐린에 대해 알고 계시는 것이 인슐린을 사용할지 결정하시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NP의 동의를 받은 나는 환자가 인슐린에 대해 알아야 할 사항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즉, 인슐린의 효과, 부작용, 투여방법, 하루 투여횟수, 부작용이 일어났을 때 치료방법, 정기적인 혈당측정의 필요성 등을 알려 주었다. 또, 경구용 당뇨병 치료제가 있음에도 왜 인슐린이 NP에게 필요한 지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NP가 인슐린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항에 대해서 대답해 주었다.
“자, 어떻게 생각하세요? 인슐린을 시작해도 될까요?”
“네, 사용해 보겠습니다.”
환자와 투명하고 긴밀한 소통은 환자중심적인 치료에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환자가 치료방법의 종류와 결과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건강관련종사자와 함께 치료방법을 결정할 때 합리적인 결정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요즘 환자들은 예전과는 달리 인터넷 등을 통해 치료 방법에 대한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다. 따라서, 환자들이 스스로 얻은 치료방법에 대한 정보와 건강관련종사자가 권유한 치료방법이 다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치료방법을 결정할 때 치료방법의 부작용에 대해서도 건강관련종사자와 충분히 상의되지 않으면 환자들은 처방받은 치료방법을 잘 따르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환자가 여러 치료방법의 장단점에 대해 충분히 설명을 들은 다음, 건강관련종사자와 함께 치료방법을 결정하는 것이 좋은 치료결과를 낳는 방법이다.
환자와 투명하고 긴밀한 소통은 치료과정내내 이루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투명하고 긴밀한 소통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때 환자와 건강관련종사자간에 신뢰가 형성되고 이러한 신뢰가 궁극적으로 좋은 치료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전자의무기록은 치료기간내내 환자와 글로 소통하는 좋은 수단 중 하나다. 특히, 미국은 2021년 4월부터 환자들이 자신의 의무기록을 무료로 볼 수 있도록 법제화했다. 그래서 의원이나 병원을 방문한 다음 의사가 작성한 의무기록과 검사결과를 환자가 온라인 등으로 접근해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보자. 나는 2020년에 손가락 근육통때문에 카이저 퍼머난테 (Kaiser Permanente) 병원에서 물리치료사를 여러 번 만났었다. 아래 이미지는 내가 카이저 퍼머난테 병원의 웹사이트에 있는 내 계정에 접속해서 갈무리한 물리치료사의 의무기록이다.
이처럼 환자가 자신의 의무기록을 직접 볼 수 있도록 해 놓은 것은 건강관련종사자와 환자간의 투명한 의사소통에 큰 도움을 준다. 또, 환자가 의무기록을 읽어 볼 수 있기 때문에 의사, 물리치료사, 약사 등 환자를 직접 보고 의무기록을 남겨야 하는 사람들이 의무기록을 더 잘 쓰도록 신경을 쓸 것이다. 따라서 환자가 의무기록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의료의 질을 높이는데에도 도움이 된다.
전자의무기록은 환자와 건강관련종사자간의 직접적인 의사소통 수단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환자는 병원의 웹사이트를 통해 자신의 의무기록 계정으로 들어가서 치료를 담당한 건강관련종사자에게 직접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 샌프란시스코 종합병원의 경우, 건강관련종사자는 의무기록을 스마트폰 앱으로 접근할 수 있다. 그래서 환자가 의무기록 계정을 통해 메시지를 보내면 스마트폰 앱이 이를 바로 알려주기 때문에 건강관련종사자는 바로 그 메시지를 읽어 보고 환자와 소통할 수 있다.
그런데, 환자만 건강관련종사자에게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건강관련종사자도 환자에게 메시지를 보낼 수 있고 이를 환자가 의무기록 계정을 통해 직접 볼 수 있다. 이처럼 전자의무기록은 환자와 건강관련종사자간의 긴밀하고 투명한 의사소통에 아주 유용한 수단이며 환자 중심적인 치료를 수행하는데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전자의무기록과 같은 인프라와 더불어 환자와의 긴밀하고 투명한 소통에 필요한 것은 건강관련종사자의 좋은 의사소통기술이다. 환자와의 소통은 주로 구두와 글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건강관련종사자는 구두소통능력 (oral communication skills)과 글로 소통하는 능력 (Written communication skills)을 잘 갖추고 있어야 한다. 즉, 환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말과 글로 전달하는 정보가 쉽고 명확하며 정확해야 하며, 잘 경청하고 공감할 수 있는 능력도 필요하다.
그런데, 좋은 의사소통기술은 공부만 잘 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다. 공부는 잘 하지만 지식을 알기 쉽게 설명하지 못하고 경청할 줄 모르거나 공감 능력이 부족한 학생들이 많기 때문에 UCSF 약대는 학생선발단계에서부터 의사소통능력을 입학선발의 중요한 요소로 보고 있다. 그래서, 지원자들의 구두의사소통 능력을 multiple mini-interviews라는 인터뷰 방법를 통해 평가한다. 이 인터뷰는 녹화가 되어 입학사정위원회의 교수들이 이를 보고 평가한다. 또, 글로 소통하는 능력을 평가하기 위해 지원자들은 학교에 인터뷰를 하러 온 동안 에세이를 써 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약대교육과정내내 의사소통기술이 강조된다. 그래서, 모든 학생들은 실기실습 (Skills lab)이라는 과목을 첫 2년내내 수강해야 한다. 이 과목을 통해 학생들은 환자와 상담하는 법, motivational interview 기술 등 구두의사소통기술과 SOAP 노트 작성법 등을 배운다, 그리고, ‘Objective Structured Clinical Examinations’이라는 시험을 이용해서 의사소통기술을 평가하는데, 이것은 배우 등이 환자 역할을 맡는 시뮬레이션 시험이다. 또, 의사소통기술은 3학년 실기실습의 평가항목에서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는 것 중 하나다. 뿐만 아니라, 의사소통기술은 졸업 후 과정, 가령 레지던시에 지원할 때 당락을 좌우할 수 있다.
요약하면, 환자중심적 치료를 위해 환자와 건강관련종사자간의 긴밀하고 투명한 의사소통은 필수적이다. 건강관련종사자는 환자에게 여러 치료방법에 대한 장단점을 알기 쉽게 설명해 주어서 환자가 치료방법을 함께 결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또, 치료기간내내 건강관련종사자와 환자는 전자의무기록 등을 통해 긴밀하고 투명하게 소통할 수 있어야 좋은 치료결과를 낼 수 있다. 이를 위해 건강관련종사자는 좋은 의사소통기술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이는 치밀한 학생 선발계획과 교육을 통해 얻을 수 있다.
다음 편(환자중심적인 치료 3>에서는 여러 직역간의 협력에 대해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다.
<필자소개>
-서울대 약학대학, 대학원 졸업
-University of Florida Doctor of Pharmacy-University of Miami Jackson Memorial Hospital Pharmacy Practice Residency
-Universityof Florida Cardiovascular PharmacogenomicsFellowship
-현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임상약학과 교수
2022-04-27 16: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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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대·약학] <96> 너는 남자라서 걱정안해도 돼
너는 남자라서 걱정안해도 돼
나는 1990년대에 서울대 약학대학에서 공부를 했다. 내가 다니던 때만 해도 – 지금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 약학대학 학생들은 여자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소속한 약학과는 정원 40명 중 70%인 28명이 여자였다. 남자가 소수였기 때문에 우리 남자들은 여러가지 설움을 겪어야 했다. 예를 들어 봄에 버들골에서 과단합대회를 할 때 남자들이 좋아하는 축구보다는 여자들이 선호하는 피구와 같은, 적어도 나에게는 별로 신나지 않은 놀이를 해야만 했다.
이처럼 약대의 학부생활에서 남성이라는 성별은 소수자가 되어 다수인 여성의 의견을 따라야 했지만 대학원에 진학할 때에는 갑자기 큰 장점이 되었다. 당시만 해도 학부를 졸업하는 많은 학생들이 대학원에 지원했기에 일부 인기있는 실험실은 떨어지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치열한 경쟁은 주로 여자 지원자들에게 해당했다. 왜냐하면 실험실들이 남자를 선호했기 때문이다. 실험실이 남자를 선호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당시에는 석박사 통합과정이 없었기 때문에 석사과정을 먼저 거쳐야 박사과정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남자들은 박사과정에 진학하게 되면 이것으로 군대를 대신할 수 있었기 때문에 – 병역특례제도 – 일단 석사과정에 입학한 남자들은 박사과정이 끝날 때까지 약 7여년간 실험실의 일꾼이 될 수 있다. 반면 여자들은 석사과정을 마치고 박사과정에 꼭 진학해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실험실 입장에서는 장기적인 일꾼으로 보기 어려웠다. 또 학위 과정 중 결혼하게 되면 여자들보다 남자들이 가정일에 좀 덜 매이기 때문에 실험실일에 더 집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문제는 대학원생을 선발할 때 이러한 실험실의 남자 선호경향이 학부때의 학업성적보다 더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남자들보다 성적이 우월한 여자 학생들이 훨씬 더 많았다. 입학하고 첫 2~3년동안 대부분의 남자들이 학업보다는 과외할동에 치중하는 동안 여자들은 수업을 빠지지 않고 참석했으며 숙제도 베끼지 않고 스스로 다 해내었다 (아마 여자들은 무의식적으로라도 자신들끼리 경쟁해야 한다는 것을 미리 알았을지 모르겠다). 이처럼 여자들의 학부 학업성적이 우수했지만 대학원에 지원한 남자들의 합격률은 여자들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내 기억으로는 떨어진 남자들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대학원 진학 준비동안 나는 선배들로부터 들은 말로 안심이 되곤 했다:
“너는 남자라서 걱정안해도 돼”
지금 우리나라의 성평등 정도는 30년전보다 좋아진 것처럼 보인다. 남녀고용평등법도 제정되었고 여성의 사회진출도 많이 늘었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부분에서 개선할 점이 있어 보인다. 다시 약대의 예를 들어 보자. 서울대, 성균관대, 중앙대 약대의 여성 교수진 비율은 각각 27%, 24%, 30%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주요 약대 교수진의 절대 다수는 남성이다. 반면, UCSF 약대의 전체 교수진 104명 중 47%가 여성이다 (여성학생의 비율이 60~70%에 달하는 UCSF도 아직 노력을 많이 해야 할 것 같다). 물론, 우리나라 약대의 경우 과거에 있었던 실험실의 남자학생 선호 영향으로 여성 교수진의 비율이 전체적으로 낮을 수 있다.
실제로 젊은 교수진인 부교수와 조교수의 여성 비율을 보면 서울대는 38% (8명 중 3 명)로 전체 교수에서의 비중보다 약 10%정도 더 높다. 이는 개선된 비율이기는 하지만 UCSF 약대의 같은 직급에서의 비율인 64% (22명 중 14명)와 비교할 때 아직 많이 부족하다. 물론 약대 교수진의 남녀비율이 한 나라의 성평등 정도를 모두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약대는 전통적으로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더 많이 입학하는 곳이다. 따라서, 약대의 여성 교수진의 비율이 낮으면 남자들이 전통적으로 더 선호해온 다른 직군에서 여자들의 비율은 더 낮을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성평등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는 이것이 사회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남녀고용평등법 제정 등 법적으로 성평등을 뒷받침하면 충분하지 않느냐고 주장할 지 모르겠다. 법으로 성평등을 보장하고 증진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여성차별은 오랜 기간동안 사회적 문화적으로 뿌리깊게 자리 잡은 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려는 노력도 병행해야 한다.
여성차별이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을 가장 잘 알려주는 것은 바로 여성과 관련된 언어일 것이다. 예를 들면 남자 대학생은 그냥 대학생으로 부르지만 여자 대학생은 여대생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뿐만 아니다. 기자, 배우, 교수 등 직업을 나타내는 많은 단어들에도 남성을 나타내는 “남”은 들어가지 않지만 여성을 나타내는 “여”가 들어간다. 이처럼 “여”가 들어가는 이유는 여자가 그 직군에서 소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을 따로 지칭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는 소수가 다수와는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차별이 ‘다르다’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고려할 때 이런 단어들을 계속 사용하는 것은 여성차별을 구조적으로 지속시키는 데 기여한다.
또, 우리가 의도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이나 행위들도 여성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구조적인 문제임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표현이나 행위들을 영어로 microaggession (미세하게 괴롭히는 것이라고 번역할 수 있겠다)라고 부르는데 일상생활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대통령 후보가 형수에게 했다는 욕설의 표현은 그 대상이 남성이었다면 달랐을 것이다.
또, 여성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사건을 저지르는 경우 미디어에서 보도할 때 남성에 비해 좀 더 부정적이고 센세이셔널하게 다루어지는 것도 이에 해당한다. 그외에도 “노처녀 히스테리”와 같은 표현들도 여성에 대한 microaggression이다. 이와 같이 여성차별이 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남녀고용평등법에 저촉되지 않는 선에서 여성 지원자에게 남성지원자에게는 물어보지 않는 사항들 - 남자친구가 있느냐, 결혼은 언제 할거냐, 아기 가지면 그만 둘 거냐, 군대에 가지 않았으니 월급을 덜 받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 - 등을 여전히 물어볼 수 있는 것이다 (또 다른 microaggression의 예).
UCSF는 이러한 구조적 편견과 차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직원들에게 이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또 교수의 임용과 승진심사에도 대상 교수가 편견과 차별을 줄이기 위해 개인적으로 노력했는지를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학교 차원에서도 편견과 차별을 줄이기 위한 교육과정을 개발하여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나는 작년에 네 시간씩 이틀, 총 8시간동안 다양성, 공정성, 포용성 (diversity, equity, inclusion)에 대한 워크샵을 들었었다. 이 때 가장 크게 깨달은 것은 나도 소수자들에 대해 편견과 차별을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고 언어와 행위를 통해 나타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편견과 차별은 오랜기간동안 형성되어 온 것이기 때문에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 하지만, 이를 인식하고 의식적으로 줄이려고 노력하면 개선이 가능하다. 그리고, microaggression을 목격하게 되면 가해자에게 이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고 피해자를 지지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microaggression을 보고도 침묵하면 이를 계속 지속시키는 공범이 되기 때문이다.
30년전 대학원 진학 때 남자로 때어난 것을 위안으로 삼았던 내가 부끄러워진다. 그리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불공정한 대우를 받아야 했던 같은 과 여자친구들에게 미안하다. 이제 “너는 남자라서 걱정안해도 돼”라는 말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데에 나의 힘을 보탤 것이다.
<필자소개>
-서울대 약학대학, 대학원 졸업
-University of Florida Doctor of Pharmacy-University of Miami Jackson Memorial Hospital Pharmacy Practice Residency
-Universityof Florida Cardiovascular PharmacogenomicsFellowship
-현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임상약학과 교수
2022-03-31 14: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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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대·약학] <95> 환자 중심적인 치료 (1)
“이 환자는 인슐린을 시작해야 할 것 같아요.”
약사 레지던트는 내 클리닉에 오늘 처음 방문하기로 되어있는 환자인 NP의 당뇨병 치료에 대한 자신의 계획을 나에게 말했다. 내 클리닉에 실습오는 수련인들은 클리닉이 시작하기 전에 환자들의 차트를 모두 읽고 자신만의 치료 계획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환자를 만나기 전에 나와 함께 이에 대해 토론한 다음 치료계획을 확정한다. 물론, 환자를 직접 만나는 동안 환자로부터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되면 이에 따라 치료계획을 수정해야 할 때가 많다. 하지만, 환자를 만나기 전에 나와 함께 미리 치료계획을 세워보면 아직 임상 경험이 적은 수련인들이 환자를 좀 더 효율적으로 또 자신있게 볼 수 있다.
“좋은 생각이야. 이 환자는 메트포민 (metformin), 글리피지드 (glipizide), 리나글립틴 (linaglipitin) 등 세 가지의 당뇨병 치료제를 복용하고 있긴 하지만 환자의 당화혈색소 (hemoglobin A1c) 수치가 너무 높아서 인슐린이 필요해 보여.”
NP의 당화혈색소 목표치는 7%미만이었는데 최근 측정한 당화혈색소 수치가 13.3%로 거의 두 배나 더 높았다. 경구용 당뇨병 치료제들은 각각 당화혈색소를 0.5-1.5% 정도 떨어뜨리기 때문에 NP의 당화혈색소 수치를 목표치까지 낮추기 어려워 보였다. 따라서, 당화혈색소를 무한정으로 떨어뜨릴 수 있는 인슐린이 NP에게 가장 좋은 치료방법이었다.
“그래, 어떻게 되었니?”
NP를 다른 진료실에서 만나보고 온 약사 레지던트에게 물었다.
“NP가 인슐린을 시작하는 것을 꺼려해요.”
“왜?”
“음식, 운동 등의 생활습관 조절을 먼저 해 보고 싶어해요.”
“그래? 같이 가서 NP와 얘기해 보자.”
우리가 NP를 만나자마자 레지던트는 인슐린의 필요성에 대해 역설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NP의 표정과 태도를 보니 인슐린을 처방받는다고 하더라도 안 사용할 것 같았다. 또, 그의 현재 사정을 들어보니 코로나로 인해 일자리를 잃어서 좀 힘들게 생활하는 상태였다. 그래서 굶는 날도 꽤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음식을 섭취하지 않은 상태에서 인슐린을 투여하면 생명이 위협받을 수 있는 저혈당 위험이 크게 증가한다.
“잘 알겠습니다. 그러면, 일단 생활습관 조절방법을 더 강화해 보는 것이 어떨까요?”
나의 제안을 들은 NP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리고, 생활습관 조절로는 충분하지 않을수도 있으니 인슐린 대신 저혈당의 위험이 낮은 리라글루타이드 (liraglutide)라는 약을 오늘 처방해 드리겠습니다. 기존에 드시고 계신 약들과 새 약, 그리고 생활습관조절을 3개월 시도해 보고 당화혈색소를 다시 측정해 봅시다. 만약 그 때에도 당화혈색소가 7%보다 더 높으면 인슐린을 시작해도 될까요?”
NP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NP가 식사를 거르지 않도록 샌프란시스코시가 무료로 식사를 제공하는 곳을 알려 주었다.
3개월 뒤, NP의 당화혈색소를 측정해 보니 11.3%로 목표치인 7%미만보다 아직 많이 높았다. 이러한 치료결과를 본 NP는 인슐린을 시작하는 것에 동의했다. 그래서, 나는 NP 에게 인슐린을 처방하고 2~3주간격으로 환자를 모니터하면서 인슐린 용량을 조절했다. 그리고, 3개월 뒤 측정한 당화혈색소는 7.9%로 크게 개선되었다.
이처럼 치료방법을 결정할 때 환자의 의견과 생활환경을 반영하면 치료결과가 좋아지는 경우가 많다. 환자 자신의 선호도, 가치, 생활환경 등을 고려하여 환자와 함께 치료방법에 대해 결정하는 것을 환자 중심적인 치료(Patient-centered care)라고 부른다. 환자 중심적인 치료는 환자를 건강관련종사자의 지시에 따르는 사람으로 보지 않고 협력자로 대한다. 즉, 환자를 치료의 객체가 아닌 주체로 대하는 것이다. 건강관련종사자는 환자에게 치료방법을 처방한다. 하지만, 이는 좋은 치료 결과를 위해서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아무리 좋은 처방이라도 환자가 이에 동의하지 않으면 그 처방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치료방법에 대한 환자의 동의와 참여는 좋은 치료 결과를 위해 필수적이다.
환자의 선호도, 가치, 생활환경 등을 반영하여 환자와 함께 치료방법을 결정하면 환자는 합의한 치료방법에 대해 좀 더 책임감을 갖고 적극적으로 임하게 된다. 그리고, 위의 NP의 예처럼, 합의했던 치료방법으로 원하는 결과를 내지 못했을 때는 건강관련종사자가 제안하는 다른 방법을 따를 가능성이 크다. 즉, 환자의 의견을 반영해 주기 때문에 그 치료방법에 대한 순응도가 높아지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환자 중심적인 치료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 같다. 당뇨병, 고혈압, 고지혈증 등의 만성질환을 가진 환자들이 증가한 것이 그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이러한 만성질환은 증상이 거의 없고 약을 이용한 장기적인 조절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환자의 치료방법에 대한 동의와 참여없이는 이 질환들에 대한 장기적인 조절이 쉽지 않다. 그런점에서 환자 중심적인 치료에 대한 관심이 증가한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다음편에서는 환자 중심적인 치료를 위해 임상현장에서 필요한 것들에 대해 다루기로 하겠다.
<필자소개>
-서울대 약학대학, 대학원 졸업
-University of Florida Doctor of Pharmacy-University of Miami Jackson Memorial Hospital Pharmacy Practice Residency
-Universityof Florida Cardiovascular PharmacogenomicsFellowship
-현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임상약학과 교수
2022-02-28 17: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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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대·약학] <94> 오미크론에 감염되다
오미크론에 감염되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1월 10일부터 목이 칼칼하기 시작하더니 11일에는 기침이 나왔다. 뿐만 아니다. 잠을 잘 잔 것 같은데 피곤해서 낮잠도 자고 싶었다.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되었나?’
코로나바이러스에 노출되었다면 지난 1월 7일에 대면해서 환자를 보았던 샌프란시스코 종합병원의 클리닉이 가장 유력한 장소였다. 왜냐하면, 학교 방침에 따라 1월에는 캠퍼스로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만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방문했던 장소 중 여러 사람이 모이는 실내 공간으로는 클리닉이 유일했다.
1월 7일 클리닉에서 나는 만성질환에 대한 약물치료를 위해 네 명의 환자를 직접대면으로 보았다. 그 때, 코로나 증상을 가지고 있거나 코로나 검사 양성이었던 환자는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환자와 나 모두 마스크를 쓰고 만났다. 특히, 나는, 병원의 방침대로, N95 마스크를 줄곧 쓰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12월30일에 코로나 부스터접종도 받았었다.
“요즘 상황이 팬데믹기간 중 가장 나빠요. 그래서, 병원은 지금 코로나 증상으로 오는 환자들로 붐비고 있어요.”
클리닉의 간호사 말대로 미국의 상황은 아주 나빴다. 오미크론이 우세종이 된 이후 감염자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 1월 둘째 주에는 일주일 평균 신규 감염자수가 팔십만명을 웃돌고 있었다. 그런데, 이는 작년 1월에 세운 최고치에 거의 세 배에 육박하는 숫자였다.
샌프란시스코도 연일 신기록을 세우고 있었다. 시내 일주일 평균 신규 감염자 수가 지난해 1월 최고치였던 350명대보다 약 6~7배가 더 많은 2천명대를 기록하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는 백신접종 완료율이 90%에 이를 정도로 높지만 오미크론의 강한 전염력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1월 12일, 나는 코로나바이러스 검사를 받기로 결정했다. 일단, 증상이 호전되지 않았다. 또, 만약 양성이면 14일에 클리닉에서 보기로 한 환자들의 예약을 다른 날로 빨리 바꾸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학교의 MyChart라는 온라인 개인 의무기록 웹사이트를 통해 당일 오전으로 검사예약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에 나온 PCR 검사 결과는 양성이었다.
코로나바이러스의 여러 변종 (variant) 중 나를 감염시킨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현재 미국 전체 코로나 환자의 99.5%를 감염시키고 있는 오미크론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내 증상은 약간의 기침과 피곤함이 전부일 정도로 가벼운 감기를 앓는 것 같았다. 그래서, 집에서 쉬는 것 외에는 따로 약을 복용할 필요가 없었다. 이런 증상은 백신 접종을 완료하고 정상적인 면역력을 가진 사람들이 오미크론에 감염되었을 때에는 대부분 가벼운 증상만을 겪는다는 기존의 보고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따라서, 오미크론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부스터를 포함한 백신 접종을 완료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암과 같은 기저질환으로 면역력이 떨어진 사람들이 오미크론에 노출되지 않도록 사회가 세심하게 배려해 주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오미크론의 전파력은 무서웠다. 내가 감염된 다음, 나와 함께 생활하던 아내와 아들이 차례로 감염되었기 때문이다. 또, 내가 감염된 경위를 생각해 보아도 오미크론의 전파력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다. 나는 팬데믹 내내 클리닉에 나가서 환자들을 대면으로 보아왔다. 내 클리닉이 속한 샌프란시스코 종합병원은 시내 저소득층에게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공병원이다. 그런데, 밀집된 생활환경, 대면접촉을 피할 수 없는 직업 등으로 저소득층이 고소득층보다 코로나바이러스의 감염율이 더 높다. 그래서, 내 환자들 중 상당수가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되었으며 무증상 감염자들도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동안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았었다. 하지만, 오미크론은 달랐다. 1월 7일은 이 변종이 유행하기 시작한 다음 내가 처음으로 환자를 본 날이었는데 그 날 일한 후 바로 감염되었기 때문이다. 백신접종을 마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오미크론은 델타에 비해 전염력이 2~3배 더 강하다고 한다. 이러한 오미크론의 강한 전파력을 고려할 때 유증상 또는 무증상 감염자와 생활을 함께 하는 가족 구성원들이나 직장 동료들이 감염될 것으로 예상한다. 따라서, 많은 수의 감염자가 짧은 기간안에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감염자 수가 폭증하게 되면 검사 수요가 폭증하여 검사를 제때 받지 못할 수 있다. 병원을 가진 학교의 교원 신분이었던 덕분에 나는 원하는 때에 검사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보험이 지불해 주는 병원에서 검사를 제때에 받을 수 없었던 아들은 개인 돈을 써서 사설기관에서 받아야만 했다. 또, 자가 검사 키트는 모두 동이나 구할 수 조차 없었다. 그런데, 오미크론이 우세종이 된 사회에서 증상을 나타내는 모든 사람들이 검사를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모든 검사에는 비용이 든다. 보험이 비용을 지불해 주는 경우, 이 검사 비용은 보험 가입자들이 낸 돈이다. 뿐만 아니라, 의료기관에 직접 방문하여 검사를 받거나 약국에서 검사 키트를 대면으로 구입하는 경우, 의료기관종사자, 환자, 약국 종사자들이 감염력이 강한 오미크론에 노출될 수 있다. 따라서, 검사는 그 결과가 치료방법의 결정에 끼칠 때에만 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부스터를 포함한 백신 접종을 완료한 건강한 사람이 확진자와 밀접접촉을 한 다음 경미한 증상을 보이는 경우, 검사를 통해 감염을 굳이 확인할 필요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검사 결과에 따라 치료방법 – 집에서 쉬기 – 이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아내는 검사를 아예 받지 않았다. 물론, 생업에 종사하거나 여행 등 일정변경이 힘든 분들의 경우 검사 결과가 음성이면 예정대로 일을 계속할 수 있으므로 검사가 필요할 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내 아들은 학업을 위해 학교로 돌아가려고 비행기 예약을 해 놓았기 때문에 검사를 받아야 했다). 따라서, 검사가 꼭 필요한 사람들에 대한 지침이 필요할 것 같다. 또, 의료기관과 약국 종사자, 환자들이 오미크론에 노출되지 않도록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우편 등을 이용한 비대면으로 신속항원 자가검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감염자가 폭증하게 되면 감염자에 대한 효율적인 추적 관리가 어려워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검사 양성을 판정받은 뒤 나흘이 지나서야 샌프란시스코 시로부터 감염자의 격리 사항에 대한 연락을 받았다. 이처럼 감염자에 대한 추적관리가 어려운 경우, 웹사이트 등을 통해 격리와 이에 대한 해제의 조건을 명확하게 알려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감염자가 이를 보고 따를 수 있다. 오미크론은 바이러스에 노출되고 증상이 나타나기 1-2일전부터 증상이 나타난지 2~3일 이후까지 가장 감염력이 높기 때문에 현재 미국 질병통제센터의 지침은 검사 양성인 날로부터 5일동안 격리하고 증상이 호전된 경우 6일째부터 얼굴에 잘 맞는 마스크를 쓰고 나다니도록 권고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질병관리청의 웹사이트에서는 오미크론 감염에 대한 격리 지침을 쉽게 찾기 힘들다.
감염자가 늘고 이들이 일정기간동안 격리되면 일터에서 인력공백이 생길 수 있다. 특히, 나의 경우처럼 의료기관종사자들은 감염자에게 노출되기 쉽고 이들이 격리됨에 따라 의료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할 수 있다. 사실 이 인력공백으로 인한 의료체계의 마비는 미국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예를 들어, 내가 클리닉에서 일한 날인 1월 7일, 클리닉에서 일하는 간호사의 수가 평소의 절반으로 줄어 들어 환자 채혈 등의 업무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앞서 기술하였듯이, 의료체계의 마비를 최소화하기 위해 의료기관종사자들이 감염자에게 불필요하게 노출되는 것을 줄일 필요가 있다. 따라서, 검사결과가 치료방법에 영향을 주지 않는 감염자들이 검사받는 것을 자제하도록 권고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또, 감염자에게 노출되거나 증상이 나타난 의료기관종사자들이 코로나 검사를 빨리 우선적으로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학교 병원과 샌프란시스코 종합병원은 코로나 양성 판정을 받은 다음 90일동안 코로나 검사를 다시 받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 기간동안 가짜 양성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도 격리 후 10일이 지난 다음 재검사없이 환자를 대면으로 보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오미크론에 감염되어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증상이 아니라 생활의 불편함이었다. 특히, 나처럼 온 가족이 감염되면, 가족 구성원 모두가 격리기간동안 외출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생필품을 배달시켜야 했다. 그런데, 필요한 물건이 모두 배달되지 않아 가족 중 감염력이 가장 낮아졌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가게가 가장 한가한 시간에 나가서 무인계산대를 이용해 물건을 사와야 했었다. 감염자 폭증으로 음식물 등 생활용품 공급이 어렵게 되면 우리가족과 같은 상황에 처할 사람들이 늘 것 같다.
이처럼 우연히 오미크론에 감염되어 불편한 생활을 겪었지만 이 감염이 가져다 준 혜택이 한 가지있다. 그것은 바로 마음의 평화이다. 부스터까지 모두 백신접종을 완료하고 오미크론까지 걸렸으니 당분간은 코로나바이러스 감염 걱정을 안 해도 될 것 같기 때문이다. 연구에 따르면, 나와 같이 백신접종을 완료하고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은 백신접종만을 완료한 사람보다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면역력이 훨씬 높다고 한다 (이를 증강된 면역력 - super immunity – 라고 부른다). 뿐만 아니라, 델타 변이에 감염된 사람은 오미크론에 대한 면역력이 생기지 않지만 오미크론에 감염된 사람은 델타변이에 대해서도 면역력이 생긴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델타는 오미크론보다 훨씬 사망률이 높은 변종이다. 따라서, 오미크론에 감염되어 경미한 증상과 생활의 불편함을 며칠 겪음으로써 이 위험을 줄일 수 있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증강된 면역력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지 아직은 잘 모른다. 또, 새로운 변이가 나타났을 때에도 면역력이 유지되는지도 알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감염이 끝났는데에도 증상이 계속 될 지도 모른다 (Long COVID). 무엇보다 오미크론이 심한 증상을 일으킬 수도 있고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다. 따라서, 가장 좋은 방법은 오미크론에 감염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오미크론에 우연히 감염되어 나타난 가벼운 증상으로 격리생활을 하고 계신 분이 있다면 다음과 같은 조언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이 며칠의 불편함을 견디고 나면 적어도 앞으로 몇 달동안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는 희망이 있습니다.”
<필자소개>
-서울대 약학대학, 대학원 졸업
-University of Florida Doctor of Pharmacy-University of Miami Jackson Memorial Hospital Pharmacy Practice Residency
-Universityof Florida Cardiovascular PharmacogenomicsFellowship
-현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임상약학과 교수
2022-01-24 15: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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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대·약학] <93> 스타틴과 간독성
“아토바스타틴 (atorvastatin)이 많이 남아 있군요. 혹시 이 약에 대해 우려하고 계신 것이 있나요?”
JM은 2형 당뇨병과 고혈압의 병력을 가지고 있는 60세의 환자이다. 그런데, JM이 약을 처방한 대로 잘 복용하는 것 같지 않아 일차의료제공자가 나에게 진료의뢰를 보내 오늘 처음 만났다. 그는 복용하고 있는 약의 약병들을 모두 가지고 왔는데 유독 아토바스타틴만이 약병에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이 약이 간을 상하게 한다고 친구들에게 들었어요. 그래서, 되도록이면 먹고 싶지 않습니다.”
JM의 의무기록을 보니 아토바스타틴은 그가 2형 당뇨병 진단을 새로 받았을 때인 6개월전에 시작하였다. 그 때, 그가 받은 간기능 검사 결과는 정상이었다.
당뇨병은 심근경색, 뇌경색 등 심순환기 질환이 발생할 가능성을 크게 높인다. 당뇨병을 가진 사람들에게 심순환기 질환이 발생할 가능성은 심순환기 질환의 병력을 가진 사람들과 비슷한 정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한 번이라도 심순환기 질환이 발생했던 사람들에게서 기존의 심순환기 질환이 재발하거나 새로운 심순환기 질환이 나타날 가능성이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도 가장 높다. 즉, 심근경색의 병력을 가진 사람은 심근경색이 다시 발생하거나 뇌경색 등이 새로 생길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뇨병을 가진 사람들도 이들과 비슷한 정도로 심순환기 질환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당뇨병을 가진 사람들에게 심순환기 질환이 나타날 가능성을 낮추는 것은 당뇨병 치료에 있어 아주 중요하다.
당뇨병을 가진 사람들에게 심순환기 질환이 나타날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서는 혈당, 혈압, 혈중 콜레스테롤을 모두 잘 조절해야 한다. 이 중 혈중 콜레스테롤의 양을 조절하는 데에 가장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약이 스타틴이다. 그 이유는 스타틴은 당뇨병을 가진 사람들이 참여한 여러 임상시험에서 심순환기 질환이 나타날 가능성을 위약보다 20-40% 정도 낮추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 심장학회와 심장내과의사 협회, 그리고 당뇨병 협회는 당뇨병을 가진 환자들이 스타틴에 대한 금기 사항을 갖고 있지 않는 한 스타틴을 복용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그런데, 스타틴의 부작용 중 하나로 잘 알려져 있는 것이 간독성이다. 스타틴에 의한 간독성을 확인하기 위해 보통 혈액을 이용한 간기능 검사가 사용된다. 스타틴이 간독성을 일으키면 간세포가 죽게 된다. 그러면, 간세포내에 있는 알라닌 아미노트랜스퍼레이스 (alanine aminotransferase; ALT)와 같은 효소가 혈액으로 빠져 나가게 된다. 따라서, 혈액에 ALT의 양이 얼마나 늘어나 있는지 측정하면 스타틴이 간독성을 일으켰는지 또 그 정도가 얼마나 되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ALT 대신 SGPT또는 GPT라는 용어를 쓰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스타틴은 간독성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스타틴을 시작하기 전에 혈중 ALT 양을 측정하여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현재 허가받아 사용되고 있는 일곱 종류의 스타틴 모두 간독성을 일으킬 수 있다. 간독성이 일어나면 혈중 빌리루빈 (bilirubin)의 양도 증가하며 복통, 구토, 황달, 무력감 등의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빌리루빈은 헤모글로빈이라는 적혈구의 성분이 분해되어 만들어지는 물질로, 간은 빌리루빈을 담관으로 배출시키는 역할을 담당한다. 그런데, 스타틴에 의한 간독성으로 간기능이 떨어지면 빌리루빈이 담관으로 잘 배출되지 않아 혈중 빌리루빈의 수치가 올라가는 것이다. 스타틴에 의한 간독성은 스타틴을 복용하고 있는 동안 언제라도 나타날 수 있지만 대부분은 스타틴을 시작한 뒤 첫 6개월 동안 발생한다. 그리고, 스타틴에 의한 간독성은 스타틴의 용량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저용량보다는 고용량이 간독성을 일으킬 수 있는 가능성이 더 높다. 따라서, 간독성의 위험이 높은 사람들은 되도록이면 고용량을 피하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스타틴에 의한 간독성은 아주 드물게 나타난다. 여러 임상시험에 따르면, 스타틴을 시작한 다음 혈중 ALT의 양이 증가한 시험 참가자들은 전체의 1-3%정도였다. 그런데, 혈중 ALT가 증가했다고 해서 꼭 간독성이 나타났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혈중 빌리루빈 수치가 올라가거나 간독성의 증상을 보이지 않고 혈중 ALT검사 수치만 약간 증가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스타틴을 시작한 후 혈중 ALT의 양만 정상치보다 3배 이내로 증가하는 것은 비교적 자주 관찰된다. 이 경우 혈중 ALT의 양은 스타틴을 중단하지 않더라도 대다수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정상으로 돌아온다. 스타틴을 시작한 후 혈중 ALT의 양이 정상보다 3배 이상 증가하고 혈중 빌리루빈 수치도 2배 이상 증가한 경우는 십만명의 스타틴 사용자 중 한 명의 빈도로 드물게 나타난다. 그리고, 스타틴을 시작한 후 심한 증상을 동반한 급성 간독성이 나타나는 경우는 더 드물어 백만명에 한 명의 빈도로 발생한다. 이처럼 스타틴에 의한 간독성은 매우 드문 것이다.
예전에는 혈중 ALT 검사를 스타틴을 시작하기 전에, 그리고 스타틴을 시작한 첫 해에는 매 3달에 한 번씩 하고, 그 결과에 이상이 없으면 두번째 해부터는 매년 한 번씩 수행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스타틴에 의한 간독성이 아주 드물고 혈중 ALT 검사가 이를 정확하게 판별해 내거나 예방할 수 있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2016년에 미국 식의약청은 혈중 ALT 검사를 스타틴을 시작하기 전에 하고, 그 이후에는 간독성의 증상이 의심될 때에만 수행하도록 변경하였다.
한편, 스타틴은 만성 간질환이 잘 조절되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용할 수 있다. 스타틴의 간독성 때문에 예전에는 만성 간질환을 가지고 있는 환자들에게는 복용을 피하도록 권장하였다. 하지만, 스타틴에 의한 간독성이 매우 드물고, 간염이나 간경변을 가진 사람들이라도 이 질환들이 약과 생활습관 개선으로 잘 조절되고 있으면 스타틴을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여러 임상 연구에 의해 확인되었다. 그래서, 미국 위장관 협회는 고지혈증에 의한 심순환기 질환의 위험을 낮추기 위해 이들에게 스타틴을 사용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다시 글머리의 JM 환자로 돌아가자. 나는 그에게 스타틴에 의한 간독성은 매우 드물고 그가 당뇨병을 진단받았기 때문에 스타틴에 의한 이득인 심순환기 질환의 예방효과가 간독성의 위험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JM은 처음에는 확신이 서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스타틴이 간질환이 있는 환자들에게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듣자 그는 조금 안심을 하는 것 같았다.
“잘 알겠습니다. 한 번 복용해 보도록 하죠.”
<필자소개>
-서울대 약학대학, 대학원 졸업
-University of Florida Doctor of Pharmacy-University of Miami Jackson Memorial Hospital Pharmacy Practice Residency
-Universityof Florida Cardiovascular PharmacogenomicsFellowship
-현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임상약학과 교수
2022-01-03 12:45 |